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으로 상황극판의 규칙을 따릅니다. 2. 모니터 뒤에 사람 있음을 알고 언행에 주의하도록 합니다. 3. 무언가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때에는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도록 합니다. 4. 15금 어장으로 도가 지나친 선정적, 잔인함을 유의하여 활동합니다. 5. 활동에 있어 밝히기 어려운 질문은 웹박수를, 그 외는 캡틴에게 질문하면 성심성의껏 안내드립니다. 6. 말하지 않고 참는 것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긴 문제는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해야할 것은 말하도록 합니다. 7.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더라도 인사는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받도록 합니다. 8. 모두 현생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건강도 챙겨가며 즐기도록 합니다.
앗 하는 경악성에 고개부터 번쩍 들렸다. 이 시점까지는 지극한 반사성의 행동으로, 미하엘을 쳐다보는 그의 낯엔 별다른 감정이나 의미는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는 놀란 고양이처럼 화들짝 몸을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놀라는 정도가 유독 심해 보였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는 어쨌거나 사람이므로, 놀랐단 한들 펄쩍 뛰며 도망을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손 붙잡힌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목이 온전했더라면 ‘왜……?’라고 물어보기라도 했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상태를 지적당했으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붙잡은 손을 자세히 살핀다면─ 나머지 손가락들도 온전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중 몇은 간신히 붙어만 있는 꼬락서니라 해도 좋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해진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체온이 지나치게 낮다는 점도.
다시금 입만 달싹거리다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대답을 하고 싶어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는 잠시 무언갈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 손을 들고 말릴 새도 없이 흙 위에 손을 대었다. 이유는 몰라도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동을 싫어하는 듯한데, 현재로서는 소통할 방법이 전무하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손이라 해서 온전할 리도 없고.
[ 왜? ]
아니나다를까 그는 조금 전의 표정 그대로 미하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생각해 보니 질문이 지나치게 함축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한 문장을 더했다.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말을 아는가? 그러나 지금, 여기엔 날개도 없으면서 추락하는 이가 있다. 차림새는 현대라기엔 지나치게 고풍스러우며, 고대라기엔 꽤나 미래적인 청년. 그는 아래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떠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굳이 눈을 뜰 필요는 없어보인다. 눈을 뜨나 마나 청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므로.
"으아아아아———!!!!!"
자신이 왜, 어째서 추락하는지 갈피도 잡지 못 해 외마디 비명만 지르던 이 청년은, 자연스레 이것이 요괴의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방금 전까지 요괴와 대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요괴라니, 이 청년은 뭐하는 자이기에 그러한 상황에 놓였었단 말인가? 뭐, 그건 나중에 차차 설명하고... 하여튼 이 청년은 지금껏 숱한 죽음의 위기를 거쳐왔고, 또 용케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면과 가까워질수록 청년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누군가를 향한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타, 호타루! 미안타! 니는 내가 꼭 살리겠다켔는데, 이래 됐다... 미안타...!'
그가 말하는 '호타루'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 없다. 청년은 이제 지면과 부딪히는 순간 온몸의 모든 곳이 박살날테니까. 어느새 지면과의 거리는 한 뼘 차이로 가까워졌다. 눈을 질끈 감은 청년, 그 이름 '후지마 메구무 藤眞 寵'. 그는 요괴의 한 서린 저주로 영원한 저승길에 오르게 되었다...
"...?"
...일 줄 알았는데. 그는 살았다. 뺨에 가장 먼저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고, 색은 싱그러운 녹색이었다. 머꼬, 이건? 지면에 닿는 몸엔 아무런 아픔도 상처도 없었다. 처음엔 저승인 줄 알고 언제부터 저승이 이리 푸르고 아름다웠는가 싶었는데, 자신의 고향에서 전해지는 전설 속 저승은 도깨비가 살을 찢고 혀를 뽑고, 죄의 무게만큼이나 영원한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무섭고 끔찍한 곳이었기 때문에, 눈 앞에 선명히 펼쳐진 숲의 광경에 메구무는 자신이 아직 이승에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살짝 의심 중이긴 했지만. 그는 어안이 벙벙해 어수선한 상황임에도 삿갓을 고쳐 쓰고는 걸음을 옮겨보기로 했다.
미하엘이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네가 놀라는 것에 금세 손을 놓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미하엘은 그다지 세심한 편은 아니었다. 여전히 손 잡은 채 너와 눈을 마주하던 미하엘이 다시금 으,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얘는 아프지도 않나 봐. 미하엘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깃들었다.
현저히 낮은 체온과 너덜거리는 손가락. 안 되겠다—. 짧게 혼잣말을 한 미하엘이 너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끝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네가 다른 손(그것도 이쪽처럼 너덜거리는 그 손!)으로 흙 위에 글씨를 적어냈기 때문이었다.
“뭐? 왜냐고?”
아니, 이게 지금 이유가 필요한 거야?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에 미하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네가 글자를 적었다. 그 내용을 본 미하엘이 아이고, 같은 소리를 냈다.
“화났냐고? 아—니! 아파 보여서 그렇거든? 아파 보여서. 너 혹시 시체야?”
일반적이라면 이런 상태를 하고도 멀쩡하게 행동하진 않는다. 덕분에 미하엘은 ‘시체냐’ 같은 말을 했지만, 곧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손을 젓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체온도 낮고 아픈 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여서 묻는 말이야. 시체, 좀비, 언데드······. 뭐 그런 거야?”
물었지만, 대답을 하려면 네가 다시 그 손으로 바닥을 긁을 거란 걸 안다. 미하엘은 금세 스스로 답을 내린 것처럼 됐어, 하더니 네게 일어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어. 일단 그 손부터 어떻게 좀 하고 마저 대화 해.”
그 손, 보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으아악이거든? 네가 싫다고 해도 끌고 갈 거니까 얌전히 움직이도록 해. 다소 강압적인 투로 말한 미하엘이 너를 재촉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화들짝 놀란 주제에 저항하려는 의사는 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얌전히 손을 잡힌 채 무슨 생각인지 모를 미하엘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려니, 손 붙잡은 채로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타이밍을 놓친 그는 반쯤만 일어선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조금 늦게서야 의도를 깨달았는지 저 역시 따라 일어섰다. 보이는 모습에 비해서는 몸이 제법 가뿐하게 딸려갔으리라. 그나저나 이러면 대답을 할 수가 없는데…… 미련 남은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하려던 찰나, 또 미하엘이 싫다는 반응을 보일까 싶어 안 본 체 애써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이걸 무어라 대답해 줘야 옳을까. 고심 끝에 그가 마침내 취한 행동은, 남은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다─버벅대는 시간이 더 길었다─ 고민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본인도 잘 모른다는 뜻일까. 사실 이 동작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은 행동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필요해지니 어찌 떠올리는 덴 성공했다. ‘시체’ 정도는 알아도 그 뒤에 나열되는 말들은 모두 처음 듣는 어휘들이다. 일단 죽은 적은 있으니까 이걸 시체라도 쳐도 될지 안 될지……. 하지만 시체는 살아 있다가 죽어야 시체잖아. 애초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으면 어쩌지? 의문만 더 아리송하게 깊어지려는 찰나에 생각이 차단됐다.
도시라면 아까 보았던 곳을 말하는 것일 테다. 자연히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저편을 바라보는 까만 눈에 일말의 불안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또한 찰나였다. 그가 끝내 손을 떨쳐내는 일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져서부터 지금 이 만남까지. 눈앞에 닥친 상황들이 워낙 당황스러워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그는 눈앞의 상대가 무척이나 반갑고도 달가웠던 것이다. 싫어도 끌고 갈 거란 말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미하엘을 바라보는 낯에는 어느새 해맑은 감소憨笑만 가득 떠올라 있다.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당신이 이곳에 있음이 문득 기뻐져서. 어디로 가든 상관 없다는 것처럼.
>>40 저항감 쪽은 미션이야. 사실 미션이라지만, 독백형식에 가깝긴 하지. 기록장에 써서 올려주면 돼. 참고로 일상으로 도시에.들어가서 저항감을 느끼더라도 미션에 짧게나마(500자)라도 적어주면 포인트도 얻고 좋아. 물논 작성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꼭 작성할 필요는 없지만 말야.
이번 미션은 도시에 입성하는 것! 이때의 키워드는 '도시에 입장할때 느껴지는 저항감' 이야. 기록장에 써있는 것들을 보면 전부 도시에 입장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고 공통적으로 저항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하고 있잖아? 그것처럼 로시주도 써주면 돼. 대신 500자 이상으로 쓰라고 하네.
─어떻게든 첫 추락을 견뎌낸 소녀. 두려움과 불확실성 품은 채 도시로 발을 내딛다. 소녀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시장통. 게다가 그곳엔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게임 속 판타지 세계에나 존재할 법한 외관의 이종족들도 있었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제 본래 세계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 뒤 소녀가 한 행동은...
"...으으..."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소녀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방황한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다.
"...사람, 너무 많아..."
신들의 시대에서부터 인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혼자였던 소녀에게, 이만한 인파를 마주하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히익!" 이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에 소녀는 지레 겁을 먹는다. 근처 지나는 발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
"......집에 갈래..."
흑흑. 이윽고 소녀는 무릎에 얼굴 파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낯선 공간에 대한 공포로 눈물이 자꾸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궁상맞다.
윈터가 잠들어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을까 고민하다가 금방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아서 일어났을때 갈만한 곳들을 미리 찾아두고자 거리로 향했다. 거리는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는 요령껏 부딪히지 않게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며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 음? "
그렇게 고개를 빠르게 돌리며 휙휙 둘러보던 내 시야에 잡힌건 고개를 파묻은채 훌쩍이는지 등이 들썩거리는 한 소녀였다. 여기서 길이라도 잃은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녀를 지나쳐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매몰찬 사람은 되지 못했다.
" 여기서 왜 울고 있어요? "
소녀의 앞에 쪼그려앉아 놀라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 나는 소녀가 진정할때까지 옆에 있어주기로 했다. 우는데엔 뭐 이유가 있겠지만 그걸 나에게 들려주는건 별개니까.
울먹이면서도 중얼중얼, 하고 싶은 건 전부 말해보는 소녀. 그런 소녀에게 다가오는 하얀 인영...? 이윽고 하얀 존재가 말 걸어오자,
"히야악!"
소녀는 괴상한 단말마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난다. 하얀 존재는 친절하게 목소리까지 낮춰주었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복잡한 시장바닥에서 누군가 제게 말을 걸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눈 앞의 존재와 시선 맞추기는 커녕 애먼 땅바닥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여간 소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달달 떨리는 몸, 퉁퉁 부은 눈가, 새빨개진 낯빛,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 소녀의 눈길이 존재의 발치 언저리를 방황한다. 줄곧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내 말을 꺼내는데.
"...누, 누구...?"
혹시 나쁜 사람? 게임에서 나온 것처럼 마을 사람들을 습격하고 돈을 빼앗는 도적이라든가, 가엾은 아이들을 납치 감금해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범이라든가!! 퍽이나 그럴싸한 상상을 이어나가는 소녀였다.
다소 천진하기까지 느껴지는 미소다. 뭐 때문에 웃는 거람. 미하엘은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네 손을 이끌고 도시로 향한다. 걷는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린 것은 아니었다. 나붓나붓 흔들리는 풀을 헤치고 걷는 사이에 조용함도 없었다.
“통증을 느끼던 느끼지 않던, 몸은 아껴야 해.”
“알아? 상처 같은 게 누적 되면 너도 힘들지만 주변 사람도 힘들다니까?”
돌아올만한 대답(이 추락자는 말하는 데에 문제가 있어 보이니까)은 없었지만, 재잘재잘 말을 이어가는 소리는 사실 잔소리에 가까웠다. 혹자는 미하엘이 처음 만난 이에게 이유도 없이 왜 그리 오지랖을 부리는 거냐고 생각할 테지만, 생각해 보면 이유랄 건 있었다. 그야 저와 너는 같은 신세의 추락자니까.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일단 가서 붕대랑, 연고랑······. 맞다, 펜과 종이도 있어야겠네.”
필요한 물품을 소리내어 정리하던 미하엘은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가까워지자 잠깐 너를 돌아본다. 혹여 네가 지쳐 보인다거나 하면 속도를 좀 더 늦출 요량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깜빡했는데 난 미하엘이야. 네 이름은 내가 펜을 구해온 후에 들을게.”
이건 어쩌면, 네가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도망치기나 하는 건 아닌지 싶어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튀면 안 된다’ 같은 게 내포되어 있는 그런 말 말이다.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구나. 그러는 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야?"
앞머리를 쓸어올려 이마를 드러내고 있던 윈터는 눈앞의 수인 소녀가 반창고를 붙여주자 앞머리를 다시 내려 반창고를 가렸다. 낮추었던 자세를 바로하고 손끝으로 반창고 옆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했다. '우리 세계를 침략했던 마수들도 대부분 다른 세계로부터 불러들인 것이었으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다른 세계에 말 그대로 '떨어지게' 된 건가.'
"좋아. 알려준 정보의 대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치를 수 있게 할게."
처음엔 같은 처지인 라크를 만났고, 이번엔 이런 일에 꽤 적응한 것으로 보이는 수인 소녀를 만났다. 이런 경험에 꽤 적응한 것 같아 보이는 그녀를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소녀에게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으나 혹시라도 있을 불편한 상황을 경계하며 당당한 걸음을 옮겨놓는 소녀를 뒤따랐다.
아, 놀래켰다. 인기척을 내면서 다가가긴 했는데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눈치를 못챈것 같았다. 그나마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서 눈을 잠깐 마주친 덕분에 상태는 볼 수 있었는데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버린 눈가에 얼굴엔 눈물 콧물이 잔뜩이었다.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서 소녀를 바라보던 나는 일단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주려하면서 말했다.
" 내 이름은 라클레시아 테시어, 라크라고 부르면 된답니다. "
엘프라고 알아요? 나의 뾰족한 귀를 가리키며 말한 나는 소녀가 진정될때까지 옆에 있어주기로 했다. 먹을게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줬을텐데 아직까지 그럴 정도로 이곳에 적응한 것도 아니었기에 아쉬운 부분이었다. 옷이 좀 얇아보였는데 내가 입고 있던 외투는 윈터에게 덮어준 뒤라 딱히 덮어줄 것도 없었다.
" 길을 잃었어요? 아니면 다른 이유? "
어쨌든 이렇게 울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결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안물어봤네.
