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77091> 【역극/외전/단편】 Project : Delta √F Ex-side - 0 :: 859

창천전야◆wxe.t7R5gc

2021-08-15 21:48:13 - 2022-04-26 21:51:48

0 창천전야◆wxe.t7R5gc (OI.V6iPaq2)

2021-08-15 (내일 월요일) 21: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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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천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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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어장은 제 명방 역극 참여자들이 단편을 올리는 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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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0:19:03

"그전의 지원자라면.... 이런 식이로군요."

물약을 던지는것을 보자 무언가가 몸을 던지는듯이 뛰어들면서 그 폭발을 대신 맞았다. 아마도 그 끌려갔을 가엾은(허나 지금은 방해물에 불과한) 용병이였다.
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천장과 바닥을 향해 뻗어드는 전선들에서 일제히 그 전류를 쏘아날리기 시작했다.

503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0:34:42

한 방은 못 먹였으나, 출구는 뚫렸다.
그거면 됐다. 저건 있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다. 다른 델타 팀원들과 함께 돌아와 섬멸해야 한다.
알케미스트는 출구를 향해 뛰었다.

"─아."

정확히는, 그래야 했다.

전류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세포들이 사그라들며 탄화한다. 안구에선 수분이 증발하고, 살갗이 녹아내려 피부가 벗겨진다.
한순간의 충격이 지나간 후에도, 진물은 배어나오길 멈추지 않는다.

알케미스트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기절했다.

504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0:40:11

"이런, 모처럼 귀중한 지원자의 신체를 상하게 하다니..."

마치 용각류의 목을 모방한듯한 케이블의 목이 주욱 늘어나면서, 기절해버린 그녀를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그 기계는 움직였다. 직후 그것은 안타깝다는 행동을 모방하는듯이 쯧쯧거리며 바라보았다.
몸을 전선들로 둘둘 말아서, 그대로 천천히 끌고 았다. 폭발 물약에 새카맣게 타버린 희생자는 거추장스럽다는듯이 휙 내던지고 비어있는 캡슐에 눕혔다.

우선은 상처의 치료가 우선이다. 설정을 입력해두고 산소마스크라던가 씌운다음에 캡슐을 닫아서는 치료액을 끠얹어들었다. 모처럼 귀한 선민의 '보급' 이거늘 자신에게 배정된 명령을 위해서라면 잘 아껴야할테니 말이다.
물론 자잘한 흉터가 남는것은 어쩔수없지만, 그건 추후에 관리를 잘하면 되는것이라고 그것은 결론을 내린채로 상태의 호전을 지켜보았다.

505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0:48:00

캡슐 속, 차오른 치료액에 의해 알케미스트의 상처는 천천히 호전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감전이란 격통을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것이었으매, 상처가 나름대로 완치된 후에도 알케미스트는 한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506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0:53:35

기계는 고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을 만든 창조주와 일원들이 목표로 삼던 '초병사' 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렇게 얌전한 것이 더 괜찮을터였다.
배출구로 치료액을 뽑아낸다음, 온전해진 그녀를 인형뽑기하듯이 집어들어서, 수술대에 눕혀들고 사지를 고정해둔다. 그리고 감염자 여부를 검토하는듯한 스캔을 지이잉- 훑어들면서 결과창을 조회한다.

507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0:59:17

그리고 그 때 즈음, 알케미스트는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건 결박된 사지. 이리저리 벗어나려 애를 써봐도, 구속구는 덜컥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힘을 줘도 마찬가지. 도리어 자신의 팔다리가 아파올 즈음에야, 알케미스트는 발버둥을 그만두었다.

508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1:04:32

"마침 좋은 순간에 일어났군요. 당신은.... 꽤나 흥미로운 약물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였죠."

위이잉, 하고 물약 배합기에서 불길한 검은빛의 용액을 주사기에 가득 채워넣으면서 기계는 저항의 움직임을 그만두고 늘어진듯한 그녀를 보며 말하였다.
그것에게는 어떠한 가책이라던가 고민이라던가는 없었다. 말그대로 프레젠테이션을 브리핑하는듯이 말하면서 주사기가 시커먼 액으로 가득 차오를때쯤 녹색 액체가 담긴 주사기도 꺼내보이며 지긋이 시선을 맞췄다.

"기존의 시제품과 실험품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서, 몸을 치료하는동안 조금 손을 썼습니다. 좌신에 기존품을, 우신에 실험품을 투여할테니 반응을 제대로 말씀드려주시기 바랍니다."

509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1:12:05

기절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알 수 있는 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몸 곳곳에 명백하게 보이는 재생된 흔적.
치유 물약 같은 걸 곧잘 써왔기에 알 수 있다. 꼴에 실험은 최선의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건가, 역겹다.

"이 빌어먹을… 그거 저작권 침해야. 알아?"

도주는 불가능,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로도스에서 자신의 실종을 알아차리고, 오퍼레이터를 보낼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510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1:16:15

"대의를 위한 재능기부라고 생각해주십시요. 그럼 지금부터 기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그것은 기존의 약물을 투여하면서 용액을 그 신체 내부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그것을 뽑아내고 거즈를 꾸욱 눌러주면서 몸의 변화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면서 꺼내드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르수스 제식군인들이 사용하는 둔기였다. 오래되어서 녹이 슬었지만, 여전히 그 형태는 튼튼하게 잡혀있었다.

"약물이 좌측 신체에 퍼지기까지는 약 3분이 예상됩니다. 3분후, 당신의 왼팔에 이 둔기를 전력으로 내리칩니다. 계산대로라면 약 70% 확률로 아픔을 덜 느끼고 상처도 나지않을겁니다."

511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1:25:46

"이런 씹…!"

검은 용액이 혈관을 타고 도는 감각은, 단적으로 말해 엿같았다.
혈류를 따라 치덕거리며 전진하는 더러운 느낌은 구성 성분 중 타르기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해버릴 정도.

하지만. 저 미친 기계가 그 다음으로 꺼낸 말은 용액의 더러움을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미친 새끼야! 사람을 흉내냈으면 그 대가리로 생각이란 걸 해 보라고!"

다시 한 번 알케미스트가 발버둥치고, 그 입에선 빈민가 시절에 배웠던 험한 말들이 쏟아진다.
평소의 그녀라고는 생각 못 할 험악한 표정. 하지만 떨리는 두 눈에는, 분명히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512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1:29:27

"경과 시간 확인. 1차 테스트를 시행합니다."

타이머 알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케이블이 수축되는 소리와 함께 팔이 들어올려지고- 뻐억!! 하고 우르수스제의 둔기가 내리찍는 소리가 중앙 실험실을 크게 울려들었다.

그 험한 말과 공포가 담긴 시선은 기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이것이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세월의 풍파가 지났음에도 수행해야하는 임무를 위한 최적의 '테스트' 뿐이였다.

513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1:32:14

[팔은 어떤 상태? 제 임의로 정할까요?]

