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하고 한번 되뇌인 다음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감히 우리가 UGN과의 협력 관계에서 주도라.
"자칫 정치관계나 '이후의 일'을 고려하다가, 강림한 신에게 전멸 당하고 대재앙이 펼쳐졌습니다. 라면 웃을 수도 없어."
결국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마찬가지로 여력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당장 우리의 전망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등바등 했을 때 승산이 있을까 어쩔까 아닐까... 사실 '여태 그런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 아니냐' 라고 말하면, 또 그건 할 말은 없지만 서도. 성정상 결국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난관에 모든걸 끌어쓰기 급급해질 수 밖에 없긴 한 것이다.
"....아까 말한 '명령 불복종'을 한게 반장인 김태식이고, 자현이는 그 사건으로 인해 반장과의 불화로 나갔다고 들었어. 정치감각은 정말 궤멸적이지만....반대로 차라리 궤멸적이라서 나았을지도 모르지. 어설프게 잔꾀를 쓰는 녀석이 있었다면, '바보의 무해함'은 주장할 수 없지 않았을까."
그 부분에 있어선 나도 정말로 소문으로나 들은지라 자세한 정황은 모른다. 다만 헌팅 네트워크가 불 타는듯한 논란에 휩쌓였고, 국내에선 1세대 인물들이 학교에 찾아가고 그랬다고 들었다. 내가 아는 반장의 성격을 보건데 절대로 사욕을 위해서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마는.... 반장의 처세술이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다는 것도, 부정은 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
"뭐, 정확히는. 1세대 시절 대한민국 군인 저격수의 기억의 편린이 강하게 남아있다.....그렇게 말하면 조금 더 그럴듯 해지나? 여튼, 그런 느낌이야. 이상한 소리란건 알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특별반 내에선 다들 믿어주더군."
- 자칫 정치관계나 '이후의 일'을 고려하다가, 강림한 신에게 전멸 당하고 대재앙이 펼쳐졌습니다. 라면 웃을 수도 없어.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은, 합당한 것 처럼 들린다.
" 헌터의 수장이 될 생각이 있다면, 가디언과의 우열 자체는 인정 할 수 있어야 겠지. 그렇지만 " " 그것에 순응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그것이 협회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일이기도 해. "
헌터가 비교적 약소하다고. 여력이 없다고... 특별반은 아직 미숙하다고. 바보라서 눈앞의 일에만 급급했다고. 이런 변명이 언제까지 통하겠는가? 감히 가디언에게 대적한다는 생각을 하는 리더를 누가 원하는가?
" 이용 할 수 있는건 이용해. 정치와 이권으로 엮어서 가디언이 손댈 수 있는 범위를 줄이거나 이동시킨다. " " 신 토벌전에 그들을 이용해도 괜찮지. 다만, 그들은 그저 조력으로의 이미지가 남도록 해야해. "
그렇게 말하며 1세대 환생자인, 그를 바라본다.
" 특별반에게 다음 기회는 없어. 신에게 죽나, 협회에게 정리 당하거나... 결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아. "
바티칸? 좋다.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끌어들이자. 신성의 전문가들 아닌가? 기사단? 그들도 역시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 아닌가. 교단의 교위 사제나 특수 개체를 막는것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
신 토벌에 참여하는 단체의 수를 늘려서 관심을 희석시킨다. 그렇다면, 어느 한 단체가 주도하여 신의 토벌을 행했다는 의견을 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케이크의 체리부분인 신살을 특별반이 행한다면? 가디언에게 쏠리는 관심을 줄이며, 이쪽의 입지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 가장 최선은 특별반과 헌터의 힘 만으로 끝내는 거지만, 말 그대로 우리는 그들보다 약소니까. "
그렇기에 영리해져야해. 라고 덤덤하게 말하며 시선을 돌려 등명탑을 바라본다.
