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자신이 무모히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유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옅게 띄우면서, "미담이군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시피 대답하였다. 유안은 미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다소 거만한 지적에 대답하는 유혜를 무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까 보인 미소와는 상반되는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이런 모습에 실망했냐고 마무리 짓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묘하게 자포자기한 것 같은 모습이, 순간 누군가와 겹쳐보였다.
"실망이라기보단, 지극히 일반적인 사고라고 생각합니다만."
눈을 잠시 반쯤 감으면서 예전에도 말했었던 것 같은 말을 낮게 읊조렸다. 살인 앞에 선 인간은 모두 그래야 정상이에요ㅡ차분하고 선명한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에 덧붙였다ㅡ설마, 살인을 냉정하게 하는 자신을 바랐던 겁니까?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목소리에는 묘하게 단호한 분위기가 서리는 듯했다. 그런데, 이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니까 우습기도 하다. 스스소를 향한 조소를 터뜨릴 뻔하였다.
유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듯이 또는 유혜가 뭐라고 말할 시간을 주듯이, 잠시 그대로 침묵을 지키다가 계단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무게 없는 분위기로 말했다.
"아, 목이 말라오는군요."
뭔가 말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목이 마르다는 것이.
"근처에 자판기가 있던데, 일단 그곳으로 가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눈치 같았으며, 실제로 유혜에게서 '이유'을 자세히 듣지 못했다.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걸까. 그나저나 이 말에 묘한 설득력이 느껴지는 것은 뭐지, 기분탓인가. 아무튼 신입인 지은에게 참 좋은 것을 가르쳐주는 유안이었다. 한편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으면서 지금은 밝게 다가오는 지은의 모습에 유안은 다시금, 그녀를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 인식하였다.
그리고 찾아온 질문과 답변 시간. 이런저런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데도 일반 시민들이 용케도 익스퍼에 관한 걸 모른다는 지은의 떠보듯 하는 물음에 사이다를 작게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요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펜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 같더군요. 그 사람들이 시민들의 익스퍼에 관련된 기억을 지우는 겁니다. 그리고 한편, 커다란 사건일 경우에는 리크리에이터라는 마찬가지로 이상한 장치가 작동하는 듯합니다. 작동하면 빛이 나고 음악소리가 들리는데, 이 또한 익스퍼 관련 기억을 지우죠."
연설조로 선명하지만 차분하게 말하고는 조금 과장스럽게 두 팔을 살짝 벌렸다. 그러고는 무표정인치 덧붙였다.
"덕분에 많은 일반 시민들은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품속으로 파고든 당신의 온기가 점점 퍼져나갔다. 따스하고, 작다. 품에 파묻히다시피 안긴 당신이 마냥 사랑스러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황홀한 기분에 몸을 맡겼다.
"응, 그러게요."
바람이 스쳐지나간 뺨에 당신의 뺨이 닿자 잠시 놀란다. 부드러운 감촉이 마냥 낯설다는 듯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둔 뒤 눈을 깜빡이고, 정신을 차린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은 내가 방금 어디에 다녀왔을지 모를거예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어쩌면 들릴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볼을 부비고, 손으로 볼을 쓸어주다 조용히 고개를 떼고 당신을 쳐다본다. 복사꽃이 핀 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대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 당신의 눈에 자신을 담았다. 나도 당신을 담을테니, 당신도 나를 담아주시겠나요?
"..응?"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시간 멍하니 당신을 바라본 로제는 조용히 눈을 굴렸다. 주여, 저를 보살피소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작은 여신이 어찌 이리 자신의 마음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는지. 이성과 본능, 그리고 아득한 벽을 넘어 스레의 제한까지 떠올린 그는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침묵을 지키더니 당신을 품에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휠체어를 끌었다. 그래, 이성이 승리했다.
"물론이죠, 안 그래도 늦은 밤이라 위험할까봐 자고가라 하려고 했어요."
누나는 작고 사랑스러워서 누가 납치할지도 모르잖아요. 라고 덧붙이며 당신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아, 정말이지. 찬미할 나의 작은 여신아.
다크서클이 한층 더 심해져 퀭한 눈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창백한 얼굴색은 그나마 좋게 비유하자면 팬더(...)요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 보자면 그냥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불면증 환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여간, 약간 어지러운 시야를 무시한 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곧 제 자리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두통 탓에 반사신경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뎌졌는지, 아실리아는 그마저도 조금 늦게 인지했다는 마냥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겨우 확인했다. 그리곤 뻑적지근한 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문득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 나 말고 누가, 당직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서하였구나.. "
글쎄. 이런 건 오히려 다행인걸까. 아니면.. 몽롱한 정신은 곧잘 사고를 흐려놓았고, 피곤한 눈은 오늘따라 유독 건조했더랬다. 이에 아실리아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서하가 내려놓은 버터쿠키 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나도 하루, 잘 부탁해요. "
집에 가도 잠을 자지 못 하는 건 같았으니, 기실 아실리아에게 있어서 당직과 귀가의 차이는 그 못 자는 시간동안 일을 하느냐 아니면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직 자체에 피로를 안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서도. 일단 아실리아 또한 사람이었기에 일을 하면 피곤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다크서클이 심해진 것에 일 탓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네.
