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흘렀다. 굳이 그런 물음을 던진것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결정을 내렸는지, 후회하고 있는지.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정해졌다. 한동안 술도 들이키지 않고 잔을 쥐고 있던 레이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자신이 환상종임을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인간이었다는것 또한 사실이다. 난 그것을 잊지 않는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술의 취기에 정신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선 환상종과 그대를 구분하는 이유가 되질 못하지. 사실, 이건 나도 그렇다. 우린 이제 불치병과 싸우지않으면 안된다. 그치만 극복해야지..."
그는 말의 속도를 술을 마심으로써 조절하는듯 보였다.
"향수병따위에 빌빌거려서야 부끄럽기만 할뿐 아니겠나? 이제야 과거이야기를 제입으로 듣게되었는데, 우리는 확실히 전 인간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금은 인간이 아니지. 이것또한 사실이다. 환상종임을 부정하라는게 아니다. 받아들이라는 거다. 불쾌한가? 그렇다면 오니의 술주정이라 생각해라.... 오니란 정이 많아서 이렇게 술만 같이 마시는걸로 친구라 생각해버리는 족속이니까, 이렇게 주정을 부린다. 인간으로선 생각치도 못한일이지."
상관 없겠지.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곤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점에서 혼자 마시고 있으니 다가온 첫만남, 그게 싫어서 살해 협박까지 했던 기억, 그런데도 어떻게 같이 한잔 했던 것. 그리고 그 외의 에피소드들. 레이첼 스스로도 먼 기억이라고 생각했으나 입을 여니 술술 나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생각했다.
977부스러기 시이 - 아나이스 교황 성하가 시이랑 커플이라니 말도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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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내일 월요일) 07:56:22
"좋아요? 그럼 나도 좋아요. 계속 그렇게 부를래요. 아나이스, 정말 정말 좋아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이내 쓰다듬어지는 것을 가만히 느낄 뿐이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하기도 했던 터라, 이내 모자를 벗더니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살짝 내민다. 쓰다듬 받는 거, 어쩐지 기분이 좋으니까.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더.
"뭐라 한 사람은 아직 없지마안~... 그래도, 그래도요. ...공석에서는 교황 성하, 와 단순한 신도 혹은 이단심문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러면 안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아나이스..."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괜히 더 안겨들며 어리광을 부린다. 한편 그녀는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것도 교황 성하께. 너무 좋아서 13살때로 정신연령이 돌아간건가...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어쩌라고! 나도 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걸요.
"...혹시 다른 식으로 부르고 싶은 그런 거 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어떻게 불려도 좋은 걸요. 아나이스."
시이는 제 이름을 부르자, 그 얼굴에 담긴 약간의 아쉬움을 알아채곤 가만히 아나이스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러곤 이내 눈이 마주치고, 볼이 쿡 찔리자 볼이 찔린 건 상관 없다는 얼굴로 지긋이 아나이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1. 쌍둥이의 이명은 flabra ĕpistŏlárĭus. 바람결 우체부라는 의미이다. 플라브라 에피스톨라리우스라고 읽는다. 2. 쌍둥이는 속도와 바람, 그리고 공기를 다루기에 물 속에서도 충분히 공기를 공급받으며 고속으로 수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다곤 해도 물을 다루는 능력이 프라이머리인 게 아니기에 물을 다루는 프라이머리를 가진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느리다. 3. 공기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기에, 청력이 좋다. 4. 사실 속도를 다루는 건 바람의 빠르다는 이미지에서 따온 거라 능력에는 그닥 상관없다. 5. 프라이머리의 이름 그대로, 바람의 날개를 만들어서 비행이 가능하다. 바람을 구체화하는 것이기에 색은 없어야 맞을 것 같지만 어째선지 은청색의 날개이다.
외딴 산림. 인적조차 없으며 사람의 손이 타지않아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이곳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어둑히 빛이 들지않는 밤이 될때까지. 내키는 대로 걷다보면 이렇게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그저 가고싶은 방향을 정했다면 그곳을 향해 도달할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마 보레아스의 밀림 중 어디였지? 행여나 환상종이 머무를수는 있겠지만, 근처에는 개울물이 흐르는걸 확인했고, 경계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내 프라이머리는 물만 있다면 홈그라운드니까.
"차나 한잔 마실까.."
얼마전 노토스에 잠시나마 다녀왔기에 가죽주머니에는 그쪽의 석탄 스토브라던가 그저 기호품으로서 찻잎을 몇개 구해다가 싸놓았다. 어차피 여기서 불을 피운다고 한소리 할 녀석은 없다. 있다고해도 상대할 자신은 있기에, 나는 석탄 스토브에 불을 피우고 개울에서 물을 떠다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 몸이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기호품을 섭취하는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계속 끌리고 마는것이다. 망령이라지만 나에게는 형체가 존재한다. 노토스의 기담처럼 아예 벽을 통과하고다니는 영체같은 기이한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고, 음식물을 섭취함에 있어서도 그저 인간과 다를바가 없다. 그저 허기가 진다던지 잠을 자고 싶다던지 하는 그런 욕구가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뿐. 인간자체와 큰 차이가 없어서 결국 과거에 이끌리고 마는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위화감이 드는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산속에 들짐승이거나 혹은, 환상종이겠지. 나는 물로 적신 닻을 오른손으로 꽉쥐고는 경계를 시작했다.
저녁, 평범한 환상종이나 짐승들은 잠이 들었을 시간이지만 야행성인 그들의 종족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잠에서 깨어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늑대는 기지개를 피고는 불어오는 바람에 코를 대며 냄새를 맡는다. 별 다른 건 없는 것 같은데. 눈을 길게 깜빡이던 늑대는 문득 든 생각에 중얼거린다.
[목마르다...]
이 근처에 개울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꼬리를 두어번 살랑인 늑대는 개울가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털이 풀 잎사귀 등에 닿아 바스락 소리를 냈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이 늑대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일 텐데...
[....낑?]
누가 있네. 잠이 덜 깬 은색 눈이 린네를 향하다가, 그녀가 피워 놓은 불꽃에게로 향했고, 물로 적셔진 닺에게로 향했지만 별 상관 없다는 듯이 늑대는 고개만을 한번 갸웃이고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강가에서 목을 축인다.
숲속에서 나타난 것은 은백색의 꼬리를 두개 가진 늑대. -사실 여기서부터 일반늑대와는 다르다- 크기는 노토스에 서식하는 종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예전에 화 민족이었으면 영물이라고 지칭했을까. 그 정도로 차이가 너무 났다. 다만 그쪽이 제갈길을 가서 목이나 축이고 있기에 경계를 풀었다. 다만 흥미가 생겼기에 좀 떠보고싶어졌는데.
마른 목을 한껏 적신 늑대는 이 다음에 무엇을 할까. 생각이라도 하듯이 앉은 채로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다.
[...?]
그러던 차에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늑대의 귀가 린네의 쪽으로 쫑긋. 하며 돌아갔고,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 상대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을 깜빡인다. 그러고는 또 다시 길게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하던 늑대는 발걸음을 옮겨 자연스레 불꽃 앞까지 갔고, 그 앞에 주저앉아 그르릉거리며 불꽃을 쬔다.
[컹]
한참을 불꽃을 쬐던 늑대는 앞발을 살짝 꼬며 바닥에 엎드렸고, 앞발 위에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은 채로 린네를 쳐다보며 상관 없다는 듯이 짧게 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