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중얼였다. 얼핏 센하의 표정이 좋지 않아진 걸 눈치 챈 그녀는 센하에게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물음을 건넸다.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을 건들여버린 걸지도 모르지. 또다시 자신을 책망해야할 순간이 올까 두려워진 그녀였다.
“ 드러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좋은 일도 아니고. “
학교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으로도 외출을 않고 하루에 한끼 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안타깝게도 모두 그녀의 의지였으니, 책임을 돌릴 곳은 없어. 센하가 그런 저에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힘들겠다는 말을 건넸다. 유혜는 걱정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센하, 괜찮은거야? 난 멀쩡해. “
어렴풋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의 반응에는 저가 모르는 무언가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저의 이야기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부분을 억지로 끄집어내게 되었다는 걸.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그가 어떠한 일을 짊어지고 살았는지, 너는 전혀 모르겠지.
소름이 끼쳤다는 그의 말에 유혜가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절반이 넘는 조각이 사라진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잠자코 센하의 말을 들어주는 건, 그의 상태가 몹시도 불안정했기 때문일까.
“ 센하, 괜찮아. “
그녀는 모른다.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일이 이미 끝마쳐진 일일지, 아직도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일지. 그 무엇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입을 여는 건 멍청한 생각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불안정한 그의 상태를 살핀다. 그의 말이 끝날 무렵 그녀가 외투 안으로 찔어넣었던 손을 빼내어 천천히 어깨를 토닥였다.네가 무얼 아는데 함부로 도움도 안 될 위로를 건네?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센하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에게 위로를 건넨다.
“ 진정되면, 나중에 어떤 일인지 알려줄 수 있어? ...안된다면 괜한 말을 꺼내 미안해. “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어버린 둘이었다. 느릿히 어깨를 토닥이던 손은 그대로, 시선은 그를 바라본다. 괜찮아, 마음 속으로 수 없이 중얼인 단어였다.
언제였을까.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너의 사소한 모습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건. 너는 고민이 있으면 귓볼을 만지작 거리는 습관이 있었지. 웃을 때는 입가의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곤 했어. 너는 콜라를 좋아했지. 아침에는 늘 이어폰을 끼고 교실로 들어와. 그림을 그릴 때는 늘 근처에 달콤한 사탕들을 한가득 부어놓고말야. —네 하루가, 네 모든게. 언제부터 나의 일부가 되었던걸까?
*
매미의 울음소리도 점차 멎어가는 늦여름이었다. 푸르른 나뭇잎들이 옷을 바꾸어 입을 준비를 하고 어둠이 하늘을 색칠하고 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던, 그러면서도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 늦여름. 봄처럼 달콤한 계절도 아닌, 겨울처럼 새하얀 계절도 아닌. 마치 너를 닮은 계절.
“ 천유혜, 너는 왜 방학동안 연락이 안된거야? 걱정했잖아. “
얇은 커텐이 바람에 팔랑이며 파도가 치듯 일렁였다. 창 밖으로는 뒤섞인 소음들이 간간히 들려왔고 그 뒤로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은 교실의 끝에 채 닿기도 전에 네 목소리에 짓눌려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느릿히 책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바람의 손 끝이 내게 닿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본다.
“ 그냥..., 집안 사정. “
창문 밖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힐긋 시선을 던진 창 밖은 마치 주황색 물감을 흐트러놓은 듯 아름다운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온통 주황빛의 하늘은 마치 내가 꿈을 꾸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끔 아름다워서, 쉽사리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도 꿈이라면 좋을텐데. 아쉬운 시선을 다시 돌리며 책가방을 메고, 너에게는 말할 수 없을 사정을 씹어삼키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 미안. “ “ 뭐, 멀쩡하니까 괜찮아. 집 같이 가자. “
평소와 다를 게 없던 네 목소리인데 오늘따라 왜이리 네 목소리가 내 마음 깊게 다가온건지, 나는 느릿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소리가 너무도 가깝게 다가와서 내 마음 한 켠을 간질여. 먼저 발걸음을 떼낸 네 뒤를 쫓으며 나는 내뱉을 수 없을 한마디를 꿀꺽 삼켜냈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웃음소리와 조잡한 소음들이 사그라진 학교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지만 나는 이 고요한 학교가 싫었다. 그덕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크게도 울려대는 심장 소리가 혹여나 너에게 닿을까 걱정을 해야만했으니. 혹여나 꽃이 한가득 피어오른 마음을 들켜버릴까, 구태여 네 뒤를 밟겠다며 발걸음을 늦추어 올려다본 네 뒷모습에 그리 가슴이 뛸 수가 없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나와 같은 교복. 그 하나로도 이리 가슴이 뛸 수 있다니 너는 참 대단한 아이었다. 계단을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심장이 주저앉을 듯 요동치는 바람에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지.
