ㅗ 잊혀지는 것은... 잊혀지는 거야. 그 이상의 의미도, 그것 이외의 의미도 갖지 못해. 왜냐하면 잊혀졌는걸. 그래도, 잊혀진 것 자신밖에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 자기 자신이라도 있는 한 결코 잊혀진 게 아니야. 내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잊혀졌다고 말할 수 있겠어?
ㅜ 다들 하늘을 동경해. 손을 휘적거리며 새를 따라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어. 닿지 못하니까 더욱 신비롭게 보이나봐. 다들 바라는게 있으면 하늘에 대고 빌어. 근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 그저 높은 곳에 있기만 했는데 알아서 떠받들어 준다고. 자신들이 없을 때도 해와 달은 계속해서 떠올랐을 텐데 그걸 무슨 축복마냥 생각한다고. 네 생각도 그래?
ㅗ 한 때는 그런 것이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이 아닌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행동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어. 애초부터 그런 노력따위 헛수고였다는 말도 되겠군.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비웃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어. ...아마도 그래서겠지, 그런 것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타고 난 그들에게,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그들에게... 그럴 자격도 잃은 주제에, 화가 나는 스스로가 싫어서, 결국에는 한없이 비참해질 뿐이지. 바보같은 열등감, 바보같은 자학 증상이야.
ㅜ 어두운 성격이 싫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비관적임이 싫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가 싫다. 숨길 수 없는 열등감이 싫다. 쓸데없이 높은 자존심도 싫다. 그런 주제에 솔직할 수 없는 것도 싫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이, 그 아이의 웃음 한 번에 모두 잊혀지는 게... 싫다.
ㅗ ...그 아이를 좋아하는 거구나. 그런데 좋아해서는 안 될 사정이 있는 거고? 어렵네... 이런 부류의 상담은 나보다는 아버지가 더 잘 하실텐데... 음... 그 아이에게는 네 진심을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서로 솔직해질 수 없는 사이인 걸까, 아니면 너 혼자 끙끙 앓는 걸까. 언제부터, 어떻게 왜 그렇게 된 걸까? ...네게 이런 말을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너 스스로 변해보는 건 어떨까. 감정적인 문제가 많아 보이니까, 그 감정들을 다스리고 추스리는 법을 한 번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 라는게 내 짧은 소견...!
ㅜ 아아 짜증나... 이럴 줄 알았으면 군에 들어가지 말걸. 잘난 실력 탓에 다른 놈들보다 승진이 빨라, 입사 선배이자 부하들한테서 눈치보고, 군단장님은 그냥 설렁설렁 도와주기나 하고... 이젠 임무 도중에 가족이 휩쓸려서 빠지겠다는데 그거 갖고 또 군법 위반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난리네. 내가 아주 샌드백인가봐~..
ㅗ 원래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지. 물론 잘난 사람한테 자기 열등감을 푸는 인간들은 문제가 있지만. 가족까지 엮였는데 안 놔주다니 문제가 많은 곳인걸. 가라앉을 배에선 빨리 나오는게 상책 아니겠어? 아니면 네가 다 갈아엎든지. 그치만... 아마 네가 힘들 정도면 남들도 별 차이는 없을거야. 불행이 사람을 골라 오지는 않는다는 소리지.
ㅜ 영웅이 되거나 위인이 될 사람들은 특별한 운명을 타고나기 마련이지. 재능이나 상황이 없이 인재가 되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해. 그래서 많은 것들을 포기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은 그래도 없앨 수가 없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재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노력하는 것의 소중함을 몰랐을 테니까. 그렇지? 영웅은 어떤 위기도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니까.
ㅗ ... 영웅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 히힛, 그들은 말야, 재능은 기본이고 거기에 노력할 수 있는 기질까지 타고난 거라고...... 노력만 해서야 될까...?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까지 주어져야... 비로소 위인이 탄생하는 거지...... 한 마디로... 세상과 운명에게 사랑받는 금수저들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하하, 댁이나 나나 운명에게 사랑받진 못한 모양이야...? 우리 서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돌보다 못한 존재로 태어난 걸 보면... 히히히......
ㅜ ...... 이젠 지쳤어. 쉬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네...... 댁은 쉬어가야 할 때 뭘 하곤 했어...? 쉬어본 적이 있는 사람일지도 잘 모르겠네... 아, 하긴, 나같은 사회 밑바닥 쓰레기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고만 있어봐야 아무런 가치도 생겨나지 않겠지만...... 히힛......