아무튼 잠시동안 조용히 서하를 응시하던 아실리아가 앉은 채로 의자를 끌어서 서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그대로 툭 떨어지듯 기대더니 서하의 허리를 살짝 껴안았다가 풀고, 도로 의자를 뒤로 당겼다. 순식간에 지나간 스킨십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당신도, 라는 말에 느릿히 두 눈을 감았다 뜨던 유혜가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확신이 없는 사람이던가- 미안하지만,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유안의 시선 끝은 창문 밖 노을을 향하고 있었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짧았다. 이제 곧 어두운 어둠이 찾아올테고, 즐기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으니 말이지.
“ 그런가요? 이참에 제가 유안씨한테서 빚을 하나 만들어 두려 했는데. “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유혜가 대꾸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코트 양 주머니로 손을 찔러넣고는 묵묵히 걸음걸이를 옮기는 모습이, 참으로 미련하다.
“ ...글쎄요, 나는 처음에. 이 순간이 온다면 정말로 행복할 거 같았는데, 정말 이제 동화가 끝나듯 내 인생도 ‘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될 거 같았는데. 아니더라고요. “
덤덤한 목소리가 공기중으로 녹아들었다. 창 밖에 비친 어두운 하늘은 어딘가 우울했고, 아름다웠다.
“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기분? 뭐 그렇네요. 그냥... 처음부터 이런 목표 같은 거, 가지지 말 걸. 마음은 허한데 어딘가 답답하고... 뭐, 그래요. 유안씨는 뭐 드실거예요? 나는 늘 먹던 걸로 먹어야지. “
어느새 자판기 앞으로 다다랐다. 유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자판기를 쓱 훑어보더니 생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를 바라본다.
"...그래? 뭐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어차피 내가 기억하니까 문제는 없고. 그것보다 괜찮아? 안색 안 좋아보이는데."
퀭한 눈과 창백한 얼굴색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즘 들어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실리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은 느낌의 얼굴이었다. 아니면 피로한 일 때문일수도 있고... 물론 경찰에게 있어서 이런 피로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그녀는 동료 이전에 연인이기도 하고...
일단 잠을 깨기 위해서 손에 쥔 커피 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추운 겨울엔 캔커피가 최고지. 입 너머로 꿀꺽, 달콤하면서도 쓴 맛을 넘기는 도중, 갑자기 허리가 끌어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실리아 쪽을 바라보니, 아실리아가 내 허리를 끌어안다가 푸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조용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커피를 근처에 책상에 올렸고, 근처에 주인없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서 근처에 앉았다. 일단 익스파 탐지기는 일이 생기면 바로 경보가 울리게 되어있으니까 문제는 없고, 당직은 어디까지나 갑자기 사태가 벌어질 때 그 사태를 체크하라는 의미에서 서는 거니, 경보가 울리기 전엔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 것은 일단 조용히 넘기고, 아실리아를 더 빤히 바라보다가 의자의 바퀴를 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고, 손을 뻗어 앞머리를 튼 후에, 그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살짝 맞추고 떨어뜨렸다.
"...뭐하는건진 모르겠지만, 반격이야. ...끌어안고 싶으면 안으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일도, 경보가 울릴 때 확인하면 되는 정도이고... 뭐, 낮에 미처 다 못한 일을 하는 것 뿐이고... 문제 될 거 없잖아? 아니면 해야 할 서류 남아있어? 있으면 나눠줘. 도와줄테니까. ...후딱 처리하고 조금 쉬자. 어차피 잠 못 자고 밤을 보내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적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서류를 보거나 탐지기를 보는 것보다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도와주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적어도 난 그리 생각하기에 아실리아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유혜는 덤덤하게 목표를 이룬 소감을 말했다. 요컨대, 이루면 정말로 행복할 줄 알았는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허탈하다는 것이다. 유안은 여전히 외투 주머니속에 손을 넣은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유혜의 과거를 들었을 때처럼.
어느새 자판기 앞에 도착했고, 유혜는 무엇을 먹을 거냐면서 유안을 바라보았다. 유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늘 먹던 것으로 먹어야겠다는 말에 그제서야 유안은 그녀를 옆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였지만. 곧바로 자판기로 다시 시선을 향한 후, 잠깐 고민하다가 그는 팀원들에게 간혹 가다 드물게 보인 답지 않은 친절을 이번에 다시 보이기로 하였다. 묵묵히 천원을 하나 꺼내 지폐 투입구에 넣었다. 눈앞에 보이는 빨간 빛을 응시하다가 초코우유캔 아래 버튼을 천천히 눌렀고, 저번과 같은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들리는 캔이 떨어지는 소리에 몸을 굽혀 캔을 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걸 유혜에게로 건넸다. 고개를 돌려 옆눈이 아닌 형태로 유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표정이었다.
"자, 복석늘 드시던 것입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능청스러운 느낌이 살짝 드니, 어딘가 시치미를 뚝 떼는 분위기가 섞인 것 같았다.
타미엘-TO: 삶에 대한 의욕이 있을 리가..분명 경찰이 되고 싶어했지만.. 그런 것도 이젠 의미없고.. 분명 좋아했고, 그래서 헤어진 건데 이런 끔찍한 짓이나 해대고.. 진짜... 죽고 싶다..(울먹) 타미엘주: 기억/감정 동기화가 망해서 너무 격차가 커버린 탓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