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 도망치다니! 나와 맞서 싸워라. 그래야 네가 한때 타던 고철덩어리를 팔아넘길 명분이라도 생길 게 아니냐! 클라리스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무뢰배나 다름없는 해적이 아니었다. 클라리스는 랭글리 정부가 정식으로 발행한 면허를 지닌 사략 용병이며, 명부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자였다. 게다가 지금은 화이트 레이븐의 호위를 맡은 처지. 비록 실망스러웠지만, 원칙과 명분을 저버릴 순 없었다.
"이지스 스완이 테라 방위군에 보고합니다. 미식별 모함이 ICRS 기준 RA 22h 42m 24s, Dec +12° 30' 55″에서 최초로 포착된 후, RA 23h 15m 08s, Dec +13° 05' 12″로 이동하며 신호가 소멸하였습니다. 이상."
클라리스의 목소리는 기품과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감정하고 기계적인 정중함을 통해 말했다. 그러나 가상 공간 속에서 흩어진 그녀의 의식 어딘가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실망감이 미세한 전자적 동요로 드러났다.
이지스 스완의 드론, 통칭 ‘미운 오리 새끼’들은 클라리스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갖춘다. 마치 백조의 날개에서 흩어진 깃털같았다. 그러나 일부러 대형의 한 곳에는 빈틈을 남겨두었다. 방심으로 인한 공백처럼 보이는 위치였다.
"이지스 스완에서 화이트 레이븐에 전합니다."
클라리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진형에 의도적으로 공백을 두었습니다. 어리석은 적들이 그곳을 허점이라 착각하고 덤벼들도록....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덫을 놓아두었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동요 없이 담담했으나, 교묘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클라리스는 미세한 조정들을 거듭하며 함정을 세밀하게 점검했다.
긴장이 풀리자 아헨은 함교의 통풍시트를 풀가동하고 에어컨 온도를 낮추며 양손으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한다. 너무도 오랜만에 겪어본 전투의 긴장감은 식은땀 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들려오는 클라리스의 보고를 듣고 레이더를 한번 돌려본다. 그녀의 말대로 대놓고 어색하게 배치한 호위망의 틈이 보인다.
"오케이 확인했어. 아마도 드론의 머릿수에 밀렸으니 또 습격하진 않겠지만 말이지." "화이트레이븐 아헨. 사령부다. 응답바람."
클라리스의 말에 대꾸하는순간 통신이 또 들어온다. 드레이크 가문의 본부에서 온 통신이었기에 클라리스도 들을 수 있도록 공유 해놓고 통신이 응답한다.
"여기는 아헨. 오랜만이에요. 아까 내가 보낸 통신때문에 연락한거?"
"그래. 성계 방위군이 너한테 갈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연락한거다. 자넬 호위하는 용병이 있다고 하니 좀 안심이군."
"계내들은 또 반대쪽에 있나보네요. 그러면 아까 호위 필요한건 왜 물거본건지 원."
"테라5 소행성 집중구역 궤도에 초계함이 주둔중이니 위험하면 그곳으로 향하도록."
"네 알았어요. 통신 끝."
많이 긴장이 풀린듯한,어쩌면 지인과 대화하는 듯한 편안한 대화가 끝나고 다시 클라리스를 호출한다.
"뭐... 얘기 들어보니 테라 항성계 방위군은 지금 너무 멀리 있어서 못도와준다네... 제일 가까운 방위군 함선도 48시간 거리에 있다고 하니 내가 믿을건 클라리스 너밖에 없겠어..."
"어쨌든 항로는 변동없이 테라3 최단거리 루트로 계속 진행할거야. 좀 힘들겠지만 테라5 행성 궤도를 지날때까지는 계속 경계해줘."
해적으로 의심되는 세력이 나타났다고 긴급통신을 주변에 전파할까 생각했지만 성계 방위군과 사령부가 알아서 할거라 믿고 그마둔다. 그러다가 함교 스크린에 에너지 부족 경고가 울리자 그제서야 황급히 전투시스템의 전원을 차단했다. 그래도 이 고물 시스템이 동작을 하는구나 하는 감탄사와 함께.
"어이구 씨... 용병 고용하니까 바로 저런 위협이나 당하고... 별일도 다 있네 진짜..."
혼자 불평하면서 기지개를 편다. 그 잠깐 사이에 몸이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화이트 레이븐과 이지스 스완은 테라3을 향해 항해를 이어간다.
아헨의 화이트레이븐은 그렇게 클라리스와 그녀의 배를 우주에 버려둔채(...)혼자서 테라3 우주스테이션 도크에 입항한다. 할당된 도크는 4번이다.
"기관정지. 고정완료. 항구 전력... 연결... 완료."
도크에 정박후 전기를 끌어쓰기 시작하니 에어컨이 눈에띄게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얼마나 동력부가 낡았는지를 속으로 욕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사령부. 나 입항했는데 왜 아무도 없어요? 대기하는거 아니었던가? ...네. 그러면 나는 여기서 대기? ...응 알았어."
짧은 통과를 끝내고 전화기를 충전기에 올렸다가 다시 꺼내들어 클라리스에게 문자메세지를 발송한다. 그나저나 이걸로 메세지 보내면 클라리스 개인 단말기로 메세지가 갈까? 아니면 이지스스완 자체 통신으로 연결될려나?
[테라3 체류기간 최소 14일 소요예정. 화이트레이븐 대수선 공사 실시함. 지금부터 추후 연락시까지 자유행동 실시바람.]
삑. 메세지 발송 완료.
"자 그럼... 우선 잠이나 자야지..."
함교를 나와 곧장 선장실로 향하는 아헨. 항해기간동안 함교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으니 자기 방에 놓여진 부드러운 침대가 그리울 따름이다. 잠든 사이에 가문에서 파견된 기술진들이나 인부들도 들어올 수 있게 출입문도 미리 잠금해제 해놓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아헨이었다.
테라3 우주상공에 떠 있는 스테이션. 일명 테라3 우주공항은 테라항성계를 관할하는 수도성이자 엘프들의 고향행성이기도 하다. 테라1,2,4 행성도 테라포밍이 완료되어 엘프들이 상주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자연이 자리잡지 못한 불모지 행성이다. 그러다보니 우주의 희귀한 전략자원인 나무를 키우는건 테라3 행성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귀중한 자원인 나무를 심고 키우고 벌목하는 행위는 매우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져 목재의 수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나무를 화물선으로 에리스 행성까지 운반하는것이 아헨의 일족인 드레이크 가문이 맡은 일이다. 나무를 심고 키우는것은 다른 가문의 일이다. 드레이크 가문은 그저 그들이 할당해주는 나무를 베어서 운송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나무를 운반하는 수송선들중 하나인 화이트레이븐호의 선장인 아헨은 테라3 우주스테이션에 있는 테라 항성계 방위군 기지로 호출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지난번 테라9 행성궤도 외곽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적대집단, 아헨 주장으로는 해적으로 의심되는 그들에 대한 조사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