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는 덤덤하게 목표를 이룬 소감을 말했다. 요컨대, 이루면 정말로 행복할 줄 알았는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허탈하다는 것이다. 유안은 여전히 외투 주머니속에 손을 넣은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유혜의 과거를 들었을 때처럼.
"목표가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죠, 앞서 정한 목표를 이루어버렸는데. 줄곧 바라보아온 목표가 사라져서 마음이 허탈하다면, 목표를 이룬 다음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기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십시오.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이를테면 좀 더 자고 싶다라든지?ㅡ라고 무게없는 말을 덧붙인다. 아까 달변으로 잘 이야기했으면서 꼭 마지막을. 그런데 역시 이상하다. 다시금 남의 일에 관심을 두는 자신의 모습이. 역시 공존이란 건 힘드네, 라고 할까.
어느새 자판기 앞에 도착했고, 유혜는 무엇을 먹을 거냐면서 유안을 바라보았다. 유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늘 먹던 것으로 먹어야겠다는 말에 그제서야 유안은 그녀를 옆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였지만. 곧바로 자판기로 다시 시선을 향한 후, 잠깐 고민하다가 그는 팀원들에게 간혹 가다 드물게 보인 답지 않은 친절을 이번에 다시 보이기로 하였다. 묵묵히 천원을 하나 꺼내 지폐 투입구에 넣었다. 눈앞에 보이는 빨간 빛을 응시하다가 초코우유캔 아래 버튼을 천천히 눌렀고, 저번과 같은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들리는 캔이 떨어지는 소리에 몸을 굽혀 캔을 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걸 유혜에게로 건넸다. 고개를 돌려 옆눈이 아닌 형태로 유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표정이었다.
"자, 복사기 누님이 늘 드시던 것입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능청스러운 느낌이 살짝 드니, 어딘가 시치미를 뚝 떼는 분위기가 섞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근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까 봤을 때보다 좀 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목 마르다고 한 건 누구였더라. 유안은 아무런 음료도 사지 않았다.
소리까지 지르며 화를 내니 조금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아니아니, 나도 하윤 선배의 말에 동의하고 있고 어째서 화내는 지도 이해 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이란게 우스울정도로 허무하고, 나도 부정하고 싶지만 뼈저리도록 깨닳고 있으니까. 정작 내 목숨은 질겨서 문제였지만.
뭐 어찌됬든 나는 죽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 일로는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기에 별 생각없이 말을 내뱉은 것 뿐이였지만, 평소에도 팀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하윤 선배는 그런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에게 쏟아내는듯 한 잔소리들을 얼버무리듯이 일부러 단순하게 대답한다. 걱정할만한 말은 삼가하고.
"...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해요."
몇번이나 괜찮냐고 되묻는 말에 다시 정만 걱정이 많은 아가씨이구나,라 생각한다. 나는 괜찮다는 것을 확신 시켜주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유안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유혜가 대답했다. 어쩐지 한결 가벼워진 거 같기도 하고,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쩐지 안심한 거 같기도 하고. 무어라 말하긴 힘든 감정이었다. 여지껏 불쌍한 아이라 스스로를 유폐 시켜놓고, 이제서야 햇빛을 바라 본 기분이었지. 그 햇빛에 눈은 많이 아팠지만.
“ 그걸 기억해주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음료는 제가 사도 되는 건데...., 유안씨는 안드세요? “
유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캔을 받아든다. “오늘은 지폐가 먹히지 않았네요?” 라는 농담 아닌 농담도 곁들이며, 유안이 걸터앉은 벤치에 앉아 유안이 뽑아준 초코우유 캔의 입구 부분을 천천히 개봉한다. 유혜는 초코우유를 한두 모금을 마시고 난 뒤에야,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고요를 떨쳐낸다.
의외로 튼튼하다는 그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쉴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냥 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정리는 정리대로 해야할 것 같고... 시말서는 시말서대로 쓰는 것이 좋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책상 서랍에서 시말서 서류를 가지고 온 후에 주 씨에게 내밀었다. 일단 괜찮은 것은 괜찮은 거고, 서류는 서류니까.
"시말서 작성하세요. 다음부터는 좀 더 주의하고요. 일단 책상과 컴퓨터는 나중에 치우도록 할게요."
다른 쪽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우선 주 씨에게 시말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일단 주 씨의 책임이긴 하니까 그에 대한 시말서는 쓰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룰이고 법칙이고 규율이니까. 그런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법이니까.