514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1:33:24

[>>513 편하신대로오~]

515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1:43:32

콰앙. 무미건조하게 일어난 소음
그 거대한 충격은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소음을 잔인하리만치 철저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니, 그 뒤에 있을 찐득거리는 소리가 더욱 비극적으로 들려오는 것이리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짙은 녹 위로 새빨간 핏물이 튀었다.
아니, 그건 사실 녹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보다 일찍 실험당했던 실험체들의 말로였을지도.

사람은 연약하지만, 사람의 신체란 지독하리만치 튼튼해서.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솟구치며, 짓눌린 근육이 터져버린 혈관과 함께 밀려올라와도.
그럼에도 어찌저찌 원형이 남아버린 모습이 도리어 더욱 참혹했다.

차라리 형체도 남지 않고 짓뭉개졌으면 좋았을 것을.

516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1:52:29

"......외상 및 내상 분석중...."

그렇게 뭉그러진 팔을 잡고, 각종 기기들로 면밀히 조사하더니 이윽고 검은 주사를 그 망그러진 팔에 투입해넣어들었다. 기계는 그런 상황을 면밀히 기록해두면서도 머리 부근에 약간의 전류자극을 가한다.
아까같이 쓰러지지않도록, 이성을 억지로 붙잡아드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기절한 상태로는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예상 효과. 파손된 신체내상 및 외상 재생률 300% 향상 및 자연치유률 50% 증대. 부작용 미검출. 투약 이후의 상황을 기록...."

517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2:02:29

"아, 아극, 그. 아, 아아악…!"

꽈득, 꽈드득. 섬뜩한 소리를 내며 뼈가 맞춰지기 시작한다.
골절된 뼈는 밀려올라가는 살에 그대로 밖으로 돌출되어 제거되고, 끊어진 근섬유는 억지로 다시 묶여간다.
당연하게도 끔찍한 고통이 동반되었으나, 알케미스트는 이번엔 기절조차 불가능했다.

"아, 아아…! 이, 이 시ㅂ… 큽, 카학, 케헥!"

새빨간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흩날렸고,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순간적으로 멎었던 폐가 다시금 산소를 갈구함에 따라, 알케미스트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518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2:05:40

"......이건 흥미롭군요. 배합률이라던가 정산을 해야겠습니다.."

실시간으로 재생되어가는 것을 클로즈업하듯이 눈의 렌즈가 주시하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 그녀의 반응도 아랑곳않고 기계는 분석을 시작하였다.
정보를 산출하는 것은 어느정도 되었으나 문제는 알케미스트가 가지고 다니는 약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다는것.

기계는 자신을 만든 박사의 결과물보다 더욱 진보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확률의 산출이 들어가지자 공업용 기능의 팔들이 움직이더니 곧 그녀의 목에 회색빛의 초커를 채우고나서 뭔가의 칩을 그 초커 내부에 넣었다.
그리고 지이잉- 하는 기동음과 함께 그녀의 결박을 풀어주면서 팔이 완전히 나았는지 그 팔을 주물러들어갔다. 실로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519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2:15:57

"큽, 콜록, 카학! 이, 큽… 개같은…!"

팔은 완벽하게 재생이 완료되었다. 의사로서, 알케미스트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압박이 가해질 때마다 아직도 콧잔등을 꿰뚫고 환상통이 머릿속을 찔러들어온다.
거기에 더해, 저 자식에게 만져지는 것부터 역겹고 불쾌했다.

그러던 와중, 알케미스트는 결박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회다, 저 빌어먹을 자식. 알케미스트는 재빨리 일어나 달렸다.
어디라도 좋으니 이 연구소를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다음번에 올 땐 저 새끼를 철저하게 부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으니.
극심한 고통에 의해, 알케미스트는 초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520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2:20:42

"과연, 신체활동이 금새 재기되었군요"

뭔가의 신호를 주기 시작하자, 칩이 삽입된 초커에서 삐빅 소리가 더니 그대로 아츠의 에너지가 신체에 찔러드는듯이 방사하면서 움직임을 억제하기 시작한다.
그래, 흡사 살아있는 소동물에게 표본용 침을 꽂는 그런식일까...

기계는 그런 탈출 시도를 눈여겨보면서 과연 이 시설에서 구비하는 실험체 제압장비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지 촬영하며, 관찰을 이어갔다.

521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2:26:20

"이, 씹…! 이건 또 언제…!"

몸 속으로 무언가가 침투하는 감각, 그리고 명백하게 둔해진 몸뚱이.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그대로 철푸덕 엎어져버린다.

쓰라린 무릎과 손바닥, 그리고 얼얼한 콧잔등.
그러나 그것보다도 먼저,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아, 아아아…!"

원래도 약했던 알케미스트가, 지금 상태로 실험체 제압장비를 당해낼 수 있을리 없다.
푸른 눈에서 희망이 눈물이 되어 넘쳐흘렀다.

522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2:33:24

"조금의 협조만 덧붙여준다면, 무사히 나가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뒤에서 위로랍시고 내보내는 말을 하면서 턱 하고 집게팔이 인형뽑기하듯이 그녀를 집어들고 끌고가기 시작한다.
기계는 그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를 위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시제의 약을 기반으로 배합하고, 그것을 투여하고, 강도실험이란 명목으로 고문같은 일격을 먹이며 몸을 수복하도록 다뤄갔다. 물론 그렇게 잡혀있는동안 레시피는 알았다면 알았다만서도.

523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2:48:01

실험, 실험.
계속되는 실험들은 매번 강도도 내용도 달랐으나, 그 실험체를 알케미스트로 두고 있다는 공통점 하나만은 공유했다.
아. 하나 더, 그것이 그녀에게 더 할 나위 없이 가혹한 고문이었다는 것 까지도.

조금의 협조라, 과연 그 조금이란 얼마나 되는 걸까?
애초에 저것이 진실은 맞는가? 나는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

알케미스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질문조차도.

524 장서가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2:53:37

"그럼 이제 10차시의 실험 진행을 시작하겠습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펑-! 하고 문이 터져나갔다. 기계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았을때쯤, 콰지직 하고 내리꽂는 뇌격이 과부하를 강제로 유발하여서 마비시켰다.
아무리 자기가 잘 버텨도 환경이 잼병인 이상 한계는 명확했으며 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 상회입찰한 팀원으로 재미를 봤냐는 투덜거림을 말이다.

525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2:57:16

알케미스트는 고개를 돌렸고, 그리하여 볼 수 있었다.

잃어버린 생기를 대신하듯, 번개의 폭력적인 섬광이 망막에 맺혀 영글었다.

526 타케미카즈치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3:05:51

"나중가면 꽁지깃털을...아니, 꽁지깃털이 있긴했나? 여하간에 내가 못 즐길만큼 누가 망가뜨리랬어 이 곰탱이네 고철딱지가?"

