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 좋아하는데, 철학의 여러 갈래가 만나는 점이 바로 ‘침묵’이거든요. 인내하고, 침묵하고. 하지만 이건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도 제게 “제3자의 눈으로 너를 한번 되돌아봐라”라는 말을 많이 하시거든요. 그러려면 일단 저는 침묵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럼 거기에서 나오는 인내, 그 인내의 시간이 점차 흐르면 경험이 되고, 경험은 또다시 희망이 되고, 희망은 결국 제 마음가짐이 되더라고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참을 인 세 번이면 바보 된다.” 전 아닌 것 같아요. 진짜 강한 사람은 세 번 참는 동안 이미 본인만의 시간 속에서 상황을 타파해 나가더라고요. 저도 인내로부터 배움을 얻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붕괴, 우울, 고독, 인내를 지향하는데 이게 저한테는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거든요. 어떻게 보면 바닥에서부터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니까. 발을 딛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아요. 오히려 붕 떠 있는 상태를 지양하려고 해요.
불안 다스리는 건 제가 좀 잘해요.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려면 생각을 많이 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한때는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으니까 ‘요만한’ 고민도 덩치가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털어놓는 게 저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단순해지자.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고민이 있을 땐 ‘지금 내가 해야 할 게 뭐지?’ 눈 딱 감고 거기에만 집중해요. 그러면 마인드 컨트롤이 돼요.
되도록 안 보려고 해요. 쿨하지 못해서 상처받으면 그 화살(가슴팍을 움켜쥐며)이 잘 빠져나가지 않더라고요. 밑도 끝도 없는 인신공격은 데미지가 덜한데, 디테일한 지적은 묵직하게 다가와요. 잠시 우울해져 있다가 넘기긴 하지만, 되도록 작품 중에는 리플을 잘 안 보려고 해요. 연기에 영향을 받을까 봐.
그런데 칭찬만 하면 오히려 의심해요. 둘 중엔 차라리 냉정한 편이 좋아요. “이 부분은 좋았고, 이 부분은 그렇네”라고 말해주면 그 말에 신뢰가 생겨요. 좋은 말은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뼈 있는 말은 새겨두죠. 저는 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요. 저는 배우로서 객관화하는 일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은 자신을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혼자 딴 세상에 빠질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날 볼 때의 내 모습을 알아야 시청자의 니즈를 반영할 수도 있고, 고쳐야 할 것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끔은 작품 선택 같은 최종 선택권을 다른 분들에게 넘기기도 해요. 주변에 자꾸 도움을 요청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달라고 하고요.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피드백을 구하고 저를 객관화하려 하는 거예요.
분명 내가 입사했을 당시 내 일은 황무지 개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 스스로에게 대견한 점은 끈기와 열정에 대한 부분이다. 답답해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일도 일이지만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도기적 상황이 전투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연장에 있지만. 지금 다시 돌아가서 그대로 하라면 정말 못할 것 같다. 내 일이 조금씩 발전됨에 따라 업계도 함께 움직였다. 그 점이 재미있었고 일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피드백이 힘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남들의 칭찬보다는 자기만족이 중요한 유형이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로선 그게 분명 최선이었음에도 아직도 아쉽고 부족한 부분만 보여 스스로 괴롭다. 그래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수년의 과정을 거쳐 신의 디테일을 수정했다는 사실이 너무 공감되고 부럽다. 나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라서. 아직도 고치고 바꿔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아직도, 혹은 이전보다 더 고민이 된다. 평생 사춘기를 겪는 느낌으로 사는 것만 같다. 뭐 별수 있나. 즐겨야지. 그리고 평생 노력하는 수밖에.
단기 수익만 고려하면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하는 브랜드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금액을 기준으로 함께 일할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잠재적 가치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돈에 끌리기 때문이다.
작업을 할 때 우리가 멋지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일이 훌륭하며,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싶다. 이런 쿨한 태도를 유지하려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쿨해 보이면서 돈을 버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내 궁극적인 목표가 정말 이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통계가 경쟁이 없는 세상이다. 이런 목표가 현대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경쟁하거나 논쟁하는 것을 싫어한다. 예술안에서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다르다. 예술은 평등하다.
욕심이 없어졌어요. 그전에는 내가 이만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많았고, 어떤 장면에선 내가 연기적으로 돋보이도록, 상황을 뚫고 나와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근데 제대를 기점으로 전체 안에서 어우러지는 법을 알게 됐죠. 방송 환경이라는 게 어떤 한 개인의 독보적 영향력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공간이니까, 결국은 서로 배려하고 어우러질 때 상대도 나도 빛날 수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덜어냈어요. 일 외의 부분에서 제가 좀 부정적으로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가 많았거든요. 생각이 많은 편이라 경우의 수도 굉장히 많이 띄워두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면에서 심플하게 접근해요.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되도록이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어떤 걸 너무 잘하려고 하면, 거기에 갇혀서 다른 걸 놓치더라고요. 그럼 또 후회가 늘고, 그 마음이 오히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독이 되더군요.
저는 현장에 충실한 편인 것 같아요. 촬영장을 벗어난 후의 이불 킥은 제 정신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니까. 하하. 그 많은 스태프를 다시 모아서 재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보니 현장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더블 체크하는 편이에요. 정작 방송된 후에는 잘 보지 않으려고 해요. 저 신에서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이 아닌데… 단점만 찾게 되거든요. 이불 킥 연장전 들어가봐야 감정만 소모될 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모험을 즐기려고 노력했죠. 하하. 앞으로는 모험하는 쪽에 더 힘을 실어보려고 해요. 내 안의 저항 정신을 깨우려고 노력하는 중이고요. 언제나 좋은 결과를 손에 쥘 수는 없잖아요. 그런 행운이 언제까지 저를 감싸주기도 어려울 테고. 지금까지는 선택과 결과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 주기를 벗어나볼까 싶기도 해요. 욕심도 버리고 양보하는 법도 알게 되니 시야가 넓어지더라고요.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루어지면 다행한 일이에요.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필요하다면 다시 노력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인생을 길게 살아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결과까지 꼭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결과까지 꼭 나쁘다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감정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불편한 마음을 알아차렸는데도 그 마음이 진정이 안 됩니다’ 라는 말에는 이미 ‘화를 진정시켜야 된다’는 전제가 있는 거예요. 의도하거나 의지를 내면 이미 마음이 긴장하게 됩니다. 또 실패가 따릅니다. 감정을 억제해야 되는데 억제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후회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편안한 가운데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일어나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으면 ‘내가 화를 냈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 불편하면 ‘부모님과 대화하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구나’ 하고 자각하면 됩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미 화를 냈다면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알아차린 후 다음 단계는 없습니다. 굳이 다음 단계가 있다면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다음 단계가 있어요.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밖으로 화를 내게 됩니다. 화를 냈을 때는 화를 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대에게 사과를 해야해요.
