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77091> 【역극/외전/단편】 Project : Delta √F Ex-side - 0 :: 859

창천전야◆wxe.t7R5gc

2021-08-15 21:48:13 - 2022-04-26 21:51:48

0 창천전야◆wxe.t7R5gc (OI.V6iPaq2)

2021-08-15 (내일 월요일) 21: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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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천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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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3:15

"…알케미스트 씨?"

"그래, 블랙!"

다행이야, 말이 통하는 상태다.
대련도 아니니 아예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격차란 게 있다.
말로 설득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만한 호재가 없다.

"일단 거기 있어!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나는 최대한 블랙 헤븐을 설득한 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진정해, 괜찮아, 멈춰, 착하지, 그거 내려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빌어먹을.
애초에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설득을 할 수 있겠어.

내가 머리를 쥐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자 블랙 헤븐이 움직였다. 아직 생혈이 뚝뚝 떨어지는 배트를 쳐들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알케미스트 씨이이이───!!!!"

그 잠깐의 찰나, 내 눈은 블랙 헤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멀쩡히 대답하는 줄 알고 나 혼자 설레발을 친 거였다. 블랙 헤븐은 애초에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를 죽이러 날아드는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다.

55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3:36

죽는다.
시체는 많이 봐 왔지만, 시체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공포심이 목을 죄어온다, 머릿속에서 주마등이 넘어간다.
벌써 죽기라도 한 듯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무언갈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한없이 검은 공간 안에서, 머리가 사라진 채 엎어진 내가 있었다.
마치 터스크처럼.

죽고 싶지 않다고 필사적으로 되뇌여 본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소리쳐 본다.
숨이 진동이 되기보다 먼저 내 머리가 깨질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터스크를 살리지도 못 했다. 블랙 헤븐을 막지도 못 했다.
아니, 자세히 생각해보면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면, 애초에 블랙 헤븐을 혼자 두지 않았다면.
알고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서 결국 이렇게 됐다.

그런 주제에, 지금 살기를 바라는 게 염치가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55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4:38

익숙한 푸른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녀는 수복된 왼팔을 뻗었다. 손에 닿은 배트가 가루가 되어 붕괴한다.

뒤이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날아오던 블랙 헤븐의 머리를 잡고 내리꽂았다.
땅이 갈라지고 파편이 튀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기절을 넘어 사망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블랙 헤븐의 신체는 경이로웠다. 뇌가 흔들려 어지러울텐데, 블랙 헤븐은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려던 블랙 헤븐이 잠깐 경련하더니 추욱 늘어졌다.
신경 붕괴였다. 블랙 헤븐은 아마 기절했으리라.

그리고, 살았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쯧."

라이브러리안은 혀를 한 번 찼다.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얼굴이었다.
그녀는 누군가랑 통신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저 멀리서 스베노쉬가 달려왔다.
놀란 얼굴로 달려왔으니, 아마도 설명을 듣고 온 것이겠지. 그랬음에도 스베노쉬는 눈 앞에 있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뒤이어, 로도스의 수송기가 이 쪽에 내려왔다.
역시 설명을 들은 듯, 스탭들이 내려와 피로 흥건한 블랙 헤븐을 이송했다.
다리가 풀린 나를 스베노쉬가 부축해 주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수송기에 탑승했다.

안에는 이미 타케미카즈치가 있었다. 그녀는 들어오는 블랙 헤븐과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에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타케미카즈치가 무어라 말했다. 아마 평소처럼 비비 꼬는 말이 가득한 조롱이었으리라.
그에 스베노쉬가 대꾸했다. 그녀는 무언가 항변하는 듯 했다. 그걸 또다시 타케미카즈치가 잡아채고, 둘은 그렇게 오래도록 언쟁을 나눴다.

그리고, 그 수많은 대화중 단 하나도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단, 하나도.


556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5:18




블랙 헤븐은 수감되었다.
아니, 표현을 조금 완곡하게 돌려보자. 그녀는 독방에서 정신치료를 받기로 했다.

정신을 회복하자마자, 상황을 인식하고 비명을 내질렀다고 한다.
그 엄청난 힘으로 자해하려는 것을 스탭들이 달라붙어 겨우겨우 말렸다 했던가.
독방에 들어간 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블랙 헤븐은 정신이 온전해질 때까지 그 곳에서 나오지 못 할 것이다.

글쎄, 은행 금고가 문짝으로 달린 곳에서 정신이 온전해질 수 있는지는 미스테리지만.

