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받는 게 왜 억울해요? 사람은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비싼 선물을 받은 것은 누군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거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쟤는 공부를 잘하는데 나는 못 한다’, ‘쟤는 부모가 훌륭한데 우리 부모님은 안 그렇다’, ‘쟤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나는 없다’ 이렇게 비교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꾸 비교하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일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죠.
남의 도움을 받으면 그때는 좋지만 받은 만큼 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베풀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살 수 있어요. 상대방의 도움을 받으면, 그 사람만 쳐다보면서 그 사람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갈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 매달리는 종속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노예를 해방시켜 줬는데 어떻게 살지 몰라서 주인집에 다시 찾아오는 것과 같은 생각을 질문자도 지금 하고 있어요.
가장 좋은 공부는 ‘무념(無念)’입니다. 즉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다음 공부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상을 짓지 않는 ‘무상(無相)’입니다. 그다음 공부는 상을 짓더라도 그 상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는 ‘무주(無住)’예요. 우리가 경전을 통해 계속 배우는 것이 바로 무념, 무상, 무주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도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어요.
이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면 한마디로 좋고 싫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수행은 ‘좋다’, ‘싫다’ 하는 마음 자체를 내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느낌이 이미 일어나 버리기 때문에 설령 그런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하는 상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뜻해요. 즉, 수(受)라는 느낌은 일어나지만 그것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거죠.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감정까지 확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도 놓쳐서 감정까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을 따라서 행동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만약 행동도 해버렸다면, 그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화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말아야 하는데, 만약 화를 내버렸다면 ‘아, 내가 놓쳤구나’하고 참회를 해야 해요.
내가 그 사람의 오늘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고, 내가 내일의 모습을 보고 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오늘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아름답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이고, 내일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추하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인 거죠.
설령 아름답다는 상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저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고 정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은 지은 거예요. 그렇지만 상에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 게 맞다고 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을 짓더라도 집착은 하지 않는 건 어찌 보면 가장 늦게라도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보다 앞 단계에서 해결하려면 ‘지금 좋은 일을 하시는구나’ 이렇게만 볼 뿐이지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상을 짓지 않는 거예요.
꽃을 봤을 때 ‘나한테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하고 말아야지 ‘이 꽃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시드는 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은 상으로 인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꽃을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고, 누군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누군가 불쌍하게 느끼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훌륭한지 아닌지,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지금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죠.
다만 내가 그렇게 인지할 뿐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무언가가 진짜로 아름다운 건지 추한 건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상을 짓는다는 건 나에게 인식되는 걸 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인식했으니 이건 이런 거야’라고 객관화 하는 걸 말합니다.
태양을 볼 때도 ‘내 눈에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거야’라고 객관화 시키면 그게 바로 상을 짓는 거예요. 실제로 태양은 지는 것도 아니고 뜨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구가 자전을 하는데 내가 지구 위에 서있으니까 내 눈에 태양이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뜬다고 말하고, 태양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진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에게 그렇게 인식될 뿐이기 때문에 실제인 것으로 객관화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에게 인지되는 것을 객관화시키는 것을 두고 상을 짓는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인지하는 걸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니까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내 말이 사실이잖아’라고 할 때는 이미 집착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단정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봤어’, ‘나는 그렇게 느꼈어’,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이렇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기분이 나빠’ 이렇게 말하기가 쉬운데, 상대방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나쁜 짓을 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하고 말할 게 아니라 ‘당신의 어떤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볼 때 내 마음이 기분 나쁘게 반응하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상을 지으면 집착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상을 짓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집착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늘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은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하는데도 ‘아니야,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고집하게 될 수 있고, 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금방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나’ 하고 다른 상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나는 좋게 생각했는데 나쁘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내가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이렇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누가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금방 좋다고 결정하지 말고, 누가 나쁘더라 하는 이야기를 해도 금방 나쁘다고 결정하지 말고, ‘지금까지는 내가 좋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쁘게 생각했다’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정말 좋은지 나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도 괜찮아요. 다만, 불쌍한 마음이 들 때 ‘그들을 보고 내 마음에서 불쌍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실제로 그 사람이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보니 딱한 마음이 들어서 지원을 해도 되고, 그 사람들한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지원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불쌍해 보여서 돕기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좋습니다. 불쌍함을 느끼는 건 내 문제이지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돕는 건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때는 꼭 그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식량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하고, ‘옷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도와줄 때는 묻지도 않고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걸 줘버립니다.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지 안 하는지 관계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주는 거예요.
호흡과 동작의 알아차림은 집중이 안 되고 산란할 때 산란심을 극복하는 수행법입니다. 앉았을 때는 모든 동작을 멈추었기 때문에 몸에서는 호흡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호흡을 온전하게 느끼라는 겁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일어나면서 자꾸 관심이 밖으로 흩어집니다. 그것에 끌려가지 말고 다만 들숨과 날숨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매우 높아집니다. 선불교에서도 집중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불교에서는 화두에 집중하라고 가르치는데, 오직 화두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위빠사나와 선불교 모두 집중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면 집중이 흐트러집니다. 움직일 때는 동작에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단순히 일어나고 앉고 오고 가고 하는 것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할 때도 그 상태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동작과 자세에 깨어있다는 것은 감각에 깨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호흡에 깨어있다는 것도 엄격하게는 감각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감각이 일어날 때 발생합니다. 내가 가진 카르마와 감각이 부딪칠 때 기분 좋고, 기분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욕망이 따라 일어납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행위를 하게 됩니다. 행위를 하게 되면 다시 습관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카르마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하게 되면 불이익과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위를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손실이 큰 행위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일어나고, 느낌이 일어나고, 욕망까지 일어나면, 계율을 지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더라도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결국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계율은 마치 저수지 뚝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의 압력이 세면 뚝은 터지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느낌에서 연유합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게 되면 느낌이 욕망으로 바뀌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과거에 지은 업식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결심과 각오로는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쳤을 때 불꽃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옆에 솜이 있으면 곧바로 옮겨 붙습니다. 불이 옮겨 붙은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불이 작을 때는 쉽게 끌 수 있지만, 불이 점점 커지면 불이 났는지 알아도 불을 끄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일어나자마자 초기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훨씬 제어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욕망이 일어나기 전 단계인 느낌을 알아차리면 불꽃이 옮겨 붙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부싯돌에서 불꽃은 늘 일어나지만, 옮겨 붙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꺼져버립니다. 이렇게 되려면 느낌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은 알아차림의 힘이 아주 강하지 않으면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감각에 기초해서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을 알아차리면 느낌을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선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은 모두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가장 먼저 호흡과 동작, 자세를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호흡에 깨어있는 것은 곧 감각에 깨어있는 것이고, 감각에 깨어있는 것은 곧 느낌에 깨어있는 것이고, 느낌에 깨어있는 것은 곧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제어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일어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이 붙은 것을 끄는 것이 아니라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욕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고 합시다. 욕하는 소리는 나에게 청각으로 인지가 됩니다. 여기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몸에서 약간의 열기 또는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화가 일어나는 징조입니다. 이때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면 화가 강하게 솟아오릅니다. 결국 바깥으로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를 놓치게 되면 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몸에서 열기가 나고 호흡이 약간 거칠어집니다. 이것이 느낌입니다. 이때 화가 나는 줄 알아차리면 바로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놓치게 되면 화가 울컥 올라옵니다. 물론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계율은 지켜지는 것입니다. 확대 생산은 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나 자신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참게 되면 나중에 병이 됩니다. 정신과 치료에서는 이런 때 오히려 화를 내도록 해서 응급치료를 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