"...쓰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가르쳐줄테니까요. 그리고... 건강즙 하나 드릴까요? 기운 내라는 의미로 말이에요."
이제 화내는 것은 끝내고 싱긋 웃으면서 주 씨를 바라보았다. 너무 화를 내도 좋지 않을테니까. 그렇기에 이번에 새로 만든 건강즙을 하나 대접하는 것은 어떨까 싶어서 주 씨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싫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몸에 좋은 것을 먹게 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편안하고, 위기가 없는 일상.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 정녕 그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나. 이제는 죽고 싶을 정도의 악몽에 시달릴 일도, 그 남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할 일도 없는데.
“ 그런가요? 뭐, 그럴 수도 있죠. “
캔 안의 우유가 찰랑인다. 그녀는 절대사절이라는 그의 말에 다시금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캔을 입가에 가져가 몇 모금을 더 마셔낸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초콜렛이나 사탕을 도통 먹질 못했네. 유혜가 왼편 주머니에 들어가있는 왼손을 꼼지락 거리며 생각했다.
“ 귀신같아라. 숨기면 나중에 마음이 걸리적 거릴 거 같아서요. 뭐, 유안씨가 한 말이 맞았죠. 결국에는 내 안위가 우선이었어요. 막상 죽인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워지는 거예요.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저지르고 남들에게 어떤 시선으로 보일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뭐 그런 게. “
그녀는 늘 제 입으로 말했다. 범죄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범죄자는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지금 와서 보니, 제 신념이 꺾인 것보다도 주변인에 대한 눈치를 더 보는 그녀는 참으로 미련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고. 지금은 그녀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 뭐..., 사실 유안씨가 그렇게 말하고 엄청 찔렸어요. 보통 사람들의 사고라 얘기해줘서 고마웠고. “
어느새 캔은 다 지워져 달그락 거리는 빈 캔이 되어있었다. 굳이 음료를 다 마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쥐어진 캔은 변함이 없다.
안색이 안 좋아보인다는 말에 아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역시, 지금 좀 상태가 심각한가. 하기사 요 근래들어 잠을 통 자질 못 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뭐, 이 과한 다크서클의 원인은 비단 수면부족뿐은 아니었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쉬지 않고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언제라도 쉬이 익숙해지질 않아 속이 뒤집어지기 십상인데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두통은 가뜩이나 너덜너덜한 정신에 스트레스를 한 바가지 더 들이붓는것과 같았다.
" 안색.. 불면증이. 그러니까.. 잠을 잘 못, 자서. "
그나마 요즘에는 스트레스를 이전보다 잘 해소하면서 산다는 게 다행이지. 주위 환경이, 사람들이, 조건들이 바뀌어가면서 아실리아 또한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좁게는 연애에서부터 외출, 넓게는 타인과의 전체적인 관계의 형태가 나쁘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야금야금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아직까진 썩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었다만. 하여간, 아실리아는 예상치 못한 반격이 들어오자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탓인지 뭔지 정신이 살짝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든 데다가, 그 때문에 방금 전 자신이 반쯤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의식한 아실리아는 괜히 제 책상 위를 뒤적거리며 서하의 시선을 은근히 회피했다.
" 으음.. 서류, 서류.. 있었나. 아마 있을 텐, 데. "
조금 민망했던지 아니면 괜히 부끄러웠으리라. 그래도 나름 사귄 기간이 되는 편인데, 아실리아는 아직도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가 잦았다. 좋지만 떨리고, 동시에 조금은 어색한것일까.
" ....어쩌면 그럴, 지도..? 서하는? "
서하도 아쉬웠어? 하고 묻는 아실리아의 고개는 여전히 책상 위를 향했지만, 눈은 이따금씩 살짝 방향을 틀어서 눈치를 보듯 서하를 쳐다보기도 하였다. 와중에 결국 서류를 찾아내기는 했는지 얇은 종이 몇 장을 손에 쥐고 말이다.
"...불면증이라. 그런가. 여러모로 힘들겠네. 정 힘들면 얘기해. ...휴가 정도는 낼 수 있게 해볼테니까. 그것도 못해줄까."
잠을 잘 못 자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아실리아의 연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정도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계급이 높은 건 아니니까 더 크게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묘하게 쓰리다고 느끼면서 다시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마셨다.