"…."

나는 술을 따랐다.
옛날엔 이거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다.
지금은 진짜 안 취해있고는 못 배기겠던데.

557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5:58

"광기… 광기라."

하, 진짜.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그런 심각한 결점을 알고 있었는데도, 굳이 이런 극비 임무에 차출한 이유가 뭔지.
그랬다면 하다못해, 나나 다른 팀원들에게는 알려줄 수는 없었는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하고 싶은 질문은 많았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하든, 어떤 사연이 있든, 그저 짜증만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냥 여기서 주저앉아 술만 주구장창 마시고 있는 것이고.

인생이 쓰니 술이 달다고 한 놈은 누구야. 인생이고 나발이고 그냥 더럽게 쓰기만 할 뿐이잖아.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나는 술을 들이켰다.
어쩔 수가 없다. 결국 이거 없이는 못 버틴다는 걸 아니까. 싫어도 들이킬 수 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술병을 비워갔다.
내 몸은 언제쯤 동맥경화로 반란을 일으키려나.

558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6:32

"으엑, 술 냄새…."

그 때, 스베노쉬가 갑판으로 들어왔다.
어째 쟤는 우르수스 태생이면서 술을 낯설어하는지 원.
하여튼 신기한 녀석이다.

…그러고보면, 지난번에 블랙 헤븐도 비슷하게 들어왔던가.

"뭐야? 또 새로운 임무라도 들어왔어?"

"세상에, 혼자서 이렇게나 먹었는데 멀쩡해?"

반응하는 게 거기냐고.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스베노쉬는 능청을 관두고는 깔깔 웃었다.

"하하핫, 미안. 연금술사 씨. 딱히 임무는 없어. 그냥… 찾은 장소에 선객이 있었을 뿐이지."

그런가. 내가 여기에 꽤 오래 죽치고 있기는 했다.
쓸 만큼 썼으니 이제 비켜줘야겠지. 나는 마시던 것들을 갈무리하고 일어섰다.

"어어, 잠깐만 잠깐만. 갈 필요 없어."

"응?"

"있어도 돼, 괜찮아."

…그런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559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8:21

스베노쉬는 다시 주저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들어오자마자 술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으면서 잘도 다가온다 싶다.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스베노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거나, 쌓인 술병들을 보거나, 바깥 풍경을 보거나.
그 괜한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나에게 용무가 있던 건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평소라면 수련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어?"

"가끔은, 나도 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

"가끔은, 쉬고 싶은 건가."

내 대꾸에 스베노쉬는 쓰게 웃었다. 자기 딴엔 분위기를 환기하려 한 농담 같은 거였나.
개그엔 소질이 없구만, 우리 검사 씨.

56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9:28

뭐, 그래.
지금 상황이 딱히 흔한 일은 아니긴 하다.
스베노쉬가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할 정도로.

그래서 나는 잔을 하나 새로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술을 따라, 스베노쉬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

"…?"

"싫으면 말고."

내가 아는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서.

그러자 스베노쉬는 피식 웃더니, 잔을 들고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내밀었다.

"우웩… 그 때 먹었던 것 보다 엄청 쓰잖아. 이런 걸 어떻게 마시는 거야?"

"그거보단 인생이 더 쓰니까 마실 수 있는 거지."

"뭐야, 그게."

우린 그렇게 한동안 술잔을 기울였다.
술이 쓰다고 불평했던 스베노쉬도,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니 멈출 줄을 몰랐다.
역시 우르수스인이라고 해야 할까.

"있잖아, 연금술사 씨."

"…왜?"

"지금, 어때?"

제법, 많이 걸러진 말이었다.
거르고 거르고 걸러서, 아예 문장 자체가 깎여버린 말.
그럼에도, 원래 말하려 했던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지금 별로 말을 거를 마음이 없는데.

"거지같아."

스베노쉬는 잘못 들었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구태여 한 번 더 말해주었다.

"거지같아."

잠깐 멍하니 있던 스베노쉬는 곧 크게 웃어제꼈다.
정말로 크게, 무엇보다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대로 웃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설마, 연금술사 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은 몰랐는데."

뭐가.
나라고 욕 모르는 건 아니야.

"아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싱겁기는.
나는 술잔을 기울였다.

"으음, 에잇."

그런데 갑자기, 스베노쉬가 나를 끌어안았다.
술이 쏟아질 뻔 했기에 눈빛으로 항의했더니, 스베노쉬는 전혀 생뚱맞은 말을 해 왔다.