아…… 그랬던가? 화가 나지 않았다 하면서도 어째서 격양된 반응을 보이나 했었는데, 의문 하나가 풀렸다. 어쩌면 저 상대가 소리를 쳤던 것도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서로의 당연함이 달랐던 모양이지. 이어지는 말만 들어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걸 쓰더라도 아마 낫지 않을 텐데……. 무용한 짓에 자원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싶어 손가락만 꼼지락거려 보지만, 이번에도 끝내 손을 떨쳐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양순한 가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졸졸 잘도 끌려갔다. 지친 듯한 기색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출발하기도 전부터 멀리에서 본 도시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았다. 쉬지 않고 걷자 관문이 어느덧 코앞이다. 어언간 주변도 점차 북적여 간다. 도시에 들어갈 요량으로 몰려든 사람의 무리와 인공의 힘으로 빚어진 건축물, 벽 너머 안쪽에부터 생생히 전해지는 왁자한 활기가 가득하여……. 그것들을 맞닥뜨리자 줄곧 머뭇거린 적 없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껏 대답만 하지 못했을 뿐 천진한 활기가 느껴지던 면에 기대와 불안이 얽혀들기 시작했다. 낯선 양식의 높은 벽 위로, 익숙한 기억 속의 풍경이 덧씌워져─ ……왜 전부 나만 남겨두고 떠나는 건데. ……남겨진 빈 자리를 좇아 한때의 흔적만 더듬으며 고독을 되새기는 짓도 이젠 질렸다. 시선이 곁으로, 그리고 조금 아래를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는 것 무엇 하나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러니 이걸로 된 일 아닐까. 생각은 스스로 정리했으므로 지체는 짧았을 테다. 생긴 모습은 다 큰 어른에 실 연령도 많을 양반이 문 하나 통과하는 데 무슨 다짐이 그리도 필요하느냐 싶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찌 잘 해결이 됐으니 상관없겠다.
문을 통과한 그는 애초에 쉬지도 않았던 숨을 한계까지 참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드넓게 펼쳐진 도시의 경관과 인파를 눈에 담을 때가 되자, 그 표정 이번에는 왜인지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뀌어서는. 웬일로 제 쪽에서 미하엘의 손을 끌어와 손바닥에 무어라 글씨를 쓰려 했다. 지금까지는 소통이 안 될지라도 잘 참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그는 미하엘이 상할대로 상한 손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다. 흉하게 상한 손끝을 대는 대신, 주먹을 쥐고 튀어나온 마디뼈─이 부위부터는 장갑에 가려진 상태였다─를 손가락 대신으로 하여 획을 그었다.
손을 달달 떠느라 획이 어긋난 것까지 시각적으로 반영한다면, 대충 이 정도 쯤 되는 문장이었겠다.
슬그머니 다가오는 하얀 존재의 손. 무시무시한 악의 품은 것 같은(아니다) 그 손아귀를 보며 소녀는 눈을 질끈 감는데...
"...으긱."
돌연 얼굴로 와닿는 감촉에 맥빠진 소리 내어버린다. 하얀 존재의 손길은 아프거나 무서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소매로 눈물 훔쳐주는 행동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겁먹은 것처럼 빳빳이 굳어있는 채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온 것도 모자라 이런 신체 접촉(?)까지!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인터넷에도 그런 건 안 나와 있었는데... 머리가 핑핑 돈다.
"라, 라클레시아...?"
모르는 이름이다. 엘프란 종족은 게임에 자주 나왔으니 알지만. 잠깐, 그럼 여기는 게임 속 세계인가? 어쨌건 소녀는 여전히 하얀 존재와 시선 마주하지 못한 채 침묵 유지한다.
"...그, 그게... 방금 전까진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뚝,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해보려 하지만, 어딘가 엉성하다. 훌쩍, 훌쩍. 소녀는 아직도 잦아들지 않은 울음기를 애써 참아내려 한다.
"...이, 이름...? 나?"
그러다 이름을 묻는 하얀 존재의 물음에 온 몸을 쭈뼛대고. "......" 결국 제 이름을 알려주긴 커녕 침묵으로 답해버린다. 소녀에겐 모든 게 낯서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그런가. 이 소녀도 저 위에서 '추락'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고공에서 추락하는 그 느낌은 처음 겪는 누구나 낯설 것이 분명했고 거기에 이 도시는 더더욱 낯선 장소일테니까 말이다. 나조차도 소녀에겐 저기 지나다니는 낯선 사람들 중에 한명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여기에 혼자 두고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못봤다면 모를까.
" 나도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
어쩌다가 떨어졌는지는 굳이 설명해줄 필요 없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경계가 심하면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마냥 여기서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있을 수는 없다. 이름도 말을 해주지 않는 소녀를 어떻게할까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일단 여기 앉아있으면 엉덩이도 아프고 그러니까 뭐라도 먹으러가요. 간단한 심부름만 해주면 음식은 주니까. "
그렇게 울어댔으면 배고플 수 밖에 없다. 우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심하니까. 하지만 소녀가 날 따라오냐 안따라오냐에 달렸다. 안따라온다면 더 난처해질것 같은데 ... 그렇다면 음식을 포장해와야하는데 그 사이에 소녀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기에 함부로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쩐담.
" 아니면 여기 꼭 앉아있는다 약속하면 내가 음식을 가져올께요. "
대신 꼭 약속해야해요? 나는 검지 손가락을 살짝 굽어서 보여주며 말했다. 아, 근데 이게 이 소녀한텐 약속의 제스처일까?
[자요. 대신에 이거라도 읽어드릴게요.] [응? 이게 뭐냐구요?] [아, 이건... 아주 먼 옛날에 찾은 책이에요. 누군가의 일생을 담은 책이죠.] [네? 얼마나 할일이 없으면 그 사람의 일생을 조사해서 자서전을 내는거냐구요?]
그는 당신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사람은 없을게 당연하잖아요? [자, 대충 50년 남짓 살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50년 동안이나 그 사람의 행적이 전부 보고될 일이 있을리가 없겠죠?] [혹여나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서 사실인 내용이 많이 있더라도, 중간중간에 각색된 내용이 있을거라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이건 달라요. 그 사람의 '모든 인생' 이 진실되게 기록되어있는거니까요.]
비굴하다! 여기서 더는 이보다 비굴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비굴하다! 일단 상황은 면하고 보자 싶어 빌기 시작했지만, 열심히 빌다 보니 어쩐지 저 쪽이 아니라 이 쪽이 진정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꼴이 되었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쪽이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그림일 지도 모른다. 비록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 쪽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니아는 열심히 빌고 빌었다. 아마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냅다 바닥에 엎드려 기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소년에게 달려들던 사람이 냅다 날아가 벽에 꽂히?기? 전까지는.......
“・・・까아악・・・“
부딪힌 건 저 쪽인데,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는 이 쪽에서 흘러나온다. 커진 눈과 벌어진 입, 질리다 못 해 시퍼렇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안색이 현재 느끼고 있을 모든 감정을 대변한다. 머, 머, 머, 무어라 말을 하려 해도 턱이 빠진 것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벙긋거릴 뿐, 주고받던 고함으로 시끌거리던 광장이 꽁꽁 얼어붙는다. 거한들이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포로 물들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언제 더 큰 악의로 변화하게 될 지 모를 일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울린다. 소년이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더니, 곧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부자연스럽다고 할까, 몸 여기저기를 강제로 어딘가에 묶어서 잘 움직일 수 없게 된 것 같은,
멀리 날아간 사내를 부축하던 거한 몇 사람의 시선이 대번에 날카롭게 꽂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분노다. 히익〰 그것이 꼭 자신에게 꽂힌 것처럼 부들부들 떤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억울한 맘 뿐이지만 내 힘만으론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방법도 없는데. 사내가 날아가던 광경을 보고 모른 체 스스슥 멀어져가는 구경꾼들의 모습이 야속하다. 그래도 누군가, 누군가 한 명이라도 개입해 줄 마음이 있다면,
“도, 도, 도와 주세요〰〰〰!!“
공간을 울리는 처절한 외침, 동시에 푸드덕, 하고. 광장 여기저기에 퍼져 있던 비둘기 따위의 새들이.. 한 번에 날아올랐다!
엉성한 설명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자기도 그렇다는 하얀 존재를 보며, 소녀의 눈빛은 두려움 한 풀 꺾인 듯하다. 그리고 다시금 손 내밀어지자 마찬가지로 움찔대긴 하나 크게 놀라진 않는다.
"...먹을 거?"
먹을 거 사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랬는데, 그래도... 낯선 사람을 쉬이 믿을 순 없는 법. 그의 제안에도 소녀는 땅 짚고 있던 손가락을 꿈질댈 뿐이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하얀 존재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여기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그치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래서 무서워. 그리고 라클레시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잖아.
"...같이 갈래."
이윽고 소녀는 그가 내보이는 손가락을 덥석 붙잡으려 했다.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모습은 어디가고 꽤나 당돌한 태도다. 줄곧 애먼 곳을 향하던 시선이, 이번엔 똑바르게 하얀 존재를 향한다. 그럼에도 속으론 의심 완전히 거두지 못한 채다. 착한 사람인 척하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무래도 게임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지만, 본인에겐 그런 자각마저 없다...
참을 수 없어서 저도 슬쩍 해 버렸습니다 픽크루.. 크아앗 넘 귀엽다 넘 짱이다... ˊo̴̶̷̤.̮o̴̶̷̤ˋ
>>155 악 맞아요~! 저번에 인사해주셨던 것 같은데 제가 그 레스 쓴 이후로 슥 사라져버려가지구.. ༎ຶ‿༎ຶ 인사 건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억상실 동지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이랑 이렇게 묶여도 되는 걸까...... 니아에게 너무 과분한 것 아닐까.... ㅇ(-( 저야말루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말에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둘이 아니라는 것에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에도. 반창고를 착 붙이고 난 뒤 이어진 네 말에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본다면 그냥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아이처럼 웃은 거겠지만, 네 입장에서는 어쩌면 비웃는 것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치를 건데?”
어떠한 악의나 적의가 있다기에는 순수하게 느껴지는 물음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뭐, 경계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인연이잖아.”
인연을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건 아니지. 미하엘은 다소 담담하게 느껴지는 투로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떠오른 게 있는 듯 휙 너를 돌아봤다.
“생각해 보니 방법이 있어. 너만 해줄 수 있는 거기도 하고.”
이제 만난지 10분이나 채 지났을까. 그런 주제에 너에 관해 아는 것 하나 없을 테지만, 미하엘은 생긋 웃는다. 무어라 더 말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은 꼭 들어줘야 한다, 같은 자신감이 담긴 채다. 미하엘은 상글상글 웃는 얼굴로 네 대답을 기다리듯 바라본다.
동쪽 구역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고, 미하엘은 그 활기참이 좋았다. 우선은 여관부터 가자고 말하던 미하엘의 몸이 잠깐 덜걱거렸다. 네가 제 손을 잡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동이 거칠다거나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하엘은 앞서 가려던 것치고는 쉽게 끌려왔다.
“왜애—?”
영문을 알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왜냐고 묻던 미하엘은 네가 제 손바닥 위에 무어라 적는 것을 유심 깊게 쳐다봤다. 상처 입은 손가락 대신 뼈마디로 글씨를 쓴다는 건 제법 웃긴 모양새였지만, 미하엘은 딱히 웃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글씨를 쓰는 네 손이 떨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뭐라는 거야······.”
미하엘이 네가 쓴 글씨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야 여러 번 흔들린 획에 익숙하지 않은 소통 방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미하엘이 네가 쓴 글 중에 알아볼 수 있는 건 고작 ‘사람’이라는 단어였고, 거기서 그 뒤의 단어를 유추해 내는 건 퍽 쉽지 않았다.
“사람이 뭐? 설마 너······. 인종, 아니 종족 차별자야?”
당연한 얘기지만, 미하엘은 사람이 많다고 겁을 먹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마법소녀는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미하엘의 눈이 짜게 식었다. 동쪽 구역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개중에는 흔히 말하는 괴물처럼 인간의 형태가 아닌 이들도 있었고, 저처럼 동물의 귀가 달린 이나······, 아니면 아예 동물 형상을 한 이들도 있었다.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 귀가 긴 사람, 등 뒤에 날개가 달렸거나 꼬리가 달린 ‘사람’들.
그러니까 내가 사주는건 아니려나. 내가 심부름을 다녀오면 내가 사주는거긴한데 혼자 두고가긴 걱정되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있으면 음식을 가져오겠다고한 것인데 같이 가겠단 대답이 나왔다. 피하던 시선도 똑바로 날 바라보는 것을 보면 경계심이 좀 가신건가, 싶었다. 내 손가락을 잡은 소녀를 보면서 나는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이제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 "
아까는 얼버무리는 바람에 듣지를 못했다. 뭐, 이름을 무조건 알아야한다는건 아니지만 이렇게 같이 다니게 될 정도의 인연이라면 이름 정도는 알아놔야 다음에 다시 봤을때 어색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으면서 본 식당만 해도 여러 곳이었고 다 파는 것이 달랐다. 근데 오늘 처음 본 소녀의 음식 취향을 단번에 맞추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니 ...
" 식당들 하나씩 앞으로 지나가볼테니까 먹고싶은게 있으면 가리키면 돼요. "
나야 음식 가리는거 별로 없이 잘먹는 편이니까 소녀가 고르는게 좋아보였다. 그리고 계속 울고 있었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걸 먹어야 기운도 나고 그러지.
그렇겠지, 그렇겠지. 대충 안다는 듯이 답하던 미하엘이 네 말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모양새가 제법 순해 보인다.
“엥? 덜 자란 수인?”
이윽고 미하엘은 아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라는 말이나 덜 자랐다는 말 보다도 수인이라는 말이 그토록 웃겼을까 싶다. 뭐가 그리 웃긴지 주변 시선 하나 신경 안 쓰고 웃는 모습이 이어지다가 미하엘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번 닦아내고는 너를 바라본다.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난······.”
무어라 말하려던 미하엘이 말끝을 흐렸다. 문득 든 생각 때문이다. 머리 위 동물의 귀가 까딱, 엉덩이께에 달린 꼬리가 흔들. 모르는 이가 봐도 수인과 닮았는데, 굳이 아니라고 정정할 필요는? ······음, 없지. 미하엘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네 이름을 입 안으로 두어 번 되뇌이다 다시금 뒤를 돌았다.
“그래, 윈터. 난 미하엘이야. 윈터가 해줄 일은 사실 별 거 아니거든. 일단 따라와.”
