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일부러 떠올려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자는 정진할 때마다 저절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는 게 좋은지, 안 하는 게 좋은지 묻는 질문은 맞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질문자는 과거의 기억을 묻어두고 살아온 겁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 보니까 미처 그 생각이 안 났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수행담을 듣고 자극을 받아서 기도할 때 생각이 일어난 것인데, 묻어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덮어둔 기억을 일부러 드러내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덮인 건 그냥 덮인 채 두되, 저절로 벗겨져서 밖으로 나온 생각을 억지로 다시 덮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드러나는 생각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아픈 기억이 떠올라 분노와 슬픔이 생긴다면, 과거의 일이 상처로 남았다는 말입니다. 즉 트라우마(trauma)가 생긴 겁니다. 트라우마는 덧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슬픔과 분노가 생기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때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됩니다. 이렇게 덧나는 현상이 삶을 왜곡시키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사는 데 많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치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상처로 남았다면 치유해야 합니다.
만약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라면, 과거의 기억을 자신이 직면하는 게 좋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욕을 하고 큰소리치고 때렸다면, 엄마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상처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되어 질문자가 엄마의 나이가 되었으니 다시 그때를 한번 되돌아보세요. 엄마가 질문자를 괴롭힐 작정으로 그랬을까요? 엄마 자신도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악을 쓴 것일 뿐입니다. 질문자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니고, 괴롭히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엄마 자신의 삶이 힘들어서 악을 쓰고 성질을 낸 것입니다.
물론 엄마가 자식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좋겠지만, 엄마의 수준이 그만큼인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엄마에게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밥 먹이고 옷 입히고 빨래 해서 질문자를 이만큼 키워줬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질문자도 성질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고함 지르는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 그렇게 할지라도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크지 않겠어요?
어른이 되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엄마가 나를 미워한 게 아니라 엄마도 힘들어서 그랬구나’ 하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상처를 받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보니 별일 아니구나’ 하고 자기 치유를 해나가야 합니다. 기억을 떠올려도 더 이상 분노나 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 자체를 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치유된 게 아니라 단지 덮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기억이 안 나서 상처가 안 일어나는 것은 언제라도 기억이 떠오르면 상처가 드러나게 됩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상하다 보면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일 뿐입니다. 안 떠오르면 안 떠오르는 대로 괜찮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치유하면 되는 일입니다. 통증이 있으면 안 좋은 느낌이 들지만, 통증이 있어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무릎의 연골이 찢어져도 통증이 없으면 모르니까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통증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통증은 좋은 거예요. 통증이 없으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이 썩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통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도 내가 나를 소중하게 안 여기는데 누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 줄까요?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도 다른 사람은 나를 별로 소중하게 안 여겨주잖아요. 그런데 나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겠어요? 그러니 내가 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기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는 내가 나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달리기를 해서 다른 사람보다 좀 뒤처졌다고, 공 던지기를 해서 다른 사람보다 좀 못한다고, 영어 시험에서 성적이 잘 안 나왔다고, 돈을 조금 적게 번다고, 사회적 지위가 좀 낮다고, 온갖 이유를 붙여서 자기를 하찮게 여깁니다. 사람하고 관계를 맺다가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또는 주식을 샀다가 주식이 좀 떨어졌다고 해서 자기를 하찮게 여긴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태도는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지위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죠.
지금 자기를 진지하게 한번 돌아보세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자기가 가장 소중한 존재다.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자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남도 소중하게 여길 줄도 모르고, 남으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을 줄도 모릅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남으로부터 사랑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가 소중한 줄 알아야 해요. 자신을 하찮게 여기거나 괴롭히지 않아야 합니다. 차바퀴가 고장 났으면 갈면 되는 것이고, 창문이 깨졌으면 창문을 교체하면 되는 것이지 차를 버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렇게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한 시간은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자기에게 좀 집중하라는 거예요. 하루 종일 자기에게 집중하면 제일 좋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매일 한 시간은 자기에게 관심을 좀 가져보라는 겁니다. 아침마다 정진을 해보면, 내가 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자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묻었으면 씻고, 응어리가 졌으면 좀 풀고, 학대를 했으면 보듬어 안아주세요.
