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과 똑같은, 그러나 흑백 사진처럼 빛과 색이 바랜 강산의 형상이 그를 마주 바라본다. 그것은 색을 잃었기 때문인지, 혹은 무표정한 표정 탓인지 어쩐지 쓸쓸해보인다.
강산이 조용히 망설이는 사이 빛바랜 형상이 손가락을 튕기고, 멜로디가 이어진다. 강산도 아는 가락이다. '패전전령가'. 대운동회 기간 중에 학교에서 버스킹을 할 적에, 그의 연주를 들은 어떤 귀빈께서 내려주셨던 가르침이었다.
내달리는 듯한 음색이 이어진다. 이내 그 가락에는 애환이 담긴다. 가만히 음색에 귀를 기울이려니 빛바랜 형상의 손에 쥐어진 스태프가 눈에 들어온다. 녹색 보석을 쥔 손의 형상. 음울한 지배자의 홀. 상대는 악기가 아니라 엄연히 무기인 그것을 쥔 채로 음악을 틀었다, 강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강산 또한, 그제서야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 무기를 손에 고쳐쥐면서도 자신의 가락을 맞춘다.
움직일 때를 보며 나란히 패전전령가의 효과부터 챙겨가기를 몇 초. 두 명이 동시에 움직인다. 강산이 시전한 진흙 구 형태의 마도와, 빛 바랜 강산이 시전한 흙의 창 형태의 마도가 맞부딪친다. 그러나 흙의 창은 기어이 진흙 구를 궤뚫고 나서야 무디어져 바닥에 떨어진다. 얼핏 수준이 비슷한 듯 보여도 원본 강산의 마도가 밀린 것이다. 아마도 장비의 성능 차이란 거겠지. '음울한 지배자의 홀'에는 자연 계통 마도의 위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장비 자체의 공격력 차도 있을테고. 반면 강산이 들고 있는 것은 '래빗공습대 의식떡매'로, 특별히 마도의 위력을 강화하는 별도의 효과는 없다.
"이것 참 골치아프게 되었구만."
지금이라도 무기를 바꿀까? 아니, 강산이 가진 지배자의 홀은 지금 내구도가 낮다. 잘못 처신하면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고 스태프는 스태프대로 잃을 터다. 그래서 더 골치가 아프다. 공격에만 치중해서는 저것을 이길 수 없다. 레벨이나 다른 조건은 같은데, 장비 하나 차이로 공격력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생각하되 동시에 움직여야 할 것이다. 왜냐면 만약 그가 저 빛바랜 형상이었더라면...
"역시나로군."
...상대가 자신과 능력치가 비슷하지만 공격력은 자신이 앞선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바로 지금처럼 화력으로 몰아쳐 단시간에 끝내려 할 테니까. 빛바랜 형상이 곧바로 멀티캐스팅으로 두 가지 마도를 시전한다. 하나는 자신의 음악을 '하드 로클'로 바꿔 신속 효율과 공격력을 올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지금 강산에게 날아오는 회오리 물대포다.
멀티 캐스팅은 추가로 의념을 소모하므로 그만큼 망념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평소에는, 의념을 투자해 단순히 마도 하나의 위력을 끌어올리기보다 그 의념량으로 멀티 캐스팅을 해서 두 번 때리거나, 공격에 다른 뒷공작을 곁들이는 것이 이득이 크다. 단체전이라면 틈틈히 아군을 챙기는데도 쓰였겠지. 그러니...자신이라면 섣불리 마도의 위력에 자원을 투자하기보다는 행동횟수를 늘려 활용하는 쪽으로 행동하려 할 것이리라.
그러한 계산대로, 강산은 물대포를 역분해하는 데 성공한다. 그 동시에, 빛 바랜 강산의 발 밑에서부터 자라난 나무덩굴이 빛 바랜 강산을 옭아매려 한다. 물론 상대도 순순히 걸려주진 않고 나무덩굴을 역분해해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듯 빤히 바라본다. 이 틈에 공격을 하려 했다면 바로 맞대응해왔겠지.