"술 냄새 나."

그거야 뭐, 그렇게 마셔댔으니까.
그런 내 말에도 한동안 옷을 붙잡고 킁킁대던 스베노쉬는 말했다.

"연금술사 씨."

"왜?"

"역시 술은, 안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

"오늘만."

"아하핫, 그래. 오늘만 예외로."

그 말 직후, 우리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왜인지 그렇게 거북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베노쉬가 계속 나를 끌어안고, 나는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 나지만, 제법 오랜 시간동안 계속.


56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0:11




나는 떨려오는 손을 부여잡았다.
고작해야 하루간의 금주에도 이만한 금단증상이라니, 내가 그동안 어지간히 술을 들이붓긴 했나보다.
반란이 일어난다면 동맥경화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별 수 있나. 약속했으니까, 꾹 참고 견뎌야지.

"뭐야, 그건? 손에 단말이라도 넣고 오기라도 한 거야?"

"남이사."

"쳇, 쌀쌀맞기는."

옛날이랑 비교해서 재미없어졌다며 타케미카즈치가 투덜거렸다.
코미디언이 된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입으로 말한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니 그냥 두었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델타의 휴게실, 그 흠집 가득한 낡디 낡은 문.
여지껏 봐 왔음에도, 무언가 새로 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시간상으로도 슬슬 한 달이 다 되어 가니까, 어쩌면 지금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마지막 기회, 마지막 임무.
그래, 지금이 마지막 임무가 될 지도 모른다. 이후를 생각해 봤을 때, 그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델타가 해체된다는 것에 대한 슬픔.
더 이상 임무를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기쁨.
이번 임무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마지막이 이런 형태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괴로움.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뛰쳐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
불안한 미래를 그리다가, 억지로 행복한 상상을 하고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핏빛을 다시 장밋빛으로 덧칠하기를 반복했다.
엉망진창이었다. 이래서 임무라는 걸 제대로 할 수는 있을지.

56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1:06

"호출한 지가 언젠데, 이 자식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타케미카즈치가 불평했다.
단말을 통해 호출이 들어온지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 다른 모두는 휴게실에 모여 있었다.
여기 없는 인원은 딱 하나, 라이브러리안 뿐.

지난번엔 억지로 끼워맞췄을 뿐, 사실 수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던 걸까.
살짝 걱정하고 있자니, 이내 문이 열리며 라이브러리안이 들어왔다.

"얏호-! 모두들, 나 기다렸어?"

평소대로 멀쩡해 보이는 모습. 역시 기우였던 것 같았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해.

"기다리다 돌아가시겠네, 뭐 하다 이제 오는 거야?"

"우리 사장님에게 잠-깐 불려가서 말이지, 이해 좀 해 달라구. 하하하하."

"쯧, 참 나."

아무리 타케미카즈치라도, 크리스라는 핑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타케미카즈치 대신, 이번엔 스베노쉬가 라이브러리안에게 질문했다.

"불려가? 어쩌다가?"

"그게 말이지, 이게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델타 전체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인데…."

라이브러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말 끝을 흐렸다.
분위기만 봐선 무슨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오히려 무척이나 별 거 아닌 이야기였다.

"이번 임무 취소니까 다들 그냥 들어가랍신다!"

그러자, 타케미카즈치가 소리쳤다.

"하아?! 이럴 거면 애초에 뭐하러 소집한 건데?!"

"뭐어, 다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어. 이해 좀 해 달라고. 하하하!"

타케미카즈치는 거세게 혀를 찼다. 심기가 심히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머리에 대고 벼락을 터트릴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향했다.

"아무튼 그렇다면 난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지, 먼저 간다."

"그래, 그래. 수고하시길."

타케미카즈치가 라이브러리안의 옆을 지나쳤다. 라이브러리안은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배웅했다.
그리고, 라이브러리안이 타케미카즈치의 뒷목에 손을 뻗었다.

56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1:51

타케미카즈치의 몸이 덜컥거렸다. 신경 붕괴였다.
나와 스베노쉬는 무심코 일어섰으나, 정작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뭐지? 라이브러리안이 갑자기 왜?

"야."

그러다가, 타케미카즈치가 라이브러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신경 붕괴를 당하고서도 멀쩡한 기색이었다.

"뭐 하자는 거냐, 이건?"

