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을 직시하는 겁니다. 질문자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해도 안 되고, 지금 때문에 괴로워해도 안 되고, 미래 때문에 괴로워해도 안 됩니다. 과거에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와 미래의 나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을 만나서 내가 불친절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면 그 사람은 기억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자 혼자서 환상을 보고 괴로워했다는 것이 되잖아요. 이것은 마치 밤에 꿈을 꾸다가 꿈속에서 남을 때렸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도 ‘어제 내가 밤에 사람을 때렸는데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같은 겁니다.
그런 선한 마음을 갖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은 우리가 죽든 살든, 괴롭든 슬프든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만약 나를 위해서 이 일을 만들고, 나 공부하라고 저 일을 벌여주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과대망상증이에요. 세상은 질문자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 욕을 해도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면 욕을 먹는 거고, 누가 나를 칭찬해도 그 칭찬이 도리어 나에게 손해가 되면 그때는 칭찬도 거절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어떤 기준이 없어요. 나한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보고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상대방은 상대방 성질대로 그냥 말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비는 그냥 오게 될 때 오는 겁니다.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자꾸 연결을 지어서 ‘이러라고 비가 오는구나’, ‘이러라고 비가 안 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착각이에요. 비한테 물어봐요, 비는 그렇게 생각해서 오는 게 아니에요. 비가 올 때는 우리가 소풍을 가는지 안 가는지 고려 안 하고 그냥 와요.
그런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얘기예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렇게 생각을 했고, 또 대중을 혹세무민 하기 위해서 ‘오늘은 내가 가니까 비도 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야 대중들이 혹 하니까요. 그런데 비가 오는 거랑 우리가 남산 순례하는 거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비가 와도 남산 순례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들면 설령 계획을 했더라도 안 하면 돼요. ‘비를 맞아가면서 모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비 맞으면서 노는 게 뭐가 어렵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 또 이렇게 모여서 노는 거예요. 이건 하느님이나 부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결국 그런 조건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복권을 샀는데 당첨이 안 되거나, 오락실에 갔는데 돈을 잃었다고 슬퍼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수학에서 기댓값이라는 거 알아요? 복권이나 오락실 기계들은 모두 100원을 넣으면 평균 기댓값이 49원만 나오게 설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런 걸로 돈을 벌겠다는 건 이치와 맞지 않습니다. 대신 재미로 하는 건 괜찮아요. 100원을 내고 49원을 받아도 재미를 봤다면 51원을 잃을 가치가 있어요. 51원을 잃는 대신 재미라는 가치를 얻었잖아요. 그런데 그걸로 돈을 벌겠다는 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락하면서 사람들이 돈을 잃어줘야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생기잖아요. 주식도 마찬가지예요. 주식을 하는 회사 직원들도 사람들이 돈을 잃어줘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알고 해야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이 주식을 밀어주고 저 주식을 밀어주겠어요.
질문자가 사람들과 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하늘에서 간섭을 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그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미국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영국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건 적응력이 부족한 거예요. 적응력이 부족한 사람은 농촌에 가도 힘들어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고,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답답해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고, 산에 가자고 하면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다고 해요.
세상 사람들은 내 인생에 별 관심이 없어요. 내가 과대망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부처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내가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날 일은 없겠죠.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면 얼른 교통사고가 나지 않게 손을 쓰시겠죠. 교통사고는 고사하고 성당이 불에 타는 것도 가만히 두시는데 무슨 다른 일에 관여를 하시겠어요?
거기에 용기가 왜 필요해요? 선택이 망설여지는 것은 어느 선택이 좋은지 몰라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과보를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릴까요, 말까요?’라고 물으면 정답은 없어요. 돈을 빌리고 싶으면 빌리고, 안 빌리고 싶으면 안 빌리면 됩니다. 다만 빌리면 갚아야 하고, 갚는 게 싫으면 빌리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인생에는 그 두 가지 길 밖에 없어요.