ㅗ 음... 지금이 쉬어가는 순간이죠? 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신전에 휴가를 내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아예 다른 곳에 처음으로 가본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맨날 걸어다녀서 운동도 되고, 새로운 곳을 둘러보며 깨달음도 얻어서 꽤 좋거든요. 조금...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헤헤.
ㅜ 저 너머 세계에서는 입에 쓴 게 몸에는 좋다고 해요. 웃긴 게, 여기에서는 입에 쓴 게 몸에 딱히 좋지도 않거든요. 마력을 포션으로만 충당하면, 안 그래도 쓴데 값도 비싸고, 마력 관리도 허술해지고. 포션은, 정말정말 비상용으로 들고다니는 거예요. 당신은 어떤 세계에 사나요? 그 세계는 좀 어때요?
ㅗ어~~~ 음~~~ 우리세계에는 포션같은건 없는데! 음, 대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낮잠도 무제한으로 잘 수 있어~~ 친구들도 많아~~ 히히~ 대신에 할 일이 없어~ 예전에는 시도때도 없이 괴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건 잘 모르겟고 엄청 평화로워!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음 좋겠어~
ㅜ안녕~~!~~ 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무말이나 할게!~ 너는 별명같은게 있어~?? 좀 더 길게 말해야 하나~? 내 별명은 용사야! 멋지지? 아닌가? 모르겟어! 그래서 그런지 나는 대검을 한손으로 휘두르게 태어났어! 히히 재미있지? 아무튼 네 별명도 듣고싶어~~
ㅗ 별명.. 이명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글쎄요, 한 때는 제 움직이는 날으는 호랑이와 같아 하여 비호라고 불리었습니다. 추방된 지금은... 제 사랑 이야기를 따서 아네모네, 라고 저를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 꽃말을 놓고보면 참으로 어울리는 별명이지요.
ㅜ 사랑하는 사람을 쏙 빼닮게 태어난 딸이 아프질 않길 바래요. 아마 모든 아버지가 그렇겠죠. 하지만 저로 인해 함께 가문에서도 추방되어, 제 어미의 얼굴조차 모르는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저 빚진 마음 뿐이에요.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가문에서도 예쁨받는 아가씨로 행복하게 자랐을 텐데...
ㅗ ...별 것도 아닌 일이군. 흔한 일이지 않나. 쫒겨난다거나 멀리 떨어진다던가. 하찮은 감상에 매달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바쁘게 지내는 게 나을 거다. 후회든 고뇌든 미련이든 모두 당장의 일에 치여서 잊혀질 테니 말이지. 그래, 나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하지. 나도, 똑같이 생각해. 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 아이는 더 행복했으리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도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한 쓸모가 없어.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를 위해 행동할 뿐이야.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더라도 분명 그렇게 말했을 테지.
ㅜ 예전, 그 때는 몰랐던 마음을 지금에야 알겠다고 한다면 이건 그저... 미련이겠지. 잃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고, 아프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어. 이제와서 욕심은 없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저 미안해. ...그것 뿐. 그것 뿐이다.
ㅗ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한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이 보이고 성자의 눈에는 성자만이 보인다고 하지요. 그대는 돼지가 우는 것에 일일이 의미를 두시는지요? 그대 얼굴 보고 돼지를 본 자는 필시 돼지일 터이니 괘념치 마시길. 죽어 양분이 되는 것 외엔 하등 쓸모가 없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ㅜ 자, 어서 한 술 드시지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 아랫입술만 겨우 보이는 여인이 웃었다. 그 자와 당신 사이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이 존재한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으니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그 어디에도 독을 넣지 않았으니 입에 거품을 물고 추하게 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ㅗ 으음... 대접해주신 것에 죄송하지만 밖에서 만든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 없는 몸이라서요. (평범한 순박한 청년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기 입을 가리키면서 멋쩍게 웃어보인다.) 독뿐만 아니라 약도 과하게 드는 몸인지라, 함부로 얻어먹고 다니지 말라고 친한 친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답니다.
ㅜ (손에 x식스를 든 청년이 음속으로 달려오다가 당신 근처에 멈춰서 두리번두리번거린다.) 어디 갔지? 시민들을 해치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하는데...