더 자세히 말하면 먼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을 놓치면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미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 때는 감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행동을 합니다. 이미 행동을 했다면 반성을 하고 참회해야합니다. 타인에게 감정대로 행동해서 피해를 줬다면 참회를 해야해요.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니까 참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이 일어났다면 ‘내가 느낌을 놓쳤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밖으로 행동까지 했다면 ‘아, 내가 감정을 놓쳤구나’, ‘마음을 놓쳤구나’ 이렇게 알면 됩니다. 이렇게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붙잡고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컵의 물을 반쯤 쏟았어요. ‘안 넘어졌으면 안 쏟았을 거 아니야?’ 하거나 ‘절반이나 쏟다니! 하고 후회한다고 해서 쏟아진 물이 다시 담기지는 않습니다. 절반을 쏟았으면 ‘넘어졌는데 그래도 절반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어난 일은 똑같지만 나한테 더 좋습니다.
박사가 되고 싶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 정치인이 되고 싶다, 기업인이 되고 싶다, 이런 목표를 갖는다고 해서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표는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목표는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항상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꼭 나쁜 결과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 목표가 이루어지면 다행이고, 안 이루어지면 가볍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목표를 이루고 싶으면 한 번 더 시도해 보면 되지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꼭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 없는데 다 이루어져야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은 원하는 게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전교에서 1등을 하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해도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안 하면서 1등 하고 싶다거나, 공부를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걸 욕망이라고 해요. 뭘 하고 싶다는 것이 욕망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집착하거나, 할 수 있도록 원인을 짓지 않으면서 결과만 바라는 것을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면 돼요. 시도를 했는데 뜻대로 안 되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다시 도전해 보면 됩니다. 원하는 게 안 됐다고 괴로워할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열 번의 시도를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두 번 해놓고 안 된다고 실망한다면 욕심을 내고 있는 겁니다. 안 된다고 낙담하거나, 후회가 되어 괴롭다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환경이 좋지 않아서 달성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포기하면 됩니다. 그래도 하고 싶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욕심내지 말고 더 연구하고 노력해 보는 거예요. 욕심만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지속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10밖에 안 되는데 100을 하겠다고 하면 그것도 욕심입니다. 욕심은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행복이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그물을 던졌을 때, 착한 사람은 물고기를 많이 잡고, 나쁜 사람은 물고기를 적게 잡는 게 아니에요. 물고기가 잘 잡히는 것은 그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그물을 던지는 기술이 있는지, 물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던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물을 던진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의 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인과에 대한 파악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다고 문제제기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는 것을 연결시켜서 불평을 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하는 말의 뜻은 내가 괴롭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곧 건강을 의미하는 것처럼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거예요. 다만 ‘왜 괴로운가’ 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날씨가 춥다고 해서 괴로운 게 아니에요. 날씨가 추우면 옷을 더 입든지 외출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씨가 추운 날에 옷을 얇게 입고서 날씨 탓을 합니다. 잘 살펴보면 날씨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돈을 못 받아서 괴로울 때도 친구가 돈을 안 갚아서 괴롭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라는 것은 내 손을 떠나면 다시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거예요. 투자를 하면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이런 문제는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할 때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문제예요. 이자를 높게 쳐준다는 말을 듣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주식을 사서 돈을 잃었다고 합시다.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하기 전에 미리 파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면 될 일이지, 괴로워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상황을 잘못 파악했구나. 다음에는 미리 상황을 잘 파악하자’ 이렇게 앞선 실수를 통해서 다음에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는 좀 더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경험을 축적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나를 다시 돌아보는 쪽으로 관점을 바꾸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행복을 내 안에서 찾는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몸속 어딘가에 있겠어요?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살피는 것을 두고 행복을 안에서 찾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하는 것이 되풀이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윤회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어떤 상황이 바뀌면 곧 나빠질 수 있으므로 기분 좋음이 오래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즉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으면 반드시 기분 나쁨이라고 하는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즉 윤회하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도 ‘지금 이 순간에 잠시 좋을 뿐이다’ 이렇게 편안하게 살펴야 합니다. 기분이 나쁠 때도 ‘지금 이 순간에 잠시 기분이 나쁠 뿐이다’ 하고 살펴야 해요.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에 의한 하나의 반응입니다. 채를 갖고 북을 때리면 소리가 나고, 안 때리면 소리가 안 나듯이, 그냥 하나의 반응일 뿐이에요. 이런 반응에 놀아나게 되면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이런 반응에 빠져들지 않고 ‘그냥 반응할 뿐이다’ 하고 살펴볼 수 있게 되면 윤회의 고통에서 점점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법을 만나서 어쨌든 괴로움에서 좀 벗어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이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런데 기분이 좀 좋아진 것을 수행의 성취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관점입니다. 마치 내가 뭔가 사고 싶은 것을 못 사서 괴로워하다가 그것을 살 수 있게 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 지나면 그 기분은 다시 가라앉게 됩니다.
물론 별로 기분이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이 한 마리 토끼나 다람쥐처럼 살겠다는 것도 괜찮아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마리 다람쥐보다 못할 정도로 괴롭게 사니까 스님이 다람쥐라도 되라고 말하는 것이지, 다람쥐처럼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은 아니잖아요. 다람쥐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한 마리 다람쥐처럼이라도 살라고 한 겁니다. 즉 괴롭지 않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람쥐보다 한 단계 높은 정신력을 가졌으니까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욕심내지 않고 편안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괴로움이 어느 순간에 없어져 버리거나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해도 잠깐 반응을 하기는 하지만 금방 알아차려서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질문자는 마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지 진실로 법을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수행을 하면서 봉사활동도 같이 해보세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그냥 한 때의 기분이었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방황하기도 하는데요.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이런 단계를 몇 번 거치면서 좋았다 나빴다 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점점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꾸준히 수행과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것 때문에 크게 괴롭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작은 물결처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상태로 나아가게 될 거예요.
사람들은 ‘아이가 어른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왜 꼭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와서 인사를 해야 합니까? 어른이 아이한테 먼저 인사를 하면 안 되나요? 사실 이런 것도 모두 나이를 갖고 부리는 기득권입니다. 그냥 아이가 보이면 먼저 가서 ‘잘 있었니?’ 하고 인사하면 어때요?
그러니 질문자도 동생을 보면 먼저 ‘잘 지내니?’ 인사하고, 헤어질 때는 ‘잘 가라’ 이렇게 인사를 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든 안 보이든, 그걸로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바다를 보고 ‘바다가 참 좋다’ 하면 내가 기분이 좋고, 산을 보고 ‘산이 참 좋다’ 하면 내가 기분이 좋습니다. 꽃이나 단풍을 보고 ‘예쁘다’ 하면 꽃은 대답을 안 합니다. 꽃을 예뻐하는 내가 기분이 좋을 뿐입니다. 그런 것처럼 동생을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되지, 자꾸 내가 형으로서 관계를 풀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관계를 풀겠다는 내 생각은 내 욕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관계를 풀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동생이 괘씸하니까 안 만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생각을 다 버려야 해요.
