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나이, 자기 건강, 자기 상태에 맞게끔 살아가는 게 평범한 삶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병을 조금씩 안고 살면서 예방할 수 있는 일은 예방하는 겁니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더라도 그걸 먹고 내가 가려워진다면 ‘이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는 맛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독이구나’ 하고 그 음식을 안 먹어야 합니다. 관점을 그렇게 가지고 살아가면 지금 당장 아무 문제가 없어요. 눈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자꾸 남을 쳐다보면서 ‘저 사람은 안 가려운데 왜 나만 가려운가?’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자는 기후 위기 시대에 친환경적인 자연 생태 속에서 생채식을 하며 살아가는 미래 지향적 삶을 체질적으로 타고났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은 식단 조절이나 운동을 안 해도 살만하다는 방증입니다. 피부가 가렵다고 해도 견딜 만한가 봅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 보여도 ‘여기에 독이 들었다.’ 하는 말을 듣고 ‘그래도 조금만 먹어보면 안 될까?’ 하는 사람은 없어요. 종류와 색깔과 맛에 관계없이 독이 들었다 하면 그걸로 딱 끝이 나야 합니다. 운동을 해야 몸이 좋아진다고 하면 운동을 하는 것이고, 생채식을 해야 한다면 생채식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면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질문자 본인이 이렇게 하면 좋은 줄 알면서도 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어요. 하느님이 오시고 부처님이 오셔도 해결이 안 됩니다. 하기 싫은데 어떡합니까?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죽든지 계속 아프든지 하겠지요. 그럼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기 싫은 마음에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게 뭐가 중요해요. 이걸 하는 게 좋다면 그냥 하는 것이고, 그래도 하기 싫으면 그냥 고통을 겪는 겁니다. 거기에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욕구를 알아차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욕구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린 후에 뭘 어떻게 한다는 건 의도가 있는 겁니다. ‘먹어야 한다’, ‘먹지 말아야 한다’, ‘뭘 해야 한다’ 하는 건 다 의도가 들어간 것입니다. 어떤 의도를 갖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것은 힘이 안 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바다를 보면서 ‘파도가 들어오는구나’, ‘파도가 나가는구나’, ‘햇빛이 났구나’, ‘구름이 흐르는구나’ 이렇게만 하지 ‘구름을 멈춰야 한다’, ‘햇빛이 나와야 한다’ 이러지는 않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먹어야지’ 이러면 욕구를 따라가게 되고, ‘참아야지’ 이러면 욕구에 저항하게 되는데, 둘 다 자신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의도를 갖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먹고 싶다고 먹는 것과 먹고 싶어도 참는 것은 정 반대 같은데, 둘 다 공통점은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욕구를 따르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욕구에 저항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욕구를 따르면 과보를 받게 되고, 욕구에 저항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이래도 문제이고 저래도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즉, 고락(苦樂)을 계속 겪게 됩니다.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린 후 그걸 따라서 ‘먹어야지’ 또는 ‘안 먹어야지’ 하는 의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먹지 않으니까 과보를 받지 않게 되고, 저항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다가 ‘먹어야지’ 하거나 ‘그래도 안 먹어야지’ 이렇게 되기 때문에 결국 참는 게 됩니다. 다만 ‘먹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먹고 싶어 할 때마다 질문자가 참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과 참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을 구분하기 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결국은 안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이 현실에서는 같기 때문에 구분이 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참는 것은 의도가 있어서 에너지가 들어가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먹고 싶어 하는구나’, ‘저 사람이 길을 가는구나’, ‘저 사람은 빨간 옷을 입었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지 않습니다. ‘나도 저 옷을 입어 봐야지’라든지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지?’ 이러면 에너지가 드는데,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지 않습니다.
질문자는 처음에 ‘그렇구나’ 하고 잘 알아차려 놓고는 그다음에 ‘안 먹어야지’ 하기 때문에 참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고는 ‘먹어야지’ 하면서 욕구를 따르게 되니까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냥 다만 ‘먹고 싶어 하는구나’,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한 번만 하는 게 아니고, 찰나 찰나를 계속 알아차려야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알아차렸지만, 두 번째에 놓치면 바로 욕구를 따라가거나 저항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찰나를 말합니다. 그 찰나 찰나에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장마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인접국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하계 기후의 특성으로, 이 때문에 장마를 '제5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의 경우 장마전선이 공급하는 강수는 전체 강수량의 약 30% 이상을 차지하여, 한반도에 위치한 대부분의 하천은 매우 높은 하상계수를 갖고 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순간 화가 올라올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말이나 행동이 폭력적으로 나올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하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화를 하다가 자기가 무시받는다고 느껴서 화를 내며 말을 험하게 내뱉으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무시받는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시 상대방에게 강하게 전달이 되면 상대방 또한 굉장히 무시받았다고 느껴서 결국 오해가 증폭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다른 사람과 부딪힐 때 상대방과 소통이 안 되고 오히려 충돌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외국이나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을 하게 되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 처할 때는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