"아, 맞다. 얘 원래 신경이 맛이 갔─"

뇌성이 작렬했다.
강대한 전압에 전등이 폭발하고, 휴게실이 무너질 듯 들썩거린다.
빛이 사라졌음에도, 벽력이 내달리는 이 곳은 세상 어디보다도 밝았다.

"어머나, 난폭하기도 해라."

그러나 그만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라이브러리안은 살짝 밀려난 것 치고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타케미카즈치는 그것에 의문과 함께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야 할 말을 헷갈리지는 않았지만.

"설명해. 정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 이번 일은 뇌신 재단에서 로도스에게 정식으로 항의할 거야."

"이야, 이거 무서워서 어쩌나. 뇌신 재단같은 거대기업이 항의한다면 약소기업인 로도스가 어떻게 될지 정말 상상도 안 가는걸."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라이브러리안은 생글생글 웃었다.
뇌룡정권을 견뎌낸 방어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 정당한 이유란 게 진짜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56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2:08

"아하, 그래. 설명 좋지. 근데 말이야,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뭐?"

"임무 성공률 0%가,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치인지 말이야."

라이브러리안의 말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 했다.
지금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그런 나의 의문에도 아랑곳않고 라이브러리안은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이전까지 제법 괜찮은 성적을 내고 있던 팀이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조사를 좀 해봤거든. 그랬더니 어머나 글쎄, 엄청 충격적인 결론이 나오지 뭐야?"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고.
라이브러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56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2:40

"꼬리를 잡는 데 시간은 걸렸지만 말이지, 결국 이렇게 다 잡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라이브러리안은 품 속에서 USB를 꺼냈다.
틀림없다. 저 디자인, 그 때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USB다.

"…그건 소실되었을 텐데?"

"얘는. 그 때 다 봐 놓고서, 벌써 내가 누군지 잊어먹은 모양이야?"

라이브러리안은 가이노이드다. 다시 말해, 로봇이다.
저장했구나. USB의 데이터를. 자기 안 쪽에 복사해놓은 거다.

"정보와 임무까지 가짜로 주면서 속이느라고 고생 좀 했지. 그래도 어떻게, 결실이 이렇게 있네?"

"하, 애초에 방치된 곳이 아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왜 모르겠어, 로도스가 그 정도로 허접한 집단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라이브러리안은 USB를 흔들었다.

"재밌는 게 많더라. 특히 뇌신 재단 간의 거래 기록이 말이야. 바로 전날에도 로그가 남아있던데."

타케미카즈치는 굳은 표정으로 흔들거리는 USB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566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2:56


"그래, 그 S.H.E.E.P이란 게 너였구나? 쯧, 거의 다 됐는데 하필이면…."

그건, 자백이나 다름 없었다.

567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3:39

"깡통 주제에 쓸데없는 기능만 많아서 말이야. 머리를 노렸는데 잘도 피했더라? 혹시 그 때 대신 USB 날린 것도 의도한 거냐?"

"글-쎄. 의도일까 아닐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이 나돌고 있는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쏟아진 정보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배신자.
타케미카즈치가, 배신자다.
고의적으로 임무를 실패시키고, 그걸 넘어 팀원들까지 죽이려 했다.
그리고, 죽였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정보들을, 나의 뇌는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귀를 통해 억지로 쑤셔박힌 현실을 최대한 부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타케미카즈치라는 사실을.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러곤, 멍청이처럼 질문했다.

"왜…."

"응?"

"왜… 어째서…?"

"아아, 맞다. 너도 있었지?"

타케미카즈치는 주저앉은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568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4:07

"뭐, 그렇게 됐다."

"…뭐?"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기업이란 게 원래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법이라고. 우리로선 로도스보다 그 양반의 비석 쪽에 관심이 더 갔다 이거지."

그러니까, 그 양반의 연구에 방해가 되는 건 치울 수 있으면 치우는게 낫지 않겠냐고.
타케미카즈치는 그렇게 말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모두를 배신했다고.

"너…."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입이 험하고, 트러블이 잦아도, 그래도 같은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고작 그따위 이익에 눈이 멀어서.

"너…!!"

용서 못 해. 절대 용서 못 해.
너만 없었어도 터스크는, 블랙 헤븐은…!!

569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4:31

"안 돼, 연금술사 씨!"

몸을 일으켜 달려가던 나를 스베노쉬가 붙답아 당겼다.
내 몸은 반쯤 우악스러운 손길에 형편없이 뒤로 넘어갔다.