동생이 나에게 다가오거나 대화를 요청하는 것은 동생의 문제이고, 나는 형제로서 대화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형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됩니다. 다만 동생이 그 대화에 응할지 안 할지는 그의 자유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형이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떻게 동생인 네가 대답을 안 하냐’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동생이 나를 싫어하든 말든 나는 나대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상대방의 몫이에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안 죽고 살았네’ 하고 자꾸 반복해 보세요. 늘 새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훨씬 생기가 돕니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시작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일하지?’ 하며 늘 인상을 쓰고 시작하니까 하루를 부정적으로 보내게 되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안 죽고 살았네!’라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여러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를 가지면 정신질환은 생기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35세에 창업을 통해 자리를 잡았다고 하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질문자는 왜 무기력할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기업가인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를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 봐야 열등의식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과학자가 다 아인슈타인이 되겠다고 하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겠지요. 고등학생 축구 선수가 손흥민 선수만큼 못 뛴다고 자괴심에 빠지면 축구를 그만둬야지 어떡합니까. 머리 깎고 스님이 되자마자 법륜 스님처럼 안 된다고 괴로워하면 어떡합니까.
그건 다 욕심입니다. 과대망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도 처음부터 대단한 각오를 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위치에 오른 겁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수십만 수백만의 도전자들 중에서 그 위치에 오르게 된 거예요.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오르게 되리라고 이미 정해져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제 나이가 칠십이 조금 넘었는데, 100m 달리기 기록이 25초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TV를 보니까 올림픽에서 1등 하는 선수는 10초에 뛰어요.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어. 한번 해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내일부터 아침마다 운동장에 가서 연습한다고 제가 10초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10초 안에 못 뛰니까 나는 열등한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뛸 수 있는 능력치는 25초라는 겁니다. 23초를 목표로 해서 석 달 연습하면 2초 정도는 단축할 수 있겠지요. 1초 단축을 목표로 석 달 연습하면 이 또한 가능하겠지요. 이렇게 작은 성공을 쌓아 나가야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목표를 10초로 정하면 10년을 노력해도 성공을 못하니까 좌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과욕을 너무 부리기 때문에 자신이 자꾸 초라해져 보이는 거예요. 타인이 옆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본인이 만족을 못하기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는 겁니다.
지금에 만족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모든 것을 개인의 이익을 우선으로 두고 접근하려는 태도예요. 기본 생존을 위한 것은 사익적으로 접근해도 되지만, 생존을 넘어서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열정을 가지려면 그 목표가 공익적이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이 개인적 이익 추구를 목표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숫자에 연연해 하지 않아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실패하면 또 새로 도전해 보고, 그러다가 대박이 나는 경우도 있고,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기다리고 최선을 다하면 피곤해져요. 인생이 그렇게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냥 대충대충 살면 됩니다. 저도 돌아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월말고사에서 1등 해보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럴 때마다 성적이 떨어져서 기죽고, 성적이 올랐다고 웃고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때 월말고사 성적이 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지금 내 인생에 무슨 변화를 주고 있나요?
그러니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하지 말고, 그냥 재미로 해보세요. 우리 속담에 ‘노는 입에 염불한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일 없이 노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오늘 저녁에 혼자 잠이나 자느니 여기 와서 여러분과 대화하는 게 낫잖아요. 청년들이 어떤 고민이 있는지도 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놀기 삼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신비한 이 생명체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푸바오와 판다의 삶은 마음 아픈 소식들을 보고 듣고 견뎌내느라 지쳐 있던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듯했다. 엄마 판다 '아이바오'의 헌신적인 육아에서 무한한 사랑을, 사육사들의 진정성 있는 교감과 관계에서 진심을, 푸바오의 성장 과정을 응원하며 용기와 희망을, 그 안에서 매일 피어나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는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은 함께 존재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푸바오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소홀했던 이타심을, 존재의 가치와 감정의 소중함을 배웠다. 그렇게 우리는 행복을 주는 보물 푸바오에게 빠르게 '푸며들며' 큰 위안을 주고받는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2024년 4월 3일, 푸바오가 새로운 '판생'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침부터 후드득후드득 비가 내렸다. 푸바오가 먼 여행을 떠나는 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푸바오를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다. 푸바오를 향해 눈물을 흘리기도, 마음속으로 응원을 전하기도 했다. 참 특별하고 아름다운 배웅이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푸바오를 보내고 생각이 많아졌다. 푸바오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푸바오를 향한 애정이 진심이었기에 보물 같은 행복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큰 슬픔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감정이 오로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행복과 슬픔이 함께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푸바오와 같이 성장을 하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푸바오와의 한 챕터를 마친 지금,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얻은 행복한 보물이라고, 먼 여행을 떠난 푸바오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푸바오의 삶이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던 건, 함께하는 모든 과정에서 각자의 사연들이 더해지고 푸바오를 위해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푸바오가 곁에 없는 우리의 삶은 공허하겠지만, 우리 푸바오와의 순간을 충분히 추억하고 그리워하자. 조급할 이유도, 서두를 필요도 없다. 서로의 그리움을 나누어도, 잠시 멈춰도 좋다. 다음의 성장 이야기에 천천히 함께해도 좋겠다. 모두 괜찮다. 푸바오 덕분에 우리는 이전보다 한 뼘 더 성장했고, 분명히 더 성장할 테니까.
이러한 공허함은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거나 외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삶으로 보이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충족감이 없을 때, 오히려 더 대비되게 비어있는 텅 빈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연대감이나 안정감만으로는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오롯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채워야 하는 측면이 있어서 이러한 심리적 공허는 더 채워나가기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새해 계획을 세운다는 건, 내 삶의 목표나 의미를 잘 구현하고자 하는 포부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 계획을 세우는 순간을 잘 생각해보면 내 삶을 더 좋게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자발성이 기반이 되어 있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즐겁거든요. 저희가 재미있는 이야기에 웃을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한 해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때 생기는 그런 즐거움이 있는 거죠. 마치 풍선을 부는 것처럼 내 마음에 의미나 목표, 희망 같은 것들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가득 차게 채워서 한해를 시작하고 열심히 지내면서 연초에 세운 계획들을 다는 아니더라도 이뤄낸 부분이 있고 또 '나는 열심히 진행 중이야.'라고 느껴지신다면 연말에 꼭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나름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시게 될 텐데요. 연초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일상에 치여 정신없이 어떻게든 살다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돌아보니 열심히 불어넣었던 의미와 목표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걸 발견할 때 저희는 초라하고 찬바람만 휑하게 부는 비어있는 마음을 느끼게 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심리적 공허감 그 자체이죠.
예를 들어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을 찾아갈 때의 10분과 익숙한 출근길을 갈 때의 10분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동일한 시간과 거리를 걸어도 낯선 길의 10분은 굉장히 길게 느껴지고 익숙한 길의 10분은 금새 지나간다고 느껴지거든요. 낯선 길을 갈 때는 길 찾기 지도도 찾아보고 맞게 가고 있는지 주변의 건물이나 가게들도 살펴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가지게 되죠.
