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으로 상황극판의 규칙을 따릅니다. 2. 모니터 뒤에 사람 있음을 알고 언행에 주의하도록 합니다. 3. 무언가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때에는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도록 합니다. 4. 15금 어장으로 도가 지나친 선정적, 잔인함을 유의하여 활동합니다. 5. 활동에 있어 밝히기 어려운 질문은 웹박수를, 그 외는 캡틴에게 질문하면 성심성의껏 안내드립니다. 6. 말하지 않고 참는 것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긴 문제는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해야할 것은 말하도록 합니다. 7.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더라도 인사는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받도록 합니다. 8. 모두 현생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건강도 챙겨가며 즐기도록 합니다.
짧은 물음에도 상당히 상세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것도 가장 핵심적이라 해도 좋을 정보들로 이루어진. 이런 질문을 받은 경험 역시 많은걸까, 슬그머니 그런 딴생각 들어오려는 것을 밀어넣고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럴 때만큼은 글로 하는 소통에도 장점이 있다. 전해야 할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으니. 골똘히 생각하며 중 떠오른 것들을 차근차근 한 줄씩 더했다. 질문거리가 모두 정해질 즈음, 그는 창구에서 서류를 제출하기라도 하듯 질문이 쓰인 종이를 슥 내밀었다.
[ 한 번 추락을 한 이후, 다음 추락을 하기까지의 주기 같은 게 있을까? ] [ 원래 있었던 세계(고향)에 다시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 [ 너는 이런 경험에 많이 익숙해? 여기가 어떤 세상인지도 대충은 알아? ]
그리하여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중요한 질문인 것은 맞으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빠진 듯도 한데, 그 부분은 미하엘 본인도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밝혔으니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질문을 자제한 것이 아니라 알지 ‘않기로’ 했다고. 세상사는 원래 기지보다는 미지로 가득함이 당연하지 않던가. 막 추락한 직후였던 이제까지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경황이 없었던 것이었지, 그는 본래 뭐든 그러려니 하는 성격이었다. 세상 풍파가 자신을 뒤흔들거든 그에 맞추어 적당히 나붓거리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이 지극히도 당연하여, 그것이 조금쯤 이상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정도로.
아, 울려버렸다. 우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 기분을 달래주고자 챙겨주고 있는거였는데 도리어 내가 울려버리다니. 기분이 착잡해진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때려박힌 감정을 한순간에 무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까처럼 손을 뻗어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려하며 말했다.
" 그렇지 않아요. 그들과 당신은 다른 사람이니까. "
물론 거짓말이다. 아마 알레프를 보고 있으면 신이란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잔뜩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소녀를 가차없이 두고 갈 정도로 나는 매몰차지 못하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더욱 그렇다. 이것 또한 내가 조금만 더 참으면 해결될 일이다. 참아내는건 이제 익숙하다.
" 따라와도 괜찮아요. 같이 다니면 외롭지 않고 즐거울테니까. 알레프라면 내 동행도 분명 좋아해줄거라 생각해요. "
이젠 괜찮아졌다. 표정관리도 완벽하다. 나는 아까처럼 웃어보이며 알레프에게 조심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선 혹시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약한 손짓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해본다.
호기심 많은 족제비처럼 주변을 알짱거리던 미하엘이 행거를 휙 치워버리자, 윈터는 다급히 그 행거를 붙들려 했다. 결국 팔을 쭉 뻗고 허리를 인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소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모델이 좋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윈터에게 있어서 제국의 제복은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언제나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지금, 그녀는 아주 알몸이 된 기분이었다. 몹시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건..."
주인장이 무어라 읊자, 옅은 하늘빛이 윈터의 옷에 스며든다. 행거를 놓고 자세를 바로한 윈터는 두 손을 그러모아 가슴께에 얹고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방금의 빛은 이 세계의 마법 같은 것이었을까.
"고마워, 주인장... 자, 잠깐. 미하엘!"
