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자 자신의 왼쪽 다리파츠가 완전히 부숴진게 보였다.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식으로도 조그마하게 남기고 싶었던 추억이 부숴지는 느낌이라 우울한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이 나무가 얼마나 버텨줄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에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망가진 것 같았지만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
-끼익-
그 때, 다시 틈이 열렸다. 마부가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세어들어왔고 비에 흠뻑 젖은 알폰스가 새로운 나무기둥을 잡고 지붕이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란 인형은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사람을 귀찮게 하는게 특기입니까?!"
나무기둥에 핏방울이 맺혀 떨어진다. 이미 잔뜩 상처입은 알폰스의 손에서 흐르는 피일 것 이다. 아리아는 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도련님.. 위험해요. 그냥-"
알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버텼다. 나무의 색이 점점 붉게 물들어도. 땅바닥에 맺힌 핏방울들이 점점 웅덩이처럼 보여도. 그는 아리아를 무시하고 계속 버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아리아를 부활시키고 제작한 이유는. 환상종을 같이 사냥할 사람이 필요했던게 아니라. 가족이 필요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도련님? 정말 위험하니까 제발 떨어지세요."
팔이 미친 듯이 떨린다.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이 너무 이질적이다. 이 마부는 돈을 어디서 구해서 이렇게 큰 집을 지은걸까. 귀찮다 참..
"도련님? 도련님!"
참 끝까지 시끄러운 인형이다- 점점 풀리는 팔과 아늑해지는 정신을 끝으로 알폰스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비는 그쳤다. 숨을 돌리기 위해 앉아있는 알폰스 옆에 그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아리아가 앉아있었다. 다행히 마부가 부른 사람들은 늦지 않게 와주었다. 사망자도 없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 오죽하면 마부가 '도련님이 제일 크게 다쳤다고. 내구성 약하네 도련님 ㅎ' 이라며 농을 건넸기에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 도련님-" "뭡니까 인형"
붕대를 다 감은 아리아는 자상하게 붕대를 잘 묶어주고는 그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전 환상종에게 죽은게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에게 죽었어요." " - "
마을 사람들이 왜 아리아를 죽인걸까? 알폰스가 그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아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다친 환상종이 찾아와서 숨겨줬는데 들켜버렸거든요. . ."
그렇다면 마을을 불태운 환상종이 아리아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머릿속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아마도 제가 쓰러지고나서 환상종이 저를 보고 마을을 불태운 것 같아요." "이상하군요- 아이들을 잡아먹는 환상종이 그런 정과 의리로 복수를 한게 이상합니다" "아니에요" "?"
"아이들을 납치한건 그 환상종이 아니에요"
알폰스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이 더이상 쉬운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훗날 어쩌면 그 때, 아리아를 다시 받아주는게 맞았던걸까? 라고 후회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제 볼에 손을 뻗는 헨리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그대로 끌려와선 자연스레 품 속에 알맞은 사이즈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기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는 듯이 푸근하게 기대거나 비비적 거리거나 하는 그 모습은 사신은 커녕 어떤 작은 동물같은 반응이다. 그런 캐롤리나는 문득 아차싶은지 헨리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말한다.
"아, 선배에~! 저어~ 이제 가봐야겠어요~"
어느새 끝나있는 점심시간. 알차다면 알찬 시간이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그 샌드위치를 놓치지 않기위해 달리는 헨리에 타고, 후식으론 주스까지 마셨다. 캐롤리나에게 있어선 더 없이 즐거웠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행동은 레오닉도 당황케 만들었다. 불쾌한 기분이 아니라 순수하게 당혹스러웠다. 돌연히 시야를 장악하는 무언가가 접근해 왔다는 것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튕길 뻔 하다가 그것이 아리나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무턱대고 일어났다가는 부딪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잠히 눈만 꿈뻑였다.
"너도 참 신기한게 많은 사람이야."
레오닉은 그녀의 얼굴이 멀찍이 떨어진 다음에야 담담히 감상평을 내리듯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친구라는 단어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건 단지 그녀의 성격 탓인걸까? 레오닉은 깔끔히 비워진유리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뭘 하냐면, 술 마시는걸 하지."
그는 사실을 말했지만 그 인과관계를 그녀가 캐치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본인의 발언에도 진정 어렴풋한 수준으로나마 흔적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녀는 순수하다는 말보다 순진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레오닉은 아리나의 되물음에도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놀랍지만, 설마 주교를 환상종이랍시고 쏘는 인간이 있을 수가..."
아무리 눈 앞의 아리나라도 초면에 자신이 주교임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저 착각이라는 명분으로 총을 뽑는다면 반란이라는 의미에서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다. 레오닉은 충고를 귀담아 듣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리나가 뒤로 얼굴을 쑥 뺐다. 당황해하는 레오닉을 신경쓰지 않는 건지 단순히 눈썰미가 부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닉을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미안해하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친구라고 해줘서 고마워.”
또다. 평소의 천진난만함과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 더 진지한, 그런 아리나. 어울리지 않았다. 아리나가 옅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신기하다고? 맞아! 난 신기하지!”
놀랍게도 분위기를 바꾸는 스위치라도 있는 건지 평소의 밝고 발랄한 아리나로 돌아왔다. 레오닉을 슬쩍 보고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술을 마시자고!”
레오닉의 추측은 정확했다. 아리나는 인과관계는커녕 그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를 사람이었다. 아리나는 제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던져진 다면 미끼인지 진짜 사냥감인지는 우선 잡아 놓고 고민하는 타입이었다. 그저 제 눈앞에 보이는 목표에 집중한다. 실로 짐승과도 같은 사람이다.
“어... 그건 맞아!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어떤 멍청이라면 쏠 수 있을지도?”
그 멍청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리나보다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울컥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단 심문관들 사이에서 아리나는 생각 없는 또라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레오닉이 자꾸 제 손에서 머리카락을 멀리하자 아리나는 미련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