우리의 뇌는 외부 자극에 따라 변화하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자극이 오면 새롭게 연결되고 강화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창의력까지도 활성화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즉, 새로운 경험과 자극으로 뛰어드는 것은 주관적으로 시간을 길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올 초 계획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시면서 여러 가지를 다 하시려고 하면 오히려 포기밖에 할 수가 없고요. 지금은 욕심은 줄이시고 행동력을 높이셔서 한두 가지만 선택해서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시면 한 달여의 시간을 주관적으로는 훨씬 길게 사용하시며 공허한 마음을 좀 더 채워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을 주관적으로 길게 느끼면서 쓰려면 가능한 직접경험을 선택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가 새로운 드라마를 보면서 보내는 1시간과 새로운 산을 등산하면서 보내는 1시간은 질적으로 굉장히 다르거든요. 물론, 드라마도 간접경험을 하도록 해주지만 내가 오감을 동원하고 온몸을 사용하면서 낯선 산을 오르는 직접경험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연휴 때 시리즈 드라마를 정주행 해보신 분들은 아마 더 확실히 느끼실 텐데 며칠의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지시지 않으셨나요? 그 며칠을 새로운 곳을 부지런히 여행하며 쓰셨을 때는 물리적 시간은 같더라도 주관적 시간은 훨씬 길게 느끼셨을 겁니다.
건강한 자기애를 키우는 것 또한 심리적 공허를 해결해 나가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이 들어요. 자기애가 부족하면 다른 사람들만 대단해 보이고, 또 자기애가 너무 과하면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거나 거대화된 허상의 자기에 빠져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소외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타인이나 사회의 욕구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나를 귀하게 여기고 대접할 수 있는 힘, 이것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심리적 공허가 자신의 내적인 측면의 반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자기애 역시 나 자신과의 관계의 토대가 됩니다. 건강한 자기애의 자리가 커지면 심리적 공허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됩니다.
쉽게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실천해 보세요. 바쁘고 귀찮다고 매 끼니를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때우시지 말고 5분만 시간을 투자해서 신선한 야채를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것을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장의 필요가 없더라도 나를 위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세요. '나는 취업도 못 하고 있는데 취미 생활을 갖는건 사치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건 꼭 거창한 무엇일 필요는 없고요. 예를 들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 잠깐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것과 같이 소소한 활동이라도 나를 위한 활동을 하시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를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것이 건강한 자기애를 갖고 공허함을 줄여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저절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건강을 관리하듯 우리의 감정도 적절히 관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똑같은 하루예요. 오늘까지는 흘려보내고 내일부터 잘한다는 건 사실 스스로를 속이는 거죠! 새해로 모든 것을 미루시면서 12월을 공허로 흘려보내지 마시고 새로운 경험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드시고 나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고 대접할 수 있는 올해의 마무리 되시면 좋겠습니다.
버리겠다고 말하면서 질문자는 왜 쓰레기를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열어보고 또 열어보고 합니까? 잊을만하면 열어보고 ‘어떻게 나한테 쓰레기를 줄 수가 있어?’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상대방이 쓰레기와 같은 선물을 주면 ‘아, 쓰레기구나’ 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입니다. 질문자가 과거를 붙잡고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아도 돼요. 어떻게 살지는 각자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문자처럼 사는 것은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바로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라는 겁니다.
일부러 게으름을 피울 필요는 없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워서 가슴 졸이고 애를 태우며 살 필요가 있을까요? 목표와 기대를 조금 낮추면 조금만 노력해도 남한테 뒤처지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잖아요. 우리들의 열등의식은 다 상대적인 겁니다. ‘열등하다’, ‘우등하다’ 하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모든 존재는 다 존엄합니다. 비교를 하다 보니 ‘누구보다 못하다’, ‘누구보다 낫다’ 하는 분별이 생기는 겁니다.
공부는 직접 사회에 나가서 하는 공부가 제일 효율적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는 공부는 다 시험을 치기 위해서 하는 공부입니다. 꼭 일회용과 같습니다. 지식을 시험칠 때만 일회용으로 사용하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거든요. 여러분들은 그냥 시험을 잘 봐야 하기 때문에 외우는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적용할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학생 수준의 과학이나 수학을 물어봐도 대부분이 몰라요. 학교 다니면서 배운 것이 생활에 활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질문자는 지금 아무런 사건이 없으니까 '무슨 사건이 좀 생겨야 하는데, 왜 나는 사고가 안 생기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화를 부르는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편안한 것을 오히려 지루하다고 느끼면 곧 화가 닥칠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수습한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생기가 돌고, 선택하기 싫어도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슨 선택을 할까’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은 질문자가 지금 편안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얘기예요.
편안한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데, 오히려 편안한 것을 문제로 삼으니 곧 무슨 재앙이 좀 닥쳐야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그래야 생기가 돌게 되니까요.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정신없이 바빠져야 사람은 생기가 돕니다. 그래서 지금 질문자의 생각은 썩 바람직한 생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하고, 안 생기면 안 하고, 그러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왜 새삼스럽게 나이 50이 넘어서 새로 선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 간의 관계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가끔 만날 때는 사이가 좋다가도 막상 같이 여행이라도 하면서 붙어 지내다 보면 취향이나 성격이 안 맞아서 틀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연애를 몇 년간 길게 해도 막상 결혼해서 함께 살아보면 1년도 못 살고 헤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떨어져서 가끔 만나는 사이와 같이 살면서 속속들이 아는 사이하고는 그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사이가 데면데면한데 며칠 같이 지내보면서 더 친해지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친한데 붙어 지내니까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더 친해지는 경우는, 기대가 없었는데 막상 가까이서 지켜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서 친해지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친한 관계일 때는 서로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막상 가까이서 지켜보면 실망할 일이 많아져서 관계가 멀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사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릴 때 생각에 사로잡혀서 늘 관계에 변함이 없기를 고집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는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과거의 생각에 빠져서 ‘늘 우리는 우정이 있어야 한다’ 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서로 ‘반갑다!’ 해도 그때 말뿐이고, 악수할 때뿐이고, 포옹할 때뿐입니다. 각자 자기 생활이 있으니까 돌아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저 1년에 한두 번 만나면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하고 그걸로 끝이죠. 왜냐하면 옛날 친구들은 현재 나의 일상생활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어떻게 지내야 한다고 정해진 건 없습니다. 친구라는 말뜻이 친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웃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을 가까이에서 친하게 지내다 보면 혈연적으로 맺어진 사촌보다 낫다고 해서 ‘이웃사촌’이라고 하잖아요. 옛날 시골에서는 사촌도 가족이니까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성장하면 서로 멀어져요. 그러나 비록 남이지만 이웃에 있는 사람은 늘 가까이 지내게 되니까 당연히 이웃이 사촌보다 낫게 느껴지죠. 혈연 때문에 친한 게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 친해지는 것입니다. 멀어지면 소원해지는 것이고요. 형제나 친척은 어릴 때 가까이 있어서 친해진 것이고, 성장하면 각자의 길을 가니까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혈연관계가 없지만 학교에 같이 다닌다든지 이웃집에 살면 가까이 지내니까 친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하는 말이 있잖아요.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에서 나온 속담입니다. 누구든지 가까이에서 서로의 생활을 같이 나누면 친해지는 것이지 혈연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설령 형제라 하더라도 멀리 떨어지게 되면 서로 소원해지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의미를 부여하고 질문까지 하는 것을 보면, 질문자는 아직 어릴 때의 생각에 젖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과거의 기억에 늘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번뇌가 생긴 거예요.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내려놓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자 문제이지 친구들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 현상은 +100이 되면 나중에 -100이 되고, +30이 되면 나중에 -30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에요. 예를 들어, 아들이 태어나서 +100이 되었다면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으면 거의 혼을 잃어버려서 -100이 됩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있어서 행복하다’ 하면서 +50이 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퍼서 -50이 됩니다.