주인장에게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등이 떠밀려 가게 밖으로 밀려나왔다. 내리쏘는 햇살이 눈부셔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포목점에 들어갈 때보다 볕이 밝아진 느낌이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내가 말없이 자리를 비운 거라서. 내가 떠나버린 줄 알고 혼자 가버리면 안 되니까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던 거야. 서두르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윈터는 미하엘과 처음 만났던 장소로 느린 걸음을 옮기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거라... 첫째. 지금 여기는 확실히 현실이 맞아? 처음엔 꿈속이라고 생각했거든. 둘째.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리고 셋째. 추락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 너는 날 보자마자 내가 추락자라는 것을 알아차렸잖아."
부끄러워 하는 거구나~ 귀여워라. 미하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말하는 오타쿠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히죽거렸다. 마스크 같은 게 있었다면 제대로 숨겼을 텐데. 제멋대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씨름하던 미하엘이 네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아하, 그런 거? 뭐,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야~ 나야 좋지.”
가는 길이 낯익은 걸 보니, 처음 만났던 장소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미하엘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릴 정도로. 이어 네 질문에 미하엘이 답한다.
“현실 맞아. 안 믿어지면 한 대 맞아볼래? 아픈 걸 느껴보면 확실히 알 텐데 말이야.”
미하엘이 주먹을 쥐고 휙휙 휘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정말로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장난치는 모습이었으니까.
“아~ 원래 세계로 말이지? 그럼, 갈 수 있지. 언젠가는.”
두 번째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언젠가’라는 불확실한 단어 때문에 썩 믿음직스럽진 않다. 미하엘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사람이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며 부연 설명을 덧붙이곤 네 세 번째 질문에 답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아~? 윈터가 말했잖아? 내가 너를 알아봤다고. 아마, 네가 처음이라 눈치채지 못한 것뿐일 거야. 추락자는 추락자들을 알아볼 수 있어. 뭐라고 할까·······. 그냥, 뭐 별 거 없어. 어쩌다 보니 알아차린다 정도려나? 약간 그런 느낌이야. 이렇게 마주치면,”
미하엘은 제 주먹과 주먹을 통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부딪친 주먹엔 그다지 힘을 준 건 아닌지, 맞붙기보다 조금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 붙지 않고 튕겨져 나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처음 딱 봤을 때 뭔가 느껴지거든.”
배시시 웃은 미하엘이 그로 인해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며 재잘거렸다. 어떤 추락자는 다른 추락자를 만나고 받은 그 느낌을 사랑에 빠진 거라고 착각 했단다. 한참을 오해하던 이가 또 다른 추락자를 만난 뒤 그게 사랑이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나 뭐라나.
그, 그래도... 소녀는 손길 받아들이면서도 줄곧 울먹인다. 마음 속 응어리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아 머뭇거리기만 하게 된다. 같이 가고 싶지만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싫어...
"...정말?"
하지만 그는 정말 괜찮다고 한다. 따라와도 괜찮다고 한다. 훌쩍이던 소녀가 고개를 찬찬히 든다. 다시금 올려다본 그의 낯빛엔 아까 전과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머리 위로 손이 탁 얹어진다. 그리고 조심스레 머리칼을 만져주는 손길. 지금... 쓰다듬어주고 있는 거야? 이토록 따스한 온정은 여태껏 받아본 적 없다. 그가 너무 상냥해서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힝."
그래도 지금은 울지 않을 거다. 이젠 슬프지 않으니까. 눈물 삼키고서 소녀는, 부탁받은 물건 든 채 얼른 돌아가려 한다. 씩씩하게 나아가려 노력한다.
"...라클레시아는 너무 착해. 너무 착해서 나쁜 사람한테 등골 빼먹힐지도 몰라."
그리고 넌지시 덧붙인다. 누가 누구한테 조언하는 건지.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던 소녀, "빨리 안 오면 두고 갈 거야!" 크게 외친다. 물론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지만.
그는 미하엘의 답변을 차근차근 복기하며 정리해갔다. 특별한 주기는 아마 없으리라고. 그렇다면 시기를 맞추어 대비를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전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언제나 하늘만 보며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 모르는 편보다는 나으리라. 하지만 언젠가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건 그다지 좋지 않은데. 본연의 자리, 이물질, 태어난 곳……. 갑작스레 눈앞에 척 들이밀어진 손가락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내도록 유하게 풀어져 있던 입매가 설핏 굳는다. 고민의 길이만큼이나 머뭇거리며 번진 획 하나도 길게 늘어졌다.