미하엘이 먼저 세 걸음 앞서고 다시 뒤를 힐끔 돌아본다. 그 행동은 꼭 네가 따라오는가, 따라오지 않는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하얀 존재의 반복된 물음에 소녀는 잠깐이나마 몸을 움찔 떤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오랜 은둔 생활은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마저 망각하게끔 했다. 창조신, 조물주, 최초의 신... 다른 신들이 자신을 불렀던 별칭은 많았으나. 그럼에도 기억나는 단어가 딱 하나 있었으니 그 단어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
"...알레프."
라고 할 수 있겠다. 간신히 대답을 마친 소녀, 알레프는 라클레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저앉은 자세를 툭툭 털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으음..."
문제는, 소녀가 보기엔 뭐가 식당이고 음식점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간판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만 그려져 있으니. 분명 게임에선 무슨 가게인지 전부 글로 적혀있었는데... 현실이니까 다를 수밖에 없는가 보다.
"모르겠어..."
한참이나 주위 기웃대던 소녀가 풀 죽은 목소리로 웅얼인다. 애초에 원래 있던 곳에서도 직접 식당을 가본 적이 없으니 식당이 있었어도 못 알아차렸을 듯.
"치킨이나 피자 파는 곳은 없어? 햄버거는?"
제 발치만 내려다보며 줄곧 고민하던 소녀, 하얀 존재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도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했지만 자신보다는 아는 게 많겠지.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세상, 무엇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단 하나 분명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으니. 미하엘이 제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리고 때마침 새로 생긴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그도 미하엘의 말을 못 알아들은 상황이었다. ……종족 차별자가 뭐지. 보통은 불명예스러운 오해를 산 순간부터 격렬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생경한 단어에 반응이 느렸다. 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기억 너머에 방금 그 단어에 관한 대략적인 감상이 남아 있는 듯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는 아닌 듯했다. 일단 부정하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직감도 느껴지고.
하지만 대화로 오해를 해결하기엔 지금은 목이 문제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글을 쓸 수 있는 수단도 없는 상태. 필사적인 바디랭귀지로 부정을 하기에도…… 기본적인 제스처조차 잊어버려 어떻게 부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상황에, 웅성거리는 소음과 존재감은 그칠 줄 모르고 정도를 더해가기만 한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쉴 새 없이 오가는 숨소리와 딱딱한 바닥을 짓밟아 대는 둔중한 군중의 발걸음, 때때로 외치는 고성, 숨죽인 속삭임들마저 모두 귀를 찌르는 것만 같다. 정말 귀가 나간대도 괴로워하지 않을 처지면서도 머릿속을 때리는 듯한 자극엔 약해 빠져서. 아, 이건, 너무 버거운데. 불안 섞인 시선 연신 주변을 향하다 이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설명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돌연 뒤돌아 달렸다. 우선은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하여 뒷일은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도주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조금이나마 한산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뜀박질이 멈추었으리라. 문득 한쪽 손에 이질감이 느껴져 확인해 보니, 거기엔 미하엘의 손이. 먼저 붙잡은 쪽은 자기면서 이번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놓았다. ……여기까지 끌고 올 생각은 없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그대로 달려 버린 모양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곳까지 안내를 해 준 사람을 쌩하니 버리고 왔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됐을 테다. 그는 여전히 꽉 막힌 듯한 입을 조금 달싹거리다 발 뒤꿈치를 세워 신발로 땅을 그었다. 손으로 쓰는 글씨보다는 투박할 수밖에 없었지만, 짧은 한 단어만 쓸 뿐이니 큰 불편은 없었다.
최소 수십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하늘에서 추락하였고, 마법이나 신성력의 도움도 없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살아 남았다
이것은 아무리 튼튼한 제 육신이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며, 그리고 애당초 어째서 하늘에서 추락하였는가. 그것에 대해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니 시작하였다. 그것은...
"망할 마법사 자식아!!! 나를 놀려 먹는게 그렇게 즐겁더냐!?"
바로 자신의 동료중 한 명인 대마법사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 물론 그녀 본인은 굳이 그런 장난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였기에 분명, 또다른 동료이자 어린 정령과 맞먹는 장난꾸러기인 엘프 궁수의 의견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라고 확신을 내렸던 그였으나
"...어이, 이제 장난은 그만치고 나오라고? 지금 나오면 머리 한 번 쥐어박는 걸로 용서해줄 테니까! ...이래도 안 나와? 그럼 그냥 용서해줄게! 나 이거 진짜 재미 없다? 농담 아니야!!!"
아무리 제 동료들을 불러봐도 돌아 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그제야 그는 또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마법에 의한 공간 이동은 아닐거다. 싸가지가 조금 없어도 나름 대마법사 딱지 달고있는 그녀가 결계로 막아둔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 어떤 마법사가 나를 눈치 챌 사이도 없이 공간이동 시키겠어? 이미 진작에 뼛조각 하나 하나 확실하게 정화시킨, 나와 동료가 토벌한 마경의 마왕 중 하나였던 리치왕이 기어코 여신의 심판장에서 빠져나와 우리에게 복수를 위해 찾아왔다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공간 이동 마법은 아닐거라 확정짓자, 그의 생각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럼 혹시 환술? 이렇게 감각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는 환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고있지만, 망할 몽마왕이라면 불가능은 아니겠지. 아니, 하지만 그놈은 마경 사이에 쳐둔 신성 결계 때문에 나오지도 못하고 애당초 이런 환영을 보여주지 않을 텐데? 이상하다는 것을 뻔히 눈치 챌 수 있는 환영 따위를 그 사람의 생명력이나 빨아먹는 모기 같은 몽마 주제에 자존감 하나는 더럽게 높은 녀석이 사용할리가.'
그러니 이것은 환각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이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
"아, 몰라!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이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안 어울려! 이런 건 마법사나 용사 녀석이 하던 일이라고!"
이내 자신은 원래 생각 같은거 안 하는 타입이라며 일단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정한 그였다
'일단 하늘에서 봤듯이 이곳은 숲속이군. 하지만 그렇게 깊지도 않고 사람의 흔적도 있는 것이 방향만 잘 찾으면 마을이나 도시가 나오겠어.'
이윽고 능숙하게 주변을 파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
"가기 전에...그래, 이 바위가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군."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튼튼해 보이는 바위와 같은 제질의 창을 만들어내는 그였으나...
"으왁!? 히, 힘이...?"
평소와는 다르게 엄청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이거. 설마 능력 때문에...? 아니 설마, 지금 까지 그런적 없었는데!"
그리고 다시 한 번 창을 만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체력이 떨어졌다
"젠장, 이 능력을 여태까지 쓰면서 이런 패널티 따위는 경험해 본적도 없는데 갑자기 뭐냐고!"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평생을 같이 지내왔던 능력에 살아 생전 처음 겪어보는 패널티가 생긴 것에 점점 더 당황하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하...이게 도대체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군."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도시와 그 도시를 지키는 성벽을 발견했다
'꽤나 커다란 도시로군. 그리고...젠장할, 한 번도 본적 없는 방식의 성벽이잖아!'
이름 높은 모험가로서 위대한 귀족의 저택이나 제국의 황성, 시골 영지의 성벽과 마경 바로 앞에서 인류를 수호하는 성벽을 봐왔고, 심지어는 마경의 마왕성에도 몇 번이고 들어가고, 직접 부서봤던 그였지만 당장 제 앞에 있던 성벽은 그가 전혀 모르는 방식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게 분명하였다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데...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거야? 주점이나 무대에서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시에서나 나오던 또다른 대륙에라도 와버린거냐 나는?"
그는 다시 한 번 골머리를 앓고 성벽으로 들어간다
'으윽...!? 뭐냐 이 감각은. 마치 마경에 처음 들어갔을 때 느꼈던 본능 단위의 거부감이...! ...? 뭐야. 바로 사라졌잖아? 착각, 이었나? 일단은 주의할 필요는 있겠군.'
윈터는 팔짱을 낀 채 세상 우습단 듯이 깔깔대는 소녀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반문이나 무언가 말하려다 말끝을 흐리는 것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으나 그녀가 느끼기에 소녀는 그다지 신뢰가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장에 정보를 얻을 기회는 소녀밖에 없어 잠자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쫑긋 솟아 까닥거리는 귀, 간지럽게 살랑이는 꼬리. 세 걸음 앞서다 뒤를 힐끔 돌아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고양이다.
"미하엘,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나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도시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만나 잠시 동행했던 라크의 이야기였다. 그가 없는 사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니 말이다. 그새 정을 붙인 건 아니지만, 이대로 떠나버린 줄 알고 헤어지게 된다면 조금은 아쉬울 것 같았다. 그나마 말이 통하던 친절하고 상냥한 엘프였으니까.
거스러미 일어난 낡은 나무 창틀을 타고 햇살이 구물구물 넘어오기 시작하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삐걱이는 간이 침대는 남는 지푸라기 따위를 나무상자 위에 대충 깔아 만든 것이다. 아주 편하진 않아도, 습기 올라오는 흙바닥에서 자는 것 보다야 백 배는 낫다.
크고작은 하품을 몇 번 내뱉고,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고 나면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어제 길어 놓은 찬 물로 얼굴이며 목을 닦고, 뻗친 머리를 대충 매만져 다듬는다. 이 쪽 세계의 물건들의 모양새며 사용법은 조금 익숙치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생활하는 것이 영 낯설지는 않았다. 정확히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오히려 익숙한 느낌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기를 닦은 천이나 이불같은 것들을 대충 정리한 뒤, 옷(마시는 이걸 유니폼이라고 불렀다)을 입고,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여관 내로 들어서면.
...일 할 시간이다!
땡전 한 푼 없이 떨어져 뭔가를 사 먹거나 안락한 곳에서 잠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 주머니에 이전 세계에서 쓰던 동전같은 것들이 조금 들어있긴 했으나 우연히 떨어진 다른 세계에서도 같은 것을 쓰고 있을 리는 없다. 길거리를 전전하며 쓰레기통이라도 뒤지며 살아야 하나 싶었으나, 운 좋게도 한 여관에서 일을 돕는 대가로 머물 방과 간단한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사실은 바짓단을 끌어내릴 기세로 오열하며 싹싹 빈 게 임팩트가 컸던 것도 같다). 가게의 주인 되는 아주머니, 마시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 방과 음식 외에도 이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상식같은 것들을 알려주곤 했다. 어느 지역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가끔은 떠도는 소문같은 것들도.
일어났니? 곡물죽 한 그릇(아트밀? 오트밀? 여전히 정확한 이름은 몰랐지만, 대충 발음을 흘리면 마시는 어쨌든 알아들었다)을 내밀며 건네는 인사에 아, 안녕하세요 마시, 작은 소리로 화답하고는 탁자 앞에 앉는다. 화로 위에 걸린 커다란 냄비 안에서 손님에게 나갈 스튜가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니아, 들었니? 중앙에 누군가 침입했다던데.“
"아, 아니요, ..중앙이라면... 아, 아무나 못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셨, 나요?”
"그래! 게다가 글쎄, ■■■라고 하잖니? 아유, 어쩜 그렇게 간 큰 짓을 한담.“
누군가 일부러 그 부분만 귀를 틀어막았다가 놓은 것처럼 말이 들리지 않는다. 분명히 뭐라고 얘기하셨는데. 뭐, 뭐라고 하신 거에요? 다시 물어 보아도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 ■■■!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관하는 것을 마시는 희한함과 걱정 조금 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고. 니아, 너.. 괜찮니? 아픈 거 아니지?아, 아니에요! 괘괘, 괜찮아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그, 그런 거였어요. 대충 얼버무리곤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갖다놓은 뒤 빗자루를 쥐었다. 손님들이 오기 전에 홀을 청소해야.
1. 다윈은 미하엘이 안 갈만한 장소를 나름대로 아는 편이다. 2. 미하엘은 자신이 안 갈만한 장소를 다윈이 안다는 걸 모른다. 3. 두 캐릭터는 서로 상반된 속성을 지녔지만, 예상외로 같은 속성도 있다. 4. 다윈은 특정 행동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기억하지 않고 있다.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니라 잊혀진 거다. 5. 미하엘에겐 큰 비밀이 있다. 진짜 매우 큰 비밀이. 정말 큰 비밀이라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있다.
으으, 설명 못하겠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설명하던 소녀, 설명이 어려운 듯 양 손바닥에 얼굴 파묻는다. 그러기도 잠시 라클레시아의 말에 고개를 번쩍.
"그럴까?"
말 끝나기가 무섭게 소녀는 코를 열심히 킁킁댄다. 개도 아니고. 하지만 이래야 냄새가 잘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이윽고 소녀의 후각 레이더에 잡힌, 향긋한 냄새. 말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소녀는 냄새의 근원지 향해 종종종 걸어간다. 비교적 인파 드문 곳, 멀지 않은 곳에 노점상이 하나 있었다. 그 매대 위에 올려진 네모난 것 가리키며 소녀가 하얀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거 맛있겠다."
하지만 라클레시아라면 알 지도 모른다, 매대 위에 올려진 물체는 음식도 뭣도 아닌─꽃향기 솔솔 풍기는 비누라는 것을...
—깐만, 같은 말을 뱉기도 전에 달리는 움직임에 따라 미하엘 또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잡힌 손이야 빼내면 되는 일이고 따라 달리지 않고 멈추어 서면 되는 일이었으나, 미하엘은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그건 어찌 되었든 네가 다친 상태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네가 ‘튄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달렸던가, 어느샌가 한산한 곳에 도착해 멈춘 네 덕에 미하엘도 멈출 수 있었다. 미하엘은 턱끝까지 찬 숨 때문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너, 너어—······. 무어라 말하려던 미하엘의 말은 놀라 손을 놓는 네 행동에 다시금 가로막혔다.
“뭐, 뭔데······.”
켁, 하는 소리와 쿨럭거리며 기침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연신 숨을 허덕거리던 미하엘은 호흡을 고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가까스로 호흡이 진정되고 난 이후에는 조금 원망스레 너를 쳐다본다. 이어 발 아래 흙바닥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 미안 ]
짧지만 확실한 단어다. 미안하다는 사람에게 뭐라 한 소리 하는 것도 참 그렇다. 미하엘은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린 채 작게 투덜거렸다. 네가 제가 있음을 까먹고 그렇게 달렸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물론 그걸 알았다면 쉽게 넘어가진 않았으리라. 결국 미하엘은 그 사과를 받아주기로 했다.
“알았어. 그래도 뭐, 날 버리고 혼자 튀지 않은 게 어디야.”