마음이 +100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져서 마음이 들뜨게 되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만큼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아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지금 기분이 좋구나’ 이런 정도로 좋아하고 말아야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하면 나중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괴로워집니다. 질문자가 괴로움 없이 즐거움만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늘 전깃불을 켜놓고 살던 사람은 갑자기 전깃불이 안 들어오면 원래 전깃불 없이 살던 사람보다 더 큰 불편함을 느낍니다. 똑같이 어두운 상황이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는 서로 다릅니다. 늘 문화생활을 즐기던 사람은 지구환경 위기가 도래해서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게 되면 원래 문화생활 없이 살던 사람보다 더 큰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문화생활을 못 즐긴 사람보다 오랫동안 문화생활을 즐겼던 사람이 더 좋은 조건에 놓여 있잖아요. 그런데 왜 더 힘들까요? 그래도 옛날에 한 번 즐겨봤으니 아예 못 즐긴 사람보다 불만이 적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는 만큼 계속 행복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치료할 약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을 때는 물질적 개선과 함께 행복도 역시 함께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물질적 개선이 되어도 행복도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습니다. 보통은 물질적 소비 수준이 올라가면서 행복도가 함께 올라가는데, 소비에 중독이 되면 아무리 물질적 개선이 이뤄져도 오히려 행복도가 떨어집니다.
마약도 그렇습니다. 마약을 한 번 먹는다고 중독성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처음에 한 번 먹었을 때는 기분 좋음이 100이에요. 그러나 같은 양의 마약을 두 번째 먹으면 기분 좋음이 100보다 낮아집니다. 기분 좋음이 두 번째 먹어도 100이고, 세 번째 먹어도 100이고, 열 번째 먹어도 100이라면 마약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먹었을 때 기분 좋음이 100이라면, 두 번째 먹었을 때는 기분 좋음이 90이 되고, 세 번째 먹었을 때는 80이 되고, 네 번째 먹었을 때는 70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 느낀 100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는 양을 점점 늘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1g을 먹었다면, 두 번째는 1.5g을 먹어야 하고, 세 번째는 2g을 먹어야 하고, 이렇게 양을 점점 늘려가야 같은 기분이 유지되기 때문에 중독 현상이 일어나고 몸을 해치게 되는 겁니다. 처음 미량으로 먹었을 때는 몸이 나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사용량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몸이 망가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심리 작용을 잘 알아서 감정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으면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기분 좋은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기분 좋음이 지나치게 크면 같은 높이로 아래쪽으로도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겁니다. 이런 원리를 미리 알고 있으면 고통이 오더라도 ‘옛날에 즐겼으니까 이 정도 과보는 당연히 받아야지!’ 하고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이 감소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행동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생겨는 불편한 마음을 없애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은 ‘당신이 훌륭합니다’ 하고 말해 주는 게 아니에요.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사랑은 이해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비심이란 곧 이해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인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을 갖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자비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에요. 그의 처지에서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도 없고, 자비심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내 식대로만 상대방을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 성질대로 상대방한테 말 한마디 툭 뱉어놓고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너는 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과 같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좋다고 상대 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껴안으면 성추행을 범하게 되는 거잖아요. 꼭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 말을 해놓고 ‘나는 상대방에게 바른말을 했다’ 하고 생각하는 거죠. 충고는 상대가 원했을 때 해줘야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충고와 비슷한 것으로 ‘자자(自恣)’라는 것을 합니다. 자자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신이 보기에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저를 위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고 자발적으로 요청할 때 성립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뤄질 때 진정한 충고라고 할 수 있어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충고를 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는 상대의 요청에 의해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충고로 못 받아들이고 비난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마음 없이는 108배가 아니라 3000배를 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기도를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자동차가 고장이 났으면 고장 난 부분을 고쳐야 해결이 되지, 자동차 앞에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상대방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을 바르게 인지한 후에도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사실을 깜빡 놓칠 수가 있습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지만 일상에서는 깜빡 놓친다면 그럴 때는 자각을 하기 위해서 기도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문을 주문처럼 중얼중얼 외우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이지 수행이 아니에요.
질문자는 상대가 오해를 했다고 말하는데, 상대가 내 생각대로 안 따르면 무조건 오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듯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오해라는 말속에는 상대가 틀렸다는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상대는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네가 오해한 거야’ 하는 말속에는 ‘네가 잘못 이해했어’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대화를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문이란 내가 놓치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비밀스러운 주문이 아니에요. ‘기도문을 외우면 병도 낫고 부부관계도 좋아질까?’ 이런 마음으로 기도문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주문을 외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선 나한테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상대를 높이느냐 낮추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화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틀렸어’, ‘그것을 말이라고 해?’ 이렇게 받아들이니까 짜증이 확 일어나는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 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가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야, 너 그러면 안 된다!’ 하고 내가 잔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반발을 하겠지요. 그럴 때 그 반발을 내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반드시 거기에는 반작용이 생깁니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만 돌아오기를 바라죠. 그것은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신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말은 상대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했을 때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면 됩니다. 상대에게 충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본인이 선택을 하고 그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빨리빨리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한 것은 문제예요. 동작이 빠른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마음이 늘 쫓기듯이 바쁘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동작이 빠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동작보다 앞서가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선불교에서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신의 발밑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절에서는 항상 자신의 발밑을 살펴서 신발을 가지런히 벗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발을 벗을 때 발의 동작에 깨어있어야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벗는 동작에 깨어있지 못하고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방안에 가버리면 신발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벗어 놓은 신발을 누군가가 모양이 좋게 가지런하게 놓는 것이 절의 규칙이 아닙니다. 신발을 벗을 때 발의 동작에 깨어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리 정돈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가 모양이 좋게 물건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때 깨어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걸레를 사용했으면 빨아서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 중요해요. 항상 자신의 삶에 깨어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급하면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이유는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동작을 빨리빨리 하면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됩니다. 꼭 천천히 행동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에요. 빨리빨리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하다면 마음을 살피라는 겁니다. 또한 질문자가 빠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느리다고 짜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질문자가 천천히 여유 있게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모든 걸 쉬어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명상이에요. 7월 말에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명상수련이 있으니까 신청하셔서 명상을 한 번 해보세요. 4박 5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수련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막상 명상을 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계속 몸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납니다. 목표는 생각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인데, 현실은 계속 생각이 일어나고 움직임이 생깁니다. 그걸 경험하면 ‘내가 그동안 조급하게 살았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5일 동안 아무리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않고, 온갖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에 의미 부여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보는 겁니다. 이런 연습을 자꾸 하면, 일이 있으면 있어서 좋고, 일이 없으면 없어서 좋은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일이 없으면 심심하다고 불평하고, 일이 많으면 바쁘다고 불평하잖아요. 일이 있으면 운동 삼아 일해서 좋고, 일이 없으면 한가하게 놀수 있어서 좋습니다.
