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적으로 상황극판의 규칙을 따릅니다. 2. 모니터 뒤에 사람 있음을 알고 언행에 주의하도록 합니다. 3. 무언가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때에는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도록 합니다. 4. 15금 어장으로 도가 지나친 선정적, 잔인함을 유의하여 활동합니다. 5. 활동에 있어 밝히기 어려운 질문은 웹박수를, 그 외는 캡틴에게 질문하면 성심성의껏 안내드립니다. 6. 말하지 않고 참는 것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긴 문제는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해야할 것은 말하도록 합니다. 7.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더라도 인사는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받도록 합니다. 8. 모두 현생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건강도 챙겨가며 즐기도록 합니다.
수많은 흐름을 지켜봐오던 나는 모든 것의 끝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언젠가 저런 끝이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어질것 같지 않던 그 기대가 나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다만 별로 좋은 꼴은 아닐 것이라는게 실망스러운 부분일까. 그래도 지금까지의 노고가 있었으니 참작을 해주면 좋겠지만 그들의 진면목을 봤으니 좋게 끝내주진 않겠지. 연구소 한가운데에 박제라도 해두지 않으면 다행일터다. 그래도 한결 홀가분했다. 그야 정말, 진짜, 매우 지겨웠으니까.
" ... ? "
느껴지는 것은 공기의 흐름, 그리고 저항감. 방금까지 있던 곳에서 옮겨온 것일까. 담담히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제서야 보이는 것은 푸르게 빛나는 배경에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색의 불규칙한 것들, 그리고 짙은 초록색의 끝도 없어보이는 저것은 ... 숲?
" 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빠르게 이해 되어 머릿속에서 재정립된다. 주변의 배경, 느껴지는 저항감, 시끄럽게 귓속으로 파고드는 파열음. 지금 나는 떨어지고 있다. 아니지. 단순하게 떨어진다는 말로는 지금 내 상황이 그렇게 와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좀 더 내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바꿔주도록 하겠다. 나는 "추락"하고 있다.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취향이 생각보다 더욱 더럽고 고약하다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좀 곱게 보내주면 어디 덧나나.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에 보이는 지형은 내 기억 속의 어떤 부분과도 일치하지 않았으니까. 이곳의 역사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어딘가에서 전쟁이 시작 되는 수준이니 지형지물이야 금방 변해버리곤 했지만 그것마저 기억하는 것이 주시자다. 그리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지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 반중력 생성 장치 가동! "
지금말고 전전 세계에서 개발 되었던 장치다. 역대 세계에서 가장 마법공학의 발전을 많이 이루었던 곳이라 그런지 수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고 지금 내가 사용하려는 것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떨어지는 중력을 상쇄시켜서 공중에 뜨게 만들거나 떨어지는 충격을 최소화 하는 이 장비는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편했기에 자주 애용하는 장비 중 하나였다. 동력을 공급해주는 결정은 엊그제 갈아끼웠으니 이젠 속도가 줄어들면서 곧 허공에 정지하겠 ...
" 고장났어?! "
가속도가 줄어들기는 했다. 그야 종단 속도에 도달했으니 당연한거고 이젠 일정한 속도로 땅바닥에 쳐박을 일만 남은 것이다. 분명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는데 그 사이에 고장 나다니. 그 작자들이 장난질을 쳐놓은 것인가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세계로 보내버리고 추락사 시키기. 진짜 악질 같은 행동인데 생각해보면 그러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은 쳐야하니 곧바로 모든 기억을 뒤져 허공에 뜰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발한 부양 마법은 단 하나도 되는게 없었고 단순무식한 방법이라고 나오자마자 사장된 마력을 모아서 뜨는 행위도 역시나 되질 않았다. 아 내 마지막은 낯선 세계에서 추락사인가.
" ... 진짜 상상도 못했네. "
어느샌가 시야 대부분이 숲으로 가득해졌다. 울창한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것 하나 없이 빽빽한 숲이라 어쩌면 나뭇가지에 걸려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추락하는 속도를 봐선 어림도 없는 일인듯 했다. 결국 처음 떨어질때처럼 덤덤하게 눈을 감고 떨어지는 충격만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기억으로 보면 추락해서 바로 죽는 사람보다 고통에 떨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던데. 그렇다면 머리부터 떨어져서 즉사라도 하는게 나을까. 온갖 잡생각은 충돌하는 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아플까, 아니 즉사하면 괜찮지 않을까, 왜 역사 속에서 추락사할때 어디로 떨어져야 한번에 죽는 것을 연구한 사람은 없었을까 같이 잡다한 생각만 쭉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도 곧 멈춘다. 이미 충돌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아 제발 한번에 죽게 해주세요. 생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분명 아까 떨어져서 고통에 떨며 죽어가야했는데. 죽기 직전까지의 시간은 길다는 것이 이런 말이었나. 허나 몸에 가득히 느껴지던 저항감 또한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미 떨어졌는데 고통도 못느끼고 죽어버린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 바램대로 고통 없이 즉사한 것이니 오히려 감사해야할지도 모른다.
" 하?? "
살며시 눈을 떠본다. 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주먹 하나 정도의 거리만 남은채 땅 위에 살짝 떠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약간의 착지 충격. 입에 흙이 들어가 뱉어내며 땅 위에 서본다. 흔하디 흔한 숲 속이었지만 이곳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역시 이곳은 '내가 있던 세계' 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끌려온 낯선 세계. 수백 수천번의 같은 세계를 지내온 나에겐 낯선 장소라는 것은 간만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그렇다면 일단 가야할 곳은 정해진 것이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낸 나는 한걸음을 내딛는다. 어쩌면 이것은 위대한 한걸음이 될지도.
처음에는 생생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보고 있었고, 구름이 바로 코 앞에 있었으니까.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사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날갯짓하는 시늉이라도 내어 보려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면 몸이 균형을 잡지 못 하고 빙글빙글 돈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몸이 반 바퀴 훅 뒤집혀 아래를 향하자 그제서야 빠르게 가까워지는 먼 바닥 풍경이 눈에 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은 놀랍다 못해 정신이 아뜩할 지경이다. 본능적인 공포로 반사적인 비명이 작게 새어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 이거, 나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거구나!
어떡하지, 어떡하지! 빠르게 울리는 머릿속 비상 종.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아니 꽤, 아니 많이 무섭긴 하지만 얼른 꿈에서 깨 버리면 바닥에 부딪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꿈의 마지막으로 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볼을 꼬집으라고 했었나, 온 몸에 힘을 주라고 했었나, 아니면 손가락을 반대로 꺾으라고 했었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떠오르는 몇 가지 방법들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첫 시도, 균형이 불안정해 허둥거리는 몸으로 힘겹게 뺨을 집어 본다. ...실패.
두 번째 시도, 몸을 웅크려 있는 힘껏 힘을 줘 본다. .....어쩐지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다! 허둥지둥 다시 몸을 펼쳤다. 실패!
세 번째 시도. 제법 대담하게 손가락을 꺾어 보려 했지만... 고통에 눈물만 찔끔 빼고 말았다. .......시, 실패..?!
왜, 왜왜왜, 왜 안 일어나지지? 이상하다. 이 쯤 했으면 보통 눈이 떠져야 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귀와 볼을 찢을 듯 마구 스치는 바람소리는 사라지기는 커녕 희미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그림같았던 바닥은 이제 조금 더 선명해져서, 스스로가 어디쯤 떨어지겠거니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만치 가까워졌다. 이상하다. 너무 생생하다. 겪어 본 적 없지만 분명 절벽에서 떨어지면 이럴 거라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생생하다.
아니, 애초에 꿈을 꾸고 있기는 한 걸까? 정말로?
.......어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어───...."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어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어 "...사, 사사사사─, 삿, 사, 사람 살려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에여아아아아악─, 새된 비명이 하늘을 가른다. 그러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우연히 같이 떨어지고 있을 리는 만무하지. 냅다 비명을 지르며 힘껏 버둥거린다고 추락이 멈출 리는 더욱 더 만무하고. 그 많은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무력하게 추락하는 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악몽에서 깨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어느새 죽은 뒤에도 내 영혼을 거두어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주님, 하는..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이 하는 기도로 바뀌었다. 이제 아주, 아주아주 조금 뒤면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 거야. 엄청 아프겠지! 무, 무서워! 눈을 꽉 감고, 둥글게 몸을 만다. 사사삭, 하고 나뭇잎 같은 것이 빠르게 등을 스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뚝, 하고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
.. .
아직도 떨어지고 있나?
작은 의문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 오만 생각을 했다. 사실은 방금 스친 나무가 엄청 큰 나무라 아직 바닥에 공간이 한참 남아 있었나?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떨어지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큰 나무인 거지? 주변을 살펴 보려고 슬쩍, 실눈을 뜨며 바람이 멎은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이악,"
쿵, 하고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작은 충격에 별 희한한 비명이 새고 말았다. 이제까지 봤던 광경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제 눈 앞에 놓인 것은 나무며 풀이 무성한 숲 속 광경이었다. 풀숲 사이를 뒹군 것처럼 온 몸이 먼지와 작은 가지, 나뭇잎으로 엉망이다. 얼빠진 데다 꾀죄죄하기까지 한 얼굴로 주위를 휘 둘러보면, ....아, 놀란 눈을 한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 시선에 뭐야 저거? 이상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사부작거리자 토끼는 귀를 움찔거리더니 냅다 줄행랑을 쳐 버린다. 자, 잠깐만~! 혼자 남는 건 무서워 다급하게 불러 보지만 역시 순순히 멈춰 줄 리는 없,
[ 왜? ]
"...........어,"
머, 멈췄다! 그리고, 그리고, 그 그리고,
"토, 토토, 토끼가 마마말을 해요〰〰〰〰!!"
[ 얼씨구? 먼저 말 건 건 너잖아! ]
히이이, 다시금 기겁. 바로잡았다고 생각했던 정신이 다시금 아뜩해지는 것 같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숲 안에 있고, 이번에는 토끼가 말을 하고, 아아,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일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근처 나무에 기대어 지탱하고 있으면 다시금 토끼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명확히 이상한 것을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 한 번에 일어나다니, 어쩌면 이건...
".....제, 제가 죽어서.. 처, 처처천국에 왔나요....?!"
그래, 그거면 다 설명되지 않나? 떨어져 죽어서 천국에 오고 만 거야! 이런저런 상황을 받아들이며 과부하가 온 뇌가 이상한 결론을 뽑아내고 마는 순간이었다. 비록 토끼의 시선은 이제 한심해하는 것을 넘어 질려하는 것 같았지만서도. 쉽지 않은 시작이었다.