그런데 자꾸 요행을 바라면 누군가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님한테 물으면 결국 스님의 노예가 됩니다. 요즘은 1,500여 개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모두 봤다는 사람도 많이 만나는데, 그건 좋은 증상이 아니라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이 유튜브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몇 개만 보고 ‘아, 스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으면 자기 문제에 적용하면서 계속 결정을 하고 책임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연습은 하지 않고 스님이 말하는 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건 중독증이에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질문자가 그냥 혼자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그런 자의식을 갖는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자취를 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가서 쌀과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쌀자루에 김치 단지를 넣어서 안 흔들리도록 묶어서 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많다 보니 김치 단지가 기울어져서 국물이 새 나왔어요. 김치 국물이 묻은 것을 어깨에 메고 버스에서 내려서 자취집까지 오면 하얀 여름 교복에 김치 국물이 벌겋게 묻습니다. 얼룩진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면 여학생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가만히 살펴보니까 아무도 나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옷이 벌거니까 ‘벌겋구나’ 하고 한 번만 보고 마는 것인데, 저 혼자 괜히 신경을 썼던 거예요. 이것을 ‘자의식’이라고 합니다. 다들 자기 살기 바빠서 아무도 신경 안 써요. 그냥 한 번 툭 던져보는 겁니다. ‘장가는 갔나?’ 이렇게요.
누구나 다 이렇게 남을 의식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경 좀 써 달라고 광고판을 들고 있어도 신경 안 씁니다. 다 각자 자기 살기 바쁘기 때문이에요. 다만 지나가다가 눈에 보이니까 이렇게 쳐다는 봐요.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에요. ‘옷에 뭐가 묻었네’ 이렇게 그냥 쳐다보는 거예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질문자는 약간 과대망상증이 있는 겁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누구 뒷담화를 하는 것도 꼭 상대를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입이 심심하니까 ‘걔는 어떻게 지내니? 걔는 아직 장가도 안 갔지’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진짜 장가를 가냐 안 가냐는 관심도 없어요. 관심 있으면 여자를 딱 데려와서 소개를 해 주겠죠. 그렇게는 안 하잖아요.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아이들을 만나면 누구든지 ‘몇 살이야?’, ‘몇 학년이니?’ 이것부터 먼저 묻잖아요. 진짜로 아이들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묻는 걸까요? 아이들을 만났는데 할 말이 없으니까 그냥 묻는 거예요. 아이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고장 난 녹음테이프 돌아가듯이 똑같은 질문을 물으니까 신경질을 내지만,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니까 그냥 던지는 말이에요. 그런 질문에는 그냥 아무 대답이나 하면 됩니다. ‘몇 살이니?’ 이렇게 물으면 아무 나이나 대답하면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제일 스트레스받는 것이 결혼과 직장 문제입니다. 그런데 명절에 집에 가면 계속 이것만 물으니까, 명절에 잘 안 가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힘들어하는 청년들한테 ‘신경 쓰지 마라. 엄마도 별 관심 없이 그냥 하는 소리다’ 이렇게 얘기해 줍니다. ‘우리 아들, 장가갈 거지?’ 이렇게 물으면, ‘네’ 이러면 돼요. ‘언제?’ 그러면 ‘곧 갈 거예요’ 이렇게 그냥 받아주면 돼요. 그런 말에 너무 신경 쓰는 것을 불교 용어로 ‘경계에 끄달린다’라고 표현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소리에 휘둘려서 자기중심을 못 잡는 거예요. 남의 시선에 좌우되어서 사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네. 그렇죠’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면 돼요.
똑같은 스님 얼굴을 두고 어떤 사람은 ‘스님, 요새 얼굴이 안 좋아 보이세요’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이고, 얼굴이 좋습니다’ 그럽니다. 실제로는 제 건강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유튜브에서 본 얼굴과 비교해서, 그것보다 살이 빠졌으면 안 좋다고 얘기하고, 살이 쪘으면 얼굴이 좋아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나쁜 의도로 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인사 치례로 하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새가 그냥 짹짹짹짹 하듯이 짹짹 대는 거예요. 그걸 문제 삼는 것은 아침에 새가 짹짹 댄다고 ‘쟤는 왜 아침 5시에 짹짹 대지?’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 남이 하는 그런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들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