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고, 위기가 없는 일상.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 정녕 그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나. 이제는 죽고 싶을 정도의 악몽에 시달릴 일도, 그 남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할 일도 없는데.
“ 그런가요? 뭐, 그럴 수도 있죠. “
캔 안의 우유가 찰랑인다. 그녀는 절대사절이라는 그의 말에 다시금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캔을 입가에 가져가 몇 모금을 더 마셔낸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초콜렛이나 사탕을 도통 먹질 못했네. 유혜가 왼편 주머니에 들어가있는 왼손을 꼼지락 거리며 생각했다.
“ 귀신같아라. 숨기면 나중에 마음이 걸리적 거릴 거 같아서요. 뭐, 유안씨가 한 말이 맞았죠. 결국에는 내 안위가 우선이었어요. 막상 죽인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워지는 거예요.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저지르고 남들에게 어떤 시선으로 보일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뭐 그런 게. “
그녀는 늘 제 입으로 말했다. 범죄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범죄자는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지금 와서 보니, 제 신념이 꺾인 것보다도 주변인에 대한 눈치를 더 보는 그녀는 참으로 미련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고. 지금은 그녀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 뭐..., 사실 유안씨가 그렇게 말하고 엄청 찔렸어요. 보통 사람들의 사고라 얘기해줘서 고마웠고. “
어느새 캔은 다 지워져 달그락 거리는 빈 캔이 되어있었다. 굳이 음료를 다 마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쥐어진 캔은 변함이 없다.
안색이 안 좋아보인다는 말에 아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역시, 지금 좀 상태가 심각한가. 하기사 요 근래들어 잠을 통 자질 못 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뭐, 이 과한 다크서클의 원인은 비단 수면부족뿐은 아니었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쉬지 않고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언제라도 쉬이 익숙해지질 않아 속이 뒤집어지기 십상인데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두통은 가뜩이나 너덜너덜한 정신에 스트레스를 한 바가지 더 들이붓는것과 같았다.
" 안색.. 불면증이. 그러니까.. 잠을 잘 못, 자서. "
그나마 요즘에는 스트레스를 이전보다 잘 해소하면서 산다는 게 다행이지. 주위 환경이, 사람들이, 조건들이 바뀌어가면서 아실리아 또한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좁게는 연애에서부터 외출, 넓게는 타인과의 전체적인 관계의 형태가 나쁘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야금야금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아직까진 썩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었다만. 하여간, 아실리아는 예상치 못한 반격이 들어오자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탓인지 뭔지 정신이 살짝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든 데다가, 그 때문에 방금 전 자신이 반쯤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의식한 아실리아는 괜히 제 책상 위를 뒤적거리며 서하의 시선을 은근히 회피했다.
" 으음.. 서류, 서류.. 있었나. 아마 있을 텐, 데. "
조금 민망했던지 아니면 괜히 부끄러웠으리라. 그래도 나름 사귄 기간이 되는 편인데, 아실리아는 아직도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가 잦았다. 좋지만 떨리고, 동시에 조금은 어색한것일까.
" ....어쩌면 그럴, 지도..? 서하는? "
서하도 아쉬웠어? 하고 묻는 아실리아의 고개는 여전히 책상 위를 향했지만, 눈은 이따금씩 살짝 방향을 틀어서 눈치를 보듯 서하를 쳐다보기도 하였다. 와중에 결국 서류를 찾아내기는 했는지 얇은 종이 몇 장을 손에 쥐고 말이다.
"...불면증이라. 그런가. 여러모로 힘들겠네. 정 힘들면 얘기해. ...휴가 정도는 낼 수 있게 해볼테니까. 그것도 못해줄까."
잠을 잘 못 자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아실리아의 연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정도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계급이 높은 건 아니니까 더 크게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묘하게 쓰리다고 느끼면서 다시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마셨다.