자기를 소중히 여겨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뿐입니다. ‘그들이 볼 줄 몰라서 그런 거지, 남이 뭐라 하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혹시 잘못 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면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있어요. ‘혹시 내가 잘난 척을 했나?’ 이렇게 한번 체크는 해볼 필요가 있지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건 그 사람이 보는 관점이니 뭐라고 하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금덩이를 보고 남들이 은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게 은이 되나요? 여러분들이 자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니까 자존감이 없어지고 자꾸 남의 말에 흔들리게 되는 겁니다.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자꾸 ‘남이 알아주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내 공로를 몰라준다’,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내 마음을 몰라준다’, ‘내가 스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는데 스님이 나를 못 본 체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아무리 헌신을 해도 자기중심이 없으면 그 헌신마저도 원망의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그건 부차적인 거예요. 수많은 일들을 해서 상을 받았다 한들 본인이 괴롭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 정진을 해서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사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리가 아프면 좀 아플 뿐이고, 허리를 다쳤으면 다쳤을 뿐이고, 못 걸으면 못 걸을 뿐이지, 그로 인해 괴로울 이유는 없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지팡이를 짚으면 되고, 못 걸으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됩니다. 그것도 못하면 그냥 참선하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멀쩡한 다리도 안 움직이고 참선을 하는데, 아픈 다리를 그냥 두고 참선하는 게 무슨 어려운 일입니까. 이렇게 수행적 관점을 좀 분명하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괴롭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래서 괴롭습니다’, ‘저래서 괴롭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건 괴로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 또 ‘저것 때문에 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또 ‘그것도 괴로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 또 ‘이것 때문에 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몇 번 주고받다 보면 마치 자신이 괴롭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그래, 그렇게 괴롭고 싶으면 실컷 괴로워해라’ 하고 말하게 되죠.
이렇게 수행을 바탕에 깔고 나서 세상에 좀 쓰임새가 있고 남에게도 보탬이 되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보람된 일을 같이 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혼자 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도 해보니 힘든데 무슨 근거로 여러분에게 헌신적으로 하라고 말하겠어요?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 조금만 하라는 겁니다. 기부도 다 하라는 게 아니고 번 것 중에 일부만 하고, 시간도 조금만 내고요. 먹는 것도 조금 줄이고, 입는 것도 조금 줄여 보세요. 이렇게 조금만 조절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가볍게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은 미미할지 몰라도 그것을 모두 합치면 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각오나 결심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각오나 결심을 한다고 해서 며칠 가겠어요? 뜻대로 안 되면 자학만 하게 됩니다. 그러니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만 해보세요. 해보고 좋으면 좀 더 하고, 이 활동이 정말 좋으면 공동체에 아예 들어오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마세요. 여러분들 한 명이 더 참여한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겠어요? 여러분들 한 명이 안 한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나빠지겠어요?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내 작은 힘이라도 하나 보태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도움이 좀 되겠죠. 그러니 ‘안 해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깐 한번 해보자’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 보면 좋겠어요.
지금 시대는 여러분들이 껄떡거리지만 않으면 돼요. 승진하려고 껄떡거리고, 일은 조금 하고 돈은 많이 받으려고 하고, 주식이나 코인을 사면 갑자기 돈이 뻥튀기되어서 들어오는 줄 알고, 이렇게 우리는 투기적 관점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회에서 내가 지능이 좀 모자라든, 기술이 좀 모자라든, 돈이 좀 없든, 키가 좀 작든, 이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조금 더 당당하게 살면 좋겠어요. 비굴하게 자꾸 껄떡거리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