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은 이런 숲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비단 누구라도 자기 발이 진창에 한번이라도 빠진다면 곧바로 이 숲을 혐오하게 되리라. 물론, 이 숲을 혐오하는 모두는 수렁을 빠져나오다가 발을 헛디뎌 썩어가는 토끼의 시체를 밟은 그만도 못했다. 신발 너머로 느껴지는 토끼의 누런 진액과 썩은 살점 조각에 빌헬름은 지금 당장이라도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그리한다면 곧 머지않아 발목을 도려내야 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젠장, 빌헬름은 나지막히 뇌까렸다. 애초에 이 빌어먹을 숲에 발을 붙이면 안 됐다고 또다시 뇌까렸다. 공기마저도 죽어버려 썩은내를 풍기는 숲에서 들릴 리 없는 그의 혼잣말만이 살아 움직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빌헬름은 정신을 차렸다. 바닥을 살펴보니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밟은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했던 상상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쉬지 않고 바닥에 처박히는 머리, 산산조각난 두개골, 두부처럼 으깨지는 뇌... 이 기분 나쁜 곳에서 잠시라도 멍때리다가는 이런 끔찍한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눈 뜨고 꾼 꿈속에서 빠져나온 빌헬름은 맨 처음 하던 생각을 다시 시작했다. '왜 이렇게 됐었나.' 빌헬름은 우체부였고, 숲 건너편 마을까지 편지를 배달해야 했다. 우체부라면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숨만 쉬어도 썩어서 죽어버리는 숲만 아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택배원이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참을 걷던 중 빌헬름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새였다. 살아있는 새. 썩지도 죽지도 않은 새. 숲에 새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 숲에서는 아니었다. 계속 쳐다보자 새도 빌헬름을 발견했는지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가까이서 본 새는 작았다. 빌헬름이 한 손에 콱 쥐어서 으깨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빌헬름은 그러지 않았다. 이 숲엔 이미 죽음이 충만했기도 했고, 애초에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생명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정신병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가까이서 본 새의 두 눈동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개-"
오, 말을 그렇게 하긴 했으나, 새의 휑한 눈구멍 너머로 새빨간 무언가가 보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새가 태어나길 눈이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 장님 새'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 빌어먹을. 눈알이 달팽이도 아니고. 빌헬름은 눈동자를 라디오 안테나마냥 넣고 뺄 수 있는 생명체에 대해 들어본 적 없었다.
푸드덕, 새가 날개를 접고 빌헬름 앞에 내려왔다. 닿은 것은 모조리 저주받을법한 보라빛의 악취나는 땅에 맨발로 내려앉았음에도 새는 멀쩡해보였다. 그 모습이 언뜻 보기에 불쾌하고 역겨워 빌헬름은 무심코 내딛은 발을 물렸다. 지금 자신이 품에 넣은 편지봉투보다도 작은 생명체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가로이 깃털을 정리하던 새는 부리를 멈추고 눈동자가 들어간 얼굴로 빌헬름을 바라봤다. 빌헬름이 방독면 너머로도 보일만큼 얼굴을 찌푸리며 또다시 뒤로 물러나려 한 순간, 작달막한 새의 자그마한 부리가 열렸다.
그러나! 사실은 빌헬름은 탈진으로 쓰러진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감쪽 같은 연기로 멋지게 상대방을 속아넘긴 것이였습니다! 거기에 그것 뿐이 아니였고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난 2주간 동안 빌헬름의 철저한 계획으로 모든 것이 빈틈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빌헬름의 야먕과 행동을 막을 수단을 없어 보이는 상황!
조용히 그 말을 듣던 빌헬름은 돌연 밖으로 나가 웬 흙반죽을 한 덩이 들고 왔다. 그는 그것을 두꺼운 원판의 형태로 빚어 바닥에 내려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나의 순간, 경내의 공기가 진동한다 싶더니 3연격이 수직으로 꽂혀들어갔다. 원판에 새겨진 세 개의 주먹 자국은 공기와 주먹의 마찰로 발생한 고열에 그대로 구워져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 옹기접시가 되었다. 그는 그 중 다른 두 곳보다 큰 부분에 탕수육의 절반을 쏟아넣고 소스 반 그릇을 부은 뒤, 남은 두 공간에 탕수육 반 접시와 소스 반 그릇을 마저 담았다. 빌헬름은 고종에게 그릇을 내밀며 독일어로 뭔가 말했다. 신하들 중 그 누구도 양놈 무투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람 인자를 그리며 나뉜 그릇을 받아든 고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미 이방인의 말뜻을 이해했다.
"우문이로군. 돼지고기 튀김에 소스를 어떻게 곁들이는지가 무엇이 중요한가. 맛만 있으면 제일이요, 거기에 모두가 함께 즐긴다면 상중상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것이 마지막 조각이었나. 탕수육은 결국, 붓지도 찍지도 않고 모두 함께 먹어야 하는 것. 65584번째의 길이, 마침내 열리는구나. 아아,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너희의 덕이니... '달'을 돌려주마." 허공에서 공허하디 공허한 기계음이 나는 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의 태양이 그 빛을 잃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처음 겪어보는 개기 일식. 그것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끝났으나... "그것은, 정어리인가?"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 정어리치왕이 마침내 지상에 다시 발을 디디고 말았다.
>>293은 무시한다. 아니 애초에 지금이 너가 끌고온 1880년 조선이고 고종도 여기 있고 신하들도 있는데 이번엔 어디의 1880년 조선으로 데려가겠다는건데? 장난함? 그렇게 고종얘기를 쓰고싶으면 혼자 어장파서 써제끼라고 좀.
>>293의 뭔지 모를 시간축을 뒤트는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빌헬름이 정어리치왕을 꼬리부터 붙잡더니 꼬리부터 머리까지 강하게 쥐고 그대로 주욱 훑었다. 거대한 생선의 군주는 순식간에 비늘 하나하나가 따로 움직이며 입체 체인소와 같이 가능하는 크고 아름다운 보검이 되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은 빛이 땅을 메움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두 요리사가 자신들의 숙적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아채고 우선 땅부터 가볍게 흔든 것이다. 쓰러진 고종, 갑작스러운 지진, 갑작스레 튀어나온 물고기모양 보검의 충격은 신료들이 빌헬름을 어떻게 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하기 충분했다. 빌헬름은 지진이나 태양빛에는 멀쩡했으나, 그렇다고 빌헬름의 상태가 멀쩡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어리한은 전에 초밥 요리사에게 그러했듯, 그의 왼팔에서부터 서서히 한기를 흘려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점차 그의 왼팔에서부터 피가 얼어붙고, 머릿속에서 정어리의 원한 어린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8월 15일의 그날 술집에서,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했었다, 영혼이란 몸 전체에 깃들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의지만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