그와는 별개로 나의 반격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에 대해서 아실리아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정말 귀엽다니까.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건지... 작게 피식 웃으면서, 내 시선을 회피하며 서류를 찾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커피를 마시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초에 서류를 정말로 찾는 것보다는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이어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아무런 말 없이 커피를 다시 마셨다. 그리고 목구멍 속으로 그 달콤하면서도 쓴 내용물을 꿀꺽 넘긴 후에 아실리아를 빤히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아쉬운데. 난? 고백할 때 아실리아, 네가 말했었나? 집착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서 말했지. 아마. 어쩌면 내가 더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래. 많은 아쉬움을 느껴. 나는 말 돌리는 것을 귀찮아서 잘 못하니까 언제나 직구야. 하지만 일은 해야하니까 참는거지.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나에게 있어선 그나마 나쁘진 않은 밤이야. ...뭐, 일단 귀찮은 질문이 싫어서 하윤이나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고, 일할 땐 이전처럼 하고 있지만, 너하고 사귀는 사이인 것은 변함 없으니까."
정말로 태연하게 이야기하면서 마저 커피를 다 마시고, 그 캔을 근처의 쓰레기통으로 전송시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실리아를 바라보면서 손에 쥔 종이, 그리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이야기했다.
"...눈치 볼 건 없지 않아? 아니면 부끄러워? ...그럼 어쩌면 좋을까. 부끄럽지 않게, 익숙해지게 해주면 좋을까?"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면서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직장에서 너무 그럴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다들 맛이 없다고 기피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먹어보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 달콤한 맛도 있고, 톡 쏘는 맛도 있으니까. 설사 맛이 없어도 몸에 좋은 것은 맛이 없고 쓰다는 말이 있다. 그런 원리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데, 무조건 다들 맛이 없다는 색으로 생각하니... 그것은 다 편견이야! 편견! 아무튼 주 씨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시말서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말서 많이 썼다는 말. 적어도 경찰서 내에서는 자랑은 아닌데 말이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랑스럽게 할 말이 아니잖아요. 주 씨.
"일단 선배로서 말을 하자면 경찰이 시말서 많이 쓰는 것은 전혀 자랑스러운 말이 아니에요. 공무원이 시말서를 많이 쓰게 되면 잘못하면 월급 깍일수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선 쫓겨날 수도 있고요. 괜히 공무원이 연급 확실하게 보장되는 거 아니에요."
그만한 의무도 필수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또 경찰이니까. 그러니까 행실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일단 컴퓨터부터 치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치울까 하다가, 그냥 내일 서하 씨가 출근하면 능력으로 치워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그쪽이 좀 더 좋을테니까. 물론 귀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그래도 이런 일이라도 시켜야 해. 그 사람은..
"마음에 드시면 한 잔 더 할래요? 건강즙? 상당히 많은데. 후훗"
그와는 별개로 잘 마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앞으로 신작이 나올 때마다 주 씨에게 바로 가져와서 먹게 하면 될까?
대충 눈치챈 분들은 눈치챘을 거라고 보지만... 서하가 성류시로 내려온 원인이자 서하가 다른 이들 모르게 기밀로서 하고 있는 일이 가벼운 사안은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일단 사람을 시켜서 감시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하의 행동은 그냥 다 다이렉트로 보고 되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렇기에 그 상사가 아실리아를 의미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고요. 물론 서하에게 있어서는 바로 권총을 뽑아들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긴 했지만요.
이번에도 묵묵하게 유혜의 말을 끝까지 모두 들었다. 유혜를 흘깃 바라보고는 주머니속에서 한 손을 꺼내 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녀가 캔을 비웠음을 알고. 내용물 없이 달그락거리는 캔의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귀도 밝아라. 마침, 그가 앉은 쪽의 벤치 끝에 친절하게도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름대로, 막 해결된 사건과 관련된 동료에 대한 배려인가보다. 아니, 근데 배려를 하려면 같이 어딘가를 갈 때 잠시 기다려주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순이 있는 법입니다. 모순 없이 완벽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죠. 설마 복사기 누님은 자신이 기계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까?"
선명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면서 유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누님의 판단은 말이죠, 상황을 제대로 고려한 지극히 융통성 있는 판단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살인이 나쁘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사고도 평범합니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요."
