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답한다. 어째서 기준이 월하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냅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맛있게 끓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취 경력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두부를 얼른 집어 들어 월하에게 다가간다. 된장찌개에는 감자랑 애호박이랑 양파랑... 된장은 집에 있으니까 됐고. 여차저차 어떻게든 재료는 다 고른 모양이다. 지은은 양 손에 바구니 손잡이를 끼우고 월하를 보았다. 자신은 다 골랐으니 선배가 고르는 것을 구경할 심산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생화를 더 선호하지 않을까. 허나 그녀는 달랐다. 모든 것엔 언제나 끝이 있다. 붉은빛의 꽃도 언젠가 퇴색해 버린한다. 그 사실이 그녀는 싫었다. 검게 죽은 꽃에서 제 자신을 연상했기에. 그렇기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 꽃들은 생화보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꽃다발 위에 놓여있던 편지로 보이는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 읽었다.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아요. 아냐. 편지를 태우고 잊어버려도 좋아요. 이제 와서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경멸이란 말엔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부터 적혀있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뭐가 죄송하단 건지."
언듯 웃음을 띄어낸다. 부끄러움에 잔뜩 붉어진 귓볼을 매만지다간, 꽃다발을 집어 조심히 품에 안는다. 처음 들어와 꽃다발을 보았을 땐 얼굴을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당혹감 뒤에 몰려오던 건 부끄러움과, 묘한 불만이었다. 허나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면 좋은, 그냥 저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는 게 괘씸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화병을 하나 가져와 꽃들이 부스러지지 않게 담아 책상 위에 올려둘 것이라고. 그렇게 이 부끄러움을 그대로 당신에게 다시 건네 부끄럽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네가 언제나 냉정하고 무뚝뚝하다 생각했었지. 어쩌면 그런 네 점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냥 너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어오르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저 그런 적절한 이유를 하나 찾아냈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의 내가 너에게 빠진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더라. 그저 너 자체로도 사랑에 빠질 이유는 충분했었어.
*
초콜릿맛 둥그런 사탕이 입안을 한 번 빙글 굴렀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니, 그가 직접 만들어준 막대사탕을 두어번 더 입안에서 굴려내며 그녀가 제 검지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올려진 사탕 다발을 툭툭 건드려냈다. 살짝 눈동자를 내려보니 제 눈에 들어오는 사탕이 9개. 어째 하나를 먹은 게 아까우면서도 차마 맛을 보지 않고 못버티겠던 그녀였다. 이리도 아까워서 어찌 먹을까. 마치 꽃다발이 연상되듯 참으로 소중히도 묶인 그 사탕들을 보며, 그녀는 제 얼굴에 어여쁜 꽃송이를 피워내고야 말았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언젠가 꽃다발을 받는 것이 로망이었다 말했었지. 마치 장미꽃마냥 비틀어 접혀진 사탕 포장지를 물그럼 바라보며 그녀가 느릿히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도 행복한 미소가 혹여나 밖으로 새어나갈까. 네가 접어낸 장미꽃마냥 붉어진 얼굴이 혹여나 들켜버릴까. 속으로 홀로만 바라보고 싶은 장미꽃이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포장지와 사탕 사이에 끼워진 쪽지를 빼내자 제 이름이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이리도 마음이 설레이니 차마 그 내용을 읽을 수가 없을 것같으면서도, 네가 내게 어떠한 말을 남겼을까 궁금해하는 그녀였다. 마음 속으로 수 많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쪽지를 펴냄과 동시에 그녀가 저를 향해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냈다.
“ 푸훗... “
정말, 너는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한자한자 적어내려갔을 그를 생각하니 그리도 환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녀였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네가 생각났으며 마음이 두근거리고 생명을 불어넣은 꽃마냥 생기가 돌았다.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것이던, 그것들이 전부 그녀의 마음에 찬란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에 봄을 피워 내려는 듯,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그래, 벌써 10년이었구나. 그 긴 시간을 너와 함께 보냈다니 새삼 놀랍고도 고마운 그녀였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준 것이 너여서, 그녀의 옆에 있어준 것이 너라서. 그녀는 너무도 행복해 그만 꽁꽁 숨겨두던 속마음을 비쳐내버렸다.
“ 정말, 그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해. “
달리 표현 할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가장 상투적이고 흔한 표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마음을 표현 할 말이 없으니, 이 마음을 어찌 보여줄까. 그렇게도 소중한 너였으니 사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찬란한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마지막에 쓰여진 1008이란 글자를 제 손가락으로 짚었다. 마음 속 가장 깊은 상자에 보관하고 싶은, 그렇게도 욕심이 나는 글자였다. 정말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