ㅗ 어쩐지 소란스럽더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한숨을 쉬고는 다시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보고는 인사한다) 어쨌든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복잡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도움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드려야겠군요. 지낼 곳이 필요하시거나 물건을 살 일이 있으시다면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푸른색 표를 건넨다)
ㅗ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 조각가의 이야기를 아니? 운명의 노예처럼 인과에 끌려다닐 뿐일 존재라 할지라도, 그 인형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네 자신의 몫이지. 사고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종국에는 사고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 탈바꿈한 그 조각가처럼 말이야. ... 후후, 너처럼 뛰어난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라 믿는단다.
ㅗ 착하다와 나쁘다, 그걸로 사람의 생명을 가릴 수 있어? 선악의 경계만큼 모호한 건 없어. 누군가는 날 죽여야 할 자로 여기고, 누군가는 날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희망이라고도 봐. 틀린 말은 아니야, 누군가는 내 권세를 빌려 사람들을 학살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게 만든 자들에게 내가 복수를 해줄 거라고 기대하니까. 그럼 나는 네 기준에서 살아야 할 녀석인가, 아니면 죽여야 할 녀석이야?
ㅜ 이래봬도 몸매에 자신은 있는데 말이야, 누나가 나더러 사내녀석이 뭔 그리 타이트하게 걸치고 다니녜. 이거 내가 잘못한건가?
ㅗ 집의 방이라면 많아. 사람 하나 더 는다고 휘청거릴 재력도 아니니 마음껏 머물러! 아, 그래도 우리 가문 사람들 위주로 사는 곳이라 조금은 불편할까? 멀지 않은 곳에 집 그냥 얻어줄까?? 뭐든 말해! 우리 집은 나그네를 반기거든~!
ㅜ 요즘 동생 녀석, 너무 많이 커버렸어! 예~전에는 그냥 내가 업어키웠는데, 요즘은 덩치도 더 커졌다고 사사건건 태클 건다니까? 뭐만 하려고 하면 "누님, 체통을 지키셔야죠" "누님은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이십니다" 이러면서!! 막 막 가불기를 건다니까~?! ...그래도 귀여운 동생이니 뭐, 어쩌겠어. 안 그래?
ㅗ 뭔가 조금 부럽네...나는 똘마니가 넷인데 그나마 얌전하게 있어주는 1명 빼고는 날 아주 볶아댄단 말이야. 한번은 가슴 만지고 싶다고 말한 거 때문에 꿀밤을 맞고, 한번은 뭔가 기행을 벌일 것 같다고 내가 뭔가 하기도 전에 돌려차기를 맞고, 또 한번은 누군가 계속 폭발해서 새까매진 적이 있었지. 집중공격당하는 건 힘들단 말이야.
ㅗ 이런, 미안하구나. 고의는 아니다. 희귀종 식물이라.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처음 보는 식물 같으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야. 거기 너,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떠냐? 좋은 조건으로 고용해 줄 수 있는데... 아아, 참. 이제는 이럴 필요 없었지. 흠, 하여간에 버릇이 되어서는... 아니다, 아무것도.
ㅜ 바쁘게 지내다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도 꽤 괴로운 일이구나.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쯤이면 벌써 아무것도 안 한 지가... 바쁘게 지냈다는 것도 이젠 옛 말이군.
ㅗ 사람이 백날 천날 달릴 순 없잖아? 기계도 째깍째깍 굴리다보면 건전지도 갈아주고, 부품도 끼워주고 해야 하는데. 기계보다는 덜 단단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지! 바쁘게 지냈다는 건,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주는 포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ㅜ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난게 이틀 전인데, 오늘은 흰 바람 쌩쌩 불어 입김 호오오 나와! 다음주에는 아름다운 단풍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대! 우리 같이 낙엽 보러 가자!
ㅜ 목표하던 대학을 수시로 합격했어. 그러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부모님은 아직도 날 감시하셔. ..아, 솔직히 수행원이 서너명씩 따라다니면 누구라도 자기가 감시당한다는 걸 알아채. 뭔가 내가 못 미더운가봐. 근데 난 정말 모르겠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난... 아, 또 듣고있는 것 같네. 그만 말할게. 미안. 좋은 얘기는 아니지.
ㅗ 나라면 직접 차린 저녁상, 직접 지은 옷 몇벌, 멀리서도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내 책 몇 권을 주겠어. 뭐, 실제로는 이 중 어떤 것도 해내지는 못했지만. 워낙 급한 이별이였어야 말이지.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도 내 눈과 귀가 되어줄 수족들을 붙여두겠지. 그 아이를 믿지 못해서는 아니야, 그 아이 주변에 꼬이는 벌레들을 믿지 못해서겠지.
