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시간동안 뭘 할까. 아리나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이 아리나는 썩 달갑지 않았다. 아리나에게는 갑작스럽게 생긴 시간동안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는 일보다 경계선 근처에서 보초를 서는 일이 훨씬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리나는 창문 너머로 어느 남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쌉니다! 싸! 다른 집에 반값이에요!”
아리나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래! 시장 구경 하자! 잠옷 차림 그대로였지만 아리나는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리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코트를 그대로 주워 대충 걸쳐 입었다. 사람이 많아 북적이는 시장 통에서도 아무렇게나 부슬거리는 강렬한 붉은 색 머리카락과 잠옷 같은 하얀 레이스 드레스는 눈에 뛰는 조합이었다. 아리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며,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시선이 머물만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따위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아리나는 골동품을 파는 가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골동품 가게 주인은 아리나를 손님이라 인식하고 열심히 물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물건은 말이죠. 아주 예로부터 전해 내려와 동방의 신기한 주술이 담겨있는 물건입니다.”
나는 지킬의 닥달을 못이겨서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엠블럼을 고정할 천을 사와! 지킬이 시킨 일을 얌전히 하는 건, 아무래도 어제 있던 전투의 여파에 온몸이 쑤시고 두들겨맞은 것처럼 아팠다. 엠블럼을 달지 않고 벨트도 하지 않은 평범한 검은색 셔츠에 바지, 부츠 차림으로 시장을 걷다가 잠시 한눈을 팔고 곡물과 우유를 갈아서 만든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서 빨대를 꽂아서 입에 물었다. 이미 천으로 쓸만한 회색 천은 두둑하게 사들었으니까, 지금부터는 순전히 구경이다. 구경.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팔려고 하는 장사꾼. 듣기만해도 사기를 치는 거라고 생각되는 말을 내뱉는 골동품 가게 주인의 목소리. 저건 뻥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가다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건들을 구경하는 익숙한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쟤가 왜 저기있어?! 그 순간. 골동품 주인의 이빨을 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저건 사기인데. 쟤 저러다가 진짜 사는 거 아니지? 나는 다급하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아리나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방긋, 아리나를 향해 웃어보인 뒤 나는 다시 골동품 가게 주인을 잠시 바라보고는 빨대를 이용해 입에 음료수를 물고 골동품 주인의 손을 잡고 그 손바닥에 뭔가를 썼다.
어느새 주인에게 시계를 건너받고 요리조리 구경하던 아리나가 뒤에서 누군가 손을 짚자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헨리! 어서와!”
아까 표정이 무채색이었다면 지금 표정은 노랑에 가까울 것이다. 아리나는 밝은 표정으로 헨리에게 인사했다. 어서와라고 말하기에는 전혀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리나는 개의치 않아 했다. 물끄러미 헨리가 하는 것을 바라보던 아리나는 용캐도 아리나가 쓴 글씨를 알아보았다. ‘미치셨어..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게 주인이 듣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그 순간이었다. 아리나 손에 들린 시계가 부셔져버린 것은. 별로 세게 잡고있지도 않았는데 바로 부셔진 것을 보아 원래 부실한 물품이었나 보다. 안 그래도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던 가게주인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아이고, 이 귀한걸 부셔버리면 어떡해! 이거 물어 줘야 겠어!”
그 말에 아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거 그냥 평범한 시계인걸. 그리고 나 돈도 없어.”
아리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그 모습에 아리나가 인상을 옅게 찌푸리고 헨리를 보며 말했다.
아리나의 인사에, 나또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서 마주 인사를 해보였다. 안녕. 입모양으로 벙긋거린 뒤, 나는 다시 가게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차피 눈꼬리도 처져서 노려보는 것보다 물끄러미 보는 게 더 양심에 찔린 테니. 그 순간, 아리나의 손에 쥐어져있던 시계가 가볍게 박살났다. 저기 아리나..? 나는 흔들리는 눈빛을 막을 수 없었다. 왜 그걸 부숴? 아니 잠깐만. 이 아저씨 화났잖아? 아니나 다를까, 가게 주인은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나는 가게 주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이마를 가볍게 짚고 말았다. 이 사고뭉치같으니라고.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천을 사고 남은 잔돈 중 몇개를 가볍게 가게 주인을 향해 던진 뒤, 옅게 인상을 찌푸린 아리나가 제 손모양을 해석해 줄거라는 걸 믿고 - 믿으면 안될거 같지만 잘못 해석해준 게 한두번도 아니니까 - 한손으로 약식 수화를 했다.
'물건값이에요 그정도면 충분하죠 아 물론 제 일행이 부순것만 값을 치러드리는 거니까 잔돈은 안주셔도 되요'
아리나는 억울한지 인상을 팍 찡그리고 헨리를 흘겨보았다. 그 다음은 가게 아저씨였다. 헨리를 볼 때에는 그래도 장난기가 있었는데 아저씨를 볼때에는 어찌나 살벌하게 보는 것인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도 오래가지 못했다. 헨리가 돈을 던지자 아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헨리를 쳐다보았다.
“돈 아깝잖아!”
그 후 헨리의 손모양과 약식 수화를 보자 왜인지 얼굴이 살살 펴지는 것이었다. 일부로인지 실수인지 크게 말했다.
“뭐, 이 아저씨 목숨값이면 싸다고? 오늘밤 그대로 저 목을 따버리겠다고? 괜찮은 생각이야!”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 아저씨에게 겁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해석을 잘못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