분명 500자 이상만 쓰면 된다고 했지? 라고 생각하며 쓰기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니 거의 2000자 정도가 되어버린 건에 대하여............⚆_⚆) 새벽에 쓰는 글은 이래서 무서워요... 다들 좋은 밤 되시고! 내일도 주말이니 다들 푹 주무시고!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ˊo̴̶̷̤.̮o̴̶̷̤ˋ)
도시로 들어온 추락자들은 소문 하나를 듣습니다. “그 얘기 들었소? 누가 중앙에 침입 했다더군.” “중앙에? 간 큰 녀석이구만. 그럼 조만간 처분 이야기가 나오려나?” “아무래도 그렇겠지?” “글쎄여? 아닐 걸여?” “응?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침입자 말이에여. ■■■라고 하던데여! 그래서 지금 같은 ■■■가 있는지 찾고 있대여.” ■■■? 이들의 말은 잘 들리지만, 이 말만큼은 노이즈가 낀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어쨌든, 들려오는 소문은 이것이 다인 것 같습니다.
둥글게 웅크린 몸을 가느다랗게 펴고 솜털 한 올까지 쭈뼛 세워가며 기지개를 켠다. 활처럼 몸을 구부렸다가 용수철처럼 다시 오므라뜨리고 풀밭 위를 뒹굴다 별안간 벌떡 상반신만 일으켜 세운다. 기계시의 해석 결과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다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춤을 더듬어본다.
누웠던 자리를 다 헤집어봐도 동력선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동력선은커녕 찾으면 찾을수록 여기가 인형 공방이 아니라는 사실만 더 확실해졌다.
…… 합선을 일으킬 것만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추스른다.
하는 수 없어 만만한 나무 하나 골라 잡고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정상에서 보는 경치가 그야말로 별세계였다. 울창한 숲 너머 수평선에 맞닿고 있는 하늘이 빠질 듯이 푸르러서─ 나는 턱이 빠져버릴 뻔했다.
“뭐야 이게…”
머리가 펑 터지는 느낌을 받는다. 매 월 있는 정기 검사를 받기 위해 정비소에 입고됐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경위를 알 수 없이 여기에 드러누워 있었다.
“납치라도 당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는 소리를 믿고 말지. 날렵하게 뛰어내리고 열원 색적을 시작한다. 나 혼자서 하는 건 출고된 이후로 처음이지만 그간의 요령이 있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지적생명체의 표준 규격을 통과하는 열 에너지가 벌레처럼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근처에 대형 거주 구역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거기서 제대로 현실을 확인해 보기로 결심한다.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내디딘 첫걸음─
갑자기 현기증이 파도처럼 밀려와 끔찍한 모습으로 평형감각이 무너진다. 풀밭 위로 꼴사납게 고꾸라지고 나는 혼자서 수치심으로 흐느꼈다.
기체 이상? 동력 부족? 아니─ 아니다. 두부 안의 인공두뇌가 전에 없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갓 추락한 따끈─ 따끈한 운석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아.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뭐야─ 겨우 그거 하나 했다고 이렇게 머리가 깨질 듯이 뜨겁다고? 믿을 수 없다.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픔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 움큼 풀을 쥐어뜯으면서 처음 맛보는 고통을 견뎌내고 가까스로 동체의 균형을 회복해 낸다.
“… 공방과 연락해야 돼.”
그리고 회수 팀을 부르자.
그러려면 유무선 가리지 않고 아무튼 간에 통신망에 접속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대자연 속이라도 인간 님들의 거주 구역이라면 반드시 그럴싸한 물건이 있을 거야.
오늘 왠지 일상이 돌아갈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니까 독백과 일상의 포인트를 미리 안내할게.
일상은 10번의 핑퐁 이상해야 비타가 지급 돼. 기본 2개. 여기서 5 핑퐁을 주고받을 때마다 비타가 1개씩 늘어나. 27핑퐁을 했다면 5개의 비타가 주어지는 거지. 거기에 지금은 이벤트 기간 중이니까 추가 비타가 2개 더 주어져서 총 7개가 주어질 예정이야. 이렇게 주고받은 일상의 수는 계산해서 기록장에 일상 돌린 추락자들 이름을 적어주면 내가 반영하거나 할게.
독백은 1천자를 기준으로 계산할 거야. 1천자 미만은 1개, 1천자 이상 2천자 미만은 2개. 이런 식으로. 이 또한 이벤트 기간 중엔 추가 비타가 1개 더 주어져.
>>181 >>183 왜냐면.. 첨에 찬물에만 타서 마셨을 때 가루 많이 넣은 것 같은데 왜 이리 맹맹하지? 싶었더니... 미처 녹지 못 한 설탕이 바닥에 우르르 깔려있는 걸 보고 충격을 먹은 나머지....... 가루가 잘 녹아서 안 맹맹하고 달달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굳이굳이 물을 끓이는 게 좀 귀찮아요. (´∵)
>>186 ㅠㅋㅋㅋㅋㅋㅋㅋ크아악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오해야 오해~~~~~!! (버둥버둥버둥)
>>191 맹맹하면 설탕을 한 스푼 타면 달달해져서 맛있어집니다. ദി ᷇ᵕ ᷆ ) (당연한 소리 꿀팁처럼 말하기)
>>193-194 이 사람..... 기백이 대단한데 내가 감히 일상을 비벼도 되는 걸까..... ( Ꙭ ) 하지만 첫 일상 놓칠 수 없어 좋아 와라! 일상이다! 고고고고고 ㅋㅋㅋㅋㅋㅋ사실 저두.. 그 엄청난 설탕들을 보기 전엔 그냥 물에 안녹아? 그럼 물을 더 타. <하는 사람이었는데요... 한 번 그렇게 먹어 보니까 맛있어가지구... 한번 쯤 생각나실 때 해 보시는 것 추천드립니다...
유니폼 입은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유키의 손을 꼭 붙든다. 여성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유키는 장갑 너머로 그 온기 와닿는 것을 썩 달갑지 않게 여긴다. 대신 그럴싸한 미소 내보이며 여성을 응시한다. 입꼬리 반듯하니 올라가있지만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다. 흐리멍텅한 시선.
"별 거 아님다~ 그치만 보너스 많이 넣어주시는 건 사양하지 않을 테니까여?"
농 섞인 말에 여성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 길로 둘은 인사 주고받은 뒤 곧장 헤어졌다. 편의점 바깥으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초여름 공기가 느껴졌다. 거리의 전경도 지독하리만치 밝았다. 어두운 밤하늘과 대칭 이루듯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문득 그런 생각 한다.
쿠로가네 유키는 그저 그런 사람이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무직 프리터 생활을 이어나가는. 아니, 그가 제 양친 잃은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쿠로가네 유키는 기묘한 능력 지닌 괴물이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지 죽어버린다. 그 시작은 양친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다독여주던 보육원 교사가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제 앞에서 얼굴 희게 질리며 고통스러워했던 모습 아직도 선연하다.) 그제서야 쿠로가네 유키는 스스로가 저주받은 재능 지녔음을 알아차렸다. 비좁은 마을은 소문 쉽게 퍼지는 법이라. 한 소년의 주변에서 비정상적인 사망이 연이어 발생한 사건은, 곧 소년이 사신死神이란 이야기로 와전되었다. 모두가 그를 피하고 그를 겁냈다. 간혹 동정의 시선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억울해하거나 분노할 수 없었다. 그건 헛소문이 아니었으니까. 지긋지긋했던 보육원과 학교를 졸업한 후 쿠로가네 유키는 고향을 떠났다. 멀지 않은 도심으로 향했다. 새 삶을 살고 싶었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결코 아니다. 그저 도피하고 싶었을 뿐. 그 뒤로는 보다시피 지금. 이루고 싶은 것도, 이룰 만한 것도 없다. 언제부터였더라, 꿈이란 걸 꾸지 않게 된 건. 지금은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 뿐. 죽는 건 싫다. 제가 죽였었던 사람들처럼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는 것은 두렵다. 선량한 이들의 목숨 앗아가놓고 정작 그 당사자는 죽음 두려워하다니.
생각하다 보니 속이 자꾸 타들어간다. 유키는 품에서 담배갑 꺼내 한 개비를 꼬나문다. 싸구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깊숙히 빨아들이니 그제서야 심란한 마음 가라앉는다.
참 지랄맞은 운명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귀를 찌르는 굉음 들려온다. 무심코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 돌리니 대형 덤프트럭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눈부시게 비춰오는 라이트도, 번호판에 쓰인 문자와 숫자도, 유리창 너머 당황한 운전기사의 모습도, 선명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유키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날씨가 화창하여 아무것도 안 먹고 가만있기만 해도 동력이 회복된다. 기쁜 일이야. 행복한 일이지. 이 세계에서 손실 분량만큼 동력을 회복하려면 많이 먹거나 냇물에 빠져 있거나 동체에 수고를 끼치는 방식 밖에 없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마음 편히 가만히 농땡이를 피우기만 해도 됐다. 얼마나 신나는 일이야. 이제까지 낯선 세계에서 다른 상식에 시달리며 아득바득 버텨온 시간이 머나먼 과거만 같다. 모든 고난과 고통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래서 다들 열심히 노동을 하는 거구나. 세상에 칭찬받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햇살이 인조 단백질 피부를 쓰다듬어 몸이 기분 좋은 따뜻함에 감싸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절전 모드로 진입할 뻔했다.
이런데─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 있자니 멀리서 휴양지의 정적을 깨부수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악기연주자인가─
음악의 소양이 부족한 나는 저 공기 찢는 소리가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 좋을 대로 악기를 휘휘─ 불어대기만 해도 돈이 벌리다니 참 속 편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시 인류의 생활 방식에 토를 달 생각은 아니지만─ 다른 원시인들은 어째서 저런 녀석을 가만 내버려 두는 거지. 내 눈에 연주자라는 직업은 남들이 구슬땀 흘려가며 열심히 일할 때 혼자서만 편하게 돈을 버는 일로 밖에 보이지 않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세계의 법이 어떤지는 몰라도, 소음 공해는 민사상 잘못에 속하지?”
… 좋아. 응징할까. 벽돌 바닥에 붙어 있던 엉덩이를 일으키고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턴다. 내 휴식을 방해하다니, 용서 못할 중죄니까.
