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진은 문득 휘영청 달이 매달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그녀의 손에 들린 청릉초의 꽃잎이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답게 빛을 산란하는 것이 보였다. 소진은 그 반투명한 꽃잎을, 잠깐 달빛에 비쳐보았다. 은을 녹여 고운 실로 뽑아서는, 고운 손으로 그물 엮듯이 한 잎맥이, 달빛을 그 표면에 굴리며 맑은 수정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잠깐 그 꽃잎을 빤히 바라보던 소진은, 그것을 곧 한쪽 팔에 끼고 있던 소쿠리에 넣었다.
그녀는 소쿠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 정도의 양이면 한동안은 또 달밤에 나와서 청릉초를 따겠다고 고생할 일이 없을 터였다. 아마 이번 겨우내 감기약 처방에 쓸 월청유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곧 발을 내딛었다. 그녀의 발끝이 보라색으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 풍경이 보랏빛으로 휩싸이곤, 바뀐다. 낯익은 풍경. 그녀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녀는 잠깐 자신의 집을 빤히 내려다본다. 반가운 나의 집. 다행히 잘 있구나- 하고, 그녀는 습관적인 동작으로 집 근처의 숲을 훑어보았다.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음을 확신하려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보인다. 집 근처의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작고 왜소한 어떤 형상을 발견한 것이다. 어찌 보면 연기 자락처럼도 보이고, 어찌 보면 아까 보았던 청릉초 꽃잎과도 비슷하게 보이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백소진은 그 형상을 주시하다가, 이내 산비탈을 빠르고 소리없이 타고 내려가서는 그 형상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한 위치까지 다가갔다.
레이첼이 축제 한 가운데에 성큼성큼 나타나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된다. 인간은 물론이고 환상종까지 배척하는 성향으로 있는 숲 지킴이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일이었던 까닭이다. 한창 웅성거리던 군중의 파도에 잠시 침묵이 인 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녀는 모두의 프라이머리. 마음이 모인 원기옥에 손을 뻗었다. 이 축제의 시작을 알리듯 쏟아져 내리던 것처럼, 그 손아귀에서 월광이 환하게 밝혀져 나오기 시작했다.
"즐거웠다."
눈 앞의 환상종에게 그것을 전달한 숲 지킴이는 그렇게 한 마디만을 하고 다시 숲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리나가 길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상황에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리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풀린 눈으로 번쩍번쩍거리는 하늘을 보았다.
"폭죽을 쏘란 말이구나!"
자신도 폭죽을 쏘고 싶었다. 아리나는 자신의 옷을 뒤적이며 폭죽을 찾았는데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때였다. 옆에 지나가는 행인이 폭죽을 들고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아리나는 망설임없이 그에게 달려가 폭죽을 빼앗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비명소리를 배경으로 아리나가 이를 들어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비명을 지는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엘라리스는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소한 칭찬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러는 건지. 분명 의도치 않은 칭찬에 후회하던 엘라리스였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자 후회되는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앞으로 예쁘다는 말을 자주 해줄까 생각해봤지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입에 담는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붉게 상기된 얼굴을 목격해버린 엘라리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도 그렇고, 요즘 자주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은데. 정말 아프지는 않은 것인지 조금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열사병이라도 걸린거 아냐?"
그래도 죽진 않을거야. 작게 덧붙이곤 바짓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병에 걸려 죽은 뱀파이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뭐, 그런 뱀파이어가 있더라도 알 바 아니지만. 유능한 메이드가 아픈건 가슴아픈 일이다. 그녀가 앓아 누으면 내 식단을 책임져줄 사람이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선 그녀가 유능한 메이드인걸 재쳐 두더라도, 그냥 그녀라는 사람이 아픈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봐. 움직이면 죽일 거야."
지난번 손바닥을 올려봤을땐 제대로 온도를 느끼지 못했는데. 무언가 잘못됐던 걸가. 이번엔 이마를 맞대어 열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확인해볼 심산으로 천천히 그녀의 이마를 향해 제 이마를 가져갔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잔말말고 따라오기나 해."
자신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는 행동에 기분이 상한 엘라리스는 살짝 찡그린 얼굴을 한채 등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그리곤 그녀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나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보름달이 밝은 보레아스의 땅. 나는 그곳을 배회하며 떠도는 뱃유령이다. 굳이 바다가 아니더라도 떠돌아 다닐수는 있기에 지금 이 땅에서도 배회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민족을 팔아버린 남자의 손녀이자, 민족을 팔아버린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길러지는 인형이기도 했지만, 그런것은 죽고나서 업에서 벗어났다고 그렇게 생각했것만. 과거에 얽메이는 것은 필연인것일까. 익숙한 화민족의 양식을 가진 집을 보고 내가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까.
대체 누군가가 이런 집을 짓고 사는 것인가. 배회하던 끝에 근처에 가보자니, 위화감이 심하게 들었다.
마소의 기운. 집근처에 강하게 깃든 그 기운은 무언가 트랩을 쳐놓았음을 암시하고 있었기에, 가까이 가지 아니하고 나는 그저 주변에서 그것을 관측하기만을 반복했다.
"짜증나.."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과거가 생각나게 한다. 어째서 이런곳에 화민족의 발자취가 남겨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꺼번에 수장시켜버렸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근처에서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언덕에서 누군가 올라와있었다.
빠직. 아 다행히 머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아니라 목뼈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하머터면 머리가 깨질뻔 했네.
"머리는 조심히 다뤄줘."
소근소근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끔 속삭였다. 방금 장면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고 싶었지만 뭐.. 이 정도는 한참 어른인 내가 참아주자. ....라는 생각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순간 흔들렸지만.. 후우, 심호흡 심호흡. 이런 애기들한테 공격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자랑은 아니오나, 사람을 즐겨 사귀는 성미가 아니라 지내온 세월에 비해 맺은 인연이 넓지 못합니다."
백소진은 먼저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그 볼은 이미 생명의 빛을 잃어, 장밋빛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한 그림자만이 남은 뺨을 한 그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실루엣으로 예전의 좋았던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얼굴에 서린, 비칠 듯 말 듯한... 어떤 원한, 혹은 증오가 드리운 듯한 안개가 아니었으면 말이다. 저렇게 고운 얼굴로 좀더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하고, 백소진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