제대로 짜증섞인 목소리가 섞여들면서 기계는 무미건조하게 제 멘트를 하려했지만 그 이전에 그것에게 죽빵이 가해졌다.
일방적인 폭력이 꽈직꽈직 퍽퍽 쑤시면서 난폭하게 전류가 튀면서 의도치않게 초커를 자극해서 제압장치가 켜지긴했지만....

직후 구조작업을 해야하니 조금 살살 하라고 당부하다가 결국 자포자기한듯한 메딕 오퍼레이터들이 그녀를 데리고 중앙실험실에서 내보내게 해준다.

527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3:16:26

빛. 빛이다.
그런게도 갈구해왔던 자연광이다.

그 찬란한 태양빛을 눈에 담자마자, 무심코 눈에서 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주변에 있던 메딕 오퍼레이터들이 흐른 물줄기를 닦아주었으나, 왜인지 그럴수록 더욱 더 많은 눈물이 흘렀다.
이내,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잠겨버린 목에선 옹알이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부서져가는 연구실을 뒤로하며, 그녀는 울었다.
아이처럼,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있음을 증명하듯.

온 힘을 다해, 소리 내어 울었다.

528 알케미스트 (8Sxl1b29s2)

2022-01-30 (내일 월요일) 03:42:54

[흐음흐음, 기절하셨나]

[개인적으로 이대로 끝내기 딱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529 타케미카즈치 (RhFCHHuPHs)

2022-01-30 (내일 월요일) 08:00:06

^)[그러믄 컷!]

53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21:45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델타팀 휴게실의 문. 여지껏 몇 번이고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차마 들어갈 용기가 안 나, 대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배선이 조금 드러난 천장에서 옅게 빛나는 전등이 보인다.
검게 광택 처리된 복도를 비추는 LED 전등.
옅지만 일정하게 계속해서 빛나는 모습이 빨리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냐 묻는 것 같다.

어휴, 그래. 여기서 백날천날 있어봐야 무얼 할 수 있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나는 문을 두드렸다.

가벼운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는 차가운 목소리가 회답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쾅 하고 들어온 문이 닫히고, 방 구석에 있는 CCTV는 보라색으로 점등하며 녹화 종료를 알렸다.
언젠가 겪은 적 있는 모습. 맨 처음, 델타의 성립과 함께 기밀 임무를 전달받았을 때도 이랬다.
혹시나가 역시나다. 시선을 돌리니, 테이블에는 당연하다는 듯 크리스가 앉아 있었다.

53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23:50

"그렇군, 대표자는 너인 건가?"

"뭐, 뭐어. 그런 셈이지."

"좋아, 일단 자리에 앉도록."

내가 자리에 앉자, 크리스는 옆에 있던 가방에서 종이들을 꺼냈다.
글씨는 깨알같았으나, 같이 들어간 사진들만으로 저게 무슨 종이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카시미어에서 있었던 비석의 회수 혹은 파괴 임무.
…실패. 로켄 헤시드가 직접 행차하기까지 해, 눈앞에서 탈취당했었다.

용문에서 있었던, 요인 경호 임무.
…실패. 경호 대상은 죽지는 않았으나 현재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 하고 있다.

라이타니아에서 있었던, 금발 저격수 티나의 생포, 혹은 사살 임무.
…실패. 전용 비석으로 강화된 티나의 아츠는 예상치를 훨씬 상회했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실패.
크리스가 내놓은 것은 우리 델타의 최근 임무 실적.
그 중 성공한 임무, 0건.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는, 호출될 때부터 알고 있었겠지."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그래. 최근 델타의 실적은 말 그대로 최악이야. 로도스 내부에서도 작지 않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그야 당연하지. 임무 실패만 계속되는 팀을 그대로 존속시킬 이유가 없다.
가뜩이나 우리는 기밀 임무 때문에 꼬박꼬박 엘리트 오퍼레이터가 동행하는 처지.
그런데도 실적이 이 따위니 주변의 여론이야 어떨까… 험담은 최근 지겹게 듣고 있다.

"그동안은 내 권한으로 묵살하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야. 이제 너희가 실적을 보여줘야 해."

"실적… 말이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어떻게 돼?"

그러자, 크리스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임시기동대 델타는 해체 수속을 밟게 될 거야. 따라서 기밀 임무도 거기서 정지, 이후 만들어질 새 기동대가 인계받겠지. 당연하지만, 끝나고 난 뒤에도 발설은 금지고. "
"실패 이후에도 임무를 받는 일이 몇 번 있겠지만, 그건 기밀 임무와는 하등 관계없을 거야. 길어야 한 달 내로 델타는 해체될 거고, 해체 이후엔 너희는 다른 팀에 소속되거나 희망할 경우 스탭으로 전향할 수 있어."

"해체인가…."

그래,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좀 씁쓸하다. 기동대의 해체는, 결국 우리가 무능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결국 다음 임무가 마지노선이라 이거지. 이해했어."

"그래, 그리고 다음 임무에서 너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어."

"유의해야 할 점?"

"다음 임무는, 엘리트 없이 진행될거야."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뻔 했다.
크리스의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시선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 했으리라.

나는 머리를 짚었다.
갑자기 엘리트의 동행이 중단될만한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

"…항의가 들어왔구나. 엘리트가 원래 리더로 있던 팀들에게서."

"그래. 슬슬 한계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야."

엘리트는 아니라고 하나, 그들 또한 충분히 능력있는 오퍼레이터들.
단순히 반감을 가지는 것만 해도 큰 손실이며, 로도스 내에서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테지.

"그래도 말이 안 돼. 여태껏 엘리트가 있었는데도 실패한 임무들인데, 엘리트 없이 어떻게 성공시키란 거야?"

그런 나의 질문에, 크리스는 옆에 있던 커피를 살짝 홀짝였다.

"그 '어떻게'를 찾아내는 게, 너희가 해야 할 일이지."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내 눈 앞에 있는게, 진정 나랑 똑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건지.
차라리 라이브러리안이 훨씬 더 사람처럼 보이는 태도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 사흘 내로 다음 임무가 갈 거야. 그 때까지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CCTV는 다시 빨간 불빛을 띄우고, 델타의 휴게실엔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머리 아프네, 진짜…."

일단 나한테 대표자 자리 떠넘긴 놈들, 다 한 대씩 때려줄 거다.


53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26:24




사흘이 지났다.
예고한 대로, 크리스는 단말을 통해 임무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 대표자로 선정되었던 나의 단말에는 임무에 대한 상세한 정보까지 추가로 전송되어 있었다.

…대표자를 뽑으라고 했던 게 그냥 대표로 혼날 사람 고르는 게 아니었나.
역시 생각에서 끝내지 말고 진짜 때려주는 거였는데.

슬슬 새삼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오는 와중, 조종석에서 파일럿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까지 10분, 브리핑 개시할 것."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파일럿의 말에 따라, 나는 수송기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인원들을 불러모았다.

"임무 브리핑할거니까 빨리 앉아. 특히 터스크, 너, 너, 너. 침대에서 빨리 안 일어나?"