아무래도 혼란스런 마음이 영 가라앉질 않아서 반쯤 도망치다시피 상권에서 벗어났다. 단순히 기억이 없어서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생경하다. 그치만 동물 귀랑 꼬리같은 걸 달고있는 사람이나, 머리가 있을 자리에 이상한 물건같은 게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 이상하지 않나요?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건 역시 제가 다, 다, 다, 다른 세계 사람이라서 그런 건가요?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맘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 뒤집어 쓴 로브를 양손으로 꾹 여민 채 발끝만 보고 걸었다. 어쨌든 지금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건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목 사이사이를 시궁쥐처럼 누볐다. 좁은 골목에서 몇 번 낯선 사람들 곁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존재감이 옅었던 게 다행인지 별 일은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지금 지나는 길이 지금껏 지나왔던 길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을 즈음에, 골목을 빠져나왔다. 부지런히 걸어 온 탓인지 조금.. 덥다. 하지만 차마 로브를 벗을 용기는 나지 않아서, 대신 여기저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마침내 발길이 멈춘 곳은 작은 광장 근처 거리다. 사람이 적진 않으나, 그렇다고 붐비지도 않는다. 비록 주위를 둘러 보다가 자신보다 머리 두세 개는 더 클 것 같은 거구의 인물과 눈이 마주쳐 놀라기는 했으나, 이 정도라면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여기가 이렇다면 다른 곳도 이럴 테니,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리 한 켠에서 흘러나오는 피리 선율을 듣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서, 근처에 있던 계단에 옹송그려 조용히 연주하는 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했다. 내 기억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혼자 다른 세계에서 온 걸까? 아무것도 없는데 당장 이 세계에선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
닥쳐오는 막막함에 울보 아니랄까 봐 또 눈시울이 시큰하다. 그러나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서도 또 살긴 해야겠는지, 근처 가게에라도 냅다 들어가서 일을 시켜 달라고 해 볼까, 생각하던 찰나에.... 누군가 오나? 고개를 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달리고 있다. 장애물 경기처럼 길가에 보이는 좌판─ 아이─ 어른─ 나무입간판─ 노인─ 다 피하고 뛰어넘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저 녀석들이랑 마주치다니!
“시비 좀 붙었기로서니 원한이 하루 넘게 이어져도 돼!?”
한 녀석 팔을 부러뜨린 게 나빴나 보다.
나는 아무래도 아주 찍혀버린 모양이었다. 당장 보이는 추적자만 세 명─ 길이 나빠서 속도를 못 낸다지만 Hi의 각력에 따라붙다니─ 저 원시인들도 얕볼 게 못 됐다. 어떻게든 따돌리고 싶은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으면─ 또 낯선 장소로 빠져나왔다. 모르는 길 위에 모르는 사람들 뿐. 피리 소리가 귀를 괴롭히고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 나는 묘안을 떠올렸다.
“거기 원시인! 그 겉옷 좀 빌려줘!”
혼자 호젓하게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 사람이 뒤집어쓰고 있는 쓰개를 탐낸다. 저 놈들 코가 아무리 예민해봤자 섞인 냄새까지 구분해 내겠어.
평화로운 피리소리에 희미하게 잡음이 낀다. 저 멀리 어디선가 소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누군가 싸우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저어-쪽 어딘가, 목을 쭉 빼서 살펴보아도 잘 보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진짜로 어쩌면 좋지? 역시 여관이나 식당같은 곳 문을 두드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다른 일? 바느질이나 밭일 같은 거라도...
하던 생각에 마저 집중하려고 그렁거리던 눈물을 주먹으로 문질러 닦고 있자니 이제는 저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작은 비명이나, 거기 서라, 이 자식! 감히 내 팔을! 하는, 분노에 찬 외침같은 것도 같이 겹쳐 들린다. 소매치기나 강도라도 나타난 걸까? 이제는 소리가 정확히 어느 방향에서 들리는 지 판별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거기 원시인! 그 겉옷 좀 빌려줘!"
이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 외친다. 저 멀리서 험상궂은 사람들이 몇 명 달려오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지금껏 쫓기고 있는 상대는... 이 조그마한 애? 아마 자기보다 작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소년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 뒤의 장정 세 명에게 쫓기고 있는 건지, 갑자기 나타나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무엇보다도... 얘도 설마, 다른 세계에서 온 게 아닐까? 하는 이상한 예감에. 이런저런 상황으로 겁이 덜컥 나기도 하고, 낯선 사람에게 대뜸 그런 소리를 들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지기도 해서, 꽁꽁 언 것처럼 계단에 앉은 그대로 에, 엥? 엥? 얼빠진 소리만 반복했다. 아니, 그런데... 지금 뭐라고?
.... ...
........?!
"네, 네네, 네네네네네....???!! 아아, 아, 안 되는 데요....~~!!!!?"
혹여나 빼앗길 새라 없는 힘을 쥐어짜 뒤집어 쓴 로브를 꽉 붙잡긴 했지만, 니아는 로브를.. .dice 1 2. = 2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외친다. 이러는 동안에도 추적자들은 그들의 삶과는 정반대로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애간장이 타는 상황. 빨리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치지 않으면 따라 잡히는데─ 이 원시인─ 절대로 주려고 하지 않아!
강제로라도 빼앗을 수 있으면 좋겠다만─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 힘을 제대로 실을 수가 없다. 변상할 능력도 없는데 그러다간 나만 곤란해질 뿐이야. 아니─ 잊지 말자. 애초에 나의 윤리 회로가 도둑질처럼 천박한 범죄를 용납할 리도 없거니와 인류와 함부로 적대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있었다.
“그러니까 돌려준다는데!”
사면초가!
손가락만 걸친 수준으로 겉옷을 붙들고 억지를 밀어붙인다.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 목적도 잊고 쓸데없이 겉옷에만 집착하게 됐다. 상황이 고착되자 추적자들은 금세 나를 찾아냈고 광장 밖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통제하고 막아서기 시작했다. 광장에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은 소란의 예감에 일찌감치 자리를 피하는데 나와 이 원시인만은 그러지 못하고 악연의 함정 속에 갇히고 만다.
말을 더듬대는 것 치고는 묘하게 하고싶은 소린 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점차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당사자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뒷사정같은 것들에 대해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헉, 혹시 너무너무 배고픈 가족을 위해 도둑질을 했다거나,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서 빵을 훔쳤다거나, 그, 그그그것도 아니면... 갖은 망상들만 가득 품은 채 도저히 어찌할 바 몰라 천 하나를 서로 맞붙들고선 한참을 대치하는데.
무슨 일이야? 뭔 일이래?
주변을 둘러싸고 수군거리던 인파가 내쫓기듯이 광장에서 떠나갔음을 문득 알아차린 건 그보다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피리 불던 악사도, 음악을 듣고 있던 나머지 사람도 없고, 소년의 뒤를 쫓던 험상궃은 사람들 몇만 주위를 에워싸듯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 마치 자신이 소년과 한 패거리라도 되는 것 마냥,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 어딘가에서 붉은 등이 팟 들어오는 것 같은. 뭐, 뭐, 뭐지?
"...이, 이이, 이 사람들.... 뭐, 뭐에요?..."
조심스레 소년에게 물었다. 어쨌든 잘못한 것은 없지만, 사내들의 기백에 눌려 겁 먹은 나머지... 천을 쥐고 있던 손 힘이 조금 풀렸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사람들이 추락자들을 보며 소곤거리지만, 특별히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흥미로운 눈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선뜻 다가와 말을 붙이는 이들은 없는 와중에, 어린 외양을 한 아이들 여럿이 다가와 추락자의 근처에 기웃거립니다. 이윽고 아이 중 한 명이 추락자에게 곱게 포장 된 눈깔 사탕을 건넵니다. 추락자, 눈깔 사탕을 받아줄까요?
6월 5일 23시 59분까지 해당 레스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글자수 제한은 없으며 그냥 받아준다, 받지 않는다고만 적어도 괜찮습니다.
일방적인 피해자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한다.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원통해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다 이 원시인 때문에 망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방방 뛴다. 어느덧 추적자의 수는 머릿수를 불려 다섯으로 늘어나 있었고 도망치기 곤란하게 모든 통로를 가로막았다. 거기다 저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조악한 수준의 흉기로 무장하고 있어─ 나의 고민은 더욱더 깊어졌다.
뒤늦게 원시인의 저항력이 약해졌지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원시인의 옷소매를 놓아버렸다.
“… 나도 몰라.”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금방 탄로 났다.
나를 벼르던 한 녀석이 먼저 목청을 높여왔기 때문이었다.
“이 망할 꼬맹이가! 내 팔! 내 팔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이렇게 반으로 똑 부러뜨렸냐고! 설명해 망할 자식아!”
개과의 포유동물처럼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인상적인 원시인이었다. 저기 보이는 저 원시인은 이 세계에 널리고 널린 유사 인류 가운데서도 특히나 멍청하게 생겼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덤터기를 씌워도 유분수지. 너─ 무 억울한 나머지 나는 방금까지 아무 관계도 없는 외부인에게 얽히고설킨 악연의 책임을 억지로 나눴던 것도 잊고 소리쳤다.
“웃기지 마! 당신이 약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 나는 그냥 손목을 잡은 거뿐인데,
당신이 칼슘 부족이라서 그렇게 똑 부러진 거잖아!!”
크와앙. 짖는 소리에 짖는 소리로 응수한다. 그러자 상대방은 혈관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더니. 저 원시인의 수준을 알 만했다. 나는 콧방귀 뀌고 팔짱을 꼈다.
“너, 너, 너, 너야말로 웃기지 마! 내 뼈가 공갈빵도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쉽게 부러지는 게 말이 돼!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아리고도, 고통스럽고도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말고. 그 누군들 그런 일이라면 기억 못하겠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한다. 단말마였던 줄로만 알았던 그 울림은 단말마가 아니었던 것까지. 그 이전에 무얼 하였으며 어쩌다가 목을 뚫리게 되었는지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도 끔찍했었다. 그 순간만. 비록 그 순간 뿐이었으나 아픔은 아픔이다. 갑자기 습격당해 희번득거리는 그 눈에 잠식 당하고 이빨에 목을 뚫리게 될 줄은.
그러나 그는 염원이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것. 어떻게든 강해져서 죽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기를. 분명히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웃었다.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인간이 아니게 되었더라도 끝끝내 염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흡혈귀는 특별한 상황 이외에 죽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이 순간을 끔찍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예상치 않는다. 되레 기쁜 일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은 조금 서운하려나.
어찌 되었든 그는 흡혈귀가 되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몸을 사리던 시절과는 다르게 당당하고도 힘차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해야 할 일이 반즈음 정해져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의구심을 품어 왔던 것. 어느 순간부터 인류에 여러 종족이 들어섰는가. 그 현상을 알아보기 위함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을 제외하고 난생 처음으로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제부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찾아볼 것이다.