“ 방학동안 철이라도 든건가, 애가 달라졌네. “
그저 친구에게 던지는 시덥잖은 농담이었다. 그런데 왜 그 한마디가 그리도 기분이 좋았던걸지. 또다시 요란스레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했건만 늘어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다행히도 눈치 없는 심장 소리를 덮어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소음. 미적지근한 바람과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 그 가운데에는 네가 있었다.
“ 그런가. “
그러고보면 나는 참으로 바보 같았다. 짧디 짧은 단어로 막을 내린 내 대답에 너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는걸. 아까와는 달리 마음 속이 샤프로 찔리듯 콕콕 쑤셔오는 느낌에 나는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네 뒷모습만 쳐다보며 한참동안 한숨을 쉬어내야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너와 나의 눈높이가 달라진 건. 너를 보는 나의 눈높이가 달라진 건. 크레파스로 뭉뚱그린 그림과도 같던 네가 언제 이리 정교하고 세밀한 작품이 되어 있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네 얼굴의 보조개를 보고, 네가 자주 하는 말버릇을 알아채고, 네가 하는 말들을 기억하려 안달이었을까. 문득 궁긍해졌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 너 여기서 버스타고 가지? 기다려줄게. “
네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학교 앞 정류장이었다. 네 생각과 목소리에 잠겨 눈을 감았더니 앞도 보질 못하였구나. 이리도 너에게 흠뻑 잠겨들었으니 어찌라면 좋을까. 나는 얼굴을 만지작 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좋았지만 너의 그런 점이 불만이었다. 감히 원하건데 나에게만 그런 웃음을 지어주라는 이기적인 소원을 바람에 흘러보내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내가 타야할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가오는 버스들을 보며 제일 먼저 숫자를 읽어내고, 숨을 내쉬고. 겨우 몇 센치가 될까 싶은 너와의 거리에 숨을 졸이고. 매미가 조금만 더 크게 울어주기를 바랬다.
“ 나, 갈게. “ “ 어? 그래. 내일 봐. “
네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차마 붉어진 얼굴을 네게 보이지 못하고 쫓기듯 버스에 탈 뿐이었다. 자리에 앉자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네가 창 밖으로 비추었다. 열심히도 손을 흔드는 너였다. 버스가 출발하고, 너의 모습이 사라진다. 나는 그제서야 새카만 책가방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네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딘다 공허했고 동시에 파도가 일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잠시 사고회로의 전원이 과열 되어 픽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자 약간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과 구름 너머로 날려보낸 소원이 내게로 돌아와 살랑살랑 살결에 닿는 느낌에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기포트를 올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신입이 새로 들어왔다던데. 저도 슬 지나가며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이름이 다솔이라던가 했었지. 혀를 굴려 작게 이름을 발음해보다, 테이블에 축 늘어진다. 요즘 사건의 수위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어째 참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온 지원병이다. 서장님이 손이라도 쓰신 건지 우연인 건지. 어쨌든 앞으로 손 부족할 일은 없겠단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R.F.F가 마음에 걸려온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의 범인들이 저희 아롱범 팀원들과 관계가 있어서. 이전엔 알트가 그랬고, 그다음엔 센하가. 그리고 지금은 지현이. 설마 신입에게도 그럴까 싶지만. 겪어 보기 전 까지는 모르니까. 앞으론 팀원들의 상처를 건드는 일이 없으면 하단 생각을 하다 물 끓는 소리에 고갤 든다. 미리 종이컵들의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어내곤 쟁반을 든 채 걸음을 옮긴다. 저희 사무실로 들어서다, 낯선 얼굴을 마주 하곤 걸음을 멈춘다. 타박 다솔에게 다가가 조심히 컵 하나를 건네보이며 방글 웃는 얼굴로 말을 건다.
일하는 시간 도중 찾아온 1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 오늘은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서 내가 먼저 쉬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쉬고 온다고 말하고 2층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2층 휴게실에서 캔커피를 뽑은 후에, 그것을 뽑은 후에 마셨다. 안 그래도 요즘 어린아이 유괴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단서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서 보통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저번 사건의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정말로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단서를 숨길 정도면... R.R.F. 그러니까 그 녀석과 손을 잡은 감마. 나와 같은 요원 출신인 그 사람이 어느정도 관여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지.