미하엘은 대충 손 젓는 제스처를 취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린 종이와 잉크 같은 통이 그려진 팻말의 가게를 발견하곤 네게 여기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하고는 가게 쪽으로 호다닥 뛰어갔다. 말리거나 붙잡을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259 “어라, 빨리 가야해? 그럼 더 빨리 움직여야겠네~? 그나저나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추락자야? 혹시 이런 식으로 무표정하고 이렇게 세상 풍파는 다 겪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
어느샌가, 미하엘은 앞서 걷던 걸음을 늦춰 네 옆에서 걷고 있었다. 양 손을 꼼지락거리며 제 얼굴 표정을 매만지는 게 꽤나 우스워보였다. 누구를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가 본다면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같이 가면 될 거고······. 아니면 뭐. 진짜 빨리 움직여야겠네. 아, 여기야!”
너와 마주쳤던 곳에서부터 가려고 했던 곳이 멀지는 않았는지 금세 도착했다. 밖에는 염색한 천을 널어놓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곳이었다. 바로 포목점 말이다. 어서 빨리—. 미하엘이 포목점 안으로 너를 재촉했다. 안은 포목점과 옷가게를 함께 하는 건지 한쪽에는 이미 만들어진 옷들이, 다른 한쪽에는 베틀 같은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원래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도 나쁘지 않아서~ 아, 사장님! 내가 손님을 꼬셔왔지롱.”
120cm나 됐을까, 아이만큼 작은 크기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하엘과 아는 사이인지 가볍게 인사를 받는다. 나하하, 웃는 소리에 이어 미하엘이 네게 속삭인다.
“아까 뭐랬지?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있냐 물었던가~?”
알고 싶으면 500원, 하는 투로 새 옷 입어주면 알려주지~ 하는 게 왠지 얄밉다. 아마 미하엘의 눈에는 다 찢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네가 영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제가 걷어찬 돌멩이에 상처 입은 것때문도 있었고.
숨을 고르다 못해 기침을 하는 미하엘과는 달리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다. 특질적으로 지치지 않는 몸인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지구력의 한계선 자체가 높은 편인 듯 보였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달음박질을 멈추자마자 거센 숨을 몰아쉬는 미하엘을 보자, 그러잖아도 당황 서린 얼굴이 숫제 기겁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갑자기 기침을……? 머릿속 어렴풋이 남은 기억의 한구석으로부터 이 상황에 걸맞을 상식 하나가 툭 굴러나왔다. 기침은 병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라는 것. 본인은 병에 걸리지도 숨이 차지도 않는 몸이니 이 판단이 틀렸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도 없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상식과 인체에 대한 부족한 이해도가 겹쳐, 이번에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된 쪽은 그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가? ……죽나?
전전긍긍 안절부절 좌불안석, 마치 5초 안에 절명할 개복치를 보듯한 시선으로 허둥거리고 있기를 잠시. 마침내 미하엘의 호흡이 진정된 듯하자 그는 온몸에 바짝 들어갔던 힘을 겨우 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안도하는 데 바빠 저를 노려보는 원망스러운 시선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 탓에 그사이 쌩하니 어디론가 달려가는 중병 환자(추정)를 말릴 새도 없었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당연히 가만 있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 있으란 당부를 단 1초도 되새기지 않는 행태로부터 범상치 않은 말썽꾼의 자질이 엿보였을지도……. 곧장 따라붙은 그는 기웃거리며 미하엘의 시선을 끈 뒤, 발 아래를 가리켜 보였을 테다.
[ 안죽어? ]
……. 발로 긴 문장을 쓰는 일은 번거로웠고, 마음이 급하기까지 했으며, 긴 시간 타인과의 소통이 부재했던 그는, 단 네 개의 문자로 처참한 의사소통 능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마는데…….
상점(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향하던 미하엘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따라붙은 널 보며 잠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가만히 있으랬더니 따라오네······. 하지만 그런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었어도 생판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다고 하면 움직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네가 바닥에 쓴 글씨를 보자마자 미하엘은 심각해졌다. 얘, 지금 나더러 죽으라고 한 거야? (아니다) 네가 쓴 [ 안죽어? ]가 미하엘에게는 ‘안 죽고 뭐하냐’ 같은 걸로 보이기라도 했는지.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너 웃긴 애다. 오해는 쌓이고 쌓인다. 입술을 비죽거린 미하엘이 다시 너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기 싫은 건 알겠어. 근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널 도와주려는 건데! 미하엘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에 가게 주인이 밖으로 나왔다가 미하엘과 너를 발견했다. 어쩌면 너는 가게 주인의 모습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야 가게 주인에겐 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놀라기는커녕 그 모습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가게 주인 또한 손끝에 분홍빛 불꽃을 피우더니 느낌표를 만들어 냈다. 분홍빛 불꽃은 다시 화살표가 되어 가게 안을 가리킨다. 아마 밖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오라는 의미 같았다.
그는 즉시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싸맸다. 이 와중에도 당장 필요한 부정 표현은 끝끝내 안 떠오르건만, 환장하겠단 몸짓은 자연스럽게 취해지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잘못 쓴 글은 발로 박박 문질러 얼른 지워버렸다. 이제라도 말을 고쳐야 했다. 하지만 크게 당황한 탓에 문장은 빨리 떠오르지 않고,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간 정정할 기회도 놓치게 될 판이니……. 위기 상황에 처하면 없던 능력도 솟아나는 현상은 불사신인 그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앗, 생각났다! 마침내 기초적인 바디랭귀지를 일부 기억해 낸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대었다. 부디 이 해명이 통하면 좋겠건만. 해명이 받아들여졌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끊긴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손발로 쓰는 짧은 글이나 몸짓 정도로는 상황에 진척이 없을 게 뻔하니 말이다.
주인장을 바라보자, 조금쯤 크기가 키워진 두 눈이 두어 번 깜빡여진다. 그는 다소는 놀랐던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주인의 외모보다는 이어지는 행동에 더욱 감탄했을 테다. 말 없이도 훌륭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니, 나도 저런 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의미에서. 그랬다면 지금 이런 오해도 없었을 텐데. 그는 약간쯤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둘을 뒤따랐다.
>>396 잠자코 걷던 윈터는 옆에서 나란히 걷는 미하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조몰락거리는 것이 누군가의 인상을 흉내 내고자 하는 듯했다. 그러나 추락자는 맞지만 무표정하고 세상 풍파 다 겪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라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는 미소가 많은 상냥한 엘프였으니까. '아직 덜 자라기도 했거니와 하는 언행이 영락없는 어린아이구나. 이제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윈터는 무심코 제 세계의 수인의 특성을 떠올리며 소녀 몰래 미소 지었다.
"추락자는 맞는데, 네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네. 그는 꽤 다정한 사람이거든."
소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포목점이었다. 소녀의 재촉에, 색색이 물들어 네모반듯 널어진 천들을 지나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보통 사람의 삼 분의 이 정도쯤 되어 보이는 주인장은 소녀와 안면이 꽤 있는 듯해 보였다. 가공된 직물과 새 옷 냄새, 베틀 따위의 나무 냄새. 알알함과 포근함 그 사이의 낯선 분위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소녀가 얄궂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여온다.
"새 옷? 그게 무슨..."
윈터는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가 새 옷을 입어주는 거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482 아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알죠.. 뭔지 알죠.. 또 프롬프트 쓰고 아닌거 걸러내고 원하는 느낌 나올 때까지 계속 뽑아낼라면은 또.... (•́ .̮ •̀) ㅋㅋㅋㅋㅋㅋ와 해냈다 ^.^~~~!!!(??) 첨에 20개 무료생성 주니까요.. 함 츄라이해보시구 안 맞으심 머.. 말씀하신대로 커미션이나 다른 픽크루나 네카나 이런저런 방법으로 어떻게든..
>>484 아이고!!! 아이고 저 이런 칭찬 못 견디는데!!!! (배배꼬인트위스트참치.) 네 저 아이폰 유저인데... 혹시 구독하신 지 좀 오래되셨다면 그 동안 구독플랜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던지?
'손으로 만진 물건'이라면 진짜 뭐든지 상관 없이 똑같은 제질의 창을 만들 수 있어서, 너무너무 단단해서 그 어떤 존재도 흠집하나 내지 못하는 광물로 창을 만든다거나,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신체 능력을 올려주며 마경의 존재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성검을 만지고 같은 능력의 성창을 만든다거나,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는 마법 물질을 만지고 창을 던져서 폭격을 날린다거나...
듣자하니 치킨은 고기를 튀긴 요리이고 피자는 치즈라는 것을 빵위에 뿌린 것이며 햄버거는 설명이 어려운 미묘한 무언가인듯 싶었다. 다만 반응을 보아하니 꽤나 맛있는 음식인것 같은데 치즈는 뭔지 모르니까 넘어가고 고기를 튀긴건 맛이 없기가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건 고기튀김 정도였다.
" 갑자기 기운이 넘쳐지셨네요. "
코를 열심히 킁킁대는 모습을 보니 아까까지 훌쩍이던 소녀라곤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 모습임 마냥 귀여워서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 느껴졌는지 홀린듯이 어딘가로 향하는 알레프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도달한 곳에서 가리킨 것을 보자마자 멈칫하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알레프, 그건 비누에요. "
냄새로 찾아왔더니 이런 참사가. 결국 아까 내가 이해한 고기 튀김을 먹는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있는 식당들 중에 기름 냄새가 나는 곳이 ... 아 그쪽 방향이었나. 아까 돌아다니면서 무언가 튀기는 냄새가 났던 곳으로 알레프를 이끌고 향했다. 조금 걸어가자 금방 보인 곳은 여러가지 튀긴 음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생선완자튀김, 고기완자튀김, 야채를 튀긴 것까지 여러가지가 있었다.
" 치킨이 이런거랑 비슷한거죠? "
아마 내가 이해한게 맞다면 그럴 것이다. 물론 설명만 들었으니 알레프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그야 알레프와 나는 다른 세계 사람이니까 말이다.
비누가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지 몰라도,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도구라는 건 알고 있다. 향긋하니 부드러운 케이크 맛이 날 거 같았던 게 사실은 비누였다니! 소녀는 노점 앞에서 우물쭈물 서성이기만 하다가, 결국 하얀 존재를 터덜터덜 따른다. 허기 느끼는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먹고 싶었다. 소녀는 집에 남겨두고 왔을 컵라면을 떠올린다. 아, 가엾은 라면이여! 차갑게 식어가는 국물과 퉁퉁 불었을 면발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져온다.
풀 죽은 표정으로 라클레시아의 뒤를 따르던 소녀, 확 들이쳐오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고개 퍼뜩 쳐든다.
"어? 음, 그런가?"
그럼에도 소녀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확실히 노릇노룻한 튀김옷을 입힌 게 치킨과 비슷하긴 하지만, 냄새와 생김새는 상당히 달랐으니. 양념 따위도 없었고. 그렇지만 치킨도, 피자도 햄버거도 없는 낯선 곳에서 음식 가리기나 할 처지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먹는 즐거움마저 잃어버린 채 말라비틀어지고 말 거다! 이내 소녀는 눈 앞의 고기완자 튀김을 덥석 집어먹는다.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
의심은 곧 확신이 된다. 바삭한 튀김옷, 사르르 녹는 고기! 소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음식물을 허겁지겁 씹어 삼킨다. 그리고 다시 한 개를 집어먹고, 먹고, 또 먹고... 이거, 말리지 않으면 여기 놓인 것들을 전부 먹어치울 기세다!
설마 비누를 처음 보는건가? 나는 처음으로 이 소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바로 청결 상태에 대해서. 다만 가까이 있었어도 냄새 같은건 하나도 나지 않았는데. 뭔가 특수한 방법으로 청결을 유지하는건가 싶었다. 비누를 모르는 것치고 머리카락도 깔끔한 편이고. 살짝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튀김을 파는 가게로 데려갔다.
" 그래도 튀긴거니까 맛은 있을꺼 ... "
아, 이미 하나가 알레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거 좀 뜨거울 것 같은ㄷ.. 두개째다. 세개, 네개 순식간에 소녀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튀김의 종류가 늘어난다. 이거 공짜 아닌데?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가게 주인장과 눈을 마주쳤다. 주인장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알레프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 아 ... 그 ... 하하 그게 말이죠. "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알레프의 입으로 들어가는 튀김의 수는 늘어만 갔다. 다섯개, 여섯개, 일곱개까지 늘어나자 나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어 알레프를 뒤에서 끌어당겨 매대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이걸 어쩐담. 이미 나는 소녀의 보호자 같은 느낌으로 되어있는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가진거 없다구요.
" 이건 ... 제가 지금은 가진게 없는데 어떻게하면 좋을까요. "
이럴땐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해야한다. 나는 긍지 높은 노던 엘프의 라클레시아 테시어, 이럴때는 긍지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내 불쌍한 척이 통했는지 쫄쫄 굶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른으로 봐주고선 다음에 부탁하는 일을 좀 해주는걸로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나는 알레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튀김을 마구 집어먹던 소녀의 뒷덜미가 확 잡아채인다. 당연히 소녀의 무전취식도 뚝 멈추었고. 하얀 존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둥대던 소녀, 잔뜩 뾰루퉁해져선 볼 부풀리는데.
"왜 방해해! 맛있는데."
그리고 자기 잘못한 것도 모른 채 라클레시아에게 항의한다. 물론 파는 것에 마땅한 대가 지불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아까 그가 말했지 않았던가? 간단한 심부름만 해주면 음식도 준다고. 그럼 실컷 먹고 난 다음이라도 괜찮잖아! 그와 가게 주인 사이에 대화가 몇 번 오간다. 소녀는 여전히 심술난 표정 하고선 딴청 피운다. 저것 봐, 어떻게든 잘 해결되긴 했네. 그러다 라클레시아가 이쪽으로 주의 돌리자.
"...고마워, 아줌마."
마지못해 따라서 고개 꾸벅인다. 더 먹고 싶었는데! 소녀는 아쉬움으로 입맛만 다시다가 불쑥 주인장을 향해 묻는다. "그래서 무슨 일 하면 돼? 심부름 해오면 더 먹어도 돼?" ...정말 욕심이 끝이 없다.
tmi 하나 풀어볼까요~ 윈터가 살던 세계에는 '마나'라는 개념이 존재해요. 사람(대부분의 지성체)은 대기중의 마나를 흡수해 체내에 저장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해 신체를 강화하거나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윈터의 경우 유난히 그 마나통이 크고 순환이 빨라서 강했던 거예요. 하지만 추락한 세계에는 원래 세계의 마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신체강화 걸고 과부하 켜고 자힐 하면서 마력 담긴 총까지 쏜다? 와! 사기캐!