역시 상대도 멀티 캐스팅 있고 공격력 차이도 나는 상황에서....여태 하던 대로 대응해봐야 망념만 먹고 밀릴 뿐이겠지? 앞서 판단했듯 공격력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산이 공격하지 않고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무 덩굴 마도를 풀고 나온 상대가 강산에게도 똑같이 나무 덩굴 마도를 시전한다. 강산은 불 속성 마도로 나무덩굴을 태우려 하지만...역시 위력 차이가 나는지 불은 나무덩굴을 일부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태워 없애지는 못한다.
"역시나인가..."
이런 식으로는 이 쪽이 밀린다. 그렇다면, 너를... '랜스'에 가까운 주강산을, '서포터'인 내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난 방도가 없진 않았다. 예전이라면 무모하다 여겼겠지만...아니 지금도 무모할 방법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늘 하던 방법 그대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애초에 무기를 교체해 떡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진짜 이유도 이걸 위해서였지. 원소계 공격 마도에만 의존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강산은 과감히 자신에게 걸려있던 패전전령가의 효과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지속'의 개념을 중첩한 신속 강화 마도를 거는 동시에 새로운 연주를 시작한다. 버프가 목적이 아니라 불협화음의 마도를 쓰기 위함이다. 악기 연주의 효과를 공격 능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의 소리가 울릴 때마다 빗방울의 탄막이 흩뿌려진다. 꼭 탄 하나하나가 치명적으로 강력해야 할 필요는 없다. 성가신 화망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만 된다. 그런 점에서 불협화음도 나쁘지 않았다. 연주하는 동안 공격이 계속되니까.
상대는 탄막을 몇 대 맞고 성가시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며, 마도 역분해로 불협화음 시전을 한 번 끊어버린다. 그 직후 강산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마는.
"너는 왜 싸우는 거지?"
처음으로 혼잣말이 아니라 빛 바랜 색의 또 다른 자신을 향한 말을 해본다. 목 속성 덩굴로 상대의 방어막을 부수고 묶으려 하며.
"이기기 위해서? 아니면 단순히 나를 가로막기 위해서?"
빛 바랜 형상은 관심없으니 전투나 마저 하자는 듯, 덩굴을 역분해로 풀고 강산 쪽으로 거센 파도를 일으킨다.
강산은 겸사겸사 높은 곳에 만들어두었던 덩굴에 로프 커넥트를 걸어서, 위로 올라가 파도를 피한다,
"네가 바라는 게 정말 그런 건가? 그냥 이길 수만 있으면 좋은거야?"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러나 거친 물살 사이로 보이는 빛바랜 형상은 또, 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산을 쓰러트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것처럼, 강산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움직일 뿐이다. 그저 시련을 위한 존재인걸까. 강산이 매달려 있던 덩굴이 역분해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시린 냉기를 품은 바람이 주변의 물을 얼려나간다...아니 그런 듯 보였다. 한 순간 이 공간 전체를 얼려버릴 듯하던 냉기가 일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얼어붙지 않은 수 속성 마도의 흔적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강산의 시야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멈칫하던 상대가 다시 주먹을 쥐는 것이 보인다. 설마 그 레벨 그 숙련도로 멀쩡하게 해내던 마도 시전이 갑자기 잘 안되는 건 아닐테고, 망념이 찬 것을 느껴 급히 시전하려던 마도의 규모를 줄인 것일테지. 강산은 옅게 웃으며 자세를 잡고 바닥에 착지한다. 강산의 노림수대로다.
저 빛바랜 형상이 사용하는, 멀티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공격 위주로 움직이는 방식은 편리하고 강력하다. 또 무기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렇기에...원본 강산도 저 '음울한 지배자의 홀'을 사용했을 때...그리고 파티에 다른 딜러가 없을 때 종종 사용했던 전투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방식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멀티 캐스팅을 자주 사용하다보면 그만큼 전투 중 망념이 빠르게 차기 때문에, 전투가 지속될수록 사용할 수 있는 패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강산이 특별반의 다른 인원들과 교류하던 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혼자서만 수련했더라면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산의 전략은, 마도 역분해나 엘 데모르 같이 망념 많이 먹을 만할 행동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체력과 의념 사용량을 아끼되, 상대에게 망념이 많이 쌓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상대를 지속적으로 방해하며 버텨온 것이다.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의념을 아끼면서 상대의 공격 내지 의념 낭비를 유도하기 위한 움직임을 하며.