소가 목장에서 풀을 뜯을 때 바쁘게 풀을 뜯습니까? 천천히 풀을 뜯습니다. 소는 풀을 다 먹고 나면 배가 불러서 풀밭에 떠억 누워 있습니다. 파리가 날아오면 꼬리로 파리를 쫓으면서 한가하게 앉아있죠. 소가 게을러서 그런 겁니까? 소가 심심해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소는 아무리 누워있어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소는 풀을 뜯어도 바쁘지 않고, 누워있어도 게으르지도 않고, 그냥 배가 고프면 풀을 뜯고, 배가 부르면 누워있는 겁니다. 풀을 뜯을 때도 한가하고, 누워있을 때도 한가해요.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방식은 다 욕심의 소산이에요. 마음이 허전하고 속이 비어 있을수록 자꾸 외모로 문제를 풀려고 하거나, 보석을 장식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거나, 학벌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떨어질 때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자꾸 좋은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도 옷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커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치장하고,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고, 지위가 높다고 자랑하고, 내 친구가 장관이라는 얘기를 자꾸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외부적인 요소로 자신의 부족함을 덮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을 해서 지금 이대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그런 외부적인 치장에 마음을 덜 뺏기게 되고, 자신의 삶에 더욱 충실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콤플렉스는 욕심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벌을 돈 주고 사고 박사 학위를 따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 조건에서 또다시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남과 비교하면 콤플렉스가 또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비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않는 이상 영원히 해결이 안 됩니다. 아무리 허전함을 채워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 능력 밖의 일을 하겠다는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으면 ‘지금 이대로도 좋다’ 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아직 젊으니까 좀 더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못 생긴 사람이 성형을 많이 할까요?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성형을 많이 할까요? 보통은 못생겼다는 사람이 성형을 많이 할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은 사람이 오히려 성형을 많이 하게 됩니다. 본인이 예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어떤 배우와 비교해 보니까 본인이 더 못한 거예요. 그래서 코만 조금 높이면 더 예뻐지겠다 싶어서 코를 높입니다. 코를 높이고 나면 그에 맞게 턱을 약간 깎아야 하고, 턱을 깎고 나면 눈이 약간 더 동그랗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또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성형중독에 빠지는 겁니다. 성형은 원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니에요. 화상을 입거나 심하게 외상을 입은 사람이 흉터를 제거하고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려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성형술이 미용술이 됐죠.
이런 현상은 모두 욕심에서 빚어지는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질문자는 정신적인 치료가 좀 필요해 보여요. 행복학교에 다니면서 관계편도 듣고 심화과정도 공부해서 내가 지금 모습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일이 나한테 이익이 많이 되거나 손해가 많다면 스님한테 와서 이렇게 묻지 않아요. 상대방이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익이 많다면 스님한테 와서 안 묻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봤을 때 손해가 많다면 역시 스님한테 물으러 오지 않고 본인이 스스로 이혼을 합니다. 스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할지 물을 때는 이익과 손해가 반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머리로는 어떤 게 조금이라도 나을지 판단이 안 되니까 스님한테 묻는 거예요. 아주 작은 손익이라도 더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스님한테 질문하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이 생각할 때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49 대 51이면 어떻고, 51 대 49이면 어떻고, 52 대 48이면 어때요? 어떻게 하든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아무렇게나 하는 거예요. (웃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자꾸 강해집니다. 초보자일 때는 설령 내가 옳다고 해도 ‘혹시 내가 잘못했나?’ 이런 생각도 드는데, 경험이 많이 쌓이고 나이를 먹고 또 지위도 높아지면 ‘내가 100퍼센트 옳아.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잖아’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100번 내 생각이 옳아도 101번째에는 틀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도 자기 확신에 차버리기 때문에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지, 결혼의 관계인지, 애인의 관계인지, 선생과 제자의 관계인지, 이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심리 흐름이라는 큰 틀에서는 똑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조금의 차이가 미세하게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큰 차원에서 감정의 흐름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찰지’라고 해요. 그리고 또 아주 세세한 감정의 차이를 디테일하게 아는 것을 ‘분별지’라고 합니다. 우선 통찰지가 먼저 있어야 해요. 통찰지가 있으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통찰지만 있으면 대중을 교화하지는 못합니다. 대중의 괴로움을 풀어주려면 분별지가 있어야 해요. 작은 차이까지 세세하게 알아야 소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종교를 믿든, 어떤 정치적 이념을 갖든, 그런 것은 헌법에 보장된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조금만 하면 누구나 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굳이 책을 안 봐도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좀 관찰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거나 음식이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아주 잘 관찰하면서 정작 자신의 마음에 대한 관찰은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이 말할 때 내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찰을 한번 해보세요. 그것을 연구하면 마음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 거예요.
첫째, 내가 화가 많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대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꼭 필요하면 화내는 습관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안 고쳐도 괜찮아요. 화가 많이 난다고 해서 못 사는 건 아닙니다. 내가 화가 많은 줄을 알기만 해도 사는 데에 지장이 없어요. 화를 벌컥 냈다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합니다. 제가 성질이 많이 더럽죠. 한 번만 봐주세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같이 살 만해요. 화를 벌컥 내고도 자기가 잘났다고 계속 고집을 하니까 같이 못 사는 겁니다. ‘화를 내니까 손실이 크구나’ 하고 깨달았다면 꾸준히 노력해서 개선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관점을 잡으시고 공부를 해나가면 될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을 보고 귀가 얇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질문자는 이 사람이 말하면 여기에 끌려가고, 저 사람이 말하면 저기에 끌려가는 사람이에요.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깨달으면 어떻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이야 뭐라고 그러든 그것은 그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 말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그것은 그냥 길 가는 사람의 얘기일 뿐이에요. 나한테 정말 필요해서 물어보고, 안 후에 직접 해봐야 딱 내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수도 없이 보잖아요. 이 사람은 이렇게 주장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주장하고, 이 사람은 이런 물건을 갖다 놓고 사라고 하고, 저 사람은 저런 물건을 갖다 놓고 사라고 합니다. 나는 그중에서 내가 필요한 걸 선택하면 됩니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전에 일단 그걸 먼저 지적하고 싶어요.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를 하는 순간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깨달음에 대한 지식을 얘기하게 됩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이런 고뇌가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질문자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는 게 뭐가 중요해요? 지식에 불과한 것을 안다고 해서 인생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깨닫는다’ 하는 말을 썼을까요?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앞이 안 보입니다. 눈을 뜨면 환히 보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바로 옆에 있는 물건도 찾을 수 없고, 눈을 뜨면 금방 찾을 수 있어요. 깜깜하면 눈을 떠도 못 찾고, 불을 탁 켜고 보면 물건이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깨닫는다’ 하는 말은 ‘눈을 뜬다’, ‘불을 밝힌다’ 하는 개념입니다. 반대로 ‘눈을 감았다’, ‘어둡다’ 이런 표현은 무지(無知),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내가 뭘 모르니까 두렵고 괴로운 겁니다. 그것은 마치 눈을 감은 것과 같은 상태이고, 깜깜한 밤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뜨고 불을 밝혀서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굉장히 쉬워집니다.
