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푸른 바다로 가득 찬 해안지역이 사라지고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각성자의 시야로도 끝이 보일 듯 말듯 높은 절벽을 아래부터 위로 바라보다 린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막 훈련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같네.' 암살자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홀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며 험지로 던져지며 기술을 배웠을 때가 떠올라 큰 감흥없이 새로운 층을 맞이했다. 능력을 봉인하라 하였지 도구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기에 린은 태연하게 인벤토리에서 등반 기구를 꺼내었다.
"좀 낡은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전 층의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이런 편법이 결정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녀는 미련없이 돌아서서 땅을 딛고 절벽을 올라서기 시작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가며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 어느정도 땅에서 멀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어 린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어 자세를 바꾸었다. 핑,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같은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곁을 지나갔다.
'함정.' 초보적인 수준의 함정이었다. 아마 날아온 각도와 반응 시각을 고려해봤을때 근처에 미리 작동하도록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린은 조심스럽게 방금 전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발을 디뎌 흙더미를 살살 더듬었다. 곧 손가락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 감촉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걸렸다. 역시나. 올라가기 쉬운 곳마다 누르면 작동되도록 조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별 무리없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느새 땅은 멀어져 크게 보였던 나무가 어느새 조그마한 녹빛 덤불로 보이기 시작했다. 갈고리가 걸린 로프의 도움으로 미리 함정이 설치될 법한 곳을 건드려 칼날이 제때 작동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고 제거하지 못한 소수의 것은 감각에 의지해 피했다.
'완전히 다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악스러울 정도로 함정 설치자는 꼼꼼하고 집요하게 함정을 파놓았다. 그 덕분에 나름 함정에 있어서라면 전문가인 그녀의 몸에도 곳곳에 생채기가 나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만..." 소모한 체력이 체력인지 강화되지 않은 몸은 슬슬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숨을 몰아쉬며 린은 떨리는 팔로 다시 몸을 지탱하며 다른 틈에 발을 디뎠다.
"...!" 정확히는 디디려고 하였다. 몸이 갑자기 훅 꺼지고 반사신경으로 한 손을 뻗어 돌이 나온 곳을 잡아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막았지만 순식간에 디딜 곳이 없어진 두 발은 그대로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툭, 툭 돌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울린다. 놀라 확장된 동공을 움직여 분명 존재했던 절벽의 틈을 다시 확인했다.
"없어...?" 린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로프가 위태하게 흔들린다. 투둑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자 힘겹게 다시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발을 두어 번 디뎌 확인하고 자리를 잡았다. 분명 존재하던 틈이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팔로 조심스레 벽면을 어루만지며 옆의 나뭇가지를 항해 손을 뻗었다. 분명 손은 나뭇가지를 통과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놀라 잠시 팔을 휘젓자 그 반동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른 손이 움직여 차가운 무언가를 누른다.
붉은 방울이 서서히 번지며 흙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점선을 그린다. 밭은 숨을 내쉬며 린은 자리에 매달렸다. 그러쥔 손에 낀 장갑의 끝이 옅은 붉은 빛으로 물드어 있었다. 험한 일본어 욕설과 왠지 모르게 튀어나온 러시아어 욕설을 짓씹듯 삼키며 피가 베어나오는 다리를 더 움직이려고 애쓴다.
"어떤 미친 개자식이..." 환각에 놀라 피하지 못한 비수가 다리를 제대로 찔렀다. 서투르게 빼낸다면 오히려 과다출혈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린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 올라가려 하였다.
"이딴 짓을." 만약 그녀의 오라비, 하야시시타 타이치가 보았다면 기겁하며 말버릇에 대해 몇 시간 훈계를 하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힘없이 키득키득 웃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거리는 웃음을 벽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리며 뱉어내었다. 환각은 이후에도 계속 있었고 능력을 봉인한 그녀는 오로지 본능에 의지하여 부상을 입은 상태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틈에 날아오는 비수나 돌덩이에 부상을 몇 군데 더 입었는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올라가 줄테니..." 반드시 올라가서. 찾아내고. 그 다음엔. 출혈이 잦아져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그녀에게 익숙한 답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언제는 고통스럽지 않았던가. 마츠시타 린의 삶이란 이 절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그녀는 그 고통을 의지로 바꾸는 하나의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목표를 연상하며 손을 움직여 다음 지지대를 잡았다. 결코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로 멈출 수는 없었다.