그 직후, 내가 있던 자리를 한 줄기 뇌전이 꿰뚫었다.
쇼크사하기 충분한 위력이었다. 다시 말해, 타케미카즈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걸 상기하자, 내 다리는 머저리같이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약하면 말이야,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그 말에,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다.
타케미카즈치는 그런 나를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는, 시선을 다시 라이브러리안에게 돌렸다.

57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5:10

"그래서, 로도스는 이제 배신자를 어쩔 생각이지?"

"이래뵈도 제약회사라서 말이야, 살생은 꺼리는 주의거든. 물론,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라이브러리안은 싱긋 웃었다.

"물론, 필요할 경우의 이야기야."

"─이 빌어먹을 깡통 새끼가!"

콰앙. 한 번 더, 천둥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러나,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실내에서 끝없이 천둥번개가 쳤다.
박살난 벽에서 끊어진 배선이 드러난다. 얇은 구리는 뇌전에 이끌려 연신 스파크를 일으켰다.
고열에 의해 벽과 바닥이 녹아내린다. 누전된 전선으로부터 기자재가 불이 붙어 타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 격렬한 싸움의 중심부는 너무나도 눈이 부셔 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눈이 부셨기에, 볼 수 없었다. 분명 그랬다.

57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5:33

이내, 빛이 잦아들었다.

바닥은 완전히 녹아내려, 아직도 빨갛게 달아오른 채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서진 천장에선 녹고 끊어진 전선들이 밑으로 축 늘어졌다.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점멸했다.
그리고 그 한중간에, 박살난 채로 분리되어 처량하게 떨어져있는 강철 팔.

타케미카즈치의 의수였다.

57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6:02

"상식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빤히 아는데 대비를 안 하고 올 리가 없지?"

"크으윽…."

오른쪽 팔이 끊어진 채, 무릎을 꿇은 타케미카즈치가 라이브러리안을 노려보았다.
라이브러리안도 이곳저곳이 탄화하는 등 제법 대미지가 있는 모습이었으나, 타케미카즈치만한 중상은 아니었다.

"너… 증폭을 개조했구나. 역방향으로, 증폭이 아니라 감소하게끔."

"왜 그럴까, 평소랑은 손맛이 좀 달랐어?"

"큭… 큭큭…."

명백하게 패배한 상황에서, 타케미카즈치는 웃었다.
실성한 건가. 아니, 아니다. 그 타케미카즈치가 그럴 리 없다.
목을 타고, 오싹한 느낌이 지나갔다.

57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6:35

"미안하지만, 난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타케미카즈치의 양 팔과 다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떨어져나간 의수 한 쪽 까지도.
그것은 명백한, 폭발의 전조.

"수단이 고작해야 그것 뿐이라면, 거리낄 것 없지…!"

"오, 이런."

그것이 부풀어올라, 마침내 터지기 직전.
무언가가 내 시야를 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폭압에 내 앞을 가리던 무언가는 날아가 버렸지만, 그 때 즈음엔 나도 날아가고 있던 터라 앞을 보기 힘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에 의해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끼고, 곧이어 바로 뒤에 있던 벽에 몸이 처박혔다.
전신을 타격하는 고통에 무심코 폐에 있던 공기가 빠져나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내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튕겼다.

스베노쉬였다.

57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7:27

"…스베노쉬?"

전신에 2도 화상, 적지 않은 곳에 3도 화상.
후두골, 좌측 상완골, 우측 대퇴골 복합골절.
척추, 그리고 우완 전체가 분쇄골절.
마지막으로 왼쪽 정강이를 뚫고 나온 뼛조각이 하나.

그마저도 당장 보이는 부상이다. 실제로는 여기서 얼마나 더 진탕이 되어 있을지.

"아냐, 안돼, 안돼, 스베노쉬."

나는 필사적으로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스베노쉬는 살아있었다. 살아는 있었다.
하지만 호흡과 맥박이 없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4분이 뭐야, 1분도 안 가서 끝난다.

"제발, 제발, 제발."

나는 그대로 스베노쉬의 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심폐소생술, 배울 땐 지겹다며 한참을 투덜거렸었는데.
정작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그저 빌었다.

제발 심장이 다시 뛰게 해 달라고, 제발 호흡이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죽지 말라고, 살라고, 눈을 뜨라고, 일어나라고, 제발.

"큽, 콜록, 콜록!"