깨달음을 표현하는 다른 말로는 ‘꿈에서 깬다’ 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고 있다고 합시다. 꿈속에서는 아무리 도망을 가도 그 강도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런데 눈을 딱 뜨면 해결이 돼요. 눈을 감은 상태, 즉 꿈속에서는 강도로부터 도망가거나 누군가가 강도를 막아주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뜨면 아무런 해결책이 필요 없어요. 원래 강도가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구해줬다고 해도 원래 나를 구해준 사람이 없었어요.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도 원래 해결할 문제가 없었어요. 눈을 뜬다는 것은 본래 문제가 없는 줄을 아는 거예요. ‘꿈에서 깬다’ 하는 표현처럼 여러분들이 어떤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걸 왜 노력을 해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별로 없으니까 자꾸 애를 쓰고 노력을 하게 되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정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애쓰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하게 됩니다. 지금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다는 말이거든요. 노력하지 말고 기꺼이 하세요. 애쓰지 말고 기꺼이 하세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갚겠다고 마음을 내버려야 죄가 다 없어져버립니다. 기꺼이 갚겠다는데 죄가 어디에 있겠어요? 돈을 빌린 사람이 돈을 안 갚으려고 하니까 죄인이 되지, 자기가 빌린 돈을 형편이 되는대로 기꺼이 갚겠다고 하면 설령 살면서 다 못 갚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죽는 것보다는 몇 푼이라도 갚고 죽는 게 낫다는 자세를 탁 취하면 죄의식도 없어져요.
명상을 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번뇌가 엄청나게 일어납니다. 아주 어릴 때 생각까지 다 일어납니다. 명상은 그런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로 가야 하는데 엄청나게 생각이 많이 일어납니다. 다리가 아프고, 가렵고, 졸리고, 도저히 명상을 지속하지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명상하지?’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비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폭풍이 일어나더라도 꿈쩍 안 하고 그걸 이겨내고 길을 가듯이 온갖 망상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온갖 망상은 내면에 쌓인 것들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밖에서 그런 망상들이 찾아올 일이 없잖아요. 단지 자기 내면에 있던 것들이 일어나서 휘몰아치고 나가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장애가 일어나면 명상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나 망상의 폭풍이 스쳐 지나가야 마음의 고요함이 뒤따라옵니다.
폭풍이 지나갈 때는 ‘명상은 너무 힘들어서 죽어도 못 하겠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다시 잔잔함이 오면 ‘이런 맛으로 명상을 하는구나’ 하며 재미를 붙이고, 그러면 그다음 폭풍이 또 찾아와서 ‘명상이 안 되네! 원래대로 되돌아 가버렸나?’ 하고 실망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내면에 쌓인 것들이 양파껍질처럼 수도 없이 벗겨나갑니다. 다음 껍질이 벗겨지면, 또 다음 껍질이 나타나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마음에 쌓여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거예요. 최근의 일이거나 강한 상처부터 먼저 일어난 후 그다음에는 무의식 세계에 깊이 잠재된 것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지나갑니다. 그때 ‘아!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생각에 억울해 하면서 울거나 욕을 하면서 거기에 자꾸 빠져들게 되죠. 그럴 때는 밖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그냥 흘러 보내듯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최소 10일 명상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 폭풍이 몇 번은 지나갑니다. 집에서 하루에 삼십 분을 하든, 한 시간을 하든 그런 정도는 10일 명상 후 원래대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유지하는 방책이지, 명상이 더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혼자 명상을 할 때는 폭풍이 몰아치면 그만두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처음 명상을 하면 원점에서 출발해서 100까지 갔다가 집에 와서 하지 않으면 20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10일 명상을 하면 20에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몇 차례 하게 되면 명상이 향상되기 때문에 10일 명상 프로그램을 몇 차례 먼저 한 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혼자서라도 꾸준히 하면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퍼센트 막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감소하는 양을 줄여서 어느 정도라도 유지해 놓기 위해서 매일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격렬한 장애가 지나가는 것을 겪어야 하는데, 일상적으로 명상을 30분 정도 하는 것은 그냥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그러나 업식이라고 하는 까르마를 변화시키려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엄청난 저항을 겪어야 해요. 담배를 끊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며칠 담배를 안 피우면 죽을 것 같죠. 그럴 때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오래 살 필요가 있나? 담배 좀 피우다 죽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 내부에서 일어나요. 그런 저항을 극복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격랑이 일어나고, 또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시 마음이 잔잔해지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평정심을 유지해 가는 겁니다.
각오하고 용을 쓰면서 하는 것은 명상이 아니에요. 잘했다 잘못했다로 평가하는 것도 명상이 아닙니다. 명상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잘하겠다는 의도를 내려놓고 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된다, 안 된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명상을 하다가 어떤 것이 일어나도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이에요. 아프면 ‘아프구나’ 하고 알아차려야지 ‘다리를 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빠져서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그건 명상이 아니라 극기 훈련이에요. 이를 악물고 명상을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명상이 하기 싫은 거예요. 명상은 그냥 쉬는 겁니다. 어떤 의도를 갖지 않고,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도 하지 않고 그냥 쉬듯이 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좋은 명상이라고 평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명상을 해보니 이런 증상이 있더라’ 하는 관점을 가지고 명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마치 세속에서 일하듯이 욕심으로 하고 있어요. 돈에 대해 욕심을 내다가 지금은 도(道)에 대해 욕심을 내는 겁니다. 수행은 욕심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욕심으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욕심의 대상이 돈에서 수행으로 바뀐 것일 뿐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됩니다.
스님이 이렇게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 별거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풀 한 포기로 살다가 죽는 것이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 죽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살기 때문에 삶이 피곤한 거예요. 인생이 별 것 아닌 줄 알고 살면 아무런 힘이 들지 않습니다. 스님이 너무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죠? 이런 관점을 갖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못 받는 게 왜 억울해요? 사람은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비싼 선물을 받은 것은 누군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거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쟤는 공부를 잘하는데 나는 못 한다’, ‘쟤는 부모가 훌륭한데 우리 부모님은 안 그렇다’, ‘쟤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나는 없다’ 이렇게 비교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꾸 비교하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일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죠.
남의 도움을 받으면 그때는 좋지만 받은 만큼 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베풀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살 수 있어요. 상대방의 도움을 받으면, 그 사람만 쳐다보면서 그 사람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갈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 매달리는 종속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노예를 해방시켜 줬는데 어떻게 살지 몰라서 주인집에 다시 찾아오는 것과 같은 생각을 질문자도 지금 하고 있어요.