>>656 헉 그런거구나. 라크네는 마나를 축적하는건 광석에만 가능하고 마법을 쓴다는건 흩어져있는 마나를 제어한다는 개념이야. 그래서 제어능력이 강할수록 더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다! 인데 광석에 축적된 마나는 농도가 굉장히 짙어서 조금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낼 수 있으니까 그거 위주로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별개로 라크는 사용한다는 개념 자체를 갖고 있는거라 마나 그런거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원래 세계에선 완전 초강자급 위치에 있었어. 근데 특성상 인지될 일이 없으니까 직접적으로 싸운건 없지만.
선불이든 후불이든 별 차이 없잖아! 입을 비죽 내밀고 불평하던 소녀, 뒤이은 주인 아줌마의 말에 언제 심술났냐는 듯 방긋 웃는다. "정말? 아줌마 짱!" 엄지까지 척 들어올리며. 하지만 무전취식을 반성하는 태도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휴,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라클레시아의 말에 순순히 그를 따라간다. 사실은, 귀찮은 심부름 얼른 해치우고 한 접시 더 받아먹을 생각에 신난 것 뿐이지만. 뒤를 졸졸 따르던 소녀가 사방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때와 달리 주변이 썩 신기한 모양이다. 그야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이 하얀 존재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먹을 걸 찾아줬으니까!) 하지만 다시 홀로 남아버린다면... 별로 유쾌하진 않은 생각에 다시금 소녀의 몸이 축 처진다.
"있잖아, 라클레시아..."
결국 소녀는, 우물쭈물 더듬더듬 말을 꺼낸다.
"나 계속 따라다녀도 돼?" "그, 그러니까, 그게, 라클레시아는 착한 사람 같고, 나 혼자 다니기엔 아직 좀, 무서워서..."
어렵사리 꺼낸 말이 왠지 모르게 창피하다. 스스로의 무능함을 이토록 뼈저리게 깨닫는 건 처음이라.
"...아, 아냐! 됐어. 라클레시아 같은 사람이면 분명 바쁠 거고, 나보다 훨씬 나은 동료들도, 많을 테니까..."
그것도 잠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소녀가 두 손을 펼쳐 마구 흔든다. 이런 히키코모리, 방구석 게임 폐인을 누가 파티원으로 받아주겠냐구. 할 줄 아는 거라곤 음식 축내는 것밖에 없는데. 게임에서도 이런 무능한 동료는 다들 싫어하잖아!
영에게 드리는 오늘의 캐해질문! 1. 「약속에 자주 늦는 상대방이 자신의 지각에는 화를 낸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성격부터 내로남불을 당한다 해서 딱히 화가 나지도 않고... 남의 잘못에는 너그러워서 오히려 본인이 진심으로 미안해할걸요... 아이고 이 호구야!!!
2.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고 믿는지?」 애초에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본성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 그냥 사람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귀하다고 생각해서요.
3. 「자신의 SNS 계정을 친구에게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는가?」 SNS를 하는지부터... 아니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지부터 물어봐야........(;´༎ຶД༎ຶ`)
붕붕 젓는 고갯짓. 뭐야, 아니라는 거야? 미하엘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죽으라는 게 아니면······, 헉. 설마 내가 죽을 거란 얘기였나. 앞서 한 말과 후에 생각한 말이 뭐가 크게 다르냐마는, 어쨌든 네 행동을 아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 거다. ······아마도.
가게 안은 온갖 종이와 잉크, 깃펜, 그리고 잡다한 물품들로 가득했다. 일반적인 잡화점이라고 하기에는 종이와 깃펜의 비율이 더 높았지만, 지금 미하엘이 필요한 건 붕대와 종이 몇 장, 그리고 펜 정도였으니 다른 건 상관없었다.
“잠깐만 여기 있어 봐.”
미하엘은 너를 가까운 테이블에 앉히고는 잠시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긴 실랑이는 없었다. 미하엘은 주인장에게 무언가를 줄 것을 약속한 뒤, 몇 가지 물품을 받아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네게 익숙할지는 모르겠지만, 미하엘이 올려놓은 건 거칠게 만들어진 종이 몇 장과 두 개의 깃펜, 그리고 종이와는 다르게 질이 좋은 듯 새하얀 붕대였다.
“자, 이거 있으면 의사소통 정돈 할 수 있겠지?”
그보다는······. 말을 흐린 미하엘이 붕대를 쥔 채 네 손을 보았다. 뭐해, 손 안 내놓구~? 붕대의 뭉툭한 부분으로 툭툭, 테이블 두드리는 시늉은 어쩌면 재촉하는 건지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부의 공간이나 진열된 상품들보다도 생활감이 제법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했던 기색마저 옅어질 정도로. 그는 이번만큼은 기다리라는 말을 잘 듣기로 했다. 조금 진정하고서 다시 보니 미하엘 당장 급사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마저 끼어들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고.
책상 위에 올라온 것들은 종이와 펜, 그리고 그리도 당부를 들었던 붕대였다. 그에게 여유가 있었더라면 미하엘을 졸졸 따라다녔던 때만큼이나 얌전히 기다릴 수 있었겠지만, 이미 여기에 오기까지 해야 할 말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그는 미하엘이 말을 꺼내기도 전, 다른 것보다도 먼저 펜을 집어들었다. 손 안을 구르는 도구의 감각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는 범위 내의 기억에도 없고 처음 쓰는 듯 낯선 기분이 드는 것으로 봐선 이런 형식의 도구를 썼던 경험은 없는 듯했다.
가장 중요한 말만 빠르게 휘갈기려 했는데, 사용감이 낯설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펜을 틀리게 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생각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잘못 쓰기도 했고. 힘조절이 올바르지 않았는지 기껏 쓴 글은 잉크가 엉망으로 배어 군데군데 검은 웅덩이가 괴었다. 하지만 아주 읽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 기침을하길래몸이아픈가걱정돼서 ]
그는 마침내 왜곡되지 않은 진솔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과 끝을 늘어뜨린 눈썹, 그리고 엉망진창으로 쓴 글씨까지 합쳐져니 그 모습 썩 하찮고도 애처롭다.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종이를 세워 보인 탓에 웅덩이 진 검은 액이 질질 흘렀다. 그것을 눈치챈 그가 다시 종이를 눕혀 테이블이 더렵혀지지는 않았지만, 복장이나 이 행동거지를 봐서는 번짐이 없고 빠르게 건조되는 개량된 필기구에만 익숙한 모양이다.
좌우간 말썽 부릴 시간은 이제 끝이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전했으니 그는 손에 든 것들을 모두 내려두고 순순히 제 손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잠시 가만 있다가…… 문득 질문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그는 한손으로 제 다른 쪽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장갑도 벗어야 하냐는 뜻이다.
종이에 적힌 글을 보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죽냐 어쩌냐 하는 말이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뒤늦게 미하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세상에, 내가 지금 혼자 오해한 거라고?
아악······, 미하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고개를 들고는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를 한다. 어쩌면 이전에 나눴던 대화 중에도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네가 얌전히 깃펜을 내려놓고 손을 내민다. 그러다 툭툭, 제 장갑을 두드렸다. 이번의 제스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미하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벗어야지. 안 벗으면 내가 벗길 거라구~?”
물론 안 벗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말하고 나니 그 의미가 제법 수상하다. 미하엘은 순간 아차한 표정이었지만, 다시 제가 뱉은 말을 정정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네가 장갑 벗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563 자캐가_화가_났을_때_제일_먼저_나가는_건_주먹_vs_욕_vs_째려보기_vs_기타 아마 셋 중에서는 째려보기겠지요! 왜냐면.. 대놓고 주먹질을 하거나 욕지거리를 던질 용기는 차마 없기땜에...ㅠㅋㅋ 거기에 더해진다면 몰래 구시렁대는 정도가 아닐까 싶네용 ( Ꙭ ) 니아. 비굴찌질의 대명사가 되다.
168 자캐의_사진_찍는_실력 사진이라는 걸 찍어 본 경험조차 없기 때문에 이.. 이게 뭐지.. 종이 안에 사람이! 영혼이! 으아아! < 이런 대 패닉상태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랄지. 사진기를 쥐어줘도 대부분 초점이 나가거나 흔들리거나 거꾸로 들어서 자기 얼굴 혹은 몸 그 어디께를 찍거나 하고 있을 것 같네요! (ᐢᗜᐢ)
480 자캐는_언제_거짓말을_하는가 대부분 곤란한 상황일 때.. 주로 자기가 생각하기에 목숨이나 생존에 연관됐거나(??) 자기에게 뭔가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겠다 하는 그런 상황들에 주로 모면을 위한 거짓말을 하는 편입니다. 유독 양심통을 심하게 느끼는 편이라 어쩌다 한 번 내뱉는 가벼운 거짓말은 나중에 저저저기 이전에 그 말은 사사실... 죄송해요ㅠ ㅠ~~~!! 하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서 TMI를 좔좔좔 털어놓습니다.
>>702 암요! 최근에 너무너무 먹고 싶었던 짜왕을 이제서야 먹었답니다. 짜파게티도 맛있지만 역시 가끔씩은 다른 맛 짜장라면을 먹고 싶어요 ᴖ ̫ᴖ)
ㅋㅋㅋㅋ아무래두,,, 현대 사람들이 옛날 중세 시골마을.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왔기때문에... ( •̀ ω •́ ) SF세계관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는 정말로 죽어서 이번에야말로 천국에 온 건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전원이 뭔지 몰라서 이것저것 되는 거 안 되는 거 누르고 때리고 두드려 보다가 기계 망가뜨리는 생각...(???) 니아 더 메카 디스트로이어.
달려서 기침이 나와? 왜? 그도 미하엘과는 다른 의미에서 눈이 동그래진다. 숨도 쉬지 않는 그의 입장에서는 기침과 달리기의 상관관계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얼굴도 왜 색이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하니 더 물을 수도 없었거니와 제 스스로 본인의 ‘상식’을 신뢰하지 못하는 처지인지라.
미하엘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던 그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엘이 의도하지 않았던 발언의 수상함은 달리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별달리 머뭇거리지 않고 손바닥을 감싸는 장갑의 면을 붙잡고 가볍게 당겼다. 검은 장갑이 벗겨지며 그 안의 손이 드러나……기도 전, 문제가 생겼다. 장갑을 벗음과 동시, 벗어낸 면 안에서부터 버석거리는 모래와 시커먼 잿가루, 미세한 금속 조각 같은 무언가가 차르륵 쏟아졌다. ……아마 옷이나 신발 안도 상태가 비슷하지 않을까. 그나마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동안에 대부분의 이물질이 탈탈 털렸고, 손발목을 조이는 옷을 입어 안쪽에 갇힌 것들이 빠져나오지 못해 다행이었다. 문제점을 스스로 깨달은 그의 시선이 가게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하엘을 힐끗 돌아본다. 이거 나가서 벗어야 하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그는 이내 펜을 쥐었다.
[ 잠시만 기다려 ]
조금 전보다는 나아진 솜씨로 재빨리 휘갈긴 후, 벌떡 일어나서는 문 너머로 후다닥 나선다. 지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돌아온 그는 양손이 깨끗해진 상태였다. 최소한 어딘가에서 물로 헹구는 조치까지는 하고 온 모양이었다. 짧은 곡절의 끝에 간신히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 완전히 맨손이 된 두 손이 마침내 미하엘의 앞에 내밀어졌다. 당연하게도, 두 손의 상태는 성한 부분을 찾는 편이 더 빠를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을 테다.
추락자들은 점차 도시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친절했고, 다소 여유로웠으며, 사람 돕기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물물교환을 하거나 심부름을 하여 조달할 수 있었고, 잘 수 있는 장소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분위기가 다릅니다. 아닌 이들도 많지만, 몇몇······, 특히나 중앙을 지키는 치안대의 반응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추락자들을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어디선가 소문이 들려옵니다. “이번에 중앙에 침입했던 ■■■ 말이야. 결국 탈출했다는 모양이야.” “그래요? 아이고, 어떻게 해?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오는 거 아니에요?” “중앙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우리도 조심하자고.” “그래도 별 일 없겠죠?” 주민들이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지만, 추락자들은 아직도 ■■■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주인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하러 가는 나의 뒤를 졸졸 따라온다. 따라오면서 주변을 둘러보곤 작게 감탄을 내뱉는 것이 처음 만났을때보다 훨씬 긴장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려준 약도를 참고하여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 뒤에서 알레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으음 ... "
확실히 처음 만났을때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라서 계속 울고 있었지. 그걸 보고 지나치기 어려워서 다가가준거고. 만약에 다시금 헤어진다면 이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될테니 아까처럼 또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자신에겐 동행하고 있는 일행이 있고 말도 없이 데려가기엔 그것 또한 민폐일것 같아 고민이 크다.
" 난 이미 동행하고 있는 일행이 있어요. "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애처롭게 울던 모습이 떠올라서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분명 지금 이렇게 헤어지고나면 계속해서 생각나겠지. 그 이후엔 어떻게 됐을까 걱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이 동행하는 윈터가 마음에 들었기에 그녀와의 트러블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걸 어찌해야한담.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일단 일행한테 같이 가봐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할지도 몰라요. "
만약 윈터가 싫다고 한다면?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알레프에게 여지를 주었다가 윈터가 거절하는 사태에 놓이게 되면 알레프에게도 큰 상처이고 윈터에게도 괜히 하기 싫은 말을 하게 만드는 셈이니까 말이다. 지금 가서 물어보고 오기엔 또 혼자 두는 셈이라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다.
" 지금은 심부름부터 하죠. 아까 그거 맛있게 먹던데? "
일단 눈 앞에 닥친 일이 먼저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첫번째 구매처에 도착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이름을 말했더니 미리 얘기가 되있었는지 물건을 건네주었다. 감사인사와 함께 받아든 나는 다음 가게로 향했다.
이게 뭐람. 모래와 잿가루, 그리고······. 미하엘은 두 눈을 꿈뻑거렸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것들을 보고 다시 너를 바라본다. 미하엘은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 녀석은 사막 같은 곳에서 살던 추락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니다)
네 시선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네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글자를 적어낸다. 미하엘은 어, 어. 그래애······, 하고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네가 문 밖으로 나서자 정적이 찾아 들었다. 가게의 주인이 불꽃으로 청소도구를 표현해 냈다. 테이블 위를 치우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치울 수 있게 도구를 주냐는 의미인진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미하엘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네가 돌아왔을 때 테이블은 깨끗해져 있었고, 네 손도 모래나 잿가루가 있었던 것치고는 깨끗해져 있었다. 그래, 치고는.