얼마 지나지 않아, 스베노쉬의 호흡이 돌아왔다. 부르르 떨리던 눈꺼풀도 점차 들어올려졌다.
나는 환호했다. 살았어, 살았다고.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그런 것들 따위의 생각들로 물들었다.

57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9:02

그게 문제였다.
나는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기뻐하고 말았다. 이제 다 끝났다며 긴장을 풀었다. 해이해졌다.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우득,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스베노쉬가 살아난 것을 확인한 그 순간, 집중이 풀린 그 짧은 순간.
흉부를 압박하던 손은 조금 미끄러져, 엉뚱한 곳을 누르고 말았다.

"쿨럭…!"

숨이 돌아올 때와는 다르게, 기침은 단 한 번 뿐이었다.
피가 흩뿌려지고, 동공에서 초점이 흐려진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찌른 것이다.

"아, 아아아…."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
그에 대한 해답은, 지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알려주고 있었다.
알코올의 금단증상 중 하나는, 바로 손 떨림이니까.

스베노쉬가 흐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떨리는 손을 증오스럽게 바라보는 나를, 왼팔을 들어 겨우겨우 쓰다듬고는.
괜찮다는 듯,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576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09:47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이 부끄러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에는 술을 마시고 만다.

"…."

델타의 휴게실은 어느샌가 사방이 격벽으로 막혀 있었다.
어쩐지, 그 난리를 치는데도 아무도 안 온다 싶었다. 라이브러리안 혼자서 끝을 볼 생각이었겠지.
실제로도, 타케미카즈치의 마지막 한 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끝났을 거고.

사실상 자폭이었던 만큼, 타케미카즈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브러리안은 상체가 뜯긴 채로 날아가, 절단면에서 마치 피처럼 부품 조각들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스베노쉬는….

577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0:06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구할 수 있었어, 구할 수 있었는데.
터스크도, 블랙 헤븐도, 스베노쉬도.
살릴 수 있었는데. 내가, 내가 살릴 수 있었는데.

그걸 못해서. 그 간단한 걸 못해서.
세 번이나, 세 번 씩이나 일을 그르쳐서.

"…."

세 번. 그래, 세 번.
내가 여기서 지지리 궁상을 떨던 것도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엔 블랙 헤븐이 왔었다.
두 번째엔, 스베노쉬가 왔었고.
그럼 이번엔? 이번엔 누가 오는거지?

578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0:32

"…아무도."

그래. 아무도 안 온다.
올 사람이 없으니까. 지금 델타는 나 혼자니까. 다 죽었으니까. 죽느니만도 못 한 꼴이니까.

나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마셨다. 퍽 기계적이었다.
델타엔 나 혼자 남았다. 해체가 진짜든 가짜든, 임무가 내려올 일은 없으리라.
이제까지 있었던 소문과 이번 일이 합쳐져, 나는 로도스에서 꺼림칙한 존재가 되었다. 다른 팀에 가거나, 스탭이 된다고 해도 뭐가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나는 로도스에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대체 왜 이 곳으로 오게 된 거지?

579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0:45

"…아아."

맞다, 선생님.
평생을 바쳐도 갚지 못 할 은혜를 입은 나의 은사.

58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1:21

선생님, 알려주세요 선생님.
제가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있나요?
아무것도 못하는 못난이에 자기 손으로 동료를 죽여버린 최악의 쓰레기가 과연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요?

말해주세요, 제발.
당신을 위해 저는 이 곳에 있어야 하는지, 당신을 위해 저는 이 곳을 떠나야 하는지.
제 우둔한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어요.

그 때 그래주셨던 것처럼, 엇나간 저를 다시 한 번 바로잡아 주세요.
모자란 제게 맞는 길을 가르쳐 주세요. 멍청한 제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제발.
머저리 같이 다물고 있지만 말고 빨리 알려줘, 알려주세요.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그런 나의 호소에도,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아, 안다. 알고 있다. 선생님은 지금 여기 없으시단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그저 나에게 하는 질문에 선생님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 뿐이었다.
자신이 찾지 못하는 답을 자신에게 묻고 있던 거였다.

병신 같은 새끼.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58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1:42

스스로가 역겨웠다.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난간으로 달려가 고개를 내밀었으나, 목구멍에선 신물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동안 그러고 있던 나는, 그대로 난간에 등을 기대어 미끄러졌다.

고개를 드니, 하늘은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하늘에서 태양이 화려히 빛났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런 상태인데. 어둡디 어두운 나락을 향해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저 하늘 위에서 고고하다는 양 빛나고 있느냐고.
그래서 한 번,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어보았다.

