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내리던 눈. 따뜻하게 건네져온 한마디. 손에 쥐어진 우산. 머릿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되감기 하던 그 시간. 그리고 어떤 소음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와 당신만 존재하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모든 게 분명해지고 선명해진 지금.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더 깊게 묻어냈던 말을 파내어도 괜찮을까. 스스로 조차 편들지 못하는데. 남의 편을 들어도 괜찮은 걸까. 모든 게 오만이지 않을까.
"나,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생각한 것보다 일찍. 곁을 떠나 상처만을 남길지도 모르는데. 진창인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은 가시가 될 말 뿐이라. 입술을 꽉 깨물던 그녀가 웃었다. 아니 울었다. 슬피 웃었다. 옷소매로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권주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자네들이 부하였던 것이 상당히 자랑스러웠네. 아무리 그래도, 내 인생에서 아롱범 팀의 서장이라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여러 의미로 번거로운 저을 얻은 모양이로군. ...하지만 경찰로서 보자면 자네들은 자랑스럽네. 물론... 델타로서 보자면 자네들은 번거롭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야."
모두의 말을 들으면서 이준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결론은 이준 역시 다른 바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막겠다는 것.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에 의미가 있냐는 것.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런 것은 화풀이밖에 안된다는 것. 경찰로서 느낀 것이 아무것도 없냐는 것. 그런 말들을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며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네들에게 정말로 그 정도의 각오가 있는지는 별개라고 할 수 있겠지.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네. 말 뿐이라고 한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자네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자네들이 한낱 경찰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결국 자네들이 하는 말은... 현상 유지밖에 되지 않네. 자네들이 앞으로 그 어떤 희생도 이뤄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일을 시작한 이유는 이것 외에는 이 악순환을 깨버릴 방법이 없기 때문일세.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이 세상에 있고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의 힘을 원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또 다시 다수의 익스퍼가 희생되었지. 그 저주받을 유지부 녀석들에게... 유지부가 없지면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걸세. ...처음부터, 전부 가지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일세. ...거기서 희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익스파도, 익스퍼도 모두 비밀이기에 '익스파 주입 실험' 같은 것이, 밝혀지지 않고 그들의 악행도 이어지지. ...그렇다면 비밀이 아니게... 그리고 가진 이들만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면 될 일일세. ...추잡한가? ....나는 부처가 아닐세. ...내 아내도 잃고, 내 딸도 위협받는 지금 시점에서 내가 부처의 마음을 가지리라 생각하지 말게나."
결국 그것은 절대로 물러설 생각도, 그만둘 생각도 없다는 선이었다. 그렇게 차갑게 선을 그어버리고서, 그는 아롱범 팀의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공중을 바라보는 듯 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익스레이버 아롱범 팀..! 난 자네들을 만나서 영광이라는 것과 동시에 저주스럽네! 생각이 잘못되었어. 이 팀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는데... 설마, 여기에 잠입하려고 계획한 팀이 결국 이렇게 우리의 앞을 막아서게 되다니. 경의를 표하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손을 꺼내서 그는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손목에 시계가 하나 채워져있는 것이 보인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까지 말한 자네들을 적으로서 인식하도록 하지. ...그리고 R.R.F의 멤버, 델타로서 자네들이 방해를 한다면 철저하게 나도 상대하겠네. ...애초에 내가 여기에 온 진짜 이유는 연구원 나부랭이보다 다른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강하윤. 보고 있는 건 알고 있어. ...이쪽으로 와라. 너는 내가 지켜주마."
ㅡ.......!
"너는 거기에 있을 이가 아니라 여기에 있어야 해. ...아니면, 자네들이 막을텐가? 자네들이 지키겠다는 이유로 내 딸을 붙잡아둘텐가? 알고 있겠지? ...결국 내 딸은 나와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하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조용히...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