"자, 잠깐 누워있기만 한 거거든?!"

수송기 안, 당장 이번 임무로 팀의 존속이 갈린다고 말했는데도 당최 진지해지질 못하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어휴… 아무튼 작전구역은 이베리아 외곽의 한 건물이야."
"첫 임무는 기억나지? 그 때 호위했던 네프라리아 세셔의 정보를 시작으로 역추적에 역추적을 거듭한 끝에 알아낸 위치고."
"평범한 민가처럼 위장했지만, 지하엔 제법 커다란 연구소가 숨어있어. 추측으론, 아마 아츠 유닛을 그 곳에서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해."

"아츠 유닛을… 그럼, 내부에 시체같은 게 가득 있다거나…?"

스베노쉬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꼴에 깔끔 떠는 성격인지 뭔지 내부에 소각장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어. 아마 걱정하는 건 없을 거야."

"그래? …다행이다."

좀 더 정확히는 소각장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다고 추정되는 거지만,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스베노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반대편에서 타케미카즈치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위험하다며? 그러니 대충 알아야 할 것만 알고 빨리빨리 가자고. 거기서 뭘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뭐라도 좋으니, 그 곳에서 로켄 헤시드에 관한 정보를 가져올 것. 디지털 문서든, 서류든 관계 없이. 기대 가능한 리스트 중 최상은 연구 기록이나 수기라는데."

"하, 뭐라도 좋다고? 차라리 제대로 된 성과는 생각도 안 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래?"

"…난 그냥 브리핑을 맡았을 뿐이고, 임무는 내가 내는 게 아니야. 타케미카즈치."

"쯧, 하여간에."

하아, 진짜.
이래서 대표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튼. 꽤 방치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뭐가 있을 지 모르니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 것. 종이 문서의 경우 그냥 들고 오면 되고, 디지털 문서의 경우 미리 나눠준 USB에 담아 올 것. 이상이야."

"…어라? 뭔가 더 자세한 정보는 없는 건가요?"

"그래, 블랙. 안타깝게도. 연구소의 넓이, 함정, 경비 시스템, 그 밖에도 다른 모든 정보가 베일에 싸여 있어. …뭐, 임기응변은 우리들 주특기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블랙이 뭔가 찝찝하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하긴, 정보가 부족한 경우야 많이 있었지만, 이번엔 아예 부족한 걸 넘어 없다시피 하니까.

"뭐, 이미 방치된 지 한참 지났다고 하니까. 그 곳의 경비 시스템들도 제 구실을 못 할 확률이 높아. 그러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일단 그렇게 말은 해 봤지만, 블랙은 여전히 표정을 피지 못 했다.

하긴, 그 인간이 있던 곳인데 뭐가 있을 줄 알고.
시간 좀 지났다고 무력화? 웃기는 소리지.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라도 이렇게 사기를 고취시켜야지, 아니면 누가 해.

53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27:46

"알케미스트, 응답 바람. 투하 위치에 도착했다."

그 때, 조종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봤을 땐 저 사무적인 태도가 시원섭섭했는데, 지금은 고맙기만 하다.

"다들 들었지? 준비해."

모두 익숙하다는 듯 강하 준비를 한다. 뭐, 얼을 타기엔 좀 많이 떨어지긴 했지.
더 볼 것도 없겠다 싶어, 나는 말했다.

"엑스피아토르."

"타이틀 롤백, 3… 2… 1…"

─0, 아크나이츠.
질릴 정도로 들은 목소리와 함께, 팀 델타는 수송기에서 투하되었다.

밑에서부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그러고보면 맨 처음 강하할 적엔 온갖 난동을 다 피워댔던가.
다 옛날 일이다. 이제와선 완전히 익숙해져서, 잡생각을 하거나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익숙해진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정돈된 자세로 일사불란하게 떨어지고 있다.

…뭔가,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서 좀 멋지다.
누가 사진 한 번 찍어주면 참 괜찮을텐데, 당연하게도 현실성 없는 생각이겠지.
나는 눈물을 삼키며 강하했다.

슬슬 땅에 가까워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아츠 유닛에서 연기가 새어나온다.
연기에 닿자, 낙하하던 몸은 급격히 속력을 잃었다. 순간 두둥실 뜬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
로도스의 자랑… 까진 모르겠고, 명물 중 하나인 역분사 안전 착지 장치. 떠오른 몸은 그냥 맨 땅에서 가볍게 점프를 한 것 마냥, 부드럽게 착지한다.

"자, 도착한 인원부터 점호!"

"네!"

"오우!"

"있어-"

"뭐, 여깄다."

블랙 헤븐, 터스크, 스베노쉬, 타케미카즈치… 다 있긴 있는데.

"넌 왜 안해?"

"정말로 애석하게도, 난 인(人)원이 아니거든. 하하하-!"

저게 진짜.

53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29:51

"아무튼 다 있고… 그래서, 여기가 아까 말한 그 건물이야."

겉을 위장한 것도 모자라 외진 곳에까지 지어놨기 때문에 바로 앞까지 날아와 강하할 수 있었다.
이게 시내 한중간에 있었으면 이런 짓 못 했지. 그날 밤 TV에 나올 일 있으려고.

사전에 브리핑했던 대로, 연구소의 외관은 철저하게 민가처럼 꾸며져 있었다.
방치되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 꽤 낡은 모습이었지만.

"좋아, 저기로 들어가면 된다 이거지?"

"응? 아닌데?"

"…응?"

일단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는 터스크를 멈춰 세웠다.
들어가기에 앞서 '투시'로 살펴본 결과, 저 바깥의 문은 가짜다.
정확히는, 저 문을 열어도 진짜로 평범한 민가밖에 안 나온다.

"진짜는─ 여깄지."

뒷마당의 흙을 조금 파헤치자,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그래봤자 나한텐 안 되지.

근데 얘 문 한번 참 이상하게 짓네.
나무 문에, 테두리는 금으로 둘러싸고. 용의 머리가 동그란 링을 물고 있는 장식품이 손잡이라.

"…묘하게 퀄리티가 높은걸요."

"만화를 어지간히도 봤나 보네. 누가 연구소 비밀문을 이렇게 만들어?"

"그 녀석이니까. 뭔들 안 이상하겠어?"

스베노쉬의 질문에 대꾸하며, 타케미카즈치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털어내며 열리는 문.

머리 위로 태양이 떠 있음에도 이상하게 어둠이 들이찬 문 안쪽의 모습에, 스베노쉬가 검을 들여 빛을 밝히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화륵거리는 소리가 문 안쪽을 채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던 횃불이 순차적으로 발화했다. 넘실거리나 미약한 불꽃이 통로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레트로 게임 같은 곳에서 자주 나오지 않아?"

