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에서 린 씨와 만난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린 씨는 줄곧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날 린이 알렌을 위해 울어주었던 것은 계기였다, 그 전부터 린은 이미 알렌의 소중한 사람이였다.
"언제나 린 씨의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린 씨가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린 씨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싶으니까."
린이 행복할 수 있도록 늘 곁에서 돕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다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듯 알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소중한 사람에게 품어서는 안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린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알렌이 고개를 들고 린을 바라본다.
"네, 저는 린 씨에게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 울어주고 저를 다시 일으켜준 소중한 사람에게 음습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품은 것을 숨기고 곁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웃고있었다, 자신을 한껏 혐오하듯이 자조하며 뒤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참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 괜찮아 질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린 씨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까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린 씨의 곁을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 제 착각이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린 씨의 곁에서 이 음습한 욕망을 채우려고 저 자신에게 변명하며 린 씨를 속이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한껏 비웃은 알렌은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 다시금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저는 이런 쓰레기같은 남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 때문에 마음을 낭비하지 말아주세요."
자욱히 깔린 먹장구름 아래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소리에 남자의 절규와 닮은 고백도 잠시 주변에 울리다가 파묻혔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남자와 마주하고 선 흑의의 소녀는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깜박, 정지된 흑백화면 속 창백한 인형처럼 못박힌 듯 가만히 선 소녀의 적안이 깜박였다. 온통 백짓장처럼 하얘진 머리로 그녀는 말없이 한 걸음 내딛어 그와 발끝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올려다 본 얼굴은 며칠 전 병동에서보다도 더 초췌해 보여 왠지 낯선 느낌을 주었다.
쉬잇. 뭔가 더 말할까. 또 그가 어떤 속을 뒤집는 말을 할지 몰라 그녀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었다.
"감히 신의 대리자에게 욕망을 품다니 불경하기 그지없는 지라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잔잔히 눈을 내리깔고서 읊조리듯 속삭인다. 어린 왕께서는 이성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의사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죽은 심장의 태아에게 휘둘렸던 이를 좋게 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신께서는 저희에게 고해하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셨나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극복해내었고 직접 원흉을 베었다. 이미 그 전에도 바티칸의 수많은 시민들이 남긴 증언에서 그녀는 교주로서 그를 용서했고 한 사람으로서 그리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한 마디만 따라 말해주시면 눈감아드리겠습니다."
"Я люблю тебя" 그녀의 평소 말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억양이었다.
어지러히 저도 흐름을 잡기 힘들 정도로 흘러가는 머릿속이 그대로 파도치게 두고서 발끝을 들고 서로의 숨을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 한 마디 속삭이고서 부드러히 끌어당겼다. 위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검은 우산이 입술이 포개어질듯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가리고서 떨어져 바닥에 도르륵 굴렀다. 우산이 굴러간 자리 옆에 어느새 다시 거리를 반걸음 정도 벌리고서 빗물에 젖은 두 사람이 서있었다.
"최악의 최악까지 보아서 그런가? 당신이 쓰레기에 최악의 남자라는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에 비할 정도로 바보 멍청이란 건 잘 알 것 같아." 빗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어 린은 알렌을 바라보았다. 씁쓸한듯 기쁜듯 흰 낯이 비에 젖은 미소를 그렸다.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굳이 창을 닫아 막지 않고서 그대로 창가에 기댄 여인의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갸름한 흰 얼굴에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아래의 붉은 눈이 우수수 이파리를 휘날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시월이 다시 왔구나." 느릿한 움직임으로 권태롭게 기숙사 밖을 훑다가 그 아래 담벼락 근처에 핀 붉은 꽃잎을 발견한다. 바람에 살랑이는 피안화 이파리가 비친 붉은 동공이 확장되었다가 감은 눈꺼풀에 가려진다.
"알렌, 우리 얘기 좀 해요." 그가 또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손을 잡고 가볍게 포옹하는 것까지는 그도 이제 크게 거리끼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이상의 표현을 할 때마다 그는 겁에 질린 것처럼 물러섰다. 혹은 무언가를 꾹 내리누르는 것처럼 애써 그녀를 밀어내었다. 마치 사귀기 전의 그처럼 말이었다. 무엇인 문제인지 몇 번 은근슬쩍 밀어붙여 실토하게 하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어설프게 둘러대며 빠져나갔고 린은 잔뜩 골이나 있었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만일 그가 정말로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표시를 하였다면 구태여 그녀가 이럴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린이 보기에는 알렌은 정말로 싫어하는 것보다는...
다시 눈을 반개하고서 저 아래에 핀 피안화 몇 송이를 바라보며 린은 창턱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끝에 머리에 한 손을 얹어 곤란한 얼굴을 하던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사정은 그녀 또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얘기였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쉬고서 헌터 챗을 열어 오간 문자를 다시 읽었다.
'내일 생일이라고 했었으니까.' 내일은 특별반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단체로 생일을 축하하기로 한 만큼 오늘 둘이서만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메세지를 쭉 바라보다 린은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이제는 슬슬 결판을 낼 때가 되었으니까요." 사귄 지 1년이 지났다. 손을 들어 살며시 가리고서 비스듬히 무언가를 꾸미듯 올라간 미소를 감추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붓하게 걸음을 옮기는 복도에 노을빛이 드리워진다. 슬슬 해가 지니 곧 약속시간이었다.
...
"어디 불편하셔요?" 적당히 저녁 식사를 하고 상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까무룩 시간이 지나가 밤이 되었다. 잠시 숙소 근처 벤치에 앉아 얘기하던 중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렌에게서 답이 흘러나오자 화기애애한 대화가 뚝 끊기고 잠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제가 그날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표정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그려진다. 생각지 못한 말인지 그는 꼼짝 얼어붙은 것처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담은 붉은 눈에 짓궂은 웃음이 어렸다.
"저도 청소년기를 녹록하지 않은 곳에서 보냈으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우리는 우리잖아요? 잠시 말을 끊다가 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적안과 벽안이 서로를 담고서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은 감정 없이 쾌락만을 좇았고 쾌락과 수반되는 책임을 질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일방의 쾌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으니 잘못된 것이지만. 저는, 그리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좋아하잖아요?"
린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그의 손을 포개어 가벼이 깍지를 끼고서 잡았다. 약간의 짓궂음과 그 괜한 심술로도 가려지지 않은 애정이 담긴 붉은 눈이 가로등의 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저는 독심술사가 아녜요.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니 더 피하면 이제는 정말로 미워할 거예요. 빙긋 웃는 얼굴을 하며 옆에 기대어 본다.
"기숙사 화단에 피안화가 피었어요." 가만히 붙어 앉아 조근거리며 얘기를 시작한다.
"마침 내일은 알렌군의 생일이고, 아시나요?" '당신의 생일인 초가을은 피안화가 만개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작게 웃는다. 그가 자신을 많이 좋아하여 어찌 할 줄 모르고 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린은 몸을 더 기울여 알렌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私も一緒に咲く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か? 가만히 있던 알렌이 순식간에 확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덮는다. 다시 원래의 거리로 떨어져서 린은 별이 점점이 박힌 별하늘을 바라보며 웃어본다. 허공에 뜬 헌터넷 스크린의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알렌." 붉어진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서 뗀다. 환한, 조금은 장난스럽고도 수줍은 미소가 린의 입가에 번진다. 드물게도 별이 쏟아질듯 행복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