전문가도 찾아가 보고. 수소문 해서 다른 종족의 나이 든 이도 찾아가 보자. 고서도 찾아보고. 예전에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그러나 그 순간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갑작스럽게 이동하게 될 줄은. 생판 처음 보는 곳에 떨어져-이걸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어느 도시로 들어가게 될 줄은.
다짜고짜 나타나 옷을 가져가려 들더니만, 이제는 자신 때문이라며 방방 뛰기까지!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 자기보다 손가락 두어 마디는 더 작을 것 같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제대로 된 반문은 꺼내지도 못한 채 내가 뭘 했는데! 소년이 놓은 옷자락을 허겁지겁 그러모으며 억울한 외침만을 늘어놓는다. 아니, 아무리 아이들은 누구나 제멋대로인 면이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 이 망할 꼬맹이가! 내 팔! 내 팔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이렇게 반으로 똑 부러뜨렸냐고! 설명해 망할 자식아!
".....흐?"
뭐, 뭐라고, 팔을 어떻게 해? ...똑? 놀란 마음에 말 대신 이상한 숨소리가 샌다. 혹여 어쩌다 툭 부딪힌 걸 가지고 과장한 건 아닐까 싶어 황급한 눈길로 남자의 팔을 살피지만.. 확실히 천조각 따위로 둘둘 감아 고정해놓은 것이 가벼운 상처 정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 그래도 극적인 연출을 위해 일부러 분장한 걸수도 있고, 아니면,
"...으아?!"
..라고 필사적으로 뇌의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이 쪽에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을 한다! 사내를 향했던 고개가 곧장 훽 돌아 소년을 향하더니, 둘 사이를 오가며 몇 번 반복한다. 이, 이, 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손목을 잡은 것만으로 파, 파, 팔을,
......그러면 방금은,
제 옷소매를 쥐었던 소년의 손을 떠올린다. 이미 안색은 저 멀리서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다. 순전히 우연이었는지, 소년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금 전 신체부위를 붙잡히지 않은 것이 어쩌면 천운일지도 모른다.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주르륵 흐른다. 내내, 내, 내, 내 손이 바바방금, 어어어어쩌면 바바바바방금, 몸을 움츠리고 시퍼런 얼굴로 울먹울먹 중얼대는 꼴이 제법 겁을 먹은 것 같지. 안 되겠어,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기절할 것 같아, 둘이 싸우는 사이에 얼른 자리를 뜨면.....
뜨면..
.......뜨면,
".............네〰〰〰〰〰〰??!?!!?"
너너너너너, 너희들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단단히 말려들어 버렸다! 패닉! 비상! 죽음 한 발짝 전! 반사적으로 와아악─ 오열과 함께 죄송해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답레랑 >>260 답과 함께 갱신합니다~! 다들... 내일은 또 연휴네요! 푹 쉬시구... 저는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해외에 나가게 될 예정이라 잠깐 갱신이 뜸해질 것 같네요.. (;´・`)> 레인주의 답레는 밤에 숙소에 돌아왔을 때 확인해서 최대한 달아드리도록 노력하겠읍니다....
>>300 ㅋㅋㅋㅋㅋㅋㅋ 긍정에너지 최고야! >>301 >>302 늙은이 듀오야 ... 언제 허리를 두드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라클레시아는 연구자 느낌이 강하니까 그런 능력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보고싶지 않은 기억의 편린이라도 살짝 건드리는 순간 몰려오는 파도가 그리 좋다곤 할 수 없겠지.
>>315 넹 평범하게 장명종입니다. 아무래도 라크 씨의 귀를 보고 아는 체를 할 것 같습니다. 시트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윈터와 같은 아인은 평범한 수인과 달리 생물학적 요인으로 개체 수가 매우 적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번식이 어렵고, 그 아인의 시조가 어떻게 되는지 또한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면 영생을 산다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320 ㅋㅋㅋㅋㅋ 오래 살았는데 10대라고 하기엔 내 양심이 가만 있질 못했어 ... 좀 중성적인 느낌을 내려고 시도했지! 근데 좀 더 여자여자스럽게 그려지긴 했어 ... 실제론 남자 모습에 좀 더 가깝긴해! 윈터도 귀엽게 생겼어!! 보자마자 잔뜩 쓰담쓰담 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 뭐야
" 그래도 다른 분들께 방해가 되는 소란은 삼가주세요. " " 자, 어디보자. 첫 손님이니 첫 장부터 보도록 하지요. "
남자가 흥얼거리듯이 말하고, 다른 책을 꺼내 표지를 넘긴다.
[그는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아래서 내려다본 세상은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었죠.]
음? 이게 처음이 맞냐구요? 음... 완전히 처음은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24번째 챕터에요. 그런데 왜 첫 장이라고 했냐구요? 그야... 그의 진정한 인생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자, 자. 시간은 많아요. 언젠가 그의 첫 챕터부터 읽을 수 있을거에요.
네? 복사본이라도 달라구요? 집에서 읽게? 에이, 안돼요. 복사본은 다른 사람이 먹어버렸어요. 너무 많은 글자가 먹혀버려서 이젠 그냥 낙서라고 봐도 좋을 정도인걸요.
그러니까... 일단은 여기부터 시작합시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 아, 오늘 한 챕터가 넘어가겠군. ']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꽁지 빠져라 열심히 도망쳐 다닌 거─ 이런 데서 윤리 평가 점수를 깎아먹기 싫었을 뿐이다. 좀 더 멋지게 말하자면─ 쓸데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뭐 대단한 상대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남들 협박해 돈 벌어먹고 사는 양아치 놈들을 상대로 주먹까지 써. 코웃음을 치고 덤터기를 쓴 「원시인」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저런 녀석들 한 트럭으로 덤벼와도 무섭지 않은데─ 이 원시인은 괜히 겁부터 먹고 있다. 흥── 나는 절대로 저러지 않아.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우고 기관차처럼 달려드는 거한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다.
단지 그것만으로─ 거한의 육체가 저 멀리 날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가치가 바로 서는 것이 느껴진다. 아아─ 시선이 느껴져, 어리석은 것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몸께서는 애초부터 너희와는 서는 대지가 다르다는 걸─ 모르고 덤비니까 이렇게 되는 거잖아!
”흥!”
선걸음에 모두 해치워주겠어.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삐─── ─── ─
별안간 경고음이 울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몰랐는데 내 목의 발성 장치에서 나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손으로 목을 덮어─ 소리를 막아보려고 하는데 이상한 팝업창이 잔뜩 나타나서 시야를 뒤덮었다.
눈꺼풀이 무겁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입에 무언가 물려있다. 시꺼먼 천장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나는 온몸을 구속당한 채 연구소 지하로 실려가고 있다. 소문만이 무성하던 비밀 장소는 실존했다. 겉으로는 인류 발전과 번영을 위한 인도적인 연구를 표방하며 깨끗한 척은 다 하면서 그 뒤로는 온갖 비인륜적인 실험을 벌여대는 곳. 기억엔 없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오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오며 똑똑히 보았다. 기분 더러운 녹색 액체로 가득한 커다란 실험관 안에 들어있는 선임의 모습을. 그녀는 수년 전에 승격자가 되었다. 중정에서는 종종 높으신 의원님들의 투표로 선별된 집행자를 진급시킨다. 높으신 분들과 같은 위치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얼굴조차 못 볼 정도로 바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꼴이 되어있었다. 승격자가 된다는 것이, 집행자의 말로가 이런 것이구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정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마왕을 만들어낼 것이고, 시민들을 선동해 권력을 유지할 것이다. 혹여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까 싶으면 영웅화를 시킨 뒤에 조용히 처분하는 것이다. 나 또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에 승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얼 위해 싸워왔던 걸까. 허탈함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실험대 위에 올려졌다. 쨍하게 내리쏘는 불빛에 눈알이 시리다. 목덜미에 차가운 느낌이 들고, 이내 기분 나쁜 액체가 몸속에 조금씩 흘러든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나는 죽어서도 편할 수 없겠구나. 이제 조금 쉬고 싶었다. 내장이 들뜨는 감각에 눈이 뜨였다. 흐렸던 시야가 점점 거두어지면 새파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공에서 내려본 대지는 커다란 도화지에 수채화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입체감이 없다. 그것은 아주, 아주 느리게 가까워온다. 내가 떨어진다기보다는 대지가 다가온다는 느낌에 가깝다. 가늘게 호를 그리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더없이 와닿는다. 지구평평설을 주장하는 미치광이들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다.
처음으로 강습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가 떠오른다. 귀청을 울리는 수송기 엔진 소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쉴 새 없이 떨려대는 진동에 몸이 떨리는 것인지 아닌지도 헷갈려. 눅눅하고 퀴퀴한 기내는 극심한 긴장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긴장 풀라며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선임의 얼굴을.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그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허공에 몸을 던졌을 땐, 허무하게도 훈련에서만큼의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 중이라는 것도 잊고서 잠시 마음이 평온해지기까지 했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내려본 대지의 모습은. 물론, 너무 겁먹은 탓에 낙하산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낙하산은커녕 양 팔이 구속복에 억압된 채 발목엔 커다란 쇠공을 주렁주렁 매달고 머리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370 네. 윈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실험실에서 정신을 잃었고, 희한한 꿈을 꾸었는데 추락 이후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약물 때문이거나 가상현실 등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 같아요. 그래도 추락 이후 바람을 느끼고 흙냄새를 맡고서 정말 현실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이겠네요. 독백을 좀 더 일찍 썼어야 했는데. 조금 애매한 감이 있으니 캡틴과의 일상은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할까요?
1. 「단골식당의 메뉴가 맛이 확 없어졌을 때의 반응은?」 > 갑자기 맛이 없어진다는건 음식을 만들던 누군가가 바뀌었다는거고 ...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테니 아쉽지만 다음부턴 가지 않겠죠? 그렇다고 제가 부엌에 들어가서 주방장 나와!! 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2. 「소원을 포기하는 걸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 제 소원이 누군가의 구원과 맞바뀔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죠. 허나 그 정도로 가치가 있진 않답니다. 어때요, 당신도 한번 생각해보시겠어요?
3. 「귀하게 여기던 것을 타인이 멋모르고 버려버렸다면?」 > ... (보기 힘든 화난 표정이 되었다가 표정을 관리한다.) 가급적이면 제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당캐질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1079210 라클레시아 테시어: 246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면 그 첫 문장은? > 세계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세계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과거와 미래를 한번에 알 수 있게 된 것일까.