"...안 그래도 따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말이야."
자연스럽게 랭크가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관찰해서 보고서를 해야하고, SSS급 익스퍼. 통칭 '월드 리크리에이터'의 혈육, 정확히는 그 딸을 찾아야하는 것도 나의 일 중 하나다. 그런 것까지 함께 병행하려고 하니 체력이 버틸래야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피를 토할 것만 같은 나날이다. ....진짜 귀찮은데 왜 일만 이렇게 점점 늘어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에게 일이 몰리는건지 버틸 수 없었다. 솔직히 피곤하다 못해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커피가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을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또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손가락을 가볍게 퉁긴 후에, 일단은 서랍 속에 넣어둔 은색 반지를 내 손바닥으로 전송했다. 이런 것은 또 언제 구입한건지. 이것을 구입할 만한 이는 딱 1명 밖에 없었다. 그 1명이 아니면 보통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맞출거면 같이 맞추면 좋잖아. 이렇게 갑자기 반칙급으로 준비하는 것은 또 뭐람. 영문 필기체로 내 이름을 세길 정도면... 이것은 틀림없이 이전부터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다. 아실리아. 나의 연인인 그녀가 이렇게 준비를 했을 것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욕심나게 할 참이야? 이리 되면, 나도 진짜 어찌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이곳에 오고서 처음으로 욕심이 난 존재. 그녀에게 민폐가 될지도 모르지만 고백했고, 그녀는 나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공개적으로 사귀고 있다. 물론 경찰이고, 최근 일이 넘치고 있으니... 조금 만나는 시간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직장이니 보는 것은 거의 매일같이 보고 있다. ...일단 일은 확실히 해야하니,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거나, 혹은 가끔 버터쿠키를 선물한다거나...하는 식의 일밖에는 못하고 있지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면 반칙이야. 아실리아."
작게 웃으면서 손바닥 안에 올려진 그 은반지를 바라보면서 작게 소리없이 웃었다. 대체, 이런 것은 언제 준비한건지... 꼭 감사인사를 해야겠지.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만나러 가던가 해야겠네. 물론 지금은 일이 바쁘니까 못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발렌타인 초콜릿도 그렇고, 반지도 그렇고... 받는 것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미소지으며 내 손 안에 든 이 작은 행복을 꼬옥 쥐었다. ...아실리아. 그녀는 정말로 욕심이 나는 존재였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먹게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지만...그와 동시에 그런 것이 너무 행복하기에,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크게 파고들줄은 몰랐지. ...그렇기에, 나도 안 놓을 거야. 절대로.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만큼은..."
이번 일 만큼은 확실히 끝내리라 다짐했다. 이번 일만 끝이 나면... 내가 요원으로서 해야하는 일만 완수한다면, 그땐... 나도 어쩌면 여기서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 손 안에 들어있는 작은 행복을 꼬옥 쥐면서...
다솔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올리려다 그제서야 자신이 오늘 렌즈를 끼고 출근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월요일에 항상 안경을 꼈는데 이유는, 그냥, 월요일엔 출근 준비하기 무척 귀찮으니까. 일종의 월요병일지도 모른다고 그녀 스스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렌즈를 끼고 온 것은 그녀 나름대로 어어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증거였다. 물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가 아닌 제대로 된 직장이라는 생각에 아침에 눈이 저절로 뜨인 이유도 있지만. 그렇지만 막상 서내의 자기 책상에 앉아있자니 한가했다. 처음 들어온 직후로 신문에 실릴 정도로 굵직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다행이었지만), 별 사고나 일 없이 월급을 받는 거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기도 해서, 그냥 책상에 앉아서 다시 한 번 이제 정리 할것도 없어 보이는 책상 정리를 하는 중에, 아마도 자신에게 인사하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와 뒤를 돌아보았다.
" 아, 안녕하십니까. 최다솔이라고 합니다. "
처음 보는 얼굴임을 알자 반사적으로 꾸벅, 정중히 목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키가 큰 여성이었다. 이 경찰서엔 다들 키 큰 분들 밖에 없는걸까, 힐을 신고 와야 할까. 잠시 다솔은 생각하며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종이컵이 눈에 들어와,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며 손에 받아들었다.
" 혹시 성함을 여쭈워도...? "
질문을 한 뒤, 뜨거운 것은 잘 못 마시기에 능력으로 살짝 냉기를 주어 차를 식힌 뒤 한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