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049734> 마음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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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9 22:09:01 - 2024-07-19 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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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9 (불탄다..!) 22:09:01

사랑은 죄악이네, 알고 있나?

- 마음, 나츠메 소세키, 45쪽 현암사판

1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12:04

"신혼부부인가 보군." 선생님이 말했다.
"사이가 좋아보이네요." 내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쓴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두 남녀가 안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넨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랑을 하고 싶지 않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겠지?"
"예."
"자넨 방금 그 두 남녀를 보고 놀리지 않았나? 그렇게 놀린 데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상대를 구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포함되어 있었을 거야,"
"그런 식으로 들렸습니까?"
"그렇게 들렸네. 사랑의 만족을 맛본 사람한테서는 좀 더 따뜻한 말이 나오는 법이거든. 하지만......, 하지만 사랑은 죄악이네. 알고 있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마음, 나츠메 소세키, 45쪽 현암사판

2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22:27

"사랑이 죄악인가요?" 내가 불쑥 물었다.
"죄악이지. 분명히" 하고 대답했을 때 선생님의 어조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강했다.
"그건 어째서죠?"
"어째선지 곧 알게 되겠지. 곧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을 거네. 자네 마음은 진작부터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일단 가슴속을 점검해보았다. 하지만 내 가슴속은 의외로 공허했다. 짚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 가슴속에는 이렇다 할 대상이 전혀 없습니다. 전 선생님께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상이 없으니까 움직이는 거라네.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움직이고 싶어지는 거지."
"지금 그렇게까지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요."
"자네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나한테 온 거 아닌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사랑과는 다릅니다."
"사랑에 이르는 단계라네. 이성과 껴안기 전에 먼저 동성인 나한테 온 거지."
"저한테는 그 둘의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니, 같은 거네. 난 남자라 도저히 자네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사람이지.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있어 더더욱 자네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네. 실제로 나는 미안하게 생각해. 자네가 나한테서 다른 데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나는 오히려 그걸 바라지. 하지만......."

(중략)

"내가 또 잘못했군. 초조하게 하는 게 안 좋을 거 같아서 설명하려고 하면 또 그 설명이 자네를 초조하게 만드는군그래. 아무래도 어쩔도리가 없네. 이 문제는 여기서 그만두기로 하세. 아무튼 사랑은 죄악이네. 알겠나? 그리고 신성한 거지."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점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더 이상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 마음, 나츠메 소세키, 46~48쪽 현암사판

3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25:12

"선생님은 왜 예전처럼 책에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거죠?"
"딱히 이유는 없지만......, 말하자면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겠지. 그리고......."
"그리고 또 있습니까?"

"또 있다고 할 만한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모르면 수치인 것 같아서 거북했는데 요줌에는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책을 읽어보려는 마음이 안 생기는 거겠지. 간단히 말하면 늙어빠졌다는 거네."

- 마음, 나츠메 소세키, 75~76쪽 현암사판

4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29:43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다들 좋은 분들인가?"
"특별히 나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니까요."
"왜 시골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추궁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대답을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친척들 중에 이렇다 하게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 마음, 나츠메 소세키, 82~83쪽 현암사판

5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35:24

"아까 사람은 누구든지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의미라고 해봐야 깊은 의미가 잇는 건 아니네. ......다시 말해 그냥 사실인 거지. 억지 이론이 아니네."
"사실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대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거죠?"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한참 시간이 지나가버린 지금 다시 열심히 설명할 의욕이 안 생긴다는 듯이.
"돈이지. 돈을 보면 그 어떤 군자라도 금세 악인이 된다네."
내게는 선생님의 대답이 너무나도 평범해서 실망스러웠다. 선생님이 별로 신명이 나지 않듯이 나도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자연히 선생님은 살짝 뒤쳐졌다. 선생님은 뒤에서 "이보게, 자네"하고 말을 걸었다.
"그것 보게."
"뭘요?"

"자네의 기분도 내 대답 하나에 금세 변하지 않았나?"
기다리려고 뒤돌아서 멈춘 내 얼굴을 보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 마음, 나츠메 소세키, 85~86족 현암사판

6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40:10

"아니, 그렇게 보였다고 해도 상관없네. 사실 흥분했으니까. 나는 재산 이야기만 나오면 꼭 흥분한다네. 자네한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래 봬도 난 집념이 무척 강한 사람이야. 남한테서 받은 굴욕이나 손해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거든."

(중략)

"나는 남한테 속았다네. 그것도 피를 나눈 친척한테 속았지. 나는 결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네.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착한 사람인 것 같았던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으로 변했거든. 난 그들한테서 받은 굴욕과 손해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네. 아마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겠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을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복수하지 않고 있네. 생각하면 나는 실제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증오하고 있거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7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41:12

>>6 - 마음, 나츠메 소세키, 87~88쪽 현암사판

8 K (7ey6TCRhcY)

2024-07-19 (불탄다..!) 22:45:35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네. 그렇게 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고나서 깜짝 놀랐네. 그리고 굉장히 두려워졌지."

(중략)

"아무튼 날 너무 믿으면 안 되네.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속은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잇는 선생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마음, 나츠메 소세키, 49~50쪽 현암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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