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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성의없게 느꼈을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이 외에는, 어떤 말을 해주더라도, 저이에게 내가 더 이상의 것을 해줄 수는 없어...
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이상해. 편해 보였는데, 편해 보였는데?
"정..답이라니..."
걸어가고 있는 쪽은 전혀 그와는 거리가 있는 곳인데?
"..이봐요,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쿵, 하는 소리가 문득 들린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니야. 팀원들을 도와야 해. 그런데, 그런데. 왜 몸이 말을 듣질 않는 거야. 아. 나는 후회했다. 떨리는 손목을 붙잡고, 입술을 깨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눈에서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고, 눈물이 어디서 내려오는지도 모르겠는 채로,
잘못을 했어. 아냐,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지만, 저 사람이 원하는 말은 이게 아니었던 거야. 저 사람은, 내가 저이를 살리기 위해서, 뭐라고 말했어야 했나. 몸이 떨려왔다. 괴롭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다고, 이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여기 온 거였는데. 아냐. 나는 살리고 싶었어. 더는 누군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질지 모를 영혼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미, 안.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울먹이는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살아가라고, 살아가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이, 편해지는 것이었다면, 진정으로 여동생을 만나는 것이었다면, 그것만큼 무책임한 소원은 없었다. 죽음만큼 무책임한 소원은 없고, 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말렸어야 했다.
바보같이. 너무, 너무 자유를 줬던 걸지도 몰라. 이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에게. 처음부터 생각해보면, 그의 눈은, 이전의 나탈리처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채였는데. 그걸 모르고, 화가 나서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춥다. 바람이 뼈를 깎는 것만 같다. 일어서지를 못하겠어.
전에 누가 그랬지. 감정에 매몰되지 말라고. 이제 알 것 같다. 감정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 전체 -- 이그니스는 곧바로 날아오는 시현의 총알을 발견했고, 곧바로 불길을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휘둘러 세 발의 총알이 모두 사라지게 해보였다. 그 다음 순간 들어온 히비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그는 이번엔 시현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히비키가 나타나 재빨리 이그니스 쪽으로 물줄기를 날렸고, 그제서야 히비키를 발견한 이그니스는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내쳐보였다. 이후 그는 히비키 쪽을 바라보고 여유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보아하니 당신은 물의 엘리멘트이신 것 같군요. 하지만 물이 불보다 더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니까 뭐하냐니깐?"
그러나 그의 말은 어느새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나탈리에 의해 저지당했다. 나탈리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메이스를 들어 세차게 이그니스 쪽으로 휘둘렀고, 미처 그녀의 공격을 막지 못한 그는 그대로 메이스에 맞아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 드디어 맞췄다, 이 망할 녀석. 하아... 고마워, 히비키..."
나탈리는 주위 상황이 겨우겨우 진정된 걸 확인한 후 히비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격렬하게 싸워본 건 난생 처음이야..."
이후 그녀는 아직 옥상에 있을 에스메랄다에게 음성 메시지로 무언가를 말했다.
"언니, 이제 당분간은 UFE에서 지원 병력 같은 걸 안 줄 것 같으니 한 번 더 주위를 확인해보신 다음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곧바로 아래로 내려오세요. 이제 코어로 향하는 입구만 제대로 막으면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러던 도중 이그니스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가 일어난 걸 발견한 나탈리는 재빨리 경계 태세를 취했으나, 이그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UFE는,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다른 모습으로 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칼립토스, 그리고 코어와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UFE를 벗어난 당신들에겐 더 이상 이런 의무가 남아있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렇게 코어를 여러분들의 손으로 제거하려 하는 것입니까? 코어와 맞서 싸우려 하는... 여러분들만의 이유같은게 있는 것입니까?"
