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네요. 절 보고 싶어한 아이들이 있다니. 앞으론 더 자주 올게요. 더 자주 와서, 희야 오빠도 보고 이 아이들도 보고. 꼭 그럴래요."
그녀는 그리 말하곤, 주위를 가만히 살피다가 언제나 여기에 있다는 말을 다시 떠올리곤 말합니다.
"저도 언제나 이런 평화로운 곳에 있고 싶지만... 그건 역시 힘들까요. 저는 이단심문관, 이니까... 원래대로였다면 환상종인 희야 오빠랑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안돼는 거였겠죠?"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한숨을 쉬고는 바람을 손에 쥐어 보려는 듯이, 잡히지 않는 바람결을 제 손에 담아 보려는듯이 손을 살랑, 또 살랑살랑 공중에서 천천히 젓는다. 앞으로는 이 곳에 더 자주 와야겠다, 역시. 이렇게 따뜻하고 온화한 자연이 날 맞아주는데, 오지 않을리가 없는걸. 이런 평화가 난 너무나도 좋은 걸. 그러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시이가 일을 하다 지쳐버리면, 평범한 10대 소녀로서의 시이로 이 곳에 오는거야.
희야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느샌가 제 주위로 날아온 노란 나비를 바라보더니, 다시 제 옆에 앉은 시이를 바라본다. 희야는 시이의 말에 두 입술을 앙 다물었다. 다만 지그시 눈을 감고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그렇게 무거운 침묵을 흘려보낸 뒤에야 천천히 입술을 떼내고 만다.
“ 어쩔 수가 없으니까, 넌 인간이고 나는 환상종 이니까... “
내가 외치는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 표면적인 평화라면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나는 모두의 화합을 바란 거였는데, 이 꽃과 나무들처럼 공존하기를 바란 거였는데..., 희야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알겠지, 이 상황의 해답을.
“ 하지만, 너는 나를 환상종이 아닌 친구로서 대해주고 있잖아? 그거면 되는거야. 우리는 모두 같은 소중한 생명이고, 너와 나는 친구이니까... “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평화와, 네가 바라는 평화. 달콤하고도 씁쓸한 목소리가 희야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희야는 그저 커피의 뒷맛같은 미소로 당신을 위로할 뿐이었다.
“ 요즘 안좋은 일 있었어? 얼굴이 안좋네. “
느릿한 말투, 희야가 아까와 같은 흐릿한 미소 아래에서 방금 자라난 꽃 몇송이를 내밀었다. 각각의 아름다움이 생생한 꽃은, 생명을 머금고 있었다
희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느릿한 목소리 사이로 희야의 흐릿한 미소가 엿보일지도 모르겠다.
“ 응, 그렇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들의 싸움에 말려든 우리는 아무리 애를 쓰고 죽을 만큼 싸워도 승기를 잡지 못 할 것이란 생각이. 그렇게, 체스판에 선 말들과 같이 제 몸을 버리며 주인을 위해 헌신하다 박스 안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버릴 거란 생각이. 아, 잔인하신 분들이여. 그 누구도 승기를 잡지 못할 싸움을 이기기 위해 악을 쓰는 어린양들이 보이지 않으시는건가요.
“ 이런, 불면증? 피로를 풀어주는 풀이... “
희야가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이더니 왼 손을 뻗어, 두 손을 오므렸다 천천히 펴낸다. 새하얀 그의 손아귀 속에는 석창포라는 초록빛 생기를 머금은 풀들이 한움큼 쥐여져 있었다.
“ 베개 아래에 두고 자거나, 차를 끓여 먹어도 좋아. 잠이 잘 오고 마음이 진정되는 풀이야. “
물론, 머리맡에 라벤더 같은 향이 좋은 꽃을 두고 자는 것도 좋아. 희야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 요즘에는 따로 키우는 식물이 있어? “
문득, 처음 만났을 때 시이가 쥐고 있던 화분이 생각났다. 말라 죽어가던 그 아이는, 지금 빛나는 생명을 품고 있겠지. 아릅답게 빛나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의 눈은 인류라는 대국의 정부 사옥이라는 귀티나는 사무실보다 더욱 화려하고 기품 있는 금발벽안의 훤칠한 청년으로 향했다. 이전에 얼추 마주쳤던 때에 비하면 쾌활한 왕자님의 아우라는 조금 덜해졌지만, 자욱한 커피향과 가득한 서류 뭉치를 보고 나서는 더없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레오닉은 자기 앞의 주교를 향해 헬리오스를 신봉한다는 의미의 성호경을 흘리듯이 그었다. 다분히 의례적인 행위로, 그는 신심은 해이함과 성실의 그 사이 어딘가였다.
피곤한 듯 눈가를 비비다가, 하암 하고 하품을 한 번 한다. 그러다가 이내 석창포를 한 움큼 쥐고 있는 그를 보더니 웃는다.
"...네? 아아, 그렇구나... 고마워요. 그러면... 음... 계속 머리맡에 두고 잘래요. 그보다 요즘은 따로 키우는 식물이라... 있어요. 방 안에 화분 투성이인걸요. 헬리오트로프, 개망초, 그리고 딱히 키우는 건 아니지만 제가 사는 곳 근처에 클로버도 있길래 물도 주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