“허······.”
손가락 뿐만이 아니라 손 자체가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손을 쓴 거지. 미하엘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따로 질문은 없었다. 그저 아쉬운 것이, 이곳에 붕대는 있었지만 연고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나중에 포션이나 연고 같은 거 바르고 다시 감는 게 낫겠다······. 대체 어떻게 하면 손이 이런 상태가 되는 거야? 너 혹시······.”
자해 같은 걸 하냐고 물으려다가 그런 예민한 질문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미하엘이 됐다,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미하엘은 다소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감아주고는 뿌듯해했다.
사실 어울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제 차림은 ‘변신’으로 인한 고정차림이었기에 갈아 입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미하엘이 그것까지 네게 이야기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미하엘안 어떤 식으로 홍보가 되는지, 홍보할 건지 확실하게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히죽거리는 게 다였다. 네가 구속복의 버클을 푸는 사이, 미하엘은 몇 가지 옷을 챙겨와 네 앞에 내려놓았다. 전체적으로 짙은 푸른색에 진주 같은 구슬이 달린 드레스나, 아이보리색 셔츠에 가죽을 덧댄 조끼와 바지, 무릎 위로 올라오는 꽃분홍색의 짧은 드레스, 그리고 짙은 남색의 반바지가 메인인 것으로 보이는 옷 등······.
그것도 모자란지 미하엘은 이미 준비된 옷 말고도 여러 색상의 천들도 늘어놓았다. 녹색의 무광재질의 천이나, 보라색 천, 붉은색에 노란색이 어우러진 천도 있었다.
“만들어진 게 별로면 지금 당장 원하는 스타일로 만들어줄 수도 있대.”
이래봬도 솜씨 있는 사람이거든. 주인장을 한껏 띄워주던 미하엘은 머리 장식을 해도 좋겠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인장은 옆에서 바늘꽂이와 가위를 든 채 너를 바라본다.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천을 두르고 시침하여 태를 잡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일행 있다는 말에 소녀는 다시금 풀 죽는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친절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은 동료도 이미 잔뜩 있을 테니까. 괜히 말했나봐. 누구 잘못도 아니건만 소녀는 뾰루퉁해져선 길가의 돌멩이 툭 걷어찬다. 이제 어떡하지. 하얀 존재를 순순히 따라가면서도 괜히 심술이 난다. 그러다 그가 뒤이어 꺼낸 말에,
"...진짜?"
다시금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물론 완전한 허락은 아니지만! 소녀는 내심 그의 일행이,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고, 고마워, 라클레시아!"
히히 웃으며 마저 뒤를 따른다. 이내 도착한 첫 가게, 라클레시아가 심부름하는 걸 뒤에서 지켜보다 총총 그의 앞으로 나선다. "내가 들래."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을 쭉 내밀어 물건 들어주겠다 하고. 만약 그가 물건을 건네주었다면 가뿐히 들고서 다시금 뒤를 따랐을 것이다.
"그 일행, 어떤 사람이야?"
문득 궁금해졌기에 소녀는 거리낌없이 묻는다. 그 일행이 동행을 허락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적어도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둬야지.
452 급하게_가야할_곳이_있을_때_자캐는_한번정도괜찮으니무단횡단_vs_그래도신호는무조건지킴 미하엘 : 마법소녀는 기다리지 않아. (날아감) 223 자캐가_기대하는_프로포즈_방법 미하엘 :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아니야. 연인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잖아. (뚜웅) 미하엘 : 하지만 딱히 생각한 건 없어. 나중엔 생기려나? 211 초코_vs_바닐라_vs_딸기_자캐가_고르는_아이스크림_맛 미하엘 : 과일맛. (당당)
221 자기_자신을_사랑하냐는_말에_자캐의_대답은 다윈 :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대답하기도 싫은 말이군요. 450 자기소개를_해야할_때_자캐는_제일먼저나서서_vs_적당히눈치보다가중간에_vs_무조건제일마지막_vs_기타 다윈 : 적당히 타이밍 맞을 때 합니다. 468 자캐의_평균_수면시간은_어느_정도인가 다윈 : 어제는 두 시간 반을 잤군요. (딱히 수면욕도 없고, 많이 잘 수 있는 타입도 아님)
전신을 털어낼 시간까지는 없었지만 최소한 소매 안쪽까지는 최선을 다해 비워내고 왔다. 그러고도 나오는 입자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게 미하엘의 뜻 모를 감탄을 시작으로 조치가 취해졌다. 제 스스로 손 내어주었으면서도 왜인지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거북하거나 싫은 건 아니지만…… 피부 위로 타인의 섬세한 수지가 이리저리 오가는 감각이 한없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는 침착하게 있기 위해서라도 딴생각을 하기로 했다. 사실 제게 있어서는 단순히 손을 단단히 감싸는 조치는 큰 효용이 없다. 하지만 미하엘이 상처를 보며 지금까지 지었던 표정을 생각해보면 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 그는 아직 타인의 비위에 관해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하간 미하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듯하단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가 한창 이런저런 잡념에 몰두하던 사이 어느새 한쪽 손의 작업이 끝났다. 마침 그쪽이 주로 쓰는 손인 김에, 슬그머니 종이 더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 오래 써서 그래. ]
그는 한 손만으로 짤막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빳빳하게 붕대 감긴 손의 부자연스러운 감각이나, 익숙하지 않은 필기구 탓에 글씨는 여전히 서툴기 짝이 없다. 혼잣말에 가까웠던 미하엘의 말을 정말 궁금해서 한 질문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막 써 놓은 문장 그대로 저 스스로 그간 혹사를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을 뿐이고……. 그러는 동안 남은 쪽의 작업도 마침내 끝이 났다. 그는 쥐었던 펜도 내려두고 두어 번 주먹을 쥐어 보았다. 팽팽하게 당기는 느낌이 영 낯설지만, 지져 둔 피부가 당기는 기분보다야 나으니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제 몸인데도 한참을 구경이라도 하듯 두 손 내려다보던 그를 정신차리게 한 것은 미하엘이 꺼낸 말 한 마디였다.
깜빡깜빡. 까만 눈동자 멀뚱히 떠졌다 감기기만 한다. 맹한 면색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모르고 쭉 남아 있다. 한참을 얼빵한 얼굴을 유지하던 그가 끝내 한 문장을 더했다.
옷가지와 색색의 천들을 죽 늘어놓는 미하엘을 멍하니 바라보는 윈터에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당장 원하는 스타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말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켜냈다.
"뭐, 뭘 그렇게 많이..."
난생처음 보는 스타일의 의상들. 윈터는 새삼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옷가지를 하나씩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색과 장식이 화려한, 여성스러운 의상들을 하나씩 눈에 담는 윈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이런 의상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눈으로 보기만 해도 낯이 간지러워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있지... 조금 무난한 의상은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드는데, 바늘꽂이와 가위를 들고 저를 내려다보는 주인장과 눈이 마주친다.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윈터는 퀭한 눈으로 미하엘을 바라보다가, 돌연 그들에게서 도망치듯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나는 그냥 겉에 걸칠 거랑 바지만 하나 있으면 되니까...."
미하엘이 제시해 준 옷들은 도저히 입을 자신이 없고, 주인장이 새 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윈터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깨 부분이 조금 찢어지긴 했어도 구속복 안에 입고 있던 상의는 있으니까. 허둥지둥 진열된 옷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대로 적당한 외투와 주황색 짧은 바지를 하나 집어온 윈터는 두 사람 앞에 서서 손에 든 것을 내밀어 보였다.
오래 써서. 하지만 오래 쓴다고 이런 식으로 상처가 생기나? 사람에겐 재생력이 있지 않던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미하엘은 문득 홀로 이해했다. 시체라서 그렇구나! —하고. 좀비 영화 같은 거에서 상처가 낫는 좀비는 없었으니 비슷한 거겠지. 미하엘은 이번에는 네가 모를 오해를 했다.
“지면? 어······.”
딱히 생각해 본 것은 없다. 실제로 ‘자신에게’ 빚을 갚으라느니 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미하엘이 좋은 것을 떠올린 듯 배시시 웃었다.
“딱히 어떻게 되진 않아. 하지만 나중에 혹시나, 이런 식으로 다친 사람을 보면 도와주면 좋겠어.”
그게 자신이 되었든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든. 누군가 본다면 왜 그런 이득 없는 일을 하느냐 물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마냥 이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추락자가 추락자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든 돌아오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나한테 진 빚을 왜 다른 사람한테 갚아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너한테 도움 받아서 빚진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계속 그렇게 반복하면 언젠가는 모르는 누군가가 널 또 도와줄지도 모르니까.”
그런 걸 운명, 그리고 인연이라고 했다. 미하엘은 자신도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아 생긴 빚을 네게 갚는 것뿐이라는 듯이 말하며 킥킥 웃는 소리를 냈다.
네 행동에 미하엘과 주인장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저걸로도 돼? 될 것 같네요. 아쉬운데. 뭐 어쩌겠습니까. 짧은 순간 여러 차례의 눈빛이 오가고 난 후, 미하엘이 빵긋 미소지으며 엄지를 척 세웠다. 주인장도 엄지, 아니 가위를 치켜 세웠다.
“좀 더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고 사랑스러운 옷을 입기를 바랐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네가 잡은 옷들로도 괜찮다는 듯이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미하엘이 가게와 옷들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인장도 같은 의견인지 별 말이 없었다.
“그래도 좀 아쉽다. 아, 이것도 같이 하는 건 어때?”
미하엘은 루비인지 아니면 다른 광물인지, 붉은색의 꽃모양으로 커팅 된 머리 장신구를 골라 네게 보여줬다. 주인장에게 장신구 가져가도 괜찮지, 하고 물은 건 그 뒤의 일이었지만.
“아니면 팔찌나 목걸이도 있는 것 같던데. 어디 보자······.”
네가 별로라고 한다던지, 아니면 못 하겠다고 할 거로 생각했는지 미하엘이 머리 장신구를 네 근처에 내려놓고 다른 장신구를 진열한 장을 이리저리 살폈다. 광채가 있는 화려한 것부터 무난한 장신구들은 옷에 달기 위해 준비한 것도, 옷과 한 세트로 판매하기 위해 마련된 것도 있는 듯했다.
이렇게 답변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소녀를 본적이 있는가. 오랜 삶에 없다고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솔직함이 곧 무기로 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귀엽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알레프를 윈터가 거절했을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 물어보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
그렇게 된다면 나는 선택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와 동행하는 그녀의 성격상 그냥 자기 혼자 가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선택할거 없이 알레프와 같이 지내면 되겠지만 그렇게 됐을때의 아쉬움이 무섭다. 그토록 예민하던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느긋해진 이유도 선택이 주는 후회가 무서워서 그 선택을 미루고 미루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게 후회는 점점 잊혀져 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바로 방금의 선택이 불러오는 후회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 수인이에요. 눈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랍니다. "
성격은 아직 오래 지내보지 않아서 확언은 못해주겠지만 털털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처럼 좀 느긋한 성격인것 같기도 하고. 약간 동류(?)의 느낌이 나는 것을 보면 그녀도 오래 살아온게 아닐까 싶었다. 물건을 들어주겠다는 알레프의 손짓이 마치 여동생 같아서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충동을 참아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꽤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 이번에 사는걸 들어줘요. "
다음에 사는건 꽤 가벼울듯 싶었다. 다음 가게는 다행히 그렇게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기에 거기서 준 물건을 알레프에게 건네준 나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자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알레프는 인간인가요? "
겉보기엔 영락없는 인간이긴한데 인간과 진짜 비슷하게 생긴 다른 종족일수도 있으니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질문의 답을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변은, 그도 흔쾌히 승낙할 수 있는 종류의 제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 간의 순환이라는 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핏기 없는 새하얀 낯은 조금도 상기되지 않았지만,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완연히 들뜬 기색 느껴졌을 테다. 왜 기분이 좋아졌는지까지는 보는 입장에서는 모르겠지만서도. 미하엘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그라면 충분히 그랬을 테고 말이다. 조금 전만 해도 사실은 아프지 않았던 미하엘에게 착각을 해 오해할 만한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다만 문제라면 하나 있었다. 상식이 모자란 그가 일반적인 기준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고, 진짜 초짜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기 마련이다. 애석하게도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도시에 들어와 붕대를 감았고, 쓸만한 필기구도 생겼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 들어온 뒤에 할일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앗, 소리 없이 무엇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할말이 있다는 듯 펜을 들었지만, 종이에 대지는 않은 채 거친 지면(紙面)을 내려다보기만 하며 묵묵무언이다. 꽤 오래라고 해도 될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손이 움직였다. 깃펜이 아직도 손에 익지 않았는지 획을 써내려가는 동작은 느렸지만, 하나하나 공을 들여 천천히 써내려 간 글자는 그만큼 정갈했다.
[ 永이라고 해. 내 이름. ]
미하엘은 도시에 가면 이름을 듣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저 기억을 잃은 탓만은 아니었을 테다.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불러 주지 않았던 이름을 누가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불려야 할 명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선뜻 떠오른 말만은 하나 있어서. 永. 영원. 그 자신조차 온전히 기억하지 못할 기나긴 목숨을 함께해 준 유일한 것, 시간의 이름이다.
곧 소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빠진다. 그럼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눈이 예쁘다고 인사하면 되겠네! 처음 만나는 사이엔 다소 뜬금없는 인사말이겠지만, 소녀가 그걸 알아차릴리 만무했다. 그래도 라클레시아의 일행이니까, 좋은 사람 아닐까?
"응? 인간 아니야."
그가 건넨 물건을 덥석 받아들고선 이어지는 질문에 답한다.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인간 모습이니까...
"그러니까... 뭐였더라. 신...?이라고 하는 거 같더라구."
소녀는 기억을 더듬듯 손가락을 꼼질대다가. 겨우내 생각해내곤 말을 마무리한다. 소녀에겐 아직 신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그야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말이었으니까. 소녀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정말 무無 뿐이었다. 그곳에서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우주가 생겼고, 별과 달과 태양과 행성이 생겨났었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생명들도 만들었었다. 그들이 바로 불멸성을 지닌 지성체, 데이dei였다.
"...그땐 친구들도 많았었는데."
