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행동에 기가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저리도 경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모르겠다. 평소였다면 기분나빠 당장이라도 짜증을 부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지 않았다. 물론 기분이 상할뻔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는 저 웃음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이 또한 상대가 그녀이기 때문일까. 잠시 입을 다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저리 경박한 웃음을 터뜨린다면 분명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그녀를 특별취급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안이 벙벙해진다.
"미쳤네. 진짜."
거친 단어를 내뱉긴 했지만 그 목소리에 악의는 담겨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 유독 그녀만을 특별취급 해주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한건 사실이다. 과거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그녀의 뛰어난 가사실력에 반해 본래 집사가 관리하고 있던 개인실과 서재의 청소를 맡겼기에 엘라리스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공간은 대부분 그녀가 관리하고 있었다. 엘라리스가 외출하기 전 자신의 귀가시간을 미리 귀뜸해주는 사람도 그녀였으며, 엘라리스가 귀가했을때 저택 정문에서 마중을 나오는 사람도 그녀였다.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식사하는 동안에도 줄곧 그녀를 옆에두곤 했었다. 이렇게 돌아보니 자신이 보내는 일상 대부분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엘라리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뒤따라 걷지 말고 내 옆에서 걸어. 오늘은 특별히 허락해줄게."
그녀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쥔채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엘라리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자신의 영지에서 상점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심심하니까 옆에서 가만히 걷지만 말고 입이라도 좀 놀려봐."
평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보던가. 같이 일하는 시녀들과의 관계라던가. 개인적인 이야기라던가. 솔직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듣고 싶었지만 이것까지 콕 집어서 말하진 않았다.
레이첼이 픽하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의 그녀라면 분명 '거절한다'며 아주 간결하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고, 그녀라는 존재가 불러온 변화였다. 레이첼 본인은, 그것을 썩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때까지. 죽지 못할때까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런것은 한참이나 가벼운 비용이였다.
옷을 걸어놓은 그녀가 비비안이 두드리는 옆자리로 천천히 걸어가 앉고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비비안은 베 혀를 내밀고 툴툴거리듯이, 레이첼의 한없이 가볍고 재밌다는 반응에 이야기를 하고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누군가가, 죽거나 사라질대까지. 영원에 약속한 사랑은 한없이 가볍다. 그녀와 레이첼은 엉원을 사는 존재들. 그 불사의 약속을 들었을 때, 그녀는 레이첼이 변함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한없는 가벼움은 레이첼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옆자리에 앉은 레이첼이 그대로 자신을 껴안고 몸을 던지자 그녀는 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잠...레이첼!!"
원망하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던 그녀가 옆으로 마주한 레이첼의 모습에 꺄르륵 웃었다. 새하얀, 레이첼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댄다.
"으응, 사랑해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요~"
고개른 살짝 움직여서 레이첼의 목과 어깨사이에 얼굴을 웉은 그녀가 갸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중얼거렸다.
한참을 웃던 위트니가 웃음을 그치고 앞을 보았을 때 분명 도련님의 등이 보여야 했는데 제 눈 앞에 있는 것은 그의 등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보고있다. 평소라면 인상을 찌푸리시며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하셨을텐데 오늘은 저렇게 무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화나보이지도 않아 위트니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위트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그만두고 그가 자신을 보는 것 처럼 자신도 그를 빤히 쳐다보기로 했다. 오랜기간 동안 봐왔는데도 이렇게 자세히 얼굴을 본 것은 손에 꼽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욕지거리를 입밖에 꺼냈다. 위트니에게는 익숙한 말이었다. 오랜 기간 그와 함께한 위트니는 그가 지금 화가나지 않았음을 어렵잖지 않게 알아냈다. 그렇기에 담좋게 그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가 왜 하필 나를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위트니는 자신이 그에게서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아왔다.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때마다 그녀는 상상에 젖어 혼자 설레하고 혼자 기뻐했으니 말이다. 그 기쁨도 잠시 그의 행동은 언제나 위트니를 설레게 하면서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좋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일반 시녀처럼 대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비참함을 잘 알면서도 위트니는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특별히 대할 때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제 손을 잡고 옆에서 걸으라 하면 위트니는 거절할 방도도 생각도 없어져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라도 좋았다. 기뻤으니까. 그의 한마디에 위트니는 눈에 띄게 밝아져 금방 입을 열고 만다.
"도련님! 정말 감사해요! 정말..."
뇌에서는 어서 아무말이라도 하라고 채찍질을 하지만 입은 그저 숨만 들이 내쉬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위트니는 울쌍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퍼뜩 머리 속을 스친 생각을 바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제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셔서 너무 좋아요!"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평소 어떻게 이야기했더라? 위트니는 안색을 굳히고 떠듬떠듬 변명했다.
"생각나는게 이것 밖에 없어서... 정말이에요. 도련 님이 절 전속 요리사로 임명하셨을 때 너무 기뻐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니까요?"
못된 뱀파이어라. 그래, 못됐다. 이 마음을 흔든것 만으로도 충분히 못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어울려주겠다. 내가 평생동안 갈고 닦은 우직함, 고집으로 너를 품겠다. 못된, 바보 같은, 그리고 사랑스러운 뱀파이어여. 레이첼은 제 귓가에서 작은 짐승처럼 중얼 거리는 그녀의 머릿칼을 쓰다듬듯이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오히려 그 반대인 케이스군.
고고한, 우직한 고집스러운 숲지킴이님. 비비안은 말과는 다르게 손으로는 조심스레 레이첼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다시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피의 내음. 그러니까, 가볍기 짝이 없는 나를 꼭 잡아야할거에요, 그렇죠~? 물론, 사랑해요 레이첼. 부비적거리던 비비안이 나직하게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