강산은 다시 불협화음을 시전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가려 한다. 거친 현악기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고 낙엽이, 정확히는 낙엽 형태의 탄막이 날린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구나."
빛바랜 형상 주변에 둘러지는 화염 방어막이 상대를 향했던 탄막을 태우며 받아낸다. '적룡공훈장'의 '적룡의 눈' 효과다. 그리고 상대는...그 안에서 양 손의 손가락 끝을 맞대고 대마도의 시전을 준비한다. 그 영향으로 금방이라도 비와 벼락이 떨어질 듯 묵직한 색의 먹구름과 갑갑한 습기가 천장을 덮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차오른 망념 때문에 더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눈빛에서 총기를 잃어가며 코피를 흘리는 것이, 상태가 좋지 않기는 빛바랜 강산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최후의 일격을 상정한 것이겠지.
상대를 지켜보며 약점 간파를 사용해 상대의 가슴께에 약점 결정을 생성한다. 단번에 성공한 걸 보니 여선이가 하는 걸 잘 봐둔 보람이 있군... 그렇게 생각하다가 새삼 깨닫는다.
강산이 집을 떠났을 적의 나이는 16세. 또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길 시기였다. 강산에게도 학교에서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산은 집을 떠나 무작정 배낭여행 길에 올랐다.
그 때의 강산은 세상 만사를 쉽게 포기하고 외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먼저 연락하지 않자 강산도 그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잊고 지냈다. 아마도 그들도 자신을 잊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실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강산에게 지나치게 많은 걸 기대했다 실망하는 게 싫으니까. 기껏 마음을 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거나 관계가 끊기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
홀로 떠났던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간만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강산을 지원해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특별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또, 그 곳에서 특별반 인원들을 만나 교류했기에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 중 몇명과 새로운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 쓸쓸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가겠노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기에, 강해지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친해지면서, 같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했다. 용기를 얻어 예전엔 해낼 엄두조차 못 내던 일을 해내고, 또 여정 도중에 만난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한 때는 떠나간 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괴롭고, 그 괴로움에 얽매이는 것이 두려워 그들도 또 다시 잊으려 했었다. 그러다, 강산이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랬을 때...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우빈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그 날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그가 외면했던 과거의 인연이 남긴 흔적들이었다.
그러니 결국 강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선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강산은 지금까지도 세 포지션 중에서 굳이 '서포터'를 고수하고 있으며, 랜스가 아닌 서포터의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강산은 생각했다. 역시 자신은 랜스보단 서포터 체질이라고.
-
손에 떡메 형태의 스태프를 들고 대마도를 준비하는 상대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무기를 힘껏 들어올리고는...
강산이 쏘아보낸 창 형태의 번개 속성 마도가, 강산이 상대에게 만들어둔 의념 결정에 꽃힌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시전한 번개가 강산에게 떨어진다.
두 명의 강산은 비명소리 하나 없이 마도를 맞고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시 일어나는 쪽은 본래의 강산이다. 빛바랜 쪽도 일어나려는 듯 몸을 움찔거리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진 채 움직임을 멈춘다.
"어우 짜릿하구만.....마지막에 도깨비불을 같이 시전해두길 잘 했지."
'여명의 여행자'의 효과를 써서 건강 능력치를 약간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새발의 피다. 그래서 마지막에 수를 하나 더 썼었다. 다른 마도의 흔적이 흩어질 때, 강산의 몸 주위에 깃들었던 불의 의념도 흩어져 사라진다.
지금은 특별반에 남아있지 않지만 한 때 강산과 같이 대련했던 누군가가 강산에게 제안했었다. 멀티 캐스팅을 대놓고 펑펑 쓰기보단 아껴두었다가 비장의 수로 써서 깜짝 기습하는 데 쓰면 어떻겠냐고 했던가.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강산은 피식 웃는다. 상대도 내가 멀티 캐스팅을 쓰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딱히 숨겨뒀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전에 혹시 모를 보험을 깔아두는 데 쓰는 건 좋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옛날 생각을 했더니 오늘따라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잠시 앉아서 쉬며 상념에 빠져있던 강산은, 문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