자의식 과잉이라고 여겼던 언행이 실제로 자신을 지칭하였더라니 그야말로 기분이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기실 무엇을 단서로 하여 저 자신에게 그런 찬사를 보내나 묻고싶은 마음도 더러 있었지만, 상대가 그저 속속들이 여러 말을 내비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하는 듯 보이기도 해서 관두었다.
"무얼, 결례라고까지 하시나요. 그렇게 따진다면 초면에 소개를 놓친 제 잘못인걸요. 전 아슬란이라고 합니다. 엘리고씨. 그보다도, 말씀을 놓으세요. 제가 공경을 차려야 할 판에..."
척 봐도 상대는 자기보다도 연륜이 들어보이는 풍채였는데, 그런 사람이 여즉 점잖은 어투로 말을 받아주고 있음이 적잖이 신경이 쓰이던 상황이었다.
"흠흠, 그럼 말을 놓겠네. 하지만 과공은 비례라는 말이 있으니 과하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고."
그는 그렇게 물을 마시며 흡족하게 웃음을 지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내다. 만약 군 시절에 이런 사내가 한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자신이 군에서 나올때 미련을 두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이미 모두 예전의 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가져온 물병중 아직 차가운 물병을 그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마시게나. 요즘 날씨가 더워서 쉬이 지치니 말일세."
그리고서는 그는 손을 들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다. 그가 본 인상이 어느정도 맞았다. 그는 사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우리에 갇혀서 그 기량을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남자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를 보이고 안 보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나는 자네를 보았고, 첫 인상으로 판단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36세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을 마주하며 느낀 것을 말한것 뿐이지."
그리고서는 목이 탔는지 물을 마시고서는 천천히 입을 연다.
"간혹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지. 그러나 그 구속을 풀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개척해 나갈수 있지. 자넨 나와 달라. 내가 자네를 처음 봤지만, 분명히 느낄수 있네. 자네는 크게 될 그릇이야."
야속한 하늘에서는 햇살만이 내리쬐고 흐르라고 간청하는 빗줄기는 얄궂게도 전신에서 줄기찬 소나기마냥 땀방울로 쏟아지는 것이 요즘이었다. 그러니 임무에서 변신이라도 할 명운이라면 어찌나 두려운지, 더군다나 야외 임무일테면 혹여 정신 잃지나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팔자로서니 특히 이번 더위가 고되었다. 그럴 때면 이런 냉수가 얼마나 그립던가.
"곧잘 말하기를... 오랜 시간이 흘러서 세공되고 발달하는 노하우를 연륜이라 하고, 진실이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것은 혜안이라 하지요. 여하간, 척 보기에 비범한 분이라 판단하기는 했는데, 여지껏 보니 그 마음이 더합니다."
크게 될 그릇이니, 썩 듣기 좋은 말에 낯이 달아오른다던가 입을 옴싹달싹 거리며 몸 둘 바를 모른다는 경구에 걸맞게 얌전치 못하고 몸을 꼬기도 하며 미숙한 모습으로 엘리고스의 말을 듣던 아슬란은 사람들의 입을 빌리는 것으로 답문의 운을 띄고 천천히 평소의 나긋한 말투로 화답했다.
"그것 참 강수십니다. 이거야 원, 어디 도망갈 길이 안 보이는걸요."
이런 상황에 어떻게 엘리고스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자세를 내뺀단 말인가. 농담의 의미로 호탕한 웃음소리에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정말 농담도 이젠 수준급이구만!! 나 같은 앞물이 밀려나는게 느껴질 정도야!!"
혜안과 연륜, 두가지 언어에서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게 느껴진다. 자신은 보는 입장에서 그리 평가한 것 일 뿐인데 이 남자는 자신에게 금칠을 해준다. 하지만 자신이 인정한 남자에게서 이러한 평가를 받으니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아슬란을 향해 마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일세. 사람은 뭐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인정하고 고치면 되는게 어른의 특권이긴 하지만, 자네는 아직 젊네, 고칠 필요가 없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나아가면 되는 법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슬란의 반응을 보았다. 아마 이렇게 띄워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믿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자들이 결코 그렇게 만만한 이들이 아니란 것을. 그는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비범한게 아니야. 그저 보고 느낀 바를 이야기 할 뿐이지. 어떤면에서 보자면 나도 여러가지 의미로 수상쩍은 어른이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