어느정도 올라왔을까. 어느새 팔 끝과 다리에 감각이 희미해졌다. 아물다 움직여 박힌 비수에 다시 찔린 다리와 팔에는 피가 멎었다 다시 흐른 자국이 남게 되었다.
'추워.' 너무 피를 흘려서인가. 멍한 머리가 그럴듯한 답안을 도출해냈다. 비정상적인 싸한 한기가 슬그머니 안개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린은 몇 분째 같은 곳에 정지해 있었다. 시선을 위로 돌리자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절벽의 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움직여 차갑게 얼은 절벽의 틈을 잡았다.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고 린은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피를 너무 흘려서가 아니었구나. " 멍청한 말을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뱉었다는 것을 몇 초 뒤에서야 인지했다. 눈이 쌓일 만큼의 고지대인가. 도대체 얼마만큼 올라온 거지. 분명 그 정도 높이는 아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그나마 추위로 상처부위의 피도 멎어 더 이상의 출혈은 멈췄으니 다행이었다.
아마도, 더 이상은 한계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린은 끊어진지 오래인 로프의 끝에 달린 갈고리로 지금껏 몇 번을 그래왔듯 얼음을 깨어 틈을 내며 다시 한 걸음 올랐다. 다시 한 걸음. 뻗은 손끝에 이제와는 다른 묘한 감각이 손 끝을 간질인다.
절벽의 끝을 확인한 린은 거의 기듯 올라와 온화한 바람이 부는 꼭대기에 탈진하여 그대로 누웠다. 올라가서. 찾아내고. 그 다음엔. 목숨에 매달리듯 반복된 생각이 끝을 맺지 못하고 넘실거리는 잠결에 파묻힌다.
등명탑 6층에 올라온 윤성은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을 올려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들어오자마자 느껴진 의념의 봉인도 그렇고 저 절벽의 존재도 그렇고 누가봐도 저길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이 시련처럼 보였다 몇몇은 포기하고 돌아간 듯 서성거리던 발자국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곳에서 윤성은 방패를 등에 짊어지고 절벽의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윤성은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수 많은 잡념을 떨쳐내고 주머니에서 꺼낸 청포도맛 싸구려 사탕을 입에 넣고 굴렸다 까득 하고 두꺼운 사탕을 억지로 깨물어 먹으며 당을 채운 그는 절벽에 있는 틈새를 움켜쥐어 단단히 고정하며 절벽등반의 첫발을 내딛었고 그렇게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를수록 어깨와 팔의 근육이 끊어질듯 비명을 지르고 뼈 마디마디가 으스러질듯 기묘한 소릴 울려댄다 수직의 벽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듯 육체가 신호를 보내왔지만 윤성은 묵묵하게 절벽을 기어 올랐다 '놈들도 여길 올랐겠지'
윤성의 손이 다시 암석을 하나를 움켜쥐고 체중을 들어올리 듯 몸을 기울이자 암석은 순식간에 으스러지고 균형이 뒤로 기울어진 윤성의 몸이 절벽에서 미끄러지기도 잠시 등에있던 방패를 절벽에 꽂아 넣은 유성은 쓸리고 다친 몸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1
윤성은 이대로 매달려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방패가 얼마나 버텨줄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하루 종일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다 방패를 뽑아내고 다시 절벽의 틈새를 움켜쥐며 천천히 기어올랐다 오르는건 한세월이지만 떨어지는건 순식간이기에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곳은 까마득하게 높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얼마나 기어올라갔을까 부르튼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갈 즈음 윤성은 적당한 크기의 암석이 튀어나와 있는걸 발견했다 적당히 평평하고 앉을 만한 공간도 있어 보였기에 윤성은 망설임 없이 암석으로 뛰어 착지했다
"드디어 조금 쉴ㅅ"
!
