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 유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222 애가 어린 나이에 충격을 적잖이 받다보니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에서 내가 잘못했어. 로 생각이 바뀌었죠. 차라리 그 편이 타격감도 적고... 그래서... (흐으릿) 만약 얘가 실존 인물이었으면 아마 전 맞아 죽었을거예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야. 어째서 그렇게도 똑같은 거야. 어째서.
"...액자의 유리 파편이구나."
억지로 평상심을 유지하려 하면서 중얼거렸다. 할머니의 죽음, 그 때부터 점점 기울어지다가 히라카와 하나는 키우던 고양이인 유키를 불태워 죽였다. 그 때부터였다, 뒤틀린 변화는. 그 사람은 내가 그 전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정신이 약했고, 저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모친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히라카와 하나는 평소 '어느 사람'에 대한 분노가 강했고, 그 화살을 결국 나와 아키야에게로 향해버렸다. 사실 완전히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행동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우리 둘을 보며 심정이 복잡하다 못해 위태로웠겠지. 겉으로는 웃으면서 상냥하게 대해주지만, 우리 둘이 점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사람은.
"그런 일이었구나. 지금까지 잘도 숨겨오셨네. 그 정도 수준일 줄 누가 알았겠어."
책망하듯이 말하다가 나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힘들었겠다". 억지로 쥐어짜내듯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절대로 빈말일 수가 없었다. 그 고통을 잘 아니까, 나도. 그러니까. 지나간 일이니까, 라며 넘어가버리는 소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소름 끼쳤어."
나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으니까.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무심코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의지할 사람이 사라지자 그 때부터 시작됐어. 그 사람이 화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럴만 했어. 그야, 전혀 원하지 않았을테니까."
나와 아키야를. 혼잣말을 하듯이 두서없이 계속 읊조렸다. 나츠미가 구해준 자료에 의하면 코미키 히로시는 B형, 코미키 라이무도 B형이다. 하지만 나와 아키야는 AB형. 무슨 소리인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겠지.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고개는 여전히 숙이고 있었다. 나답지 않게 자신없이.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중얼였다. 얼핏 센하의 표정이 좋지 않아진 걸 눈치 챈 그녀는 센하에게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물음을 건넸다.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을 건들여버린 걸지도 모르지. 또다시 자신을 책망해야할 순간이 올까 두려워진 그녀였다.
“ 드러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좋은 일도 아니고. “
학교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으로도 외출을 않고 하루에 한끼 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안타깝게도 모두 그녀의 의지였으니, 책임을 돌릴 곳은 없어. 센하가 그런 저에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힘들겠다는 말을 건넸다. 유혜는 걱정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센하, 괜찮은거야? 난 멀쩡해. “
어렴풋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의 반응에는 저가 모르는 무언가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저의 이야기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부분을 억지로 끄집어내게 되었다는 걸.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그가 어떠한 일을 짊어지고 살았는지, 너는 전혀 모르겠지.
소름이 끼쳤다는 그의 말에 유혜가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절반이 넘는 조각이 사라진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잠자코 센하의 말을 들어주는 건, 그의 상태가 몹시도 불안정했기 때문일까.
“ 센하, 괜찮아. “
그녀는 모른다.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일이 이미 끝마쳐진 일일지, 아직도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일지. 그 무엇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입을 여는 건 멍청한 생각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불안정한 그의 상태를 살핀다. 그의 말이 끝날 무렵 그녀가 외투 안으로 찔어넣었던 손을 빼내어 천천히 어깨를 토닥였다.네가 무얼 아는데 함부로 도움도 안 될 위로를 건네?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센하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에게 위로를 건넨다.
“ 진정되면, 나중에 어떤 일인지 알려줄 수 있어? ...안된다면 괜한 말을 꺼내 미안해. “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어버린 둘이었다. 느릿히 어깨를 토닥이던 손은 그대로, 시선은 그를 바라본다. 괜찮아, 마음 속으로 수 없이 중얼인 단어였다.
언제였을까.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너의 사소한 모습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건. 너는 고민이 있으면 귓볼을 만지작 거리는 습관이 있었지. 웃을 때는 입가의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곤 했어. 너는 콜라를 좋아했지. 아침에는 늘 이어폰을 끼고 교실로 들어와. 그림을 그릴 때는 늘 근처에 달콤한 사탕들을 한가득 부어놓고말야. —네 하루가, 네 모든게. 언제부터 나의 일부가 되었던걸까?
*
매미의 울음소리도 점차 멎어가는 늦여름이었다. 푸르른 나뭇잎들이 옷을 바꾸어 입을 준비를 하고 어둠이 하늘을 색칠하고 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던, 그러면서도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 늦여름. 봄처럼 달콤한 계절도 아닌, 겨울처럼 새하얀 계절도 아닌. 마치 너를 닮은 계절.
