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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로 잊는다. 떠나간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잊는 법이고, 지나간 좋은 추억은 새로운 좋은 추억으로, 행복을 잃은 고통은 새로운 행복으로... 상실을 치료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흔한 방법이다. ......미카즈키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까지고, 이미 지나버린 그날에 하나요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오래된 쪽지처럼 소중히 놓여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그것을 두어야 할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돌려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가쿠모 미카즈키는, 점점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 있는 하나요에게서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치는 건 실컷 했다. 끌려왔다는 사실에서 도망쳤고,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에서 도망쳤다. 오사카에서 도망쳤고, 이제는 포스터 앞에서 도망쳤다.
마음만 같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응. 이제부터라도 마음껏 놀러다니자. 못 갔던 시내도 가고, 수족관도 바닷가도 축제도 마음껏...... 그러나 미카즈키는, 미키 군은 오늘 작별을 하러 왔다. 그때 못다한 작별인사를. 저 허공으로 멀리멀리 던져버린 야구공처럼, 미카즈키는 미키군을 끝내려 한다.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그 조그만 소년을 이제서야 옛날로 떠나보내주려고.
"...난 더 이상 네가 알던 미키군이 아닐 거야."
하나요가 손을 내밀었을 때, 손끝에 걸리는 것은 미키군의 하얗고 곱던 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얗다, 그것만은 똑같았다. 그래 그것은 하얬다. 하지만 그것은 딱딱한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고, 군데군데 변색되어 있었으며, 기다란 손가락은 마디가 툭툭 불거져 마치 거미와도 같았다. 손등이며 손가락에 살은 사라지고 근육과 핏줄만이 남아 피부로 꽉 조여져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근육 결이 선명히 드러나 있어, H. R. 기거의 포트폴리오에서나 볼 법한 기괴한 형상이 되어 있었다. 그 차가운 것은 하나요에게 먼저 내밀어져오지 않았으나, 하나요의 손길을 피하지도 못했다. 미카즈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연못물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눈물이 또록 굴러내린다. 그리고 미카즈키는 다시 눈을 뜨고는 하나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네 앞에서 미키군으로 있을 수 있을 때..."
그때 그 날 그 여름의 하늘이, 미키군의 마지막 여름 하늘이, 하나요를 바라보고 있다.
"말하게 해줘. 「안녕히」 라고..."
비어버린 그릇이 앞에 놓여 있다. 전에 없던 금이 크게 가 있다. 연못물을 다시 담아주는가, 아니면 그대로 두는가. 당신의 선택이다.
미카즈키가 뒤를 쫓는 스즈네는 어느새 구름 같던 그 모습이 되어있었다. 중력을 무시하듯 퐁당퐁당 걷는 몸짓이 그렇고. 동그랗게 뭉쳐져 정수리 살짝 아래 묶인 머리뭉치가 그렇고. 나른하게 늘어진 말투가 그렇다. 미카즈키의 말이 바람이라도 되는 양 매번 고개를 빙글 돌려 쳐다보면서 대답하는 것도 그랬다.
"당연하지~ 음~ 저어기 차밭의 작업장이~ 더 크으고 멋있지만~"
소년이 알 지 모르겠지만 키리야마 가의 말차는 교토 쪽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특유의 향이 나는 키리야마 가의 말차와 이를 사용한 디저트를 주력으로 미는 카페와 말차 자체를 유통하는 영업점도 있었다. 전부 키리야마 가의 사업이었긴 하지만. 유명한 것은 분명했다. 그 모든 수요를 맞추기에 지금 가고 있는 작업장은 턱없이 작았다. 기껏해야 토키와라에 공급하는 물량을 채우는게 고작일 듯한 규모라고 할까.
"얼마나~ 아주 많이~? 미카즈키 군 체력 나름이지 않을까 싶구~"
체력보다는 요령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미카즈키는 처음이니 말이다. 되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말하던 스즈네는 문득 미카즈키가 걸음을 늦추자 따라서 타박. 멈춰섰다.
"향기~?"
고개를 뒤로 갸웃 기울이며 미카즈키를 본다. 처음 오는 걸 텐데 익숙한 향기를 접한 듯한 반응이다. 왜지? 하듯 차츰 기울어가던 스즈네의 고개가 아!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떠나온 본 저택 쪽을 보며 말한다.
"잇치 할부지~ 오시면 저어기 뒤뜰 쪽 방으로 모시니까~ 그래서일 거야~ 뒤뜰 바람~ 여기 통해서 들어가니까~"
그렇게 분 바람은 저택을 휘감으며 지나가기에 저택 내에서도 그 은은한 향이 늘 감돌았다. 그 안에서 차를 우리면 향이 더욱 짙어지니. 다녀간 사람에게 묻어간 잔향이 누군가에게 흘러들어갈 법도 했다.
"미카즈키 군도 다음에 오면 그 방 안내해줄게~"
다음에 오면~ 히히~ 하고 웃은 스즈네는 별채 현관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본 저택 현관에서처럼 슬리퍼를 휙휙 벗어놓았다. 한 짝은 옆으로 세워지고 한 짝은 뒤집혔지만 제대로 놓을 생각은 없어보인다. 목판 복도는 현관에서부터 관리가 잘 되어 반질반질하다. 안으로 들어오니 더 진해진 향이지만 편안하게 감싸올 뿐 불편한 과함은 없다. 그리고 둘 외의 인기척도 없었다.
"멧돌~ 멧돌~ 빙글빙글 멧돌방은 여기~"
혼자 참 떠들 말도 많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상이라는게 이런게 아닐까. 복도를 통통통통. 울리며 걸어간 스즈네가 종이 발린 장지문 하나를 휙 열자 갇혀 있던 공기가 화하고 흘러나온다. 갓 갈아낸 찻잎의 상쾌함과 목재 저택 특유의 향이 절묘하게 섞인 향이 형체 없이 쏟아지듯 흐른다. 그 흐름을 가르듯 방 안으로 쑥 들어간 스즈네가 방 한켠을 손짓했다.
"저기 앉아~"
방 안은 가운데 큰 작업대를 중심으로 그 위에 작은 찻잎용 멧돌이 여섯 구 놓여 있고 멧돌마다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 옆의 벽으로 긴 작업대가 따로 있어 갈은 찻잎을 포장하거나 말린 찻잎을 가져다 놓는 용도로 보인다. 스즈네는 선반 따위가 놓인 긴 작업대로 가 달그락거리며 찻잎을 꺼내려는 듯 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 곧 일감을 한바구니 든 스즈네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