스베노쉬의 말대로다.
리소스가 한정되어있던 옛날 픽셀 게임들이 곧잘 채용했던 배경.
벽을 가득 채운 투박한 벽돌과, 결코 충분하지 않은 광원, 그리고 무지막지한 크기.
그 셋이 한 데 모여 만들어진 음산한 분위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실험실이라며? 웬 던전을 만들어놨어?"

"침입자 대비용… 이 아닐까, 아마도."

누가 경비 시스템이랍시고 이런 짓을 하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까 그 녀석이라면 아주 말이 안 되는건 아니겠지 싶었다.
그래도 대체 머리에 뭐가 들어야 연구소를 통째로 이렇게 만들 생각을 하는 건지, 원.

"그럼 어디… 한 번 뭐가 있나 보자고."

눈에 미세한 열기가 감돈다. 유닛을 통해 눈을 매개로 발동된 아츠는 내 시야에서 방해물을 철저하게 격리했다.

가장 먼저 칠흑같은 어둠이 자취를 감추었다. 기껏 어중간하게 박아둔 횃불의 악의도 쓸모없이, 던전은 그 미로같은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 다음은 벽돌이 위에 허공을 덧칠하듯 사라졌다. 투명해진 미로는 정말이지 날카롭고 폭력적인 함정들을 수도 없이 품고 있었다.
나는 아츠를 조금 조정했다. 방해물로 취급되어 사라졌던 것들이 일부분만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그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너무 멀리 있는 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완벽히 파악하진 못 했으나, 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아츠를 해제했다.
눈이 다시 푸르게 돌아오며, 시야 위로 다시 현실이 덧씌워진다. 어둠이 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손짓하는 것을 나는 일단 무시했다.
이게 어딜 봐서 연구실인지, 정말 작정하고 꾸며뒀구나. 그리 생각하며 나는 아까 본 것을 모두에게 알렸다.

"알겠지? 그러니까, 잘 보고 따라와야 해. 뭐 하나라도 잘못 만지지 않게 조심하고."

모두가 그럭저럭 납득하는 기색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움직였다.
악랄하게도, 트랩은 첫 번째 계단부터 깔려있었다. 아무리 경계한들 미리 알지 못한다면 그대로 밟을 수 밖에 없도록.
하지만 이걸 어째, 미리 알아버렸네. 나는 그대로 함정을 피해 발을 움직였다.

53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1:43

"잠깐만."

"우와아아아아아악?!"

정확히는, 터스크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우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발을 삐끗해 그대로 넘어질 뻔한 몸을 나는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뭐, 뭐야. 왜?"

터스크는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턱에 손을 얹고, 나를 불렀으면서 나보다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그는 무언가를 고뇌하는 듯 했다.
아니, 그 눈은 가라앉기보다는 번뜩이며 총명한 것이, 이미 반쯤은 확신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네가 말한 대로, 함정을 전부 피해서 간다면 말이야…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시간?"

그거야, 당연히 무지막지하게 걸릴 것이다.
함정의 개수를 봤을 때, 좀만 지체된다면 나왔을 땐 달을 볼 수 있겠지.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하고 확실한 게 몇 배는 나으니.

그러나 터스크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아니, 뭐라 해야 할까. 그건 좀 그렇잖아? 어두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씩이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전진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잖아, 터스크. 우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임무를 성공시키는게 중요하지."

그러자, 터스크는 씨익 웃었다.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서』야. 알케미스트."

"…뭐?"

"있잖아? 더 『빠르고』, 더 『안전하고』, 더 『확실한』 방법이 말이야."

그 순간, 내가 터스크의 눈을 바라봤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터스크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여전히 같았다. 나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청색 눈동자.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저 치가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허공을 실선이 가로질렀다.
콰앙. 벽이 폭발하며, 그 안쪽에서 혀를 날름거리던 화살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쏟아진 화살이 건드린 다른 함정들 또한 똑같이 폭발하며 형편없이 늘어진다.

그러길 몇 번. 아까와는 다르게 완전히 처참해진 입구.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이 곳은 안전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터스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뛰어들었다.

"함정을 『전부 쳐부순다』!! 눈에 보이는 족족,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이야!"

"야! 그러면 뭔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러는데!!"

"미안하지만 말이야, 난 누구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걸 진짜 싫어한다고!!"

그 말을 끝으로, 터스크는 저 깊디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쾅, 쾅, 하며 손톱탄을 쏘아대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흐응,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잖아. 저 녀석?"

그 뒤로, 타케미카즈치가 의지를 철컥이며 앞으로 나섰다.
다리에서 파지직거리며 전격이 튀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얘도 곧 가겠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 그렇게 됐으니까 말이야. 알아서 잘 따라오라고?"

피식 웃는 소리, 그 다음으로 우렁찬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둥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흙도 조금 튀었고.

"…따라갈까요?"

"…가야지."

이래서 대표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손은 이제 내려도 되지 않을까?"

"조금만 더 있다가."


536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4:11




"늦는다고. 출발한 지가 언젠데 이제 오는거야? 장애물도 손수 치워줬더니만."

"남들이 다 너만큼 빠르진 않아, 타케미카즈치."

"알 게 뭐람, 느린 놈 잘못이지."

참 한결같구나 싶다.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곤 고개를 돌렸다.

벽이고 바닥이고 낡은 벽돌로 가득했던 통로는 어디가고, 제법 미래적인 디자인의 검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전체에 문양처럼 새겨진 조명에서 하늘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촛불 정도의 밝기였지만, 의외로 이 곳을 전부 밝히기엔 충분했다.
재료로 쓰인 검은 금속 때문인 듯 했다. 빛의 반사율이 심상치 않은 것이, 이 정도면 사실상 색만 까만 거울이다.
조명의 빛 때문인지, 내 모습은 가까이 가야 비춰졌지만.

방의 한쪽 벽면에는 홀로그램 패널이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울 기세로 떠오르는 수많은 화면을 보자니, 아무래도 여긴 기록실이나 그에 준하는 곳인 모양이다.
다행히도, 데이터는 온전히 남아있는 듯 보였다. 아니면 그 녀석이 일부러 남겨뒀을 수도 있고. 어찌됐건 이 쪽엔 좋은 일이지.

패널 밑쪽에는 어떤 기계와 함께 터스크가 있었다. 저게 아마 메인 컴퓨터 비스무리한 무언가인 모양이다.
타케미카즈치가 해킹했는지, 살짝 그슬려있는 기기에 터스크가 USB를 꽂았다. 그와 동시에, 패널엔 데이터 이전 중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전 완료까지 11분…13분…12분…"

"너 컴퓨터 써본 적 없지?"

일단 어림잡아 10분 정도인가. 데이터를 다 옮기고 나면 바깥으로 나가 수송기를 호출하면 될 것이다.
그 때까진 잠깐 쉬어도 되겠지.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엘리트도, 정보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좀 쉬운걸…."

"어머나, 설마 하던 배틀 정키 타입?"

"전혀 아니거든? 그냥… 너무 순조로워서 뭔가 찜찜하단 말이야."

