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천천히 열리는 문. 문이 열리자마자 내부의 풍경이 한결의 눈 앞에 펼쳐졌다. 서류더미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일처리를 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은 그의 다른 기계들 못지 않았다.
'기억, 데이터?'
거기다 '아직은' 이라는 단서라면. 눈앞의 이 남자는 정말로 기계가 할당량의 데이터를 처리하듯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기 전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억들을 소거해버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시간이 더 흘러 남자의 기억 속에서 한결의 실례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기 전, 지금이라도 찾아온 것이 정답이었을 터다.
"...아닙니다."
준비한 말들이 무언의 압박감에 짓눌려 휘발되는 것만 같았다. 전번과 같은 실수는 이번엔 두 번 다시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신중히 말을 골랐다.
세디브는 한 손을 가볍게 가슴에 모은 채로 신성력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진정한 신을 신앙하지 않는 상태. 즉... 그가 사용하는 신성력은 어디까지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에 담긴 것일 겁니다.
" 제가 움직이는 순간. 다른 분들이 노려질겁니다. "
감지
......
느껴지지 않는다. 즉, 상대 역시 어중이는 아니란 걸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339 배로흑왕은 한결의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서류를 처리합니다. 높았던 서류가 한참이나 줄어들기 시작하고 사람이 처리하지 못할 분량을 기계의 그것처럼 해내가기 시작할 때.
" UHN의 이사라는 직함은 단순히 전투력이 높다 따위로 정해지지 않는다. "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며 서류를 내려둡니다. 수많게 쌓여있던 서류가 줄어들고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
" 얼마나 헌터들에게 존경을 받는가. 그가 그 지역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투자했는가. 그것을 위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는가.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가. 어떤 길드 출신인가. 얼마나 많은 지지를 얻어내고 있는가. 다른 세력과 융화될 수 있는가. "
그는 말을 이어갑니다.
"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이지. 잠이라는 인간에게 필요할 영역을 기계의 것으로 대체하며 버려냈고, 내게 있어 인간으로써 남은 것은 오직 폐와 심장. 그런 것들 뿐이니 말이야. 그런 기계에게 누군가를 위해 쓸 시간이란 그만큼 그를 인정했단 얘기. 나는 그대를 인정했기에 내 시간을 써 만나러 간 것이라네. "
펜대를 내리고. 그 메마른 듯 보이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면서, 배로흑왕은 한결을 바라보며 얘기합니다.
" 그러나. 실수로써 배우는 것도 있겠지.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불쾌와 무례를 기억으로 이해할 뿐.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
페로몬의 효과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기억으로서의 연속성이 없는 배로흑왕에게 자신이 저지른 무례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사죄가 받아들여진 것인지. 한결은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다행히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깊숙하게 허리를 접는 직각 인사를 건네며 감사 인사를 말한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그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신 점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랬다. 한결이 뽑았던 번호표는 분명 1천번이 넘는 대기인수를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줄어드는 대기열 수는 배로흑왕이 그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의미했으니까.
너무 오랜 시간 물 위에서 지낸 탓인지 오히려 땅 위에서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드는군요...
>>352 " 어이. "
그는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르키며 말합니다.
" 이거. 기계공학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수리하지도 못하는 물건이잖아. 그나마 재밌어보이는 물건이니 싸게 해주려 하는데 어중간히 등쳐먹으려 하면 그게 눈에 띄어. "
그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있으면 불룩할 철자를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361 " 아이. 왜 그럽니까! "
정답. 그는 하인리히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합니다.
" 아시지 않습니까. 하인리히 군이 우리 UHN를, 그리고 저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제가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
하지만. 하고, 그는 여지를 남긴 채로 하인리히에게 얘기합니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가디언과 손을 잡으려 하거나, 우리 UHN을 적처럼 여기기도 하고. 우리와 상의 없이 UGN이 준 특수 의뢰를 진행하기도 하고, 심지어. 우리들이 내린 명령을 자의적으로 거부한 끝에 우리 입장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
곧 그는... 지금까지 특별반의 일들을 하인리히에게 설명해갑니다. 시간이 지나가고,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하인리히를 바라봅니다.
페로몬의 효과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기억으로서의 연속성이 없는 배로흑왕에게 자신이 저지른 무례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사죄가 받아들여진 것인지. 한결은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다행히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깊숙하게 허리를 접는 직각 인사를 건네며 감사 인사를 말한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그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신 점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랬다. 한결이 뽑았던 번호표는 분명 1천번이 넘는 대기인수를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줄어드는 대기열 수는 배로흑왕이 그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의미했으니까.
"처음에 제게 말씀하셨던 바. UHN이 특별반의 계약 이행을 필요로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치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이 있으시단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때까지의 경험을 미뤄보면,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낸 것 같긴 하지만.' 잔존하는 구토감을 쓸어내리며 안도를 하려고 할 즈음-
하지만. 이라는 불길한 말이 다가온다.
그 이후로 그에게서 나온 말들이란 전부 자신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 뿐이라 그저 멍하게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 가디언과 손을 잡아? 명령을 거부하고 길드화를 추진해? 특수 의뢰? 테러 혐의는 또 뭐지? '이 빡통들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절대.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사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버지의 치료를 유지 하기 위해서는- 특별반의 유지가 불가피. 그렇지만 기존 인원들이 한 짓을 뜯어보면...
" 척을 지겠다. 라고만 생각이 되는군요. 아니면 엄청난... 바보들이거나. "
제발. 그저 바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쓴물을 삼킨다. '자현이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거지? 그녀석 성격에 이런 일을 내버려 두지 않았을텐데' 이를 어떻게 수습하고, 특별반을 정상 궤도로 돌려 놓을지 생각만 해도 위가 쓰리는 듯 했다. 정치적인 수습만 하더라도 엄청난 노력이 동반 될테지.
" 만약 그들이 가디언이나 타 세력이 붙을 의사가 없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수습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 " 추락한 특별반의 인식. 그리고 정치적인 평판... 고려할게 한 두가지가 아닐뿐더러 " "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상부에선 이미 특별반에 대한 기대가 많이 사그라든 상태라고 이해가 됩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기존 인원들을 물갈이 하는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본다. 헌터의 관점으로도, 정치적인 관점으로도 오점이 있는 인원들을 헌터의 리더로 다시금 옹립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코스트가 들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