029 단 것을 잘 먹나요? > 매우 좋아하지요! 따뜻하고 달달한거라면 더 좋습니다 (엄지척)
040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함 > 별로 ... 말하고 싶지 않군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까요. (괴로운 표정이다.)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646172
귓전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매섭다.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갑작스러운 현상, 전조 없는 변화에 그가 망연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세찬 바람은 살갗을 할퀼 듯 몰아치고, 몸 안의 것들이 진탕 뒤흔들리며 위로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구태여 몸을 뒤집어 아래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중인 모양이라고. 끝도 모를 속도감이 등 뒤에 도사리고 있건만, 도무지 바로 설 열의 없는 정신은 혼몽하기 그지없다. 감겨 가는 느릿한 이성의 한편에서 그가 간신히 떠올렸다. 내가 뛰어내리기라도 했던가? 아니, 분명 직전까지 있었던 곳은 높은 지형이 아니었는데…… 기억이란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짧은 회상마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모르는 사이 또 무얼 잊은 걸지도 모르지. 섬뜩한 추락의 감각에 몸을 맡긴 채 그는 눈앞에 제 두 손을 펼쳐 보았다. 검붉은 흉과 찢어진 피부, 여전하게도 헐어 빠진 몸 그대로였다. 그사이 죽지도 않았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의문만 잇따르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썩어나도록 많고 사유는 저주스러울 만큼 과다하리니─ 고심은 완전히 지상에 내리꽂히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마침내 떨어져 부스러지기 전까지는 이 뜻없는 무상을 만끽하기로 했다.
어중되게 살아남아 널브러진 사지를 끌고 다니는 것보다야 깔끔한 죽음이 낫다. 이만한 높이라면 편히 즉사할 수 있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익숙한 충격이 덮쳐들기를 기다리며,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 ……. …….
……왜 땅에 닿지 않지?
어느덧 추락감마저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을 의식하자마자 얄궂게도 툭, 누군가 들고 있던 물건을 살살 던지기라도 하듯 허공에서 풀려났다. 동시에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난데없는 추락에 대한 의아함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땅을 등진 채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던 몸이 이제는 땅 위에서 하늘을 우러렀다. 연재煙滓 빛깔 새까만 두 눈에 상이 비쳤다. 청명한 하늘과 온화하고 따사롭기만 한 일광. 때마침 불어 오는 바람은 선선하고, 일제히 가지를 흔드는 나무들의 푸르른 잎사귀가…….
어느 것 하나 빠짐 없이, 전부, 아찔할 정도로 비현실적이게만 느껴져서.
작게 벌어진 잇새로 미미한 들숨 깃들었다. 금방이라도 탄사를 뱉어낼 듯 마른 입술 달싹여 보지만, 침묵에 익은 목은 울리는 법을 잊은 지 오래다.
“…….” 이럴 리가 없는데. 정말, 이럴 리는……. 빈 숨결의 자리에 차마 형언치 못할 감정들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는 오래도록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455 그러면 인사 한 걸로 해버려도 되겠지! 반가워 영주! 영주라고 하니까 어쩐지 높은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기분이 드네. 시트는 잘 봤어! 불사신이 단순히 찔러도 안 죽고 태워도 안 죽는 게 아니라 좀 더 초월적인 느낌이더라, 코스믹 호러나 아우터 장르에 나올 법한 캐릭터라 취향 저격 당했어.
>>454 SF 캐릭터는 나도 이번에 처음 만들어봤네, 생소해서 아직 손에 잘 익지 않지만 열심히 해보고 있습니다! 귀엽게 봐줘서 고마워.
>>457 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트 낼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의문의 영주님행이 됐네요! 초월적... 코스믹... 아니 이거 오타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잖아요(´°̥̥̥̥ω°̥̥̥̥`) 저 감동해서 우럿슴... 저도 레인이의 SF적 어필이 인상깊었어요! 간간이 엿보이는 H I 세계관의 사회상도 흥미롭고... 무엇보다도 밉지는 않은데 귀여운 얄미움이 아주 절묘해서 귀여운데 꿀밤 먹여주고 싶고...(?)
>>466 음. 아까 로시주가 올린 독백을 기준으로 해볼게. >>441의 독백은 1265자야. 그럼 1000자 이상 2000자 미만이니까 포인트 시트에는 2개의 포인트(비타)를 기입하면 돼. 미션을 쓴다면 이번 미션은 포인트 2개짜리니까 2개로 기입하면 되고. 지금은 상점을 못쓰니까 계속 누적해서 기입해주면 돼.
세계의 첫번째 주시자, 라클레시아 테시어는 단 한번도 깊은 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신들에게 선물 받았다. 기억이란 바닷가의 모래사장과 같아서 밀려온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들처럼 조금씩 침잠되어 가는 법이다. 허나 그의 기억은 바다는 존재하지않는 메마른 사막과도 같아서 가라앉은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 죽겠네요. "
그가 있는 연구소는 외형만 연구소일뿐 사실 주시자들이 세계를 지켜보는 장소였다. 세계의 멸망에 대한 인과는 전혀 적용 받지 않는 그들만을 위한 공간. 그곳에도 밤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때만큼은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라클레시아는 휴식때마다 수면을 취하고 있었지만 수시로 깨어나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잠깐 앉아있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대륙 최북단의 침엽수림. 그가 주시자가 되고나선 한동안 그의 가족들을 자주 바라보았다. 세계의 곳곳을 바라보다가도 한번씩 가족들을 지켜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비록 그들의 기억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사실 그는 본래 연구원이었던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억력에 만족했다. 한번 배웠던 것, 읽었던 것을 전부 잊어버리지 않을수 있으니까. 잊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세하게 생각해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세계는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문명은 마법공학이라는 것을 발전 시켜나갔다. 마력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여 물리법칙을 어느 정도 무시까지 할 수 있는 그런 학문. 허나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어딘가에 저장하는 것이 필수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광석이 바로 매저리(Maggery)였다. 광석이라는 말에서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채굴할 수 있는 광산은 당연하게 한정적이었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다툼은 대부분 전쟁이라는 결과로 나아갔다. 허나 기술의 발전은 대부분 군사 기술이 주도하는 법이다. 전쟁이 벌어질때마다 그 규모는 커져만 갔고 그 여파가 그의 고향까지 닿았다.
열핵무기가 그가 살았던 침엽수림 근처로 떨어졌다. 모든 것은 녹아 없어지고 남아있는 것들은 금방 불에 타 없어졌다. 아마 북쪽에 숨겨두었던 연구소를 노린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처음 목도한 죽음이었다. 그렇게 세계는 전쟁의 화마에 소멸했다.
북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고 만년설이 순식간에 녹아 폭포처럼 쏟아졌다. 산발적인 국지전이 불러온 전 세계적인 기후이상은 그가 살던 침엽수림을 강타했다. 유사 이래 존재하지 않았던 강력한 태풍, 바다가 높아짐에 따라 섬이 잠기고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들은, 그의 연인은 그렇게 죽어갔다.
어느 세계에선 갑자기 들이닥친 군부대가 그들을 학살했다. 어느 세계에선 침엽수림은 존재조차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세계에선 엘프들이 모두 학살 당했다. 그나마 몇몇의 세계에선 행복하게 살았던 경우도 있었다. 라클레시아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아니, 기억해야만 했다. 단 하나도 잊을 수 없었으니까.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외침을, 세계가 죽어가는 모든 광경을. 그렇게 잠에서 깼다.
" 괜찮으신가요? "
미간을 누른채 가만히 앉아있던 그의 앞에서 한 명의 수인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주시자가 되고나서 한참 뒤에 들어온 두번째 주시자였다. 마침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에 슬슬 힘이 부치고 있을쯤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연구소에서 무언가 일이 생겼을때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인문학이라는 분야만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침 원래 연구하던 분야도 그쪽이었다고 했었다.
" 괜찮아요. 전쟁의 양상은 어떻죠? "
밤새 이어진 전쟁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고 있었다. 승자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누가 이기냐에 따라 멸망의 순간이 뒤로 미뤄질수도 있었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손에 든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고 일어난 자리 옆에 놓여진 수첩에는 휘갈겨진 글씨로 무언가 쓰여있었다.
관문을 지나 도시에 들어서니 책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평소에 책을 자주 읽지는 않았지만―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당히 구시대적인 디자인의 건축물들. 일직선으로 넓게 이어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현실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스쳐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쇠를 탕탕 두드리는 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 이곳의 분위기는 어릴 적에 보았던 마켓의 것을 닮았다.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너무나 생경하고 생생해서 작금의 상황이 더욱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저기..."
마켓 초입에 가만히 서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조심히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그는 딱 일 초간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허공에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구속복 소매가 아래로 축 늘어져있다. 아무리 꿈이래도 이런 꼴을 하고서 평범한 대우를 바라긴 어렵겠지 싶다. 그제야 드는 섬뜩한 위화감에 어깨가 떨려왔다. 여태 스쳐간 수많은 행인들 중에서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관문을 넘어올 때의 위병들처럼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젠장."
한숨을 쉬며 마켓 너머의 도시 중앙을 올려보려 했다. 이유 없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꿈인데도 괜히 피로감이 밀려오는 듯해, 인적 드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문에 들어서서 오른쪽, 그러니까 북쪽을 향해 성벽을 따라 죽 걸었다. 돌벽에 손바닥을 대고 있으면 차갑고 거친 감촉이 선명하게 팔을 타고 올라온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엘프가 나무그늘에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와서는 처음 보는 낯설지 않은 인종이다. 그들은 대부분 대륙을 떠나갔기에 실제로도 보기 드문 인종이기도 했고 말이다. 무심결에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도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일 초가 지났다. 내가 그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그도 나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려보려 했다.
밖에서 보았을때부터 예상했지만 내부도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엄청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다양한 종족이 이렇게 한 도시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풍경 자체가 나에겐 이질적이었지만 투쟁으로 점철된 사회보단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더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면 한두명쯤 이방인이 섞인다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 도시로 진입할때의 위병들은 내가 통과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 중앙으론 들어가지 못하는것 같지만. "
보통 도시의 중앙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도시에 들어와선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향했다. 허나 가는 길에 들려온 중앙으로 가는 통행이 막혔다는 소식에 미련없이 몸을 돌려서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이런 도시의 중앙엔 분명 도시를 컨트롤하는 조직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오는 길을 막았다는 것은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원래 좋은 일엔 어떻게든 끼고 좋지 않은 일엔 어떻게든 몸을 빼라고 했었다. 괜히 휘말리는 것은 가뜩이나 초행인 이 도시에서 절대 사절이다.