그들의 배신은 소녀에겐 큰 충격이었다. 믿고 있었는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친구로 있어줄 줄 알았는데. 결국 그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다가 전부 소멸하고 말았다. 그 덕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거지만, 그게 잘 된 일이었을까? 모르겠다. 소녀는 평소의 멍한 표정으로 생각을 거듭하다, 다시금 정신 차린다. 지난 일은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미하엘과 주인장이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윈터는 끝끝내 긴장을 풀어낼 수 없었다. 험난한 일을 수없이도 겪어온 윈터가 이토록 주저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날 때부터 군인의 삶을 살아왔으니까. 예쁜 옷을 입거나 몸을 치장하는 등 여성력을 어필하는 것에는 내성이 전혀 없단 말이다. 윈터는 이 상황이 마냥 부끄럽고 창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행히도 납득이 되었는지, 두 사람은 각각 엄지와 가위를 살벌하게 치켜세우며 빵긋 미소 지었다. 윈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쳤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옷은 나랑 어울리지 않을 거야."
못내 아쉬워하는 소녀에게 윈터는 주눅 든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했다.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고 사랑스러운 옷. 살면서 눈으로 본 적도 드물뿐더러 제가 입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 갈아입고 올게."
윈터는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품에 안고서, 미하엘이 가져다준 장신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것을 집어 들고선, 진열장을 이리저리 살피는 미하엘을 뒤로하고 종종걸음으로 탈의실에 들어섰다. 외투는 품이 넉넉해서 움직이기 편하고, 바지도 조금 짧은 감이 있지만 활동성이 좋았다. 거울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미하엘이 제시한 장신구도 머리에 꽂았다. 갑갑했던 구속복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윈터는 조심스럽게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저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윈터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닿자, 그녀는 옷들이 가득 걸린 행거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이럴 때엔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고개만 빠끔 내밀고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윈터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있다.
다른건 몰라도 눈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나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그것보다 아름다운 눈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망각이 없어 할퀸 자리가 아물지 않는 기억의 바다에 간만에 생긴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 신? "
순간 얼어붙듯이 걸음이 멈춘다. 신, 모든 생명체의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존재. 그런 것들 마저 추락할 수 있는건가?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내 얼굴은 어느새 경직되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그저 단 하나의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일뿐인데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몰려온다. 이럴땐 아무리 제어를 하고싶어도 할 수가 없다. 손에 들려있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비틀거리던 몸이 간신히 옆에 서있는 벽에 기대어진다.
" 그렇군요 ... 당신은 신이군요 ... "
애초부터 이 소녀가 신이라는걸 알았다면 아는체도 하지 않았을텐데. 이건 정말 농간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여기서 모든걸 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 길거리에서 울고 있던 그 모습이 겹쳐보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버텨낼뿐. 마치 드러난 진흙을 마른 모래로 덮어버리는 것처럼.
" 이제 돌아가면 될거에요. "
그래, 이젠 걸을만해졌다. 아직까지도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말이다. 힘들게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려하지만 잘 지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심부름을 맡은게 있으니 돌아가야만한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던 물건을 집어들고선 천천히 아까의 그 가게로 향했다.
어라, 기분이 좋아졌나? 미하엘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라 싫어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네 반응이 예상과는 달라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갸웃거림도 잠시, 곧 네가 한 획 한 획 적어가는 글자에 시선을 둔다.
그리고 완성된 문장을 보았을 때, 미하엘은 어떠한 기이함을 느꼈다.
글자와 글자가 겹쳐진다. 제가 아는 글자부터, 모르던 글자 따위가 새겨지고 또 얹어졌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단순하되 단순하지 않다. 말로 인해 ‘힘’이 주어지듯이, ‘글자’도 마찬가지다. 그건 추락자가 된 지금 여실하게 깨달은 내용이었다.
영, 영원, 영원함, 영원불변한, 결코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
단어의 의미는 알겠다. 그게 네 이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영원하게 어필하는 글자는 추락자가 되면서 모든 언어에 불편함이 없기에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글자의 겹침은 어느새 수많은 영원을 남기다 서서히 사라지더니 하나의 글자로 남았다. 미하엘은 한참이나 말없이 글자를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통역 기능이라는 게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글자로 보이고 느껴진다는 것이.
“그러니까, ······영원이? 맞아? 그런 의미인 게? 아니, 이건 그냥 영인가?”
영원이. 어쩐지 친근한 느낌의 이름이다. 아마 제 말이 네게는 둘 다 같은 말로 들리던지, 아니면 미세하게 다른 말로 들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미하엘에게는 영(원)이라고 보였으니까 말이다.
라클레시아의 몸이 휘청거린다. 들고 있던 것마저 떨어트리고, 경직된 얼굴로 내뱉는 몇 마디. '당신은 신이군요'. 소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사람이나 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눈치마저 없는 건 아니라. 소녀의 표정도 덩달아 굳는다. 무슨 사연 있는진 알 수 없으나 결코 유쾌한 내용은 아니리라. 게임에서도 으레 이런 일이 있곤 하잖은가. 호의적이라 생각했던 상대가 알고 보니 적이었다든가... 그는, 날 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디 아파? 내가 들까?"
그런 반응조차 애써 무시하고 걱정스레 말 붙여보지만, 이미 마음 속에 얹힌 돌덩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를 부축하려 다가가던 발걸음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뚝 멈춘다.
"......"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소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완자 튀김을 기대하던 마음도 식은 지 오래다. 지금이라면 뭘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있잖아, 아까 그 얘기..."
한껏 내리깐 시선처럼 목소리도 가라앉은 채다. 동행하는 거, 분명 불편하겠지.
"없던 걸로, 해도 될까..."
물론 내키지 않는다. 다시 혼자 남겨지는 건 싫다. 그렇지만 남에게 상처 입혀버릴지도 모르는 게 더 싫다. 게다가 제게 처음으로 호의 베풀어준 사람인데.
스스로 손을 움직이면서도 그것이 어떤 형상이 되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손을 겹치고 움직임을 이끌듯, 그 자신이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어떠한 개념이 문자의 격 안에 욱여넣어진다. 인지로써 한정된 어휘가 아닌 ‘관념’을 써내려가는 행위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말은…… 하나가 아닌 독음에 그가 빙긋 웃었다.
[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돼. ]
어느 쪽도 틀린 방식은 아닐 테니까. 미하엘이 제 호칭에 관해 명확히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인데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는 웃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 어쩌면 너무도 오래되어 처음인 것도 같아서 그랬다. 다시금 펜을 놀리면서도 싱거운 웃음 자꾸만 흘려댔을 테다.
[ 도와줘서 고마웠어. ] [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돼? ]
짐짓 어설픈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계속되던 웃음이 그나마 사그라든 것은 이 대목을 쓸 즈음부터였다.
[ 지금 내 상황이 어떤 건지 알고 있어? ] [ 모르는 곳에 온 거 말이야 ]
만나자마자 생긴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미뤄진 감은 있지만, 분명 미하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처한 상황에 관해 무언가 아는 듯한 말을 했었다. 소통 수단도, 이름도, 손의 처치까지 모두 준비된 지금이야말로 늦춰진 호기심을 꺼내 들 때가 아니겠는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대비를 못했을뿐이다. 지금은 안다. 이 소녀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그저 같은 신일뿐 본질부터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심리에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대비하지 않았을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알레프는 나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난 지금 이 소녀를 상처 입히고 말았다.
" 난 당신이 싫은게 아니에요. "
그저 그 단어에 스위치가 들어왔을뿐이다. 자신과 같은 류의 존재가 신이라는 사실을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야 자신의 세상에서 전능한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처럼 하늘에서 떨어질거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요. "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다. 미소를 지어야하는데 아직까지도 힘들다. 잘못은 이 소녀가 한게 아닌데 마치 내가 그녀를 탓하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 내가 ... 극복해야하는 일이니까요. "
없었던 일로 해도 되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내 욕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알레프가 원해야만 되는 일이다. 또 나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하나 더 추가해버렸다. 오롯이 나의 실수 때문에.
부족한 재료를 사다 달라는 마시의 부탁으로 시장에 나온 날이었다. 적당히 따듯한 날씨,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지 않아 화창하기만 하고. 저번처럼 또 거스름돈 이상하게 받아 오면 안 돼!거, 거, 걱정 마세요, 마시! 놀림 반, 걱정 반 섞인 배웅에 허둥지둥 대답하며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늘 낯설게만 느껴졌던 거리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사람을 잡고 묻지 않아도 알아서 갈 수 있을 만한 짬이 되었다.
가게에서 똑바로 걸어가면 늘 아이들이 몰려 시끌시끌한 작은 과자점이 하나 있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면, 골목을 둘러싼 낮은 담장 위로 종종 볕 좋은 날에 꾸벅거리며 조는 늙은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여윳돈이 생겼을 때 들러보고 싶은 빵가게(그 중에서도 케이크라는 걸 꼭 먹어 보고 싶었다! 아직은 택도 없었지만.)가 있고, 그걸 지나쳐 계속 걸으면 다른 구역으로 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언제나처럼 수상한 사람들을 주시하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경비원들의 앞을 지나가면...
.... ..
지금, 마주치지 않았나? 눈이. 딱, 하고.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슬쩍 경비원 쪽을 보면, 여전히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강렬하다.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 있어서 옆구리를 쿡 질린 것처럼 어깨를 작게 떨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옷차림이 이상했나, 아니면 지나치면 안 될 곳을 지나쳐왔나. 괜히 위축되는 맘이 들어서 잘못된 게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전혀 떠오르는 것은 없다. 로브나 스커트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단은 이 세계 옷이랑 조금 다르게 생겼을 뿐인데. 망설임 가득한 눈으로 다시 마주친 시선은 강렬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일단은' 해를 끼칠 마음은 없어 보여 소심한 발걸음으로 착착착. 최대한 무해한 몸동작으로 앞을 지나쳐왔을 뿐이다.
조금 찜찜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주어진 심부름은 무사히 마쳐야 한다. 시장은 언제나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과일 사세요! 오늘 아침에 낚은 싱싱한 생선이요! 한 손님이라도 더 들이려 목청껏 외치는 상인들의 소리, 빵이며 고기를 굽는 냄새, 지갑을 들고 이 가게 저 가판대를 쏘다니며 질 좋은 물건을 살피는 사람들. 평소대로였다면 작은 몸집과 잽싸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아무 신경도 쏠리지 않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닐 수 있었겠지만,
'⋯탈출⋯⋯ ■■■⋯⋯ 중앙에⋯' '⋯어쩌면⋯⋯ 아닌지⋯⋯ ■■■⋯⋯'
영문 모를 숙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묘한 시선들이 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은.. 단순히 기분 탓일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몇 번이고 발견하는 건 그저 우연일까.
마시가 부탁했던 물건의 대금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어제 주점에 손님으로 왔던 사내가 자신을 보며 숙덕대는 걸 발견했을 때에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까지 들기 시작했다. 넉살 좋게 인사를 먼저 인사를 건네 주길래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고개를 푹 숙여 로브에 얼굴을 가리고 지나쳐왔던 길을 되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1시가 넘었는데도 깨어 있는 분이 이렇게나 ː̗̀(ꙨꙨ)ː̖́...! 다들 안 주무시고 뭐 하시는 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사실..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독백을 많이 써 본 적은 없거든요..... 근데 뭐랄까.. 저의 상황극판 전성기가 도래했는지(??) 뭔가 연속되는 상황이 던져지니까 상상도 잘? 되고?(??) 그렇습니다.. 저도 신기하네요 독백 쓰는 게 왤케 즐겁지... ๏̯๏
그러는 자신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었지만, 그건 까맣게 잊은 듯 왁 소리친 미하엘이다. 주인장의 슬픈 눈빛을 받은 것은 덤이고. 네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미하엘은 진열장에서 시선을 떼고 주인장을 바라보며 열심히 변명했다. 아니, 사장님 옷이 나쁜 게 아니라구? 아잇, 왜 울려고 그래! 아니, 봐봐! 쟤 옷 입으러 들어갔잖아······.
다시 옷을 갈아입은 네가 나왔을 때는 주인장과 미하엘의 시선이 그리로 확 옮겨졌다. 네가 행거 뒤로 숨으면 미하엘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뭐가 그리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빨개졌을까~? 으응?”
미하엘은 행거 주변을 알짱거리며 너를 놀리는 듯 싶다가 휙 행거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제가 가져왔던 옷과는 다르게 간편해 보이는 옷차림이지만, 미하엘은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와, 모델이 좋으니 옷도 잘 어울리잖아~”
옷을 만든 주인장을 띄워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너를 띄워주는 건지 모를 투다. 미하엘은 히죽거리며 네 등을 가볍게 밀어 가게의 한가운데로 이동하게끔 했다.
“자자, 사장님. 한 번 봐봐. 수정할 곳이 보여? 없어? 그럼 이대로 홍보해도 돼?”
주인장이 다시 엄지를 들듯 가위를 들어올렸다. 만족스러운 얼굴의 주인장이 무어라 읊자 옅은 하늘빛이 네 옷에 스며들어갔다. 아마 이 세계의 마법 같은 듯싶었다.
“자, 그럼 사장님~ 홍보하고 올게. 가자, 윈터.”
미하엘은 찡끗 윙크하며 다시금 너를 밖으로 내보낸다. 햇살 아래에서 네 옷을 본다면 시선을 뗄 수 없을 거라는, 칭찬인지 아부인지 모를 말과 함께.
“일단, 아까 빨리 가야한다고 했던가? 언제까지 가야 해? 아직 시간이 있는 거면 이동하면서~ 궁금한 것에 답해줄게. 내가 아는 것에 한해서지만.”
>>904 꺄 아 악 그걸 그런 식으로... 견딜 수 없 어 욧... (´⌓`) 아니 하지만? 저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캡틴과 모두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 있었을까요?! 아닐걸요....!? 영주를 포함한 모두가 있었기 땜에 제가 이렇게 열심히 독백을 쓸 수 있고! 니아를 굴릴 수 있고! 모두를 귀여워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
>>906 꺄아악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야 ■■■!!! ■■■!!!! 이거 너무 치사합니다 ■■■!!! 대체 뭔데1! 뭔데!!!!
굳이 따지자면 아무것도 모르고 들러붙은 자기 잘못일까. 물론 실제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건만 소녀는 모든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거 같으니까.
"...으힝."
눈을 두어번 꿈뻑이다 보니 눈물이 찔끔 튀어나온다. 그래도 방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이젠 또 아까 전처럼 또 펑펑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는데 마르기는 커녕 더 축축해지는 눈물샘.
"그, 그래도, 나 때문에 힘들 거 같아서..."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녀는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그는 분명 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역시 신, 동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싫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그 문제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 나는 진짜 괜찮아, 괜찮으니까, 응..."