끝에 잠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때 한올을 체포하는 유혜에게 보였었던 적 있던, 소탈한 미소. 이내 그 미소는 지워졌지만. 유안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그 무표정에 비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누님이 반대로 저에게 물어보실 건 없습니까? 기브 앤드 테이크입니다. 공평하게. 어차피 예전에 과거도 말했는데, 더 숨겨서 득볼 것도 없고."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캔과 함께 고맙단 인사를 건넨다. 오늘따라 폐가 되는 행동만 하는 거 같다는 느낌에, 유혜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손을 꼼지락 거리다가 미니 초코바 하나를 유안에게 건네준다.
“ 자, 이건 유안씨한테 고마워서 주는 거예요. “
다시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유안을 보더니 유혜가 옅은 웃음을 짓는다.
“ 복사기 누님이라 부르면서, 기계가 되고 싶냐는 질문은 안아울려요. “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던 유혜가 ‘ 아. 별명이 마음에 안든단 이야기는 아니에요. ‘ 라는 말을 덧붙여낸다. 진솔한 이야기를 한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을 더듬어도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익스퍼가 된 날 이후로부터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리도 진솔히 내 마음을 털어놓았던 일 말이야.
“ 그렇네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다짜고짜 목부터 조르던, 메치던 했겠죠. “
이제는 제법 농담을 곁들일 여유가 생겼는지, 유혜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래도 다행이네, 극한까지 내몰리기 전에 뒷걸음질을 칠 수 있어서. 그녀가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들며 생각했다. 잠깐 유안의 미소가 스친 듯 했지만, 또다시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캔을 받아 쓰레기통으로 가볍게 던졌다. 총기류가 아닌 이상 명중은 자신없는데, 다행히 들어가주었다. 귀찮게 일어나서 다시 주워넣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유안은 안도의 한숨을 옅게 쉬었다. 그러다가 유혜가 고마워서 주는 거라며 미니 초코바를 하나 건네왔다. 멍청한 표정으로 잠시 초코바를 응시하다가 숨을 내쉬며 방금 캔을 버린 손으로 받았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그 복사란 걸 필사로 했죠. 그 점에서 아날로그와 관련 짓죠. 뭐, 사람은 복사하지 못했지만."
무게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헤의 농담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방금 받은 초코바의 포장을 벗겨서 드러난 간식을 입안에 넣는 것이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리고, 유혜의 질문이 왔다. 다 듣자마자 유안은 난데없이 "아, 초코바가 질기군요"라는 투덜거리는 말을 나지막히 흘렸다. 설마, 이런 질문이 올 줄이야. 초코바를 씹으면서 이마에 손바닥을 짚었다. 스스로에게 모진 이유라. 난감한 기색을 잠시 무표정에 비추었다. 이건 숨기려고 했는데 답하게 됨으로써 보이는 기색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하는 거지ㅡ에 가까웠다.
"...누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아니, 사실 제 자신의 일부가 싫습니다."
아까 유혜에게 진지하게 달변으로 말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릿한 말투였다.
"무엇만 하면 부정적으로...포기부터 하려는 제 자신의 일부요. 그 일부는 사람도 싫어하고 자신도 싫어합니다. 엄청나게요."
이마에 대던 손바닥을 떼었다.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사실, 저는 언제나 제멋대로인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그 사건 이후로, 방금 말씀드린 그런 일부가 저에게 생긴 것이죠. 거만했던 저는 그 일부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부를 혐오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이중인격 같다.
"웃기는 일이죠. 일부는 자신을 싫어했고, 본래의 자신은 그 일부를 또 싫어했습니다. 스스로를 좋게 대할 수 있을리가."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표정은 씁쓸했다.
"...저도 스스로가 확실치 않은 사람입니다. 본래의 저와 그 일부의 생각은 언제나 부딪치죠.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아, 설명하기 참 어렵군요ㅡ투덜거리면서 하얀 김을 지켜보았다. 초콜릿은 맛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유안주도 머리 아팠다... 어쨌든 비설 하나 더 풀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