" 여기가 도시의 끝인가. "
외곽으로 나오다보니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에 도착했다. 이만하게 거대한 도시를 지키려면 성벽의 높이도 상당해야할터. 실제로 성벽의 망루는 까마득하게 높이에 위치해있는듯 했다. 성벽은 방어하기에 아주 중요한 시설이니 아무나 출입 시켜주진 않겠지. 그래도 저기 올라서서 도시를 볼 수 있다면 한눈에 지형을 알 수 있을텐데 그것은 좀 아쉬웠다.
조금 쉬었다가 다른 곳으로 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지나간다. 원래 살았던 침엽수림은 바람 한줄기마다 전부 칼바람이라 이런식으로 바람을 쐰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 명의 수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인이야 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족이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구속복이라고 부르던가, 자신이 일하던 연구소에서도 몇번 본 적이 있었다.
" 안녕하세요? "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목을 확 끌어당기는 분홍빛의 눈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실례겠지. 살짝 시선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해보이는데 쫑긋 선 귀가 있어서 신장의 한계는 나보다 더 위에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흔하지 않은 복장을 보건데 ... 아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 혹시 위에서 떨어지셨나요? "
푸른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고공낙하를 하는 체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동작 시키려던 장비들도 땅에 내려오자마자 다 버려버렸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았나보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말한 그녀는 대뜸 자신을 아냐고 물어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 속에 넣고 있는 나는 혹여 이전 세계에서 나와 마주쳤던 사람인가 싶었지만 내가 있던 세계에선 일반적인 사람들이 날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그것은 아닌듯 했다.
" 제 이름은 라클레시아 테시어, 노던 엘프입니다. 라크 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
그래도 비슷한 처지니까 어느정도 대화는 통하지 않을까 싶어 먼저 통성명을 해본다. 애초에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으니 이상한 대답은 아닐 것이다.
" 내 기억 속에 당신은 없으니 아마 우리는 초면이겠지요. "
내가 잊어버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웃으며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목을 감싸고 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아내리자 보인 주사자국과 핏자국을 보고선 살짝 놀랐다. 구속복을 입었다는 시점부터 조금 생각하고 있던건데 아무래도 그녀가 있던 세계에서 취급은 별로 좋지 않았던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치료를 해주려 손을 뻗었지만 이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멋쩍은듯 닿을뻔한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일단 치료가 필요해보이네요. 옷도 갈아입어야할 것 같고. "
그래도 멀쩡해보이긴 했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의 수인은 육체적인 강함만큼은 다른 종족과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눈 앞의 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싶었다. 하지만 저런 자국들은 감염의 위험도 있으니 치료를 하는게 좋고, 옷은 너무 눈에 띄니까 갈아입는 것이 좋아보였다.
// 언급 대신 손을 뻗었다는걸로! 라크는 원래 세계에선 모든 마법을 다 다룰줄 알았으니까.
나는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지금 꾸고 있는 꿈에도 나름의 시나리오가 있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가상현실 같은 공간에 갇혀버린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지만 이것이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짜다. 그 어떠한 인공지능도 이처럼 정교하게 인격체를 모방할 수 없다. 그런 기술은 우리에게 아직 없다. 단지 꿈으로 치부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나는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노던 엘프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애먼 꿈에서 절대로 나올 리 없단 말이다.
"윈터라고 불러. 보다시피 수인이야."
아마도 우리는 초면일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그가 대뜸 손을 뻗어오기에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붙들고 있던 넥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연이은 그의 말과 행동에 오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치료라면 목덜미의 주사 자국을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는데, 이게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던가 의문이다. 그보다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욱신거리기도 하고. 꿈이라는 것이 현실에서의 일을 이렇게 정교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던가? 꿈인지 현실인지 어느 한쪽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혼란스러움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뿐이다.
"그보다 돈은 있어? 저쪽이 마켓인 것 같긴 하던데."
나는 여태 걸어온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도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의지가 되어준다. 덕분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일단 어디든 가보자고."
어차피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거―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꿈이든 현실이든 둘 다 아닌 다른 무언가이든 이곳에서 살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각자가 다른 언어를 사용할 이방인들을 위해 있는 특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와서 단 한번도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단걸 이제야 깨달았다.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한거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제 고향은 상당히 추웠던 곳이라 마음에 들어요, 겨울, 윈터. "
그녀의 이름을 곱씹어보며 살짝 웃은 나는 떠오르려는 기억을 억지로 되삼켰다. 고향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최후까지. 메마른 사막의 바람은 살짝만 불어도 모래바람을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손을 뻗자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 그 분홍색 눈동자에 서린다. 이것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행동이라 생각도 하기 전에 먼저 손이 나가버렸다. 그래도 금방 오해를 풀어주었는지 눈빛이 아까처럼 되돌아왔다. 이해심이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 음, 돈은 없어도 간단한 부탁만 들어주면 챙겨주더라구요. "
도시에 도착했을때 허기가 도져 뭐라도 먹을까했지만 가진게 아무 것도 없어서 그냥 굶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간단한 부탁을 들어주면 먹을걸 주겠다는 제안을 했었다. 가치를 지불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주는 사회라니 이런게 유토피아인가 싶었다. 어쨌든 심부름 정도만 하고 밥을 얻어먹었으니 옷 같은 것들도 그 정도만 한다면 무리없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침 옷이 있던 곳을 여기 오는 길에 봤어요. 그곳으로 가면 될 것 같네요. "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이라 해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 첫번째 주시자가 가진 특권이자 족쇄니까. 근데 이젠 주시자가 아니니까 없어졌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은 편리한 능력이기도 하니 없어진다면 당장은 아쉬울지 모른다.
" 아무튼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가워요. "
뒷머리를 덮을 정도로 길어버린 뒷머리를 꽁지로 질끈 묶으며 말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머리 잘라두는건데, 같은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면서.
// 캡틴이 알려준거 미리 해봤다고 설정 넣어놨다! 그래도 라크는 도시를 좀 돌아다녔다는 설정이니까.
비록 그 기억의 끝은 항상 고통스럽다고해도 내 고향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아주 먼 옛날 일이라고 해도 나는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침 겨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은 더이상 고향을 바라볼 수 없는 나에겐 큰 행운이기도 했다.
" 저도 마찬가지로 잘 부탁드립니다. "
머리를 다 묶고나자 상대방이 건넨 손이 보였다. 아무래도 처음 본 나를 벌써부터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뭐, 나도 일반적인 인간보단 수인쪽이 좀 더 편했다. 내 세계에선 엘프와 수인이 동맹 관계였으니까 말이다. 인간들의 제국은 너무 덩치가 커서 그렇게 연합하지 않으면 막아내기 힘든 수준이기도 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가볍게 악수를 했다. " 저는 남자입니다. 굴곡이 그렇잖아요? "
엘프치곤 확실히 작은 키이긴 하다. 엘프 남성들의 평균보단 작고 여성들의 평균보단 좀 더 큰 편이었긴했다. 허나 적어도 내가 살던 세상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몸의 굴곡이 확실한 편이라 키가 작다고 여자라고 헷갈리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던 세계에선 다를 수도 있으려나.
" 여기에요. 실례합니다. "
다행히 옷가게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는 흔쾌히 물건 하나만 가져다주면 옷을 주겠다고 했기에 나는 윈터에게 다가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 이것만 가져다주면 된다고 하네요. 마침 위치도 멀지 않은 곳이니 당신은 입을 옷을 골라두면 될 것 같아요. "
그 옷으론 아마 움직이기도 꽤나 힘들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녀가 알았다는 말을 하자마자 바로 문 밖으로 나가서 목적지로 향했다.
자신은 남자라며, 굴곡이 그렇잖냐는 말에 그의 몸을 힐긋 훑어보았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임에도 굴곡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으니 혹여 상처가 될까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었을 뿐이다. 여성이 남성으로 오해를 받는다면 꽤나 큰 상처가 되겠지만, 남성이 여성으로 오해를 받는 것은 어떤 의미로 기뻐해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잡다한 생각을 너저분히 흩뜨리며 그를 따라 근처의 옷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 진열된 의상들은 낯선 복식도 있었고 드물게는 눈에 익숙한 복식도 있었다. 그것들을 눈으로 훑고 있으면 잠시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던 라크가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다.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면 주인장이 옷을 준다더라. 간단히 호의를 사는 그의 언변이 뛰어난 것일까, 사람이 좋은 것일까 새삼 그가 대견했다.
"알겠어. 한 번만 부탁할게."
라크가 가게를 빠져나가고 나서, 장내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도 주인장도 말 한마디 없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인장의 시선이 내 발목을 향했다. 족쇄와 쇠공을 의식하는 듯했다. 호의도 호의지만, 아무래도 새 옷을 받기엔 못내 부담이 되어 주인장에게 다른 것을 부탁하기로 했다. 입고 있는 구속복의 찢어진 소매 부분만 수선해달라고. 옷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 구매하러 다시 오겠다고 덧붙였다.
탈의실에 들어가 갑갑한 구속복을 벗어 주인장에게 건네주고 문을 닫았다. 양 팔이 억압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눈에 띄는 복장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나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옷을 수선하는 주인장과 심부름 간 라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시 전체를 한번 돌아봤다면 모를까 내가 가본 곳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니 주인장이 알려준 가게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고 그나마 그가 그려준 약도가 있어서 물어물어 찾아갈 수는 있을듯 했다. 중간중간 길을 헤매기도 하면서 도착한 가게는 옷가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물건을 전달해주고 시계를 확인하자 꽤나 지체된 상황이라 나는 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옷가게로 향했다.
" 길을 헤매서 살짝 늦었네요. "
이 정도 시간이면 옷을 다 입고도 남을 시간이라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인 것은 여전히 구속복을 입고 있는 윈터의 모습이었다. 다만 움직임을 방해하던 족쇄라던가 그런 것들은 전부 없어진 상태였고 이곳저곳 헤져있던 곳들도 전부 수선이 되어있었다. 아마 옷을 고르지 않고 대신 입고 있는 옷을 고쳐달라고한 것 같았다.
" 새 옷을 입었어도 괜찮았을텐데요. "
애초에 주인장이랑 나눈 얘기도 그것이었으니까. 다만 그녀가 저 옷을 입겠다고 결정했으면 그것에 대해선 내가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구속복은 원래 하얀색인데다 이상한 것들만 안붙어있으면 디자인이 특이한 옷이라고 생각이 들법도 하니까 말이다. 주인장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나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도 해는 중천, 잠을 자기 위해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할 것 같았다.
" 시간이 아직도 한참 남았네요. 딱히 목적이랄 것도 없고 ... 도시나 한바퀴 돌아보는게 좋을까요. "
한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다. 그러니 딱 한바퀴만 구석구석 돌아두면 어디서든 원하는 위치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동반자가 생긴다면 지루하지 않고 좋을 것 같기도.