말로는 괜찮다 하지만 실은 괜찮지 않다. 괜찮을리 없다. 그럼에도 마치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선뜻 따라가겠다 말도 못 꺼낸다. 줄곧 소매로 얼굴을 비비적대고 있으니 눈가가 붉어진다.
왜 이렇게 웃는 거지? 혹시 이런 뜻이 아니었나? 네가 웃는만큼 미하엘은 다소 심각해졌다. 그나마도 곧 네 질문에 정신을 차렸지만.
하나 물어봐도 되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하나만 물어보지 않을 거란 예상이 있다. 그야, 대부분의 추락자가 그랬다. 하나의 의문을 해소하면 다른 의문이 생겼고, 그걸 또 해소하면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오죽하면 미하엘 또한 모든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니 말이나 다했을까.
“완벽하게 안다고는 말 못 해. 나도 모르니까. 하지만 몇 가지는 알아.”
미하엘이 검지를 펼쳤다.
“하나, 넌 세계에 추락 했어. 그리고 앞으로 계속 추락하게 될 거야. 물론~ 추락한 세계에 남는 방법도 있기는 해. 하지만 보통은 선택하지 않아.”
그야 내 세계가 아니니까. 미하엘이 말하는 추락이란 의미심장한 단어와도 같았다. 미하엘은 혹여 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고는 중지를 펼쳐 두 개의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둘, 우리는 서로를 ‘추락자’라고 해. 말 그대로 세계에 추락하는 사람. 누가, 왜, 언제, 어떻게, 어째서 추락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 누군가는 신의 짓이라고 했지만, 그거 알아? 신도 추락자가 될 수 있다는 거.”
어이없다는 듯, 혹은 무언가를 포기한 듯 지친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미하엘이 언제 그런 표정을 했냐는 듯 방긋 웃었다. 그리고 세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셋, 추락자는 언어의 불편을 느끼지 않아. 이건 뭐, 알고 있는 거겠지만. 근데 이 언어라는 게 참 기이해. 우리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거든. 참 웃긴 게, 벽화도 보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는 판국에 어떤 특정한 것은 아예 판단이 안 돼. 이건 직접 겪어보면 알 거야.”
그리고, 네 번째······. 미하엘이 넷째 손가락을 펼치려다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도로 접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더니 헤죽 미소지었다.
>>911-912 ㅋㅋㅋㅋㅋㅋㅋㅋ크 아 악.... 미션독백 줘.. 미션독백을 먹지 못 해 말라죽어가는 참치가 여기에 잇습니다. 독백. 도 독백.... (바짓가랑이)
>>913 꺄 아 악 강제로 자만하게되......(?) 그쵸 맞는 말이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영주도 저의 최?전성기?에 기여한 셈이 되는 거죠? ಠ‿↼ (아까부터 이상한 논리 펼치기)
>>915 ㅋㅋㅋㅋㅋㅋ아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쥐엔장...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어장을 거치면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글을 쓰고.., 심지어는 독백에 등장하는 모브 설정도 조금이지만 짜게되었기땜에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재밌어... 재밌어 이 어장..... 직감했어요 제 인생 어장이 될 거라고... ( *ˊᵕˋ)
짧은 물음에도 상당히 상세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것도 가장 핵심적이라 해도 좋을 정보들로 이루어진. 이런 질문을 받은 경험 역시 많은걸까, 슬그머니 그런 딴생각 들어오려는 것을 밀어넣고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럴 때만큼은 글로 하는 소통에도 장점이 있다. 전해야 할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으니. 골똘히 생각하며 중 떠오른 것들을 차근차근 한 줄씩 더했다. 질문거리가 모두 정해질 즈음, 그는 창구에서 서류를 제출하기라도 하듯 질문이 쓰인 종이를 슥 내밀었다.
[ 한 번 추락을 한 이후, 다음 추락을 하기까지의 주기 같은 게 있을까? ] [ 원래 있었던 세계(고향)에 다시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 [ 너는 이런 경험에 많이 익숙해? 여기가 어떤 세상인지도 대충은 알아? ]
그리하여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중요한 질문인 것은 맞으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빠진 듯도 한데, 그 부분은 미하엘 본인도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밝혔으니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질문을 자제한 것이 아니라 알지 ‘않기로’ 했다고. 세상사는 원래 기지보다는 미지로 가득함이 당연하지 않던가. 막 추락한 직후였던 이제까지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경황이 없었던 것이었지, 그는 본래 뭐든 그러려니 하는 성격이었다. 세상 풍파가 자신을 뒤흔들거든 그에 맞추어 적당히 나붓거리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이 지극히도 당연하여, 그것이 조금쯤 이상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정도로.
아, 울려버렸다. 우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 기분을 달래주고자 챙겨주고 있는거였는데 도리어 내가 울려버리다니. 기분이 착잡해진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때려박힌 감정을 한순간에 무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까처럼 손을 뻗어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려하며 말했다.
" 그렇지 않아요. 그들과 당신은 다른 사람이니까. "
물론 거짓말이다. 아마 알레프를 보고 있으면 신이란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잔뜩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소녀를 가차없이 두고 갈 정도로 나는 매몰차지 못하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더욱 그렇다. 이것 또한 내가 조금만 더 참으면 해결될 일이다. 참아내는건 이제 익숙하다.
" 따라와도 괜찮아요. 같이 다니면 외롭지 않고 즐거울테니까. 알레프라면 내 동행도 분명 좋아해줄거라 생각해요. "
이젠 괜찮아졌다. 표정관리도 완벽하다. 나는 아까처럼 웃어보이며 알레프에게 조심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선 혹시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약한 손짓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해본다.
호기심 많은 족제비처럼 주변을 알짱거리던 미하엘이 행거를 휙 치워버리자, 윈터는 다급히 그 행거를 붙들려 했다. 결국 팔을 쭉 뻗고 허리를 인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소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모델이 좋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윈터에게 있어서 제국의 제복은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언제나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제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지금, 그녀는 아주 알몸이 된 기분이었다. 몹시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건..."
주인장이 무어라 읊자, 옅은 하늘빛이 윈터의 옷에 스며든다. 행거를 놓고 자세를 바로한 윈터는 두 손을 그러모아 가슴께에 얹고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방금의 빛은 이 세계의 마법 같은 것이었을까.
"고마워, 주인장... 자, 잠깐. 미하엘!"
주인장에게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등이 떠밀려 가게 밖으로 밀려나왔다. 내리쏘는 햇살이 눈부셔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포목점에 들어갈 때보다 볕이 밝아진 느낌이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내가 말없이 자리를 비운 거라서. 내가 떠나버린 줄 알고 혼자 가버리면 안 되니까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던 거야. 서두르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윈터는 미하엘과 처음 만났던 장소로 느린 걸음을 옮기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거라... 첫째. 지금 여기는 확실히 현실이 맞아? 처음엔 꿈속이라고 생각했거든. 둘째.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리고 셋째. 추락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 너는 날 보자마자 내가 추락자라는 것을 알아차렸잖아."
부끄러워 하는 거구나~ 귀여워라. 미하엘은 자신의 세계에서 말하는 오타쿠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히죽거렸다. 마스크 같은 게 있었다면 제대로 숨겼을 텐데. 제멋대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씨름하던 미하엘이 네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아하, 그런 거? 뭐,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야~ 나야 좋지.”
가는 길이 낯익은 걸 보니, 처음 만났던 장소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미하엘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릴 정도로. 이어 네 질문에 미하엘이 답한다.
“현실 맞아. 안 믿어지면 한 대 맞아볼래? 아픈 걸 느껴보면 확실히 알 텐데 말이야.”
미하엘이 주먹을 쥐고 휙휙 휘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정말로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장난치는 모습이었으니까.
“아~ 원래 세계로 말이지? 그럼, 갈 수 있지. 언젠가는.”
두 번째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언젠가’라는 불확실한 단어 때문에 썩 믿음직스럽진 않다. 미하엘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사람이 있다고 얘기를 들었다며 부연 설명을 덧붙이곤 네 세 번째 질문에 답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아~? 윈터가 말했잖아? 내가 너를 알아봤다고. 아마, 네가 처음이라 눈치채지 못한 것뿐일 거야. 추락자는 추락자들을 알아볼 수 있어. 뭐라고 할까·······. 그냥, 뭐 별 거 없어. 어쩌다 보니 알아차린다 정도려나? 약간 그런 느낌이야. 이렇게 마주치면,”
미하엘은 제 주먹과 주먹을 통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부딪친 주먹엔 그다지 힘을 준 건 아닌지, 맞붙기보다 조금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 붙지 않고 튕겨져 나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처음 딱 봤을 때 뭔가 느껴지거든.”
배시시 웃은 미하엘이 그로 인해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며 재잘거렸다. 어떤 추락자는 다른 추락자를 만나고 받은 그 느낌을 사랑에 빠진 거라고 착각 했단다. 한참을 오해하던 이가 또 다른 추락자를 만난 뒤 그게 사랑이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나 뭐라나.
그, 그래도... 소녀는 손길 받아들이면서도 줄곧 울먹인다. 마음 속 응어리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아 머뭇거리기만 하게 된다. 같이 가고 싶지만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싫어...
"...정말?"
하지만 그는 정말 괜찮다고 한다. 따라와도 괜찮다고 한다. 훌쩍이던 소녀가 고개를 찬찬히 든다. 다시금 올려다본 그의 낯빛엔 아까 전과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머리 위로 손이 탁 얹어진다. 그리고 조심스레 머리칼을 만져주는 손길. 지금... 쓰다듬어주고 있는 거야? 이토록 따스한 온정은 여태껏 받아본 적 없다. 그가 너무 상냥해서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힝."
그래도 지금은 울지 않을 거다. 이젠 슬프지 않으니까. 눈물 삼키고서 소녀는, 부탁받은 물건 든 채 얼른 돌아가려 한다. 씩씩하게 나아가려 노력한다.
"...라클레시아는 너무 착해. 너무 착해서 나쁜 사람한테 등골 빼먹힐지도 몰라."
그리고 넌지시 덧붙인다. 누가 누구한테 조언하는 건지.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던 소녀, "빨리 안 오면 두고 갈 거야!" 크게 외친다. 물론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지만.
그는 미하엘의 답변을 차근차근 복기하며 정리해갔다. 특별한 주기는 아마 없으리라고. 그렇다면 시기를 맞추어 대비를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전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언제나 하늘만 보며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 모르는 편보다는 나으리라. 하지만 언젠가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건 그다지 좋지 않은데. 본연의 자리, 이물질, 태어난 곳……. 갑작스레 눈앞에 척 들이밀어진 손가락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내도록 유하게 풀어져 있던 입매가 설핏 굳는다. 고민의 길이만큼이나 머뭇거리며 번진 획 하나도 길게 늘어졌다.
[ 언젠가 되돌아가더라도── 고향을 다시 떠날 수 있을까? ]
‘고향’을 이야기하는 얼굴에 스치는 감정은, 감추지 못할 거부감과 명백한 불안이었다. 어찌해서든 멀어질 수만 있다면 그리하겠노라 단언할 것만 같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던 기색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손 안에 쥐인 낯선 물건의 감촉, 평온한 실내의 분위기,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의 존재는, 홀로 곱씹는 뇌고마저도 바래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막연하게 드리운 두려움이 조금은 덮어지는 듯했다. 그즈음 화제를 돌리려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그리해야 되겠다 생각해서였을까? 그는 지금껏 쓰인 이런저런 줄글 아래에 엉뚱한 문장을 더했다.
[ 너도 나한테 물어볼 거 없어? ]
미하엘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기까지 했고, 방금 들은 정보가 꽤 도움이 되었으니 비슷한 정도로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일까.
[ 아는 건 많이 없겠지만…… 나한테 궁금한 게 있다면. . . . ? ]
비록 지금 그의 처지엔 가진 것이나 도움 될 만한 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지만서도……. 쪼들리는 처지가 찔려서 맺음말이 애매하게 길어지다, 소심한 물음표로 끝맺는다. 마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필연이었다. 늘 지니고 다녔던 가방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이곳에 떨어지기 전부터 잃어버린 상태였던지라 무의미한 가정밖에 못 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하엘과 달리 윈터는 담담한 표정으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보았다. 당장 의문이었던 것들은 속시원히 답을 들었다. 이제는 이 세계에 조금씩 적응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윈터는 옆에서 경쾌하게 조잘거리는 미하엘과 나란히 걸으며, 정면의 허공 어딘가를 응시한 채 나지막이 운을 떼었다.
"있지. 난 이 세계가 점점 좋아지려고 해.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 "나는 날 때부터 군인이었어. 머릿속에 남은 첫 기억이 훈련병 윈터니까. 그게 인간 나이로 아홉 살쯤이었나. 아마 그 이전의 기억은 소거당했겠지. 아무튼. 일생을 인간의 편에 서서 몸 바쳐 싸워왔는데. 그 대가가 폐기처분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 "분명히 실험대 위에서 주사를 맞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여기였던 거야." ... "이제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아.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이제는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거야. 친구를 만들고, 세계를 여행하고. 나도 평범하게..."
즐거운 듯 재잘거렸던 미하엘의 말소리가 잦아든다. 네 말에 집중하는 걸지도 몰랐다. 담담하게, 그러나 못내 속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는 네 말을 듣는 동안 미하엘은 어떠한 말도,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걷던 걸음을 좀 더 늦췄을 뿐이다.
그리고,
네 말이 마침표를 맺었을 때.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거야? 네 세계를 포기할 거야?”
미하엘이 묻는다. 묻는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무표정한 것 같으면서도 안타까워 한다. 화내는 것 같으면서도 침착하다. 슬퍼하면서도 이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네가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고 나서는, 미하엘은 익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그럼 이 세계에서 헤어지는 거려나. 선택은 윈터의 몫이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미하엘은 무언가 생각하듯 제 턱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몇 초 정도 늦게 다음 반응을 보였다.
“추락자가 할 건 추락자마다 다르지. 윈터가 이곳에 남아 생활하겠다면 그렇게 하면 돼. 이건 자신한테 달린 거야. 누구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누구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누구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추락자는 저마다 가진 목표가 있으니까.”
네 경우엔 친구를 만들고 여행하고 평범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목표겠지. 그렇게 느린 걸음이었건만, 어느 순간 너와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휙 돌아선 미하엘이 너와 마주섰다.
“누구든 네 세계에 가는 건 원치 않겠다—. 나라도 다른 세계에 머무르길 바랄 것 같아.”
미하엘은 빙그레 웃었다. 고생했다거나 힘들었겠다 같은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말할 뿐이다. 네 목표가 이뤄지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