58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2:08

그러자 세상이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부터 바람이 격렬히 불어오고, 몸은 잠깐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그것이 익숙하다 느낄 때 쯤 알아차린다. 나는 지금 추락하고 있구나.

저 멀리서 내가 앉아있던 로도스의 갑판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딱 내가 기댄 부분의 난간만이 뜯겨져나간 모습이었다.
몸을 뒤로 젖히자, 이번엔 태양이 보였다. 여전히 태양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났다.

58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2:48

나는 이번에도 손을 뻗어 보았다. 이번엔 이유 같은 건 잘 모르겠다.
팔이 완전히 펴질 즈음, 이동하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흙먼지가 튀었다. 삽시간에 튀어나간 알갱이들은 허공에서 뭉쳐 태양을 가렸다.

"…."

아츠를 써 볼까 했지만, 포기했다. 나는 뻗었던 팔을 스르르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58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3:34




──년 ──월 ──일

원인 불명의 난간 파손 사고 발생.

이 사고로 임시기동대 델타의 오퍼레이터 하나가 실종되었다.

로도스는 긴급히 운행을 중지하고, 사흘 밤낮동안 주변을 수색했으나 발견된 흔적은 전무.

실종자의 신체능력과 여러 정황으로 짐작했을 때,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하다고 판단된 바.


수색 종료 당일, 알케미스트는 사망 처리되었다.

58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4:14:14


<배드엔딩 시뮬레이터?>

-<完>-

586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15:32

[그런데 여기서 해도 되는건가!]

587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16:36

[잡담판에서 하기엔 신규 참치분들도 있고 하니(?)]

[일단 누가 먼저?]

588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16:48

[anchor>1596446071>789-826

첫 만남]

[대강 이렇게 하고.]

589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17:16

[>>587 대피소에서 해야하나 싶었지만.

저부터 해도 되련지요]

590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18:20

[아, 대피소(멍청)]

[이, 이미 와버렸으니까...! (?)]

[아무튼 확인확인.]

591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32:56

이곳은 우르수스 제국에 속해있는 어느 설산.
분명 이곳은 이전에도 한번 와 봤건만 왜 또다시 오게되었느냐 하면....
무엇이겠나? 언제나 처럼의 임무지. 이번에는 그 이상한 석판이 아니라 다른 물건의 회수가 그 임무였었다.
M이 말하길 장소가 험난해보여서 그렇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테니 휴가간다는 느낌으로 다녀오라고 했었고
그 말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듯 이 설산에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같은건 그다지 없었다.
문제는, 하늘에서 그 장애물을 추가해 준 것이 문제겠지.

눈이 정말. 저주스러워질 정도로 많이도 내렸다. 그리고 그 저주스럽게 느껴진 눈은 곧이어 혐오의 감정으로 번져버렸다.
왜냐하면....지금, 그 눈때문에 생긴 눈사태가 당신과 그 동료들을 덥쳐오고 있었기에
눈사태가 일어난것을 알아챈 당신과 동료들은 언젠가 했던것 처럼 능숙하게 모여서 그것을 버티려했지만
당신은, 새로 쌓인 눈에 발이 푹 빠져버리면서 홀로 눈사태에 휩쓸려버렸다.
그리고.....

"...............아, 눈 떴네."

눈을 떠 보니 왠 동굴같은 곳의 안. 이게 대체 뭐지 하고 겨우겨우 머리를 돌리다가
당신의 옆에있던 -아마도 휩쓸린 당신을 구해주고 지금까지 간호해준걸로 추측되는- 익숙한 얼굴의 아이를 발견했다.
....본지 좀 오래되서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것 같기도.

592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42:50

"어, 어라? 그러니까..."

알케미스트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훑었다.
이런 곳에 사람? 아니, 지난번에도 사람은 있었지. 민가도.
그렇지만 자신은 눈사태에 휩쓸리는 중이었다. 꽤 어린아이 같은데, 자신을 어떻게 구한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음, 산사태가 멈추고, 운 좋게 신체 일부가 빠져나와 있었을 수도 있나. 아무튼 천운이 따랐다.
알케미스트는 일단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소녀를 보았다.
탐스러운 흑갈색 머리카락과, 신묘한 검은 눈동자. 그것이 알케미스트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이상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dice 0 10. = 8 8 이상으로 기억 못함]

593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43:20

[어이]

594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43:54

[이어서 쓰시는거죠?]