핸드폰이 울리는 것이 주머니 안에서 느껴진다. 나탈리구나. 직감적으로 알았다. 과연 핸드폰에서는 나탈리의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지원 병력은 소강 상태고, 나탈리도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싸움도 멎은 듯하다. 바로 아래로 내려오라고.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만 살짝 끄덕였지만, 나탈리에게 보일 리가 없지. 하지만 나탙리가 제대로 들어야 하니까,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자.
"알았..어요."
잔뜩 지친 듯한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야. 이렇게 걱정을 끼쳐서는 안 돼..., 나는 눈을 들어 옥상을 둘러보았다. 또 옥상에 누군가 올라오려나. 그러진 않겠지. 땀이 식은 건지 싸늘한 기운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끊긴 나탈리의 목소리 너머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다.
코어와 맞서 싸우고자 하는 우리의 이유라구..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였다. 고작 나에게 찾아온 사람 하나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으면서, 호언장담만 해대곤 결국 구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코어를 없애기 위해 여기에 온 이유를, 어떻게 말하겠어.무슨 수로 말하겠어. 나는 당당할 수 없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당당할 수가 없었다. 그를 그런 식으로 보내버리고, 내게 대체 무엇이 남았지.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시야에 나의 벗은 발이 들어왔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 내가 여기에 왔던 이유. 나는 지금 맨발로 서 있다. 어린 시절의 나와 같이. 어리고 순진한 라 에스메랄다, 네가 여기에 있구나. 어느새 훌쩍 자라서,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고, 너 스스로.
나는 다리에 힘을 넣었다. 일어서야 한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해도,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다 해도, 여전히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여전히 한 사람만이라도 살려내기 위해서. 온전히 나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꿈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떨어지려던 공허한 눈을 가슴에 새기고. 마리안느가 내게 내밀었던 손과 푸른 눈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나의 대장, 나의..., 내게 말한 소원을, 나는, 이루어 낼 테야. 나는 살아갈 것이다. 싸워 나갈 거야. 살려내기 위해서,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어디라도, 언제까지든.
틀리지 않은 대답, 이라는 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전히 저이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두드리고 있지만, 그것에 잡혀 나아가지 못한다면 쓰러진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옥상엔 아무도 올라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 팀원들을 찾았고, 팀원들과 마주 서 있던 이그니스의 말이 들려왔다. 가까이 갈수록 확실하게 들리는 그 말은, 패배를 인정..하겠다고. 저 사람의 입에서 패배라는 말이 나오다니. 웃기지도 않네. 이그니스와 엘리멘트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팀원들 사이로 합류하려고 했는데-
능력을 코어에게 다 쏟아붓는다고? 무거운 걸 잡아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후폭풍? 나는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해선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직후 나탈리가 말했다. 아, 별로 나탈리를 무겁다고 생각...바위의 엘리멘트는 단단하지 않나? 아니, 나탈리가 아니라잖아. 도리질을 치며, 나탈리의 외침을 듣자하니 잘못하면 후폭풍에 휩쓸린다는데, 그거..그거 진ㅉ..그거 진짜야? 아니야, 날아가ㅣ는-...날아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지도? 물론 날아간 다음 어디에 떨어져서 머리 한 쪽이 깨지면 그것도 곤란할 테니, 나는 얌전히 엄폐물을 찾기로 했다. 저..저 커다란 바위를 안고 있으면 괜찮겠지. 땅에 잘 붙박여 있는 것 같고..설마 날아가진 않겠지..?
달리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나는 무거운 것 같은 바위로 달려가 그걸 끌어안고 앉았다. 얼마나 센 거야..
그래, 올바르다고 믿을테니 사라지라고. 건물을 빠져나가는 이그니스를 바라보며 표정을 찡그려보인 그는 무거운 거, 라는 말과 함께 나탈리를 향해 시선을 슬쩍 던지다가 에이, 그럴리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여자인걸. 같은 생각을 해보이곤 굳이 무거운걸 잡아야 하는가, 에 대해 생각했다.
"...바닥에 내리 꽂혀져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설마 하는데 바닥을 깨서 거기에 다리를 꽂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 ...안돼..? <-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