위키 장점은, 어장의 설정이나 시스템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참여중인 플레이어 캐릭터들 목록도 표로 만들어서 한번에 볼 수 있고, 중간중간 추가되거나 업데이트되는 캐릭터 설정을 수시로 수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보통 캐릭터 목록이랑 시트 한번에 보려고 위키 들어가는 편이에요.
제가 모바일러라 다른 어장 위키처럼 예쁘게 만들 수는 없지만 형식적인 것만 넣어서 어떻게 만들어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볼때부터 입고 있던 옷이었어서 그런가 구속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서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사실 팔이 묶여있다거나 그런 것만 아니라면 좀 특이하게 생긴 옷이라고 취급할 수 있을 정도 같았다. 하지만 발목에 아직까지 감겨있는 족쇄와 쇠사슬은 타인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해보였다. 근데 달려있던 쇠공은 어디가고 끊어진 쇠사슬만 저렇게 달랑달랑 매달려있는거지?
" 그나저나 ... 괜찮은거에요? "
나갈때와 다르게 표정이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있었던 쇠공은 없어졌고 컨디션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것이 쇠공을 없앤것과 관련이 있어보였다. 자세한 내막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으니 알 수는 없었지만 ... 힘을 쓰다가 너무 과하게 써버린 나머지 몸이라도 안좋아진 것일까. 일단 도시를 돌아보자는 말을 해놓긴 했지만 안색을 보니 마음껏 돌아다니기엔 힘들어보였다.
" 아까 그 그늘로 다시 돌아가서 쉬는건 어떨까요? "
한블록 정도 더 나아갔을까, 결국 그녀가 걱정된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도시는 확실히 큰 편이고 오늘이 아니어도 돌아다닐 시간은 많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일단 앞으로도 같이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족인 엘프 다음으로 편한 종족이 수인이니까. 그것은 동맹이 수인이었던 것도 지분이 있었지만 주시자로 있을때 가장 오랜 세월을 같이 한 것이 수인이었다는 것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 돌아다니는 것은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마침 날씨도 좋으니까 바깥에 누워있어도 괜찮을테고. "
찢어지는 바람 소리가 귓전 때린다. 무거운 풍압이 안면을 강타한다. 짓누르듯이 무거워진 눈꺼풀 간신히 밀어올리자 새파란 창공 눈 앞에 펼쳐진다. 뇌가 상황 채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사지 허우적거리며 무언가 붙잡으려 시도하지만 잡히는 게 있을리 만무하다. 땅으로의 자유낙하. 비슷한 경험은 많았지만, 구름 사이에서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는 상황 겪는 건 난생 처음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떨어지는 중이니 지상에 도달한다면 분명 즉사하겠지. 오랜 삶 동안에도 차마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죽음의 공포가, 지금에서야 와닿는다. 그동안 숱한 위협과 위험 견뎌냈음에도. 아, 나는 이제 예전만큼 단단하지 못하구나. 잔뜩 무르고 썩어선 죽음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어느새 무성한 가지와 나뭇잎들 시야에 들어온다. 이 아래는 숲인가? 나무가 보인다는 건 지상에 가까워졌다는 뜻일 거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곤 두 눈 질끈 감는다. 매섭던 칼바람이 잦아든다. 계속해서 낙하하던 몸도 어느 순간 멎는다. 그리고 척추뼈를 따라 전해지는 극심하고도 압도적인 고통─
─따위 찾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보아도 그랬다. 아예 아픔마저 느낄 수 없게 된 걸까. 적막이 지속된다. 감긴 눈꺼풀 살며시 뜨니 아까 보았던 새파란 하늘과 푸른 나뭇잎 보인다. 그러나 그 광경은 정적이었다. 마치 끝없던 추락이 끝난 것처럼. 난 지금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죽은 건가.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다시금 몸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예의 추락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주먹 한 줌만큼의 움직임.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보다도 짧은 낙하. 그제서야 감각 제대로 느껴졌다. 몸을 푹신하게 받쳐주는 풀밭, 그 싱그러운 냄새. 팔다리를 간지럽히는, 이슬 머금은 잔디. 천천히 상체 일으키니 예상했던 것처럼 주변에는 울창한 숲 펼쳐져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한 풀 꺾이자 그제서야 제게 이런 일 닥친 이유가 궁금해진다. 하지만 애초에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모르겠다. 현실이라기엔 너무 작위적이고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지라. 잘 기억나지도 않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려 머리 붙잡고 끙끙대지만 별 소용은 없다.
하는 수 없이 추락했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만있기만 한다고 궁금증이 절로 해결되진 않을 테다. 주변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마을의 윤곽이 설핏 보이는 것도 같다.
'일단은 저기로 가볼까.'
이런 오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대개 폐쇄적이다. 이방인의 방문 반기지 않을 수도. 그럼에도 뭐든지 해봐야 한다. 이 낯선 장소에선.
괜찮냐는 그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무라도 낀 앙 시야가 흐렸다. 옆에서 걷는 그의 인영에 의지해 가는 방향만 겨우 인지하고서 걸음을 계속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몸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쇳소리는 어느샌가 머릿속에서부터 칭칭 울려대고 있어, 비기질적인 환청은 불안정한 뇌가 소리를 점점 크게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게 된다. 귓구멍 뒤에 있는 두개골을 작은 쇳조각으로 연신 두드리고 긁어대는 끔찍한 소음은 청각보다 진동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읍..."
아까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쉬자는 말이 반가웠는데, 속이 심히 울렁거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조심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새나오는 침을 겨우 삼켜내고, 몽롱한 정신으로 한걸음 두 걸음 옮겨놓다 보면 그를 처음 만났던 그늘 아래 서있어. 날이 좋으니 누워도 괜찮겠다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폭신한 침대에 등을 뉘듯 몸을 던져 나무그늘 밑, 맨 풀밭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누우니까 조금 살 것 같았다.
"너는 너무 상냥해."
풀밭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 잠꼬대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 숨 안 쉬면 깨워줘야 해. 약속...."
경계심 없이 무겁게 내리감은 눈꺼풀 위로 봄볕의 밝음이 선명히 비쳐듦에도 통제 잃은 의식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갔다.
이제 미하엘은 추락에 있어 달인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봤자 아직 두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추락이었지만, 대부분이 ■번째 추락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 추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 미하엘은 추락의 달인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차게 뺨을 때리는 바람과 맞은편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눈두덩이를 두드린다. 미하엘은 본능적으로 눈 앞에 손을 대 바람을 막았다.
다윈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 공포나 두려움을 느꼈을 테지만, 그는 공포를 거세하기라도 한 것처럼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강하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인상은 찌푸렸을지언정 겁 먹고 몸을 웅크리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오히려 다윈은 다소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윈은~ 근처에 없나? 어디 봅시다~ 어라, 저기 도시?
그 여자애는······ 다행이군. 같은 위치에 떨어지진 않는 것 같아. 그나저나, 저기 도시로군.
미하엘은 눈으로 들어차는 바람을 막은 손을 조금만 들어올려 저 멀리 성벽이 둘러진 도시를 바라봤다. 멀리서 보는 거였는데도 한 눈에 도시가 구역별로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으로 나뉘어지는 도시라니. 이번에는 어떤 세계인지 궁금했다.
다윈은 도시의 형태보다는 중앙에 집중했다. 반투명한 원형의 돔이 씌워진 것 같은 모양새. 멀리서 보는 거였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결계다. 굳이 중앙에 결계를 쳐놓았다는 것은, 어쩌면 추락자를 대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한 생각일 수도 있었으나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 세계에 마법이 있는 거라면 더더욱.
으음~ 다윈은 또 이상한 경계나 하고 있겠네.
······경계는커녕 또 마법소녀가 어쩌고 하고 있겠군.
미하엘은 다윈과 ■번째 함께 추락하고 있었기에 그의 행동패턴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행동패턴이라고 해봤자 주변을 전부 경계하는 게 다였을 테지만. 미하엘은 그가 생각보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다윈은 미하엘과 한 몇 번의 추락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미하엘은 생각보다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보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미하엘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행동했다.
아, 슬슬 바닥이네.
······.
미하엘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추락자에게 주어지는 기이한 반발력은 추락시의 충격을 완화해 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하엘은 추락할 때마다 특정한 자세를 잡곤 했다. 웅크렸다가, 펼친다. 꽃봉오리가 활짝 개화하듯이. 봐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련의 행동은 말 그대로 멋진 등장을 꾸며내는 것만 같았다.
다윈은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던 자세를 잡았다. 특별히 연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다소 안정적인 자세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가까워질 수록 그의 자세는 더욱 더 안정이 되었다. 언젠가 그의 추락을 본 사람이 그토록 안정된 자세는 본 적이 없노라며 칭찬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윈에게 추락은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이렇게 걷는 것은 무리인듯 싶었다. 대체 옷가게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몸 상태가 안좋아지는건지. 추락의 여파가 뒤늦게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옷가게의 주인장이 뭔가 했다기엔 나오면서도 윈터의 반응이 적대적이진 않았으니까. 결국 더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내가 돌아가자는 말을 하자 그녀도 긍정의 제스처를 취했다.
' 어디 방이라도 잡아야하나.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도 시시각각 나빠지는 그녀의 컨디션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지만 지금 수중엔 아무것도 없었고 방을 잡으려해도 무언가 대가가 있어야했다. 그것까지 할 정도의 시간은 없을것 같아 위태위태하게 걷는 윈터의 몸을 살짝 잡아주면서 천천히 원래 있던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린 그녀는 상냥하다는 말과 함께 숨을 안쉬면 깨워달라는 좀 오싹한 얘기까지 하면서 금세 잠에 빠졌다.
"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그렇게 자면 감기 걸려요. "
이미 잠들어서 안들리려나. 나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윈터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연구소에서 입던 짧은 가운이니까 그녀의 몸을 어느정도 덮어주는데엔 충분한 크기일 것이다. 대자로 뻗은채 잠에 든 그녀의 옆에 앉은 나는 조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다가 몸을 일으켜 적당한 넓이의 나뭇잎을 하나 손에 넣었다.
" 상냥하다고 하셨나요? "
나는 잎을 반으로 접고선 조금씩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형태가 완벽한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 제가 보기엔 당신도 충분히 그렇답니다. "
어느정도 형태가 잡힌 나뭇잎을 입가에 가져다댄다. 약간의 호흡이 들어가자 나뭇잎에서는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노던 엘프지만 나도 어쨌든 숲의 일족이다. 나는 어릴적 배운 몇가지의 곡을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처음엔 조금씩 음을 틀리기도 했지만 금세 안정감을 찾은 선율은 그렇게 그들 주변으로 조금씩 퍼져나갔다.