" 우리는 리더라는 위치에 선 이상, 목숨이 제 1목표로 삼을 수 없게 되었어. " " ...이해 할거라 믿어. 형씨. "
"역시 머리가 좋은 마도사의 의견은 훌륭한데. 아. 비꼬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최초의 헌터'인 이상, 사실은....미숙하다는건 애초에 용납될 수 있는 구실이 아니야."
비꼬는게 아니라 실제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협회는 미숙한 꼬맹이들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서 막대한 지원금을 쏟은 것이 아니다. 바보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변절의 가능성을 의심받는 최악의 상황에서 해명하기 위해 말했을 뿐이지. 사실은, 시간벌기라고나 부를 수 있을지 조차 애매한. 어느 의미론 우리에게 받는 기대를 제 손으로 부숴버린 격이다.
다만....
"딱히 반론을 하려는건 아니고.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렇게 떠들고 있으면서도....근본적으론 정치와 잘 맞지 않아."
열심히 같이 진지한 이야기를 해놓고 혼자 이상으로 달려나가는 것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들어, 나는 팔짱을 끼곤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기사야. 논리적으론 네 말에 공감하더라도, 결국 내 행동의 근간은 뒤바뀌지 않아. 기사도는 바보 같은거거든."
그러니까.
"나는 결국 이 불합리한 세상이 싫고. 거지같은 상황 속에서 무고한 아이가 우는게 싫어. 지키고 싶은게 있고, 부수고 싶은게 있어. 그러니까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해. 그 찰나의 순간에 영혼을 내던질 수 없다면, '이후의 일'에서도 결국 나는 내가 아니게 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찰나를 살아. '이후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건 결코 아니지만, 그 단 한순간을 평생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나에겐 그런 '기억'이 너무나도 많아."
나는 충분히 닦은 꼴깍이를 어깨에 멘다.
"너와는 얘기가 꽤 잘통하는 것 같고, 가능한 돕고 싶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해줘. 그렇지만 나란 녀석은 근본적으로 이런 느낌이니까, 정치적인 부분에서.....너무 기대하지는 마."
온통 푸른 바다로 가득 찬 해안지역이 사라지고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각성자의 시야로도 끝이 보일 듯 말듯 높은 절벽을 아래부터 위로 바라보다 린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막 훈련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같네.' 암살자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홀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며 험지로 던져지며 기술을 배웠을 때가 떠올라 큰 감흥없이 새로운 층을 맞이했다. 능력을 봉인하라 하였지 도구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기에 린은 태연하게 인벤토리에서 등반 기구를 꺼내었다.
"좀 낡은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전 층의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이런 편법이 결정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녀는 미련없이 돌아서서 땅을 딛고 절벽을 올라서기 시작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가며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 어느정도 땅에서 멀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어 린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어 자세를 바꾸었다. 핑,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같은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곁을 지나갔다.
'함정.' 초보적인 수준의 함정이었다. 아마 날아온 각도와 반응 시각을 고려해봤을때 근처에 미리 작동하도록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린은 조심스럽게 방금 전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발을 디뎌 흙더미를 살살 더듬었다. 곧 손가락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 감촉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걸렸다. 역시나. 올라가기 쉬운 곳마다 누르면 작동되도록 조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별 무리없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느새 땅은 멀어져 크게 보였던 나무가 어느새 조그마한 녹빛 덤불로 보이기 시작했다. 갈고리가 걸린 로프의 도움으로 미리 함정이 설치될 법한 곳을 건드려 칼날이 제때 작동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고 제거하지 못한 소수의 것은 감각에 의지해 피했다.
'완전히 다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악스러울 정도로 함정 설치자는 꼼꼼하고 집요하게 함정을 파놓았다. 그 덕분에 나름 함정에 있어서라면 전문가인 그녀의 몸에도 곳곳에 생채기가 나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만..." 소모한 체력이 체력인지 강화되지 않은 몸은 슬슬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숨을 몰아쉬며 린은 떨리는 팔로 다시 몸을 지탱하며 다른 틈에 발을 디뎠다.