"과아연, 여자의 감이란 녀석인가. 404 오류, 본 기체에게서 해당 모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삐비빅."

"…이제 와서 로봇 흉내 내기엔 많이 늦었지 않아?"

"저런,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나."

하여간에.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별 건 아니고. 우리 임-시 리더에게 작은 조언을 해 주러 왔지."

"…대표자라고 해 줄래?"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고 뭔가 바뀌는 건 없─ 어이쿠, 알았어. 대표자님."

…저게 진짜.

"뭐, 그래.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연구실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했던가?"

"그렇지? 건네받은 자료에도 그렇게 나와있었고."

"자알- 생각해 봐. 그런 것 치곤 이상하게 관리가 잘 되어있었지 않아?"

"그건…."

확실히. 어딘가 순식간에 지나가서 놓친 감이 있긴 하지만, 다시 되짚어보니 수상한 점이 많다.
이 방의 전력이야 타케미카즈치가 공급했다 쳐도, 다른 함정들은?
그만한 수의 함정들이, 아무런 관리 없이 부식은 커녕 조금의 녹도 슬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거기다, 아까까지 지겹도록 봤던 벽돌.
얼핏 보기엔 그냥 낡은 벽돌로 보였지만… 연금술사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낡아보이도록' 만든 벽돌이다.
겉을 조금 깎아내고, 약품을 뿌려주면 세월의 흔적을 덧입히는 건 어렵지 않다. 그 벽돌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애초에, 연구소라며. 연구를 위한 도구들은 어디 있었지?
있었던 건 그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함정, 그것도 오로지 새 것들로만.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애초에, '방치'된 게 아니었던 건가?"

우리가 미리 올 줄 알고, 연구소를 이렇게 개조해 놓은 거라면.

하지만 그러면 새로운 의문이 남는다. 애초에 우리가 오는 건 어떻게 알고?
라이브러리안을 쳐다보자, 그녀는 그저 싱긋 웃었다. 더 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데이터 이전이 완료된 모양인걸,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자고. 대표자님."

라이브러리안이 기기로 다가가, USB를 빼 품에 넣었다.
다른 모두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이 일은 돌아가서 항의를 해 봐야겠다. 크리스든, 매그에게든.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537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6:34

"뭐, 뭐야?!"

그 때, 터스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아까 그 홀로그램 패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고, 나는 볼 수 있었다.

[버그성 플레이는 하면 안 되지.]

홀로그램, 아니, 벽면을 통째로 채우는 그 거대한 메세지를.

라이브러리안 덕분에 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나는 다급히 아츠를 발동하고 주위를 훑었다.
인근이 시내이기 때문인지, 소녀는 제법 가까운 곳에 숨어있었다. 그 특징적인 금발이 살랑이는 게 선명했다.
그 총구가 향하는 방향도 선명했다.

"터스크, 피해!!"

터스크가 몸을 날렸다. 한 박자 늦게, 열선포가 벽을 뚫고 난입했다. 거대한 열에너지가 터스크의 발뒤꿈치를 스치며 지나갔다.
터스크가 느렸다? 아니, 열선포가 빨랐다. 그것도 너무. 오히려 그가 민첩하게 반응했기에 이 정도에서 끝났다.

그래도 하필이면 아킬레스건인가, 치료받기 전까지 터스크는 이제 뛸 수 없다.
아니, 괜찮다. 뛰지 못한다면 누가 업고 가면 될 문제다. 스베노쉬나 블랙 헤븐이라면 능히 옮길 수 있다.
내 입이 다급히 열리며, 그 둘을 부르려고 했다.

거울, 검은 거울.
하늘빛 조명을 받아 조심스레 빛나던 그것에, 열선포가 튕겨나왔다.

도탄(跳彈)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궤적에, 사선에 있던 라이브러리안이 그대로 꿰뚫렸다.
왼쪽 어깨가 그대로 증발하고, 가슴팍이 녹아내려 형체를 잃는다. 그러고도 열선포는 멈추지 않아, 방 안을 종횡무진하다 사그라들었다.

기적적으로, 아니면 상대가 의도한 대로,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지지대를 잃은 라이브러리안의 왼팔이 그대로 추락해 차가우면서도 애처로운 소리를 내었다. 텅, 터덩.

"터스크!! 라이브러리안!!"

내가 터스크에게 달려가고, 스베노쉬와 블랙 헤븐이 근처에 있던 라이브러리안을 챙겼다.
타케미카즈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괜찮아?!"

"크… 오랜만이구만, 이 더러운 기분."

"서 있으려 하지 마! 거기서 더 손상되면 재생이 불가능해질수도 있어!"

"괜찮아… 익숙하거든, 이런 건"

"익숙하긴 뭐가!! 환자면 얌전히 있어!"

터스크를 부축하며, 나는 아츠를 다시 활성화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두 번째 저격은 없었다. 저격수, 티나는 총을 내리고 누군가랑 통신하는 듯 하더니, 이내 빨간 스위치를 꺼내서 눌렀다.
그리고 등을 돌려서 가 버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뭐지? 저격하기엔 지금이 적기일 텐데?
저 통신은 역시 로켄 헤시드인가? 방금 누른 스위치의 정체는 대체 뭐지?

나는 그런, 답도 얻지 못할 하잘것없는 질문들에 휩싸여, 잠깐 눈이 멀었었다.

참으로 멍청하게도.

538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7:21

"…어?"

눈치챈 순간, 나는 이미 떠밀려져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엔 터스크가 있었다. 부축해줄 사람이 사라지자, 그는 앞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아킬레스건이 나가버린 상태에서 온 체중을 실어 나를 떠미느라, 그는 앞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말했잖냐, 익숙하다고."

그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잘 있어라."

콰앙.

539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7:46

공기를 부수고, 바닥을 깔아뭉개며 난 폭음이.

얼핏 폭죽의 소리만 좀 키워놓은 것 같이 하잘것없다가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잔인한 소리가.

내 얼굴 위로 몇 방울 튀겨, 흘러내렸다.

그것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붉었고, 또 찐득했다.

"터스, 터스크?"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듣지 못 할 것이다.

아무렴, 한낱 금속 뭉치가 그의 머리를 대신할 순 없으리라.

54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8:24

"터스크, 터스크!!!"

반쯤 넘어져가며 달려나가던 내 손목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스베노쉬였다.

"정신 차려, 빨리 탈출해야 해!"

"잠깐만, 이거 놔! 저기 터스크가 있단 말이야!"

터스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스베노쉬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나를 한 팔로 들쳐메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 여기, 무너지고 있단 말야!"

그제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사방이 요동치고 있었다.
벽, 천장, 바닥. 곳곳에 거미줄처럼 그어진 검은 실선들이 부르르 떨면서 먼지를 토해내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가래를 뱉듯, 커다란 금속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하지만.

"스베노쉬! 잠깐, 잠깐만! 스베노쉬!! 적어도, 적어도!!"

54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8:33

적어도, 시체만이라도.

