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숲으로 나갔습니다. 날이 오늘따라 좋아서 말이죠. 그렇게 산책하듯 계속 걸었습니다. ...아 물론 혹시 몰라서 무기도 챙겼습니다. 위험한 것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숲을 걷다 보니, 타박타박하는 제 발소리가 아닌 타인의 것이 분명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구..."
누구인가, 싶어서 일단은 스푼을 들었습니다만 그 곳에서 보인 건 분홍빛 머리의 남성입니다. 희야군요. 어릴 적부터 만나온 사람이라서 그럴까 이젠 익숙합니다.
오늘따라 날이 좋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 없이 햇살은 내리쬐고 하늘을 푸르렀지만, 오늘은 참 날이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날이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희야는 오늘도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자신과 같은 환상종들의 하루를 지켜보고 자신의 화원으로 나가 식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똑같이 반복하는 일상은 특별한 사건을 원할 여유 조차 없었다. 그에게 특별한 사건따위는 과분한 사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숲은 희야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나무와 꽃들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늘 그렇듯, 희야는 숲에서 누구도 신경써주지 않는 아름다운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 아, 시이? 오랜만에 온 거 같네. “
너른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희야는 늘 그랬듯 풀밭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이름 모를 꽃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그의 존재를 인정받는 시간이었다. 희야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제 앞에서 스푼을 들고 서있는 시이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38 공적인 자리에서 오빠라 불렸다 희야 : 아니에요... (에오스 눈치보기 참, 시이는 희야가 과거에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나무였고 인간이 된 지금의 나이도 셀 수 없이 많다! 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걸로 할까, 아니면 그냥 잘 몰라서 외모 나이로 때려맞추고 어련히 이십대겠구나~~ 하는 걸로 할까!?
날이 좋은 오늘, 그녀는 희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스푼을 거두곤 희야와 이 자연의 모두에게 웃으며 목례한다. 아아, 오늘도 날이 좋구나. 오늘도 즐거운 날이 될 것 같아.
"나무가 겁먹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건 거둘래요."
시이는 그렇게 말하며 희야의 곁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조심조심 앉았다. 혹시 자연이 내 무게에 아파하진 않을까 조심하며, 나에 의해 깔려죽어버리는 꽃이나 풀잎이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며 앉은 곳은 마침 아무도 다치지 않을만한 곳이었다.
"오늘은 별 이유 없이 그냥 와봤어요. 산책이라고 할까요."
조금 사느랗다 싶은 바람이 부드럽게 살랑였다. 바람도, 날도 좋아서 이대로면 훌쩍-, 어딘가를 떠나가고 싶었다. 내가 있을 곳을 향해 떠나가고 싶어서 온 곳은 언제나 숲이었다. 나는 숲도 바람도 좋았다. 그래서인지 곧고 곱게 뻗은 나무들이 흐드러진 꽃들이 다정하게도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서 와, 라고.
희야가 연한 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그 시선의 종착점은 시이였고, 그는 시선을 다시 제 옆의 나무로 옮기며 다시금 미소를 피워낸다. 오늘은, 드물게도 기분이 좋은 날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일까.
“ 고마워, 이 아이들도 너를 보고 싶어 했어. “
희야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울려퍼져 안개처럼 녹아 내린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자신의 옆에 앉은 시이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자신에 의해 희생되는 자연이 있을까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살풋 미소가 떠오른다. 재잘거리는 웃음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그래, 작게 대답을 중얼이자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 그래?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으니까. “
‘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환상종의 우두머리 ‘는, 그들에게 있어서 별 쓸모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의 눈을 피해 유유자적히 숲에서 자연을 돌보며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평화를 그려내는 것, 그것이 그의 고작이자 전부였다.
“ 앞으로는 더 자주와, 이 아이가 널 보고 싶대. “
손을 천천히 뻗어 제 옆의 풀들을 부드럽게 쓸어내자 곧 아름다운 장미가 몇 송이 피어난다. 희야는 여전히 그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