[ 언젠가 되돌아가더라도── 고향을 다시 떠날 수 있을까? ]
‘고향’을 이야기하는 얼굴에 스치는 감정은, 감추지 못할 거부감과 명백한 불안이었다. 어찌해서든 멀어질 수만 있다면 그리하겠노라 단언할 것만 같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던 기색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손 안에 쥐인 낯선 물건의 감촉, 평온한 실내의 분위기,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의 존재는, 홀로 곱씹는 뇌고마저도 바래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막연하게 드리운 두려움이 조금은 덮어지는 듯했다. 그즈음 화제를 돌리려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그리해야 되겠다 생각해서였을까? 그는 지금껏 쓰인 이런저런 줄글 아래에 엉뚱한 문장을 더했다.
[ 너도 나한테 물어볼 거 없어? ]
미하엘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기까지 했고, 방금 들은 정보가 꽤 도움이 되었으니 비슷한 정도로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일까.
[ 아는 건 많이 없겠지만…… 나한테 궁금한 게 있다면. . . . ? ]
비록 지금 그의 처지엔 가진 것이나 도움 될 만한 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지만서도……. 쪼들리는 처지가 찔려서 맺음말이 애매하게 길어지다, 소심한 물음표로 끝맺는다. 마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필연이었다. 늘 지니고 다녔던 가방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이곳에 떨어지기 전부터 잃어버린 상태였던지라 무의미한 가정밖에 못 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하엘과 달리 윈터는 담담한 표정으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보았다. 당장 의문이었던 것들은 속시원히 답을 들었다. 이제는 이 세계에 조금씩 적응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윈터는 옆에서 경쾌하게 조잘거리는 미하엘과 나란히 걸으며, 정면의 허공 어딘가를 응시한 채 나지막이 운을 떼었다.
"있지. 난 이 세계가 점점 좋아지려고 해.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 "나는 날 때부터 군인이었어. 머릿속에 남은 첫 기억이 훈련병 윈터니까. 그게 인간 나이로 아홉 살쯤이었나. 아마 그 이전의 기억은 소거당했겠지. 아무튼. 일생을 인간의 편에 서서 몸 바쳐 싸워왔는데. 그 대가가 폐기처분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 "분명히 실험대 위에서 주사를 맞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여기였던 거야." ... "이제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아.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이제는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거야. 친구를 만들고, 세계를 여행하고. 나도 평범하게..."
즐거운 듯 재잘거렸던 미하엘의 말소리가 잦아든다. 네 말에 집중하는 걸지도 몰랐다. 담담하게, 그러나 못내 속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는 네 말을 듣는 동안 미하엘은 어떠한 말도,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걷던 걸음을 좀 더 늦췄을 뿐이다.
그리고,
네 말이 마침표를 맺었을 때.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거야? 네 세계를 포기할 거야?”
미하엘이 묻는다. 묻는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무표정한 것 같으면서도 안타까워 한다. 화내는 것 같으면서도 침착하다. 슬퍼하면서도 이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네가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고 나서는, 미하엘은 익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그럼 이 세계에서 헤어지는 거려나. 선택은 윈터의 몫이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미하엘은 무언가 생각하듯 제 턱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몇 초 정도 늦게 다음 반응을 보였다.
“추락자가 할 건 추락자마다 다르지. 윈터가 이곳에 남아 생활하겠다면 그렇게 하면 돼. 이건 자신한테 달린 거야. 누구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누구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누구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추락자는 저마다 가진 목표가 있으니까.”
네 경우엔 친구를 만들고 여행하고 평범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목표겠지. 그렇게 느린 걸음이었건만, 어느 순간 너와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휙 돌아선 미하엘이 너와 마주섰다.
“누구든 네 세계에 가는 건 원치 않겠다—. 나라도 다른 세계에 머무르길 바랄 것 같아.”
미하엘은 빙그레 웃었다. 고생했다거나 힘들었겠다 같은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말할 뿐이다. 네 목표가 이뤄지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