ㅜ 과거 이 별에 살던 인간들은 바랐다. 힘을. 지배자를 뛰어넘고 그로부터 벗어날 힘을. 그것이 그들의 자유라는 꽃으로 자라날 씨앗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자유의 씨앗이었을까. 그렇다면 분명 나는 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여야 했을 텐데. 그들이 바라던 건 미래, 나는 덩쿨에 묶인 과거였어.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지. 그들은 허울 좋은 거짓말에 속았을 뿐이다. 꿈은 피를 마시고 자라나 뿌리를 내리는 식충식물과도 같아서, 쫓으면 쫓을수록 불나방이 되기를 자초하는 것 뿐이라고.
ㅗ 신성모독 같은건 잘 모르는데 말이지. 일단 구원의 힘이라면서 부적절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ㅜ 연금술은 말이야, 시행착오의 학문이라고. 수많은 실패들은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한 기회비용이란 말이지. 너도 말이야, 시중에 돌아다니는 포션을 한 번이라도 써 봤으면 나한테 아무 말 못 할 걸. 다시 말해서, 또 실험실이 폭발해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거지! (당당)
ㅗ 글쎄요, 그 단 한 번의 성공이 수많은 실패들로 날린 재료와 시간보다 값진 것이라면 그렇겠지만... 실험실을 여러 번 날려먹을 정도로 대책이 없어서야 안 봐도 뻔하군요. 제가 투자자라면 절대 당신에게는 투자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그런 것 보다도, 스스로의 안전을 생각하세요. 더 나아가서 주변의 안전도. 실패는 한 번으로는 그 의미가 없고 여러 번이 쌓여야 비로소 빛을 본다지만, 인간에겐 단 한 번의 목숨밖에 없잖아요?
ㅜ 읽다가 물려서 방 한켠에 치워둔 고서적 같은 옛이야기지만, 미신을 혐오하는 이일수록 오히려 그 미신에 연연한다는 속설이 있었죠. 소위 말하는 '미개함', 그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격한 대응은 곧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자기방어기제나 다름없다, 고 해서. 저 말입니까? 글쎄, 전 미신에는 흥미가 없는 편이지만 정보 수집을 할 때는 주의깊게 보는 편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미신이라는 가면으로 감춰져 있곤 하니까요. 그 쪽을 물은게 아니다, 라. 너도 비슷하게 동족혐오를 한 적이 있느냐... 라는 의미였다? 예, 뭐, 아주 아니라고도 못 하겠네요. 그런데, 과연 결백한 이는 있을까요?
ㅗ 없어, 내가 알기론, 적어도. 모두가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살아가지. 그렇기에 모두가 죄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심판 받고 죽을 정도의 악인인가를 묻는다면, 글쎄? 그건 전적으로 '메시아'라는 존재에 달린 일이겠지. 모두를 위해 희생했기에, 그렇기에 모두에게 죄를 물을 자격이 있는 자. 그것이 바로 '메시아'니까. ...이런 걸 깨달을 경지까지 가니, 동족혐오니 운명이니 미신이니, 그런 건 다 무의미하더군.
ㅜ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나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도 더 전의 태초부터 지성체들을 지켜보고 관리하는 조율자가 되어있더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지 마, 나도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게다가, 그런 소소한 과거에 일어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너희의 이야기. 들려주지 않겠어?
ㅗ 당신은 마치 '신' 같네요. 그치만 제가 아는 그분에 비해 그정도로 규율에 묶인 것 같진 않아보여요. 그건 그렇고 여러 지성체를 지켜봐온 당신에게는 제 삶이 지루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면 얼마든지 얘기해드릴게요. (짐짓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잡으며)약간 고해성사 하는 느낌이라 신기해요. 칸막이도 없는데 말이에요. 후후. 이 고해성사가 끝나면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아, 당신의 나이를 생각해서 되도록 요약본으로요.(짖궂게 눈웃음을 짓는다)
ㅜ 하아... 채소는 여전히 제 입맛이랑 안맞네요. 그렇다고 반찬을 빼먹으면 요리사분들이 일할곳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던데 그런 협박은 너무하다는 생각 안드세요?! 내가 못살겠어 못살아..! (누군가 들으면 곤란하기라도 한듯 주위를 둘러보며)그래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에요. '우연히' '어딘가에서'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명분으로 잠깐? 아니, 그건 너무 짧나... 한 반나절 정도..? 자리를 비우고 어디라도 좋으니까 기름진 육즙이 좔좔 흐르는 돼지구이를 먹고오는 건 어떨까요..?(입 밖으로 나오려던 침을 삼킨다) 쓰읍.. 맞아! 오가는 도중에 진짜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오면 거짓말도 아니게 되는거니 윈윈 아닐까요?!