그와는 별개로 나의 반격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에 대해서 아실리아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정말 귀엽다니까.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건지... 작게 피식 웃으면서, 내 시선을 회피하며 서류를 찾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커피를 마시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초에 서류를 정말로 찾는 것보다는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까? 이어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아무런 말 없이 커피를 다시 마셨다. 그리고 목구멍 속으로 그 달콤하면서도 쓴 내용물을 꿀꺽 넘긴 후에 아실리아를 빤히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아쉬운데. 난? 고백할 때 아실리아, 네가 말했었나? 집착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서 말했지. 아마. 어쩌면 내가 더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래. 많은 아쉬움을 느껴. 나는 말 돌리는 것을 귀찮아서 잘 못하니까 언제나 직구야. 하지만 일은 해야하니까 참는거지.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나에게 있어선 그나마 나쁘진 않은 밤이야. ...뭐, 일단 귀찮은 질문이 싫어서 하윤이나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고, 일할 땐 이전처럼 하고 있지만, 너하고 사귀는 사이인 것은 변함 없으니까."
정말로 태연하게 이야기하면서 마저 커피를 다 마시고, 그 캔을 근처의 쓰레기통으로 전송시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실리아를 바라보면서 손에 쥔 종이, 그리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이야기했다.
"...눈치 볼 건 없지 않아? 아니면 부끄러워? ...그럼 어쩌면 좋을까. 부끄럽지 않게, 익숙해지게 해주면 좋을까?"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면서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직장에서 너무 그럴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다들 맛이 없다고 기피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먹어보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 달콤한 맛도 있고, 톡 쏘는 맛도 있으니까. 설사 맛이 없어도 몸에 좋은 것은 맛이 없고 쓰다는 말이 있다. 그런 원리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데, 무조건 다들 맛이 없다는 색으로 생각하니... 그것은 다 편견이야! 편견! 아무튼 주 씨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시말서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말서 많이 썼다는 말. 적어도 경찰서 내에서는 자랑은 아닌데 말이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랑스럽게 할 말이 아니잖아요. 주 씨.
"일단 선배로서 말을 하자면 경찰이 시말서 많이 쓰는 것은 전혀 자랑스러운 말이 아니에요. 공무원이 시말서를 많이 쓰게 되면 잘못하면 월급 깍일수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선 쫓겨날 수도 있고요. 괜히 공무원이 연급 확실하게 보장되는 거 아니에요."
그만한 의무도 필수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또 경찰이니까. 그러니까 행실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일단 컴퓨터부터 치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치울까 하다가, 그냥 내일 서하 씨가 출근하면 능력으로 치워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그쪽이 좀 더 좋을테니까. 물론 귀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그래도 이런 일이라도 시켜야 해. 그 사람은..
"마음에 드시면 한 잔 더 할래요? 건강즙? 상당히 많은데. 후훗"
그와는 별개로 잘 마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앞으로 신작이 나올 때마다 주 씨에게 바로 가져와서 먹게 하면 될까?
대충 눈치챈 분들은 눈치챘을 거라고 보지만... 서하가 성류시로 내려온 원인이자 서하가 다른 이들 모르게 기밀로서 하고 있는 일이 가벼운 사안은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일단 사람을 시켜서 감시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하의 행동은 그냥 다 다이렉트로 보고 되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렇기에 그 상사가 아실리아를 의미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고요. 물론 서하에게 있어서는 바로 권총을 뽑아들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긴 했지만요.
이번에도 묵묵하게 유혜의 말을 끝까지 모두 들었다. 유혜를 흘깃 바라보고는 주머니속에서 한 손을 꺼내 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녀가 캔을 비웠음을 알고. 내용물 없이 달그락거리는 캔의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귀도 밝아라. 마침, 그가 앉은 쪽의 벤치 끝에 친절하게도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름대로, 막 해결된 사건과 관련된 동료에 대한 배려인가보다. 아니, 근데 배려를 하려면 같이 어딘가를 갈 때 잠시 기다려주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순이 있는 법입니다. 모순 없이 완벽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죠. 설마 복사기 누님은 자신이 기계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까?"
선명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면서 유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누님의 판단은 말이죠, 상황을 제대로 고려한 지극히 융통성 있는 판단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살인이 나쁘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사고도 평범합니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요."
끝에 잠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때 한올을 체포하는 유혜에게 보였었던 적 있던, 소탈한 미소. 이내 그 미소는 지워졌지만. 유안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그 무표정에 비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누님이 반대로 저에게 물어보실 건 없습니까? 기브 앤드 테이크입니다. 공평하게. 어차피 예전에 과거도 말했는데, 더 숨겨서 득볼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