펑소리가 울려퍼지며 붉은빛의 화염이 치솟은건 그 때 였다 화염에 그을리진 않았지만 암석이 터져나간 충격으로 공중에 몸이 붕 뜬 윤성은 절벽에 부딫혀 몸을 구르며 또 다시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나갔다 날아가려는 의식을 겨우겨우 붙잡아 손을 절벽에 박아넣듯 매달린 윤성은 몸에서 검은 연기를 흘려대며 폐에 고여있던 숨을 내뱉었다
"진짜 적당히해!!"
그제서야 밑에 흔적이 절벽을 보기 포기한게 아닌 이 절벽의 악독함을 느끼고 돌아간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윤성이 주먹으로 절벽을 연신 후려치며 절규했다 짜증과 분노가 서린 고함을 얼마나 내질렀을까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기에 윤성은 결국 다시 몸을 기울여 절벽을 등반했다
다시 또 한참 절벽을 기어오르고 부상을 입은 몸이 욱씬거리는 것도 애써 무시하며 겨우겨우 끝자락에 도착했다
폐에 산소가 부족하여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절벽의 끝에 손이 닿는 순간 역광탓에 보이진 않았지만 커다란 새 형상의 무언가가 돌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 충격에 의해 윤성은 또 다시 밑으로 추락했다 아늑해지는 정신을 바로 잡으려 해도 몸에 더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윤성의 시야가 검게 변하며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2
의념도 봉인된 와중에 파고드는 격통을 참는건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소릴 지르면 하피가 눈치채고 윤성을 떨어트릴 것 이기에 윤성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버티다가 아드레날린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직접 뽑으며 피에 흠뻑 적신 다릴 이끌고 절벽을 다시 기어올라갔다
함정이 작동되며 들린 소리 탓에 하피가 슬쩍 고도를 낮췄지만 특별히 이상한건 보지 못했는지 다시 고도를 높히며 어디 사냥감 없나 두리번 거렸다
"이대로면 걸리겠네 어쩌지"
하피가 바보도 아니고 혈향을 눈치 못챌리 없다 그렇게 생각한 윤성은 또 다시 절벽의 끝을 앞에 두고 고뇌에 잠겼다 의념이 봉인된 지금 하피를 따돌리고 절벽을 완등 할 방법 절벽을 오를 수 만 있다면 의념은 돌아올 것 이고 하피를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피는 느껴지는 혈향에 고갤 숙였다 이 절벽은 가끔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 매달려 있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먹잇감이라 생각한 하피는 절벽에 매달려있는 윤성을 발견하자 크게 날개짓을 하며 빠르게 낙하했다
풀을 뒤집어쓴 윤성을 향해 하피가 낙하하며 점점 거릴 좁히자 윤성은 풀로 가린 방패를 꺼내 하피를 겨누었다 그러자 방패의 반짝이는 면에 반사된 햇빛이 하피의 눈을 가렸고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은 하피는 허우적거리다 그대로 윤성을 스치듯 지나쳐 떨어졌다
'다시 올라올거야 ... 이틈에!'
떨어지는 하피를 볼 틈도 없이 윤성은 다시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화살이 박혔던 다리도 한참이나 절벽을 구른 몸도 이미 한계인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또 얼마나 회복을 기다려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절벽의 끝에 손을 뻗어 움켜쥔 윤성은 마지막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몸을 굴렸다 익숙한 지면이 그를 반겼고 중력의 영향으로 끌어당겨지는 듯한 몸에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
그리고 윤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분노한 하피가 날개를 펼치며 절벽 위를 향해 날아오르자 몸에 스며드는 의념을 느끼며 환희에 절여있던 윤성은 몸을 일으켜 하피를 마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