“ 천유혜, 너는 왜 방학동안 연락이 안된거야? 걱정했잖아. “
얇은 커텐이 바람에 팔랑이며 파도가 치듯 일렁였다. 창 밖으로는 뒤섞인 소음들이 간간히 들려왔고 그 뒤로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은 교실의 끝에 채 닿기도 전에 네 목소리에 짓눌려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느릿히 책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바람의 손 끝이 내게 닿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본다.
“ 그냥..., 집안 사정. “
창문 밖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힐긋 시선을 던진 창 밖은 마치 주황색 물감을 흐트러놓은 듯 아름다운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온통 주황빛의 하늘은 마치 내가 꿈을 꾸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끔 아름다워서, 쉽사리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도 꿈이라면 좋을텐데. 아쉬운 시선을 다시 돌리며 책가방을 메고, 너에게는 말할 수 없을 사정을 씹어삼키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 미안. “ “ 뭐, 멀쩡하니까 괜찮아. 집 같이 가자. “
평소와 다를 게 없던 네 목소리인데 오늘따라 왜이리 네 목소리가 내 마음 깊게 다가온건지, 나는 느릿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소리가 너무도 가깝게 다가와서 내 마음 한 켠을 간질여. 먼저 발걸음을 떼낸 네 뒤를 쫓으며 나는 내뱉을 수 없을 한마디를 꿀꺽 삼켜냈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웃음소리와 조잡한 소음들이 사그라진 학교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지만 나는 이 고요한 학교가 싫었다. 그덕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크게도 울려대는 심장 소리가 혹여나 너에게 닿을까 걱정을 해야만했으니. 혹여나 꽃이 한가득 피어오른 마음을 들켜버릴까, 구태여 네 뒤를 밟겠다며 발걸음을 늦추어 올려다본 네 뒷모습에 그리 가슴이 뛸 수가 없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나와 같은 교복. 그 하나로도 이리 가슴이 뛸 수 있다니 너는 참 대단한 아이었다. 계단을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심장이 주저앉을 듯 요동치는 바람에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지.
“ 방학동안 철이라도 든건가, 애가 달라졌네. “
그저 친구에게 던지는 시덥잖은 농담이었다. 그런데 왜 그 한마디가 그리도 기분이 좋았던걸지. 또다시 요란스레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했건만 늘어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다행히도 눈치 없는 심장 소리를 덮어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소음. 미적지근한 바람과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 그 가운데에는 네가 있었다.
“ 그런가. “
그러고보면 나는 참으로 바보 같았다. 짧디 짧은 단어로 막을 내린 내 대답에 너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는걸. 아까와는 달리 마음 속이 샤프로 찔리듯 콕콕 쑤셔오는 느낌에 나는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네 뒷모습만 쳐다보며 한참동안 한숨을 쉬어내야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너와 나의 눈높이가 달라진 건. 너를 보는 나의 눈높이가 달라진 건. 크레파스로 뭉뚱그린 그림과도 같던 네가 언제 이리 정교하고 세밀한 작품이 되어 있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네 얼굴의 보조개를 보고, 네가 자주 하는 말버릇을 알아채고, 네가 하는 말들을 기억하려 안달이었을까. 문득 궁긍해졌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 너 여기서 버스타고 가지? 기다려줄게. “
네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학교 앞 정류장이었다. 네 생각과 목소리에 잠겨 눈을 감았더니 앞도 보질 못하였구나. 이리도 너에게 흠뻑 잠겨들었으니 어찌라면 좋을까. 나는 얼굴을 만지작 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좋았지만 너의 그런 점이 불만이었다. 감히 원하건데 나에게만 그런 웃음을 지어주라는 이기적인 소원을 바람에 흘러보내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내가 타야할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가오는 버스들을 보며 제일 먼저 숫자를 읽어내고, 숨을 내쉬고. 겨우 몇 센치가 될까 싶은 너와의 거리에 숨을 졸이고. 매미가 조금만 더 크게 울어주기를 바랬다.
“ 나, 갈게. “ “ 어? 그래. 내일 봐. “
네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차마 붉어진 얼굴을 네게 보이지 못하고 쫓기듯 버스에 탈 뿐이었다. 자리에 앉자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네가 창 밖으로 비추었다. 열심히도 손을 흔드는 너였다. 버스가 출발하고, 너의 모습이 사라진다. 나는 그제서야 새카만 책가방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네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딘다 공허했고 동시에 파도가 일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잠시 사고회로의 전원이 과열 되어 픽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자 약간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과 구름 너머로 날려보낸 소원이 내게로 돌아와 살랑살랑 살결에 닿는 느낌에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