ㅗ 잠깐 잠깐 잠깐. 고기야 나도 좋아하지만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인과관계로 엮일 수 있는 건가? 도와준 사람이 고기를 산다는 거라면야 그렇다 쳐도, 그럴 확률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어차피 지금 네 목적은 '고기를 먹는다'지 '남을 돕는'게 아니잖아... ... 그래, 알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럼 이렇게 하자고. '누군가를 도울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기를 먹는다. 그러면 되겠지. 애초에 이거나 저거나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ㅗ히어로를 믿냐고.. 글쎄, 애초에 난 인간이란 존재를 믿지않아. 그들도 자신의 이익, 또는 남들을 구할 수 있단 우월감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일테니. 반대로 그들이 악행을 벌이는 게 그들에게 득이 된다면 그러고도 남았을거야. 못한다면 사회에서 매장될 베짱이 없는거고. ..아, 너무 삐뚤어진 이야기를 했나..
ㅜ..과연 신이 존재한걸까? 존재한다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거고? 아니면 우릴 버린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엿같은 세상을 그저 하나의 유흥거리로 보는 걸려나..
ㅗ 당연하지. 그조차도 내가 바란 것이니까. 내가 먼저 그녀와 함께 무너지길 원했어. 자신과 함께 지옥에 뛰어드려는 나를 말리고, 밀쳐내던 그 손을 억지로 잡아가며. 네가 바란 참신한 답은 아닌 것 같아 미안하군.
ㅜ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지만. 나는 사실, 내 아이들이 나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이기에 더 좋은 것 같다. 내가 함부로 허리를 놀리고 다니는 작자는 아니지만, 만일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이였더라도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조금 의문이 들어. 아마도 내겐 내 아이들조차 그녀의 아이이기에 의미가 있는 거겠지.
ㅗ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 하나만 딱 잘 기억하고 있으면... 살면서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아, 아니다. 잃었다는 것 마저 잊어버리면 더 편할 수도 있겠네. 그렇게 되면 신경쓸 일마저 없을 테니까. 뭐... 어쨌든 네 일이니 잘 판단해보라고. 네 인생인데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 맞는거잖냐.
ㅜ 아, 오래 사니까 안 좋아. 그냥 어렸을 때 추억의 노래 잠깐 흥얼거렸을 뿐인데 소실된 자료니 뭐니 하면서 사람 귀찮게 하더라고. 사실... 무슨 저주라도 걸린 건지, 나이를 먹어도 죽지를 않아. 근데 또 스스로 죽기는 무섭다? 하하, 답 없네, 싶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에휴, 들어줘서 고맙다.
ㅗ 하하, 재밌네. 내 주변에도 그런 애들 많아. 아예 창세 때부터 살아온 애들도 있었어서 남일이 아니네. ...사실 그거 내 이야기야. 정확히는, 태초부터 불사자였던 내 원본의 이야기.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궁금하긴 했는지, 자기 dna를 복제해서 나를 만들었는데, 어쩌다보니 서로 정신이 연결되어서 원본과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어. 가끔씩은 내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야. 아무튼 이제는 원본이 물질세계에서 활동을 멈춰 끊어진 연결이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내게 남아, 네게 공감이 아주 안 되진 않아. 혼자 변하지 않는 채 남아있다는거, 정말 무서운 감정이더라고. 원본이 느낀 외로움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너,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원본과 달리 필멸자라지만, 나도 받은 수명이 꽤 길어서 말이야. 너와 비할 바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이야기하고 싶을 때 찾아와. 언제든 들어줄게.
ㅜ 기억을 모두 알 수 있다 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 나와 내 원본의 관계가 딱 그러했어. 어쩌면 원본이 내가 자신과 완전히 같아지길 바라지 않아 기억을 일부 공유해주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알게 된 수많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원본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난 그 존재의 복제인간이라구. 이런 걸 보면 참, 결국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건가 싶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