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심호흡에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솔직하게,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나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내뱉을지,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지. 웃기는 일이었다. 그는 나의 존재 자체를 모를텐데. 왼편 어깨가 또다시 아려왔다. 아, 흉터 지울 걸. 작은 후회는 당신의 그림자로 드리운다.
두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뜨거운 불로 감싸오른 성류시가 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불에 타오르는 커대란 백화점이- 아, 그러니까. 아냐, 당황하지 마. 아니야, 이건 그냥...
숨이 가빠졌다. 어쩌면 누군가가 이상함을 눈치 챌 지도 모를 정도로, 규칙적인 호흡은 어딘가 흐트러져 들쑥날쑥, 꾹 깨문 아랫입술은 곧 피가 터져나올 듯 붉어진다. 아직 나는 십년 전의 나를 내치지 못했구나, 다시금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뜨자 호흡이 진정 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은 문제 없어. 그녀는 백화점에서 내려오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흐렸다. 진정 되지 않는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쳤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감정이 조금도 실려있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으면서 유안은 한발짝 앞으로 갔다. 표정 또한 차가웠다. 사내의 모습에서 어쩐지 광기가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만약에 맞다면 유안이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 중 하나에 들어간다. 광기어린 사람. 아니, 애초에 살인범이군.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이 불바다가 당신의 소행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순순히 투항할 기회를 한 번 드리겠습니다."
열기 탓인지 불꽃 탓인지 눈 앞이 상당히 산란했다.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솟고, 광장과 백화점은 이미 불바다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 그리고 그 아비규환 사이로 보이는 한 남자를 쳐다보며, 아실리아는 조심스레 테이저건을 쥐었다. 분명, 전에 한 번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지.
일단 준비는 끝마쳤고. 전송된 곳에서 바라본 광경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일 한번 크게 벌리시는구만. 왜, 아예 초열지옥이라도 만드시지. 그런 빈정거리는 생각을 하며 아파오는 뒷목을 주무르던 로제는 렛쉬가 크게 짖자 그쪽을 본능적으로 바라보았고, 따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에 쥐고있는 귀금속을 보곤 표정을 구겼다.
"당연히 움직이겠죠. 그렇게 여유로운 나들이를 하고 계시는데."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은 없나? 자신이 가야하는 상황은 아닌가? 남성보단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했다.
테이저건을 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 동료들의 반응에 슬그머니 내린다. 잘근 입술을 깨물곤, 뒤로 불타는 건물을 바라본다. 늦기전에 끌 수 있을까 몰라. 내린 테이저건을 다시 겨눈다. 상대가 뭔가 할 조짐이 보이면 바로 쏠 수 있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사내의 등장. 그 모습은 당연히 사무실에 있는 서하와 하윤에게도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서하는 빠르게 사내의 데이터틀 데이터베이스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서 통신을 보냈다.
"...이름은 최한올. 나이는...10년전 기준으로 28살이고, 10년전 기준으로 랭크는 A. 능력은 버닝 스플래시. 열기를 주변으로 퍼뜨리는 능력인 것 같아요. 다만, 퍼뜨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 것 같은데...일단 매우 위험한 능력이라고 하니, 모두들 조심하세요. 함부로 다가서지 말고..."
모두에게 사내에 대한 데이터가 전달되는 것과는 별개로 한올은 아롱범 팀 멤버들을 나른하게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건물로 뛰어가려는 이도 있었다.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그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탁탁, 마치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모션을 보였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와 사이에서 붉은색 스파크 같은 것이 튀었고, 동시에 타오르고 있는 백화점에서 아주 큰 폭발이 일어났다.
"...투항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건 해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경찰 나으리~"
다시 한번 그는 오른손으로 그런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백화점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서 백화점은 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이어 백화점의 잔해는 다시 한번 크게 터졌고..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버렸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이제 와선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소멸하듯이 사라졌으니까.
"왜..했냐라...그야 귀금속은 비싸고... 이렇게 힘으로 차지하는 쪽이 더 편하니까..? 후후후..."
참으로 나른하면서도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면서 그는 손에 쥐고 있는 귀금속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렛쉬는 정말로 크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그 모습의 렛쉬를 바라보며 한올은 피식 웃었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때 본 그 개였나? 아직 살아있었나? 크크큭... 좋네. 좋아. 이번엔 잡아다가 술 안주로 삼아볼까? 아니면..일단 이 경찰들과 놀아볼까? 당신들이 그 익스레이버 아롱범 팀인지 뭔지 하는 이들이야? 레드....뭐였지? 아무튼 그런 느낌의 애들이 당신들을 조심하라고 했는데..고작 경찰 따위를 조심해야할 필요가 어디있어? 범죄라도 저질러서 크게 날뛰어달라고 했는데..눈치보는건 싫거든. 그래서 당신들도 볼겸 해서 한번 이렇게 해봤어? 어때. 이러면 100% 올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크크큭.."
참으로 광기 가득한 목소리 속에서 그는 씨익 웃으면서 모두를 바라보면서 도전하듯이 이야기했다.
세 글자가 입 안을 맴돈다. 10년 그는 스물 여덟이란 나이었다.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그 끔직한 짓을 저지르고 저렇게 멀쩡히 살아있었다. 이건...,
“ 불공평해. “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인상을 찌푸리던 유혜가 작게 중얼였다. 큰 폭발에 무너져내린 백화점을 보며 마음이 울렁이길 몇 분, 심호흡을 반복하던 그녀가 입을 떼낸다.
“ 하윤씨. 저 백화점에, 사람이 있었나요? “
떨리는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눈은 그 남자를 쫓고, 머릿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저 역겨운 목소리를 듣고만 있을 이유 또한, 없었다. 당장 테이저건을 집어든 유혜가 그 남자를 노려본다. ...쏘아야할까, 아니면... 테이저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과거의 어린아이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복수의 칼을 다잡고 있었을까.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눈 앞은 불 타는 성류시가, 그리고 잠깐 죽어가는 아버지가. 그리고 다시 불타는 성류시가, 그리고 다시 불바다가 되어버린 백화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