가장 좋은 공부는 ‘무념(無念)’입니다. 즉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다음 공부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상을 짓지 않는 ‘무상(無相)’입니다. 그다음 공부는 상을 짓더라도 그 상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는 ‘무주(無住)’예요. 우리가 경전을 통해 계속 배우는 것이 바로 무념, 무상, 무주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도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어요.
이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면 한마디로 좋고 싫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수행은 ‘좋다’, ‘싫다’ 하는 마음 자체를 내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느낌이 이미 일어나 버리기 때문에 설령 그런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하는 상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뜻해요. 즉, 수(受)라는 느낌은 일어나지만 그것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거죠.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감정까지 확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도 놓쳐서 감정까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을 따라서 행동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만약 행동도 해버렸다면, 그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화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말아야 하는데, 만약 화를 내버렸다면 ‘아, 내가 놓쳤구나’하고 참회를 해야 해요.
내가 그 사람의 오늘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고, 내가 내일의 모습을 보고 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가 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오늘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아름답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이고, 내일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추하다’ 하고 상을 지을 뿐인 거죠.
설령 아름답다는 상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저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고 정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은 지은 거예요. 그렇지만 상에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 게 맞다고 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을 짓더라도 집착은 하지 않는 건 어찌 보면 가장 늦게라도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보다 앞 단계에서 해결하려면 ‘지금 좋은 일을 하시는구나’ 이렇게만 볼 뿐이지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상을 짓지 않는 거예요.
꽃을 봤을 때 ‘나한테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하고 말아야지 ‘이 꽃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시드는 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은 상으로 인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꽃을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고, 누군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누군가 불쌍하게 느끼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훌륭한지 아닌지,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지금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죠.
다만 내가 그렇게 인지할 뿐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무언가가 진짜로 아름다운 건지 추한 건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상을 짓는다는 건 나에게 인식되는 걸 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인식했으니 이건 이런 거야’라고 객관화 하는 걸 말합니다.
태양을 볼 때도 ‘내 눈에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거야’라고 객관화 시키면 그게 바로 상을 짓는 거예요. 실제로 태양은 지는 것도 아니고 뜨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구가 자전을 하는데 내가 지구 위에 서있으니까 내 눈에 태양이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뜬다고 말하고, 태양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태양이 진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에게 그렇게 인식될 뿐이기 때문에 실제인 것으로 객관화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에게 인지되는 것을 객관화시키는 것을 두고 상을 짓는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인지하는 걸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니까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내 말이 사실이잖아’라고 할 때는 이미 집착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단정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봤어’, ‘나는 그렇게 느꼈어’,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이렇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기분이 나빠’ 이렇게 말하기가 쉬운데, 상대방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나쁜 짓을 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하고 말할 게 아니라 ‘당신의 어떤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볼 때 내 마음이 기분 나쁘게 반응하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상을 지으면 집착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상을 짓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집착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늘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은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하는데도 ‘아니야,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고집하게 될 수 있고, 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금방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나’ 하고 다른 상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나는 좋게 생각했는데 나쁘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내가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이렇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누가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금방 좋다고 결정하지 말고, 누가 나쁘더라 하는 이야기를 해도 금방 나쁘다고 결정하지 말고, ‘지금까지는 내가 좋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쁘게 생각했다’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정말 좋은지 나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도 괜찮아요. 다만, 불쌍한 마음이 들 때 ‘그들을 보고 내 마음에서 불쌍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실제로 그 사람이 불쌍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보니 딱한 마음이 들어서 지원을 해도 되고, 그 사람들한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지원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불쌍해 보여서 돕기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좋습니다. 불쌍함을 느끼는 건 내 문제이지만 ‘이게 필요하구나’ 해서 돕는 건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때는 꼭 그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식량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하고, ‘옷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도와줄 때는 묻지도 않고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걸 줘버립니다.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지 안 하는지 관계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주는 거예요.
호흡과 동작의 알아차림은 집중이 안 되고 산란할 때 산란심을 극복하는 수행법입니다. 앉았을 때는 모든 동작을 멈추었기 때문에 몸에서는 호흡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호흡을 온전하게 느끼라는 겁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일어나면서 자꾸 관심이 밖으로 흩어집니다. 그것에 끌려가지 말고 다만 들숨과 날숨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매우 높아집니다. 선불교에서도 집중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불교에서는 화두에 집중하라고 가르치는데, 오직 화두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위빠사나와 선불교 모두 집중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면 집중이 흐트러집니다. 움직일 때는 동작에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단순히 일어나고 앉고 오고 가고 하는 것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할 때도 그 상태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동작과 자세에 깨어있다는 것은 감각에 깨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호흡에 깨어있다는 것도 엄격하게는 감각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감각이 일어날 때 발생합니다. 내가 가진 카르마와 감각이 부딪칠 때 기분 좋고, 기분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욕망이 따라 일어납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행위를 하게 됩니다. 행위를 하게 되면 다시 습관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카르마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하게 되면 불이익과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위를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손실이 큰 행위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일어나고, 느낌이 일어나고, 욕망까지 일어나면, 계율을 지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더라도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결국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계율은 마치 저수지 뚝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의 압력이 세면 뚝은 터지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느낌에서 연유합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게 되면 느낌이 욕망으로 바뀌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과거에 지은 업식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결심과 각오로는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쳤을 때 불꽃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옆에 솜이 있으면 곧바로 옮겨 붙습니다. 불이 옮겨 붙은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불이 작을 때는 쉽게 끌 수 있지만, 불이 점점 커지면 불이 났는지 알아도 불을 끄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일어나자마자 초기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훨씬 제어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욕망이 일어나기 전 단계인 느낌을 알아차리면 불꽃이 옮겨 붙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부싯돌에서 불꽃은 늘 일어나지만, 옮겨 붙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꺼져버립니다. 이렇게 되려면 느낌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은 알아차림의 힘이 아주 강하지 않으면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감각에 기초해서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을 알아차리면 느낌을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선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은 모두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가장 먼저 호흡과 동작, 자세를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호흡에 깨어있는 것은 곧 감각에 깨어있는 것이고, 감각에 깨어있는 것은 곧 느낌에 깨어있는 것이고, 느낌에 깨어있는 것은 곧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제어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일어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이 붙은 것을 끄는 것이 아니라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욕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고 합시다. 욕하는 소리는 나에게 청각으로 인지가 됩니다. 여기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몸에서 약간의 열기 또는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화가 일어나는 징조입니다. 이때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면 화가 강하게 솟아오릅니다. 결국 바깥으로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를 놓치게 되면 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몸에서 열기가 나고 호흡이 약간 거칠어집니다. 이것이 느낌입니다. 이때 화가 나는 줄 알아차리면 바로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놓치게 되면 화가 울컥 올라옵니다. 물론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계율은 지켜지는 것입니다. 확대 생산은 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나 자신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참게 되면 나중에 병이 됩니다. 정신과 치료에서는 이런 때 오히려 화를 내도록 해서 응급치료를 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