"...!" 정확히는 디디려고 하였다. 몸이 갑자기 훅 꺼지고 반사신경으로 한 손을 뻗어 돌이 나온 곳을 잡아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막았지만 순식간에 디딜 곳이 없어진 두 발은 그대로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툭, 툭 돌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울린다. 놀라 확장된 동공을 움직여 분명 존재했던 절벽의 틈을 다시 확인했다.
"없어...?" 린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로프가 위태하게 흔들린다. 투둑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자 힘겹게 다시 몸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발을 두어 번 디뎌 확인하고 자리를 잡았다. 분명 존재하던 틈이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팔로 조심스레 벽면을 어루만지며 옆의 나뭇가지를 항해 손을 뻗었다. 분명 손은 나뭇가지를 통과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놀라 잠시 팔을 휘젓자 그 반동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른 손이 움직여 차가운 무언가를 누른다.
붉은 방울이 서서히 번지며 흙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점선을 그린다. 밭은 숨을 내쉬며 린은 자리에 매달렸다. 그러쥔 손에 낀 장갑의 끝이 옅은 붉은 빛으로 물드어 있었다. 험한 일본어 욕설과 왠지 모르게 튀어나온 러시아어 욕설을 짓씹듯 삼키며 피가 베어나오는 다리를 더 움직이려고 애쓴다.
"어떤 미친 개자식이..." 환각에 놀라 피하지 못한 비수가 다리를 제대로 찔렀다. 서투르게 빼낸다면 오히려 과다출혈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린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 올라가려 하였다.
"이딴 짓을." 만약 그녀의 오라비, 하야시시타 타이치가 보았다면 기겁하며 말버릇에 대해 몇 시간 훈계를 하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힘없이 키득키득 웃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거리는 웃음을 벽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리며 뱉어내었다. 환각은 이후에도 계속 있었고 능력을 봉인한 그녀는 오로지 본능에 의지하여 부상을 입은 상태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틈에 날아오는 비수나 돌덩이에 부상을 몇 군데 더 입었는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올라가 줄테니..." 반드시 올라가서. 찾아내고. 그 다음엔. 출혈이 잦아져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그녀에게 익숙한 답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언제는 고통스럽지 않았던가. 마츠시타 린의 삶이란 이 절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그녀는 그 고통을 의지로 바꾸는 하나의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목표를 연상하며 손을 움직여 다음 지지대를 잡았다. 결코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로 멈출 수는 없었다.
어느정도 올라왔을까. 어느새 팔 끝과 다리에 감각이 희미해졌다. 아물다 움직여 박힌 비수에 다시 찔린 다리와 팔에는 피가 멎었다 다시 흐른 자국이 남게 되었다.
'추워.' 너무 피를 흘려서인가. 멍한 머리가 그럴듯한 답안을 도출해냈다. 비정상적인 싸한 한기가 슬그머니 안개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린은 몇 분째 같은 곳에 정지해 있었다. 시선을 위로 돌리자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절벽의 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움직여 차갑게 얼은 절벽의 틈을 잡았다.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고 린은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피를 너무 흘려서가 아니었구나. " 멍청한 말을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뱉었다는 것을 몇 초 뒤에서야 인지했다. 눈이 쌓일 만큼의 고지대인가. 도대체 얼마만큼 올라온 거지. 분명 그 정도 높이는 아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그나마 추위로 상처부위의 피도 멎어 더 이상의 출혈은 멈췄으니 다행이었다.
아마도, 더 이상은 한계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린은 끊어진지 오래인 로프의 끝에 달린 갈고리로 지금껏 몇 번을 그래왔듯 얼음을 깨어 틈을 내며 다시 한 걸음 올랐다. 다시 한 걸음. 뻗은 손끝에 이제와는 다른 묘한 감각이 손 끝을 간질인다.
절벽의 끝을 확인한 린은 거의 기듯 올라와 온화한 바람이 부는 꼭대기에 탈진하여 그대로 누웠다. 올라가서. 찾아내고. 그 다음엔. 목숨에 매달리듯 반복된 생각이 끝을 맺지 못하고 넘실거리는 잠결에 파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