그렇게 바라며 뻗은 손은,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 했다.


54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9:06




결과적으로, 임무는 실패했다.
라이브러리안이 중상, 그리고 터스크가 …사망한 것도 물론 큰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열선포가 뚫고 나간 라이브러리안의 가슴팍에 USB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USB는 증발, 데이터는 모조리 소실됐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임시기동대 델타는 해체된다.

"푸흐, 푸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해체란다, 해체.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고, 다른 녀석들은 우리를 은근슬쩍 차별하면서.
그럼에도 꾸역꾸역 남아서 끝까지 살려보겠다고 붙들고 있었는데.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과가 이따위로 돌아오니, 웃음이 안 나오고 배길 수가 있나.

543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39:39

"거지같네…."

비어있는 잔에 다시금 술을 따르며, 나는 마지막 임무를 떠올렸다.

그 때, 투시를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마지막 방은 미처 확인하지 못 했던 걸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러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왜 라이브러리안의 충고를 좀 더 파고들지 못 했을까? 왜 그냥 의문점 수준에서 묻어놓았던 걸까?

만약 내가 좀 더 조심했다면, 터스크는 살았을까?

모르겠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술을 너무 마셨나.
주량은 그래도 자신 있는데, 얼마나 마신 거지.

"…됐다."

지나다니는 풍경은 예쁘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놈들도 없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그러는데 술 몇 잔 더 들어가는 것 정도가 대수랴.

어느새 비어있는 잔에 다시 한 번 술을 따랐다. 청량한 바람이 갑판을 휩쓸자 수면에 파문이 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걸 쭈욱 들이켰다.

술은 쓴 맛이 났다.

544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0:29

"아, 여기 계셨군요. 알케미스트 씨!"

"…블랙?"

갑판에 앉아 가만히 술을 축내고 있자니, 문을 열고 블랙 헤븐이 들어왔다.
그 손에는 단말이 두 개 들려있었다. 하나는 자기 거겠고, 하나는… 내 거다.

일부러 놔두고 왔었는데.

"무슨 일이야?"

"델타에게 임무가 내려와서요. 알케미스트 씨는 단말을 놔두고 가셨으니까, 알려드려야겠다 싶어서!"

"…응, 고마워."

임무, 임무라.
해체될 팀에 굳이 임무를 넣는 이유는 또 뭔지.
사람 하나하나가 어지간히 귀하긴 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무시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만….

"…."

"?"

그러기엔, 이 순박한 천사가 마음에 걸린다.

터스크가 죽었던 그 날 이후로, 블랙 헤븐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만사에는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 딴에는, 모두가 힘들어하니 자신만이라도 밝게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 연기인 게 다 티가 나서 그렇지.

지금도 보라. 내 주변엔 널브러진 술병이 한가득에, 스스로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술냄새가 나고 있건만.
블랙 헤븐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집합 장소는… 뭐, 휴게실이겠지. 언제까지 가면 돼?"

"아, 그러니까… 30분 남았네요!"

그러니까, 어쩌겠는가.
없는 기운도 끌어서 낼 수 밖에.

"빡빡하구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준비한 뒤 갈 테니까."

"네. 그럼 수고하세요, 알케미스트 씨!"

블랙 헤븐은 나에게 단말을 건네준 뒤 먼저 휴게실로 향했다.

그럼, 이쪽도 준비해야지.
술병들을 치우고, 술냄새도 지우고.
다 하기엔 30분은 제법 촉박한 시간이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나는 가장 먼저 널브러진 술병들을 집어들었다.


545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5:09




라이타니아와 시라쿠사 사이.
재앙에 휩쓸려버리고 만 이동도시의 구제가 바로, 델타팀이 받은 임무의 내용이었다.

"쯧, 이젠 하다하다 자원봉사를 시키는군."

그렇게 말한 타케미카즈치는 흥미 없다는 말을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뭐, 그래. 차라리 저게 낫다. 타케미카즈치의 성격을 생각하면, 구제를 맡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어련히 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타케미카즈치에 대해 신경을 끄고, 임무의 대상이 된 이동도시를 바라봤다.

재앙에 휩쓸렸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닌 듯, 이동도시의 상태는 처참했다.
폐허, 폐허, 폐허.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폐허 뿐. 바람막이라도 될 법한 무언가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나있다.
그 사이사이에서, 누더기를 입은 사람들이 신음했다.

그나마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재앙의 영향을 적게 받은 외곽지역이다. 중심부는 이것보다 훨씬 심각한 광경이겠지.
애초에 재앙을 마주하고서도 이동도시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으니, 그마저도 상당한 행운인 셈이다.

"그나저나 구제라… 뭘 어떻게 해야 좋은지, 원."

"글쎄, 저런 것들을 도와주면 되는 거 아냐?"

스베노쉬가 남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고 있는 소매치기를 가리켰다.
물건의 원주인이 소매치기의 뒤를 쫓는다. 그러다 소매치기가 발이 걸려 넘어지고, 물건의 주인은 그런 소매치기를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팬다.
그렇게 맞고도, 일단 살아는 있는지 꿈틀거리는 소매치기.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그의 주머니를 뒤져보곤 혀를 차며 떠나간다.

…옛날 생각이 난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폐허 아니랄까봐 치안이 개판이구만, 이거."

"어쩌겠어, 지금 여긴 경찰도 뭣도 없는걸."

"혹시 모르지, 저 안에 경찰이었던 양반이 섞여있을지도."

"…."

"하하, 로봇 조-크."

로봇이라서 그런가, 쟤는 참 한결같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흩어지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뭉쳐다니면 효율이 안 좋을 테니까."

"나야 뭐, 상관없지."

"좋아, 블랙은?"

"네, 네?! 아, 저도 괜찮아요!"

명백하게 당황한 모습. 이 이동도시의 모습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얘를 혼자 놔둬도 되는 건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잘 할 수 있겠어?"

"물론이예요! 맡겨만 주세요!"

…그렇다니까, 한 번만 믿어보기로 했다. 일단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애도 아니니까.

그래도, 역시 좀 신경쓰인다.


546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6:30




겉에서 봤던 폐허와, 안에서 봤던 폐허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였다.

밖에서 봤던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사지가 망가져 신음하는 사람, 무너진 건물에 깔려 사경을 헤메는 사람.
실성한 듯 그저 끊임없이 웃고만 있는 사람, 죽어버린 눈으로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사람.

시간이 흐르며 조금이나마 안정화가 된 줄 알았는데, 전혀 틀린 생각이었다.
바깥의 고름은 안쪽으로 모여들어 더욱 더 짙어졌다. 종말이라도 도래한 듯한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갔다.