595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44:16

역시 기우인가.
하긴, 여기에 사람이 있을 확률 하며, 그것이 또 아는 사람일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알케미스트는 상쾌할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구해준거지? 고마워!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596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44:35

[여기서 8이 나오네(착란)]

[이제 쓰시면 됩니다!]

597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sN5WTok3g)

2022-02-14 (모두 수고..) 23:48:00

그리고 소녀는 그 대답에 불만에 찬 얼굴을 하고있었다.
뭔가, 지뢰라도 밟은걸까. 소녀는 고민하는 기색을 띄다가

"안쥬."

어디한번 알아서 기억해내 보라는듯 당신의 본명을 말해버렸다.

<거 봐 신박하게 미친놈 맞지?>

'.........'

확, 밖으로 쫒아내버릴까. [#]

598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52:33

"...어?"

어, 응, 어?
뭐지? 뭐지? 왜 상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심지어 코드네임도 아닌 본명을?
혹시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인가? 자신이 기억을 못 한 건가?

아냐, 침착해. 분명 자신도 저 모습을 어딘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떠올려라, 필사적으로 떠올리는거다. 생명의 은인도 기억 못 하면 그만한 무례가 없다.

알케미스트는 다시 한 번 두뇌를 헤집었다.
흑갈색 머리칼, 검은 눈동자. 이 두 개를 마중물 삼아 최대한 기억의 샘물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dice 0 10. = 10 0으로 기억 못 함] (+)

599 알케미스트 (jLkvo6Hxlg)

2022-02-14 (모두 수고..) 23:57:25

"...에제!"

떠올랐다.
흔치 않게 휴가가 있어 밖으로 나갔던 날.
지갑을 되찾아준 보답으로 밥을 한 끼 사줬던 바로 그 소녀가 아닌가.

떠올리고 나니 오히려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나 싶어진다. 스베노쉬의 편지 같은 인상깊은 사건도 분명 있었는데.
아냐, 아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알케미스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야, 에제! 오랜만이네! 그때보다 엄청 예뻐져서 못 알아봤다! 혹시 BB크림이라도 발랐어?"

그리고 소녀에게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600 알케미스트 (4AljKMCO.Y)

2022-02-15 (FIRE!) 00:02:06

(#)

601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uH0CSZdZU)

2022-02-15 (FIRE!) 00:15:40

".....오랜만이야 언니."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친한듯 이야기 하는 당신을 소녀는 짠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겨우 입을 엽니다.

"...언니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한거야?"

그러면서 소녀는 당신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손에서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걸 보니 정말로 눈에 파묻혀서 죽기 직전이었다는걸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602 알케미스트 (4AljKMCO.Y)

2022-02-15 (FIRE!) 00:24:26

"앗, 아하하하... 그게..."

손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와아, 이거 괴사하기 직전이었네. 조금만 늦었어도 손가락을 절단해야 했을 거다.
의지(義肢)라던가, 달 수는 있겠지만... 역시 애초에 달 일을 만들지 않는게 최선이겠지.
점점 더 입은 은혜가 커져만 간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알케미스트는 이것 이외의 답을 찾기 힘들었다.

"일... 때문에?"

말해놓고 알케미스트는 아차했다. 혹시 로도스가 블랙기업으로 의심받는 건 아닌가.
아니, 블랙기업 맞나? 아니, 아무튼. 알케미스트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지. 발을 헛디뎌서 눈사태에 휩쓸렸어. 동료들은 다 잘 버텼지만 말이야, 나는 몸 쓰는 건 그다지 특기가 아니라서." (#)

603 이제닉 에제 코토이아 (QuH0CSZdZU)

2022-02-15 (FIRE!) 00:33:33

"......"

놀랄수밖에 없었다. 일이 얼마나 험하면 이런곳에서 조난을 당하는건가.
일이란게 이런 날씨에 산을 타야하는 것이라면 무슨 산악회같은 것이라도 하는것일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언니, 눈 안에 파묻혀있었어."

나로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것을 신님이 말해주셔서 겨우 구해낼수 있었다.
삽은 없으니 손으로 파내긴 했었지만 그게 무슨상관인가. 죽을 뻔한 사람 살리는 일이었는데.
...그러니 환자인 사람이 걱정하지는 않도록 손은 다시 뒤로 숨겨버렸다.
장갑이 방해된다고 벗고 파내었더니 손이 찢어져서 지금 보여주면.....응, 되려 걱정받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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