작은 시비에도 사람들은 쉽게 언성을 높였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곧 주먹다짐으로 발전했다.
누군가가 흉기를 꺼내드는 것은 예삿일.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총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재앙은 지나갔으나, 진정한 재앙은 이제 시작이었다.
블랙 헤븐은 차마 저 사이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입을 가린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막지 않으면,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547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7:13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안 된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발 밑에, 무언가가 밟혔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있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것은 시체였다.
푸르게 멍이 들고, 어두운 피딱지가 내려앉아,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은.
폭력의 흔적이 너무나도 선명한 시체가 그 곳에 있었다.

블랙 헤븐은 무심코 자신의 아츠 유닛을 집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 버렸다.
스스로가 역겨웠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참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이걸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크리스와 라이브러리안의 권고를 무시하면서까지 여길 따라온 의미가 없다.
모두를 위해 따라왔는데, 도리어 모두에게 폐만 끼치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블랙 헤븐은 도망쳤다. 어디든 좋으니, 어디로든 도망쳤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져온다. 다리는 후들거려 서 있기 힘들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달렸는지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해가 좀 기울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블랙 헤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야겠지. 그녀는 단말을 꺼내들었다.

548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9:12

"어… 혹시 거기 누구 있어?"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귀신인가? 블랙 헤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했다.

"누구 있으면 나 좀 꺼내주지 않을래? 여기 벌써 사흘 째 갇혀있다구. 이젠 진짜로 좀 나가고 싶어!"

음, 아무래도 귀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블랙 헤븐은 목소리가 나오는 곳을 찾았다.
근처에 있던 무너진 건물과 바닥 사이, 목소리는 그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렇게 무너졌으면 밑에 사람이 있을 공간이 없는데. 지하실이나 벙커라도 있었던 걸까.
목소리도 기운이 넘치는 걸 보면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

"오오, 드디어! 알았어!"

블랙 헤븐의 지식과 힘이라면, 이런 잔해를 치우는 것 쯤은 식은 죽 먹기.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모든 걸 날려버린 그녀는, 이내 밑에 있는 갈색 머리칼의 소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소녀는 지하실에 있었다. 문짝은 뜯겨나갔지만, 대신 잔해더미가 그 위를 막아준 것이리라.
덕분에 소녀 본인도 갇혀버리고 말았지만.

"이야, 살았어! 어쩌면 평생 저 안에서 갇혀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

"아하하… 그건 다행이네요."

"꺼내줘서 고마워! 난 엘 모프스라고 해, 너는?"

"아, 저는… 블랙 헤븐이라고 불러주세요."

"블랙 헤븐? 특이한 이름이네. 알았어!"

딱히 이름은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반쯤 이름처럼 쓰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본 적 없는 얼굴인데, 혹시 최근에 여기로 왔어?"

"아뇨, 저희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로도스?! 내가 아는 그 로도스 맞지?!"

"어어… 네, 아마도 맞을 거예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야! 그럼 너도 오퍼레이터야? 아까 말한 건 역시 코드네임이지?!"

"어… 그러니까…."

블랙 헤븐은 쓰게 웃었다. 여러모로 마이페이스인 소녀였다.

하지만 방금 그런 광경을 보고 와서일까.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이 밑에 갇혀있었기 때문일까.
아이러니한 일이다. 불행이 행운이 되다니.

549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49:44

"아무튼, 진짜진짜 고마워! 나중에 만나면, 내가 꼭 답례할게! 아니다, 그냥 내가 로도스로 찾아가도 괜찮으려나?"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봐!"

엘이 손을 흔들고, 블랙 헤븐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로도스로 찾아온다면, 혹시 저 아이도 오퍼레이터가 되는 걸까.
혹시 저 아이도 델타의 일원이 되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블랙 헤븐은 생각했다.
저런 활기찬 사람이 옆에 있으니, 자신까지 기운이 나는 느낌. 지금 델타엔 무엇보다도 저런 사람이 필요했다.
밝고,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한.

…그래, 자유분방한.
다시 생각해보면, 저 어린 소녀에겐 너무 각박한 짐이었다.
블랙 헤븐은 쓰게 웃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언젠가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를 위해 블랙 헤븐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엘 또한 더욱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소녀는 무언가를 본 것인지 블랙 헤븐의 뒤쪽을 가리켰다.

550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0:07

낯선 누군가가 그녀의 주머니를 노렸다.
아까도 보았던, 지금 이 곳에 흔하디 흔할 소매치기.

문득, 블랙 헤븐은 떠올렸다.
스베노쉬가 가리켰던 그 소매치기. 발이 걸려 넘어지고, 죽기 직전까지 처절하게 맞았던 그 소매치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를 돕기는 커녕, 주머니를 뒤지다 침을 뱉고 떠나가는 다른 사람들.
그렇게 방치된 그가, 이 폐허 속을 싸늘하게 굴러다니다,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모습.

무심코, 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들린 흉악한 배트는, 소매치기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551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1:01

"아."

아직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머리와 다르게, 몸은 착실히 이미 죽어버린 그에게 다음 공격을 가했다.
머리 없는 몸이 세로로 뭉개지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길고 길었던 척추는 어긋날 새도 없이 단번에 뭉개졌다.
철퍽. 추잡하게 양단된 몸이 방금 만들어진 피웅덩이 위로 넘어졌다.

"…어?"

끼릭, 도쿠로의 고개가 돌아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거부하고 있는 건지.
아직 무언가 멍한 상태인 도쿠로의 머리는, 똑같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속삭였다.

목격자라고.

"미안해요."

도쿠로가 날아들었다. 바람을 찢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배트를 소녀는 피할 수 없었다.
두개골은 연약했다. 차라리 그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조금 더 거슬렸다.
물론, 둘 다 의미 같은 것은 갖지 못했다.

도쿠로 덕에 잔해 밑에서 빠져나왔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도쿠로에게 살해당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행운이 불행이 되다니.


552 알케미스트 (a2Zk/JKcSo)

2022-02-12 (파란날) 13:52:23




아까 보았듯, 이 곳은 바람막이가 될 만한 무언가조차도 없이 철저하게 박살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리저리 돌아가는 일 없이 최단거리로 달릴 수 있었다.

"젠장, 젠장, 제기랄…!"

불안하다는 걸 알았다. 위태롭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혼자 놔뒀다. 그 결과가 저 꼴이었다.

그나마 계속 신경쓴 탓에 조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멈춰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더 이상 블랙 헤븐이 사람을 죽이게 둬선 안 된다.

"블랙─!!"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져온다. 다리는 후들거려 서 있기 힘들다.
익숙한 감각이다. 종잇장같은 몸으로 앞뒤 안 가리고 달려왔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덕분에 어찌저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랙 헤븐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헤일로에 묻은 피가 주우욱 늘어졌다. 마치 헤일로 그 자체에서 피가 나고 있는 듯 했다.

알 수 있다. 의사니까.
저 모습, 일부러 피를 들이부어도 저렇게 되기 힘들다. 한둘의 피가 튀었다고 가능한 수준이 절대 아니다.
필사적으로 달려왔건만, 그 사이에 이미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더….

아니, 아니야 괜찮아.
돌아갈 수 있어, 괜찮아. 돌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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