라크네 엘프는 무려 제국까지 있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어. 사실 모든 종족이 나름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 규모로 가장 큰건 인간, 엘프, 수인 세 종족이야.
인간의 제국은 가장 규모가 크고 인구도 제일 많지만 정치적으로 꽤 시끄러운 편이지. 공화정을 채택했거든. 그럼에도 국력은 가장 강해. 광산도 가장 많이 소유중이야.
엘프의 제국은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땅은 넓은데 척박한 곳이 많아. 자연스럽게 기술력이 발달해서 가장 진보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 제국의 가장 최북단에 거주하는게 라크의 종족인 노던 엘프야. 여긴 왕정 체제라서 왕이 있고 귀족도 있는데 귀족은 현재 시점에선 세습 불가능한 자리야.
수인의 제국은 규모가 셋 중 가장 작은데 군인 한명한명이 정예야. 국민성도 가장 좋아서 위기에도 잘 넘기고 있지. 엘프와 동맹 상태라서 질 좋은 무기들을 받는 대신에 자국의 군인들을 빌려주고 있지. 여긴 왕이 존재하는데 정치는 안하는 입헌군주국이랑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어.
물론 존재하지! 엘프-수인은 서로 동맹이다보니 꽤 많은 편이고 인간과의 혼혈은 서로 적대국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적어. 매일 치고박고 하는건 아니고 협정도 하는 시기가 있고 하니까 자연스러운 흐름이랄까.
라크네 세계는 지성체까지 종분류를 내려오면 크게 아인종이랑 마인종으로 나뉘는데 아인종끼리는 전부 혼혈이 있어. 마인종은 또 그들끼리 혼혈이 있고. 마인종의 대표적인 종족으론 가장 다수종이 오크, 그리고 그 아래로 트롤, 노움 이런 녀석들이 있지. 오우거는 어디갔냐고 물어보면 오우거는 오크의 돌연변이성 아종이야.
엘프-수인은 아무래도 귀쪽이 겹치는데 진화의 방향성이 보통은 종의 생존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무조건 수인의 귀가 생겨나. 그야 엘프 귀가 수인의 귀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나머지 부분은 유전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져. 그래서 둘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외모는 거의 수인이야.
1. 몸무게가 비정상적으로 가볍다는 설정인데, 그래서 정확히 몇kg이냐 하면! 지금 상태에서는 약 49kg 정도 되겠네요. 179cm/49kg라니 뼈말라잖아... 인체에서 혈액의 무게가 전체 체중의 8% 정도 되고, 그 외의 다른 부분도 좀 잃어버린 상태라 이것저것 해서 10kg 정도 더 빠져서 이렇게 됐다...
+ Q.없는 부분은 왜 잃어버렸나요? A.내상을 정교하게 치료하는 법은 몰라서 어디가 상했다 싶으면 (1)방치하거나 (2)열어서 그 부위를 꺼낸 다음에 버렸습니다. 어차피 안쪽이 없다고 문제 생기는 몸도 아니라...
2. 이름이 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한국어 이름, 그러니까 모두에게 정확히 '영'이라는 발음으로 들리는 이름은 아니에요. 대충 추락자 언어 패치에 힘입어서 '영원, 긴 시간, 머나먼 때' 정도의 함의를 지닌 '말'을 이름으로 삼았다는 설정이라서요. 그게 오너인 우리의 경우에는 永이고, 다른 사람/캐릭터들에겐 제각각 다르게 들린다는 설정입니다. 앗 풀어놓고 보니까 이런 설정이 가능할까 캡틴에게 물을 걸 그랬다 싶기도 하네요...🙄
3. 기본적인 유연성 자체는 남성 평균과 같지만, 몸을 억지로 꿰메고 태운 탓에 피부 면적이 수축된 부분이 늘어나 많이 뻣뻣해요. 몸을 크게 숙이거나 지나치게 역동적인 동작을 취했다간 상처가 벌어지기 때문에 평소에는 되도록 격한 몸동작은 삼가려 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진다면 어쩔 수 없이 찢어져야겠지만요.
나쁘지 않다. 오히려 괜찮은 느낌이다.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모인 도시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고 분위기라서 미하엘은 조금 들떴다. 이곳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또 순진했으며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처음 추락해서 도착했던 북쪽 구역의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았고, 순진하지도 괜찮지도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구역은 달랐다.
미하엘은 동쪽 구역에 자리를 잡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분명 같이 떨어졌을 텐데, 도시가 생각보다 커서 다윈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도시에 저와 같은 추락자가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날 장소라도 정해놓을 걸 그랬다. 물론 다윈은 질색했겠지만.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미하엘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아니다. 이유라면 있었다. 소문. 잡다한 이야기들. 원래 그런 것들은 시장 바닥에서 자주 돌아다니는 법이었으니까.
“흐—음. 별 거 없나—.”
한껏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재미없다며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던 미하엘은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뻥 걷어찼다. 누군가 맞을 수도 있었지만, 제 알빠인가! 이렇게 사람들이 있는데, 지나가다 운이 나쁘면 맞을 수도 있는 일 아니던가. 혹시라도 제가 찼다는 게 들킨다면 사과하면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미하엘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긴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땐, 라크의 외투가 몸에 덮여져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아직 한낮이었다. 몸이 찌뿌드드했다. 여전히 나무그늘 아래였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나무에 등을 기대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외투를 나무 아래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잠시 둘러볼 요량이었다.
성벽을 따라 마켓 쪽으로 걸었다. 잠을 잔 것을 보면, 꿈은 역시 아니었다. 지나간 기억을 되짚으면 폐기처분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
무언가가 날아와 이마를 세게 때렸다. 맞은 자리를 손으로 더듬으니 피가 묻어났다. 어린 시절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날아왔을 방향을 돌아보면 복장이 화려하고 키가 작은 수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발목에 걸린 쇠사슬을 바닥에 질질 끌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니 사실 경쾌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미하엘의 두 눈이 놀란 토끼인양 땡그래졌다. 왐마야······.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친 미하엘 앞에 이름 모를 수인이 섰다. 회갈색 머리카락에, 저보다 큰 키. 머리 위에 솟은 동물의 귀······. 퀭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에 주춤할 법도 했으나 그보다는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피!”
짧은 외침과 예의 없이 뻗어진 손가락이 너를 가리킨다.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 놓인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가 발로 찬 돌멩이에 맞아 난 상처였다.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켠 미하엘이 우왕좌왕하며 제 옷주머니를 마구 뒤적였다.
“어떡해, 진짜진짜 미안! 설마 누군가 맞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 맞더라도 피가 날 거라고도 생각 못했는데!”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 사과는 당연했다. 누가 맞으라는 의미로 찬 것도 아니었으니 이어진 말도 맞았다. 그러니 당연히 피가 날 거라고 생각 못한 것도 맞았고. 열심히 주머니를 뒤지던 미하엘이 기어코 주머니 속 깊은 곳에 꾸깃꾸깃 접혀 있던 반창고 하나를 찾아냈다.
“진짜 미안해, 이름 모를 추락자야. 이거 반창고인데······.”
부산스럽게 행동하던 미하엘이 냅다 네 손에 반창고를 쥐여줬다. 두 눈썹을 늘어뜨린 채 온몸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던 미하엘은 곧 네 발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에 시선이 닿았다. 온갖 세계에서 오는 추락자였기에 이런 모습이 마냥 신기한 건 아니었지만, 제법 불편하겠다 싶었다. 다시 고개를 든 미하엘이 너와 눈을 마주한다.
부산스럽게 주머니를 뒤적이던 그녀는 반창고를 하나 내밀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그녀의 입에서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추락자. 이어서 그녀는 발목의 족쇄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풀어주겠다고 했다. 윈터는 왼발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처음에는 구속복의 속박을 풀었고, 다음에는 족쇄의 쇠공을 떼어냈다. 족쇄를 풀어내는 것은 어쩐지 자신만의 숙제로 느껴졌기에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대신, 건네받은 반창고를 다시 내밀어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손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미안하면 붙여주던가."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겨 생채기 난 이마를 드러낸 채 그녀의 놀 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추락자라니. 하늘에서 떨어진 걸 말하는 거야? 너는 이곳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손을 들어 귓가를 덮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잎새의 소음,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울어 대는 짐승들의 울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요할지언정 더없이 생생하게 피력되는 이 모든 것들의 생동과 존재감이 버겁다. 그 오랜 고요를 버틸 수 없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는 벅차다니. 앞뒤가 다른 꼴 같잖지만 자조를 할 정신도 없었다. 떨어지고 난 뒤에도 시간은 한참이나 흘렀겠지만 줄곧 혼란스러워하기만 했으니 위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귀를 찌르는 생소한 소음에 그가 조금이나마 적응했을 무렵, 그제야 주변의 경관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울창한 숲 너머에는 탁 트인 드넓은 땅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도시일 터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상황에 관해 어떤 실마리라도 얻으려면,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저곳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애꿎게 눈길만 딴 데로 돌리던 순간.
사람 하나를 보았다.
눈에 보인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서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낯선 인물의 앞에 서 있는 상황.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다가갔던 그는 당혹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제 입을 틀어막기만 할 뿐이다. 이럴 거라면 할말이라도 생각한 뒤에 행동하는 편이 나았겠다. ……사실 그는 무엇이라도 말하려던 참이긴 했는데,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성대를 써 본 것이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침묵해 온 탓에 목이 잠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
그리하여, 마법소녀의 눈앞에는 시커먼 옷 입은 모르는 사람 하나가 성큼성큼 다급히 걸어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서 있는 상황. 입가의 손을 뗀 뒤로도 미미한 들숨과 함께 입만 작게 달싹이다 다물렸다. 사람이 당황하면 눈부터 저절로 흔들리는 것은 아마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새까만 눈동자 곁으로 슬쩍 구르며 어색한 침묵만 길어졌다.
미하엘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냥, 혹시나 다윈이 저보다 늦게 추락해 숲에 있지는 않을까 싶어 나온 것뿐이었는데.
웬 어두컴컴한 사람(사실 이런 생각은 실례지만)이 제 앞을 떡하니 막아서지 않는가. 덕택에 도시에서 얻은 과일을 베어 물던 미하엘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아, 이거. 사과처럼 생겨 놓고 맛은 복숭아네. 그런 짧은 생각과 함께.
춘추 특유의 기분 좋은 날씨가 뺨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미하엘과 이름 모를 사람의 사이엔 대화가 흐르지 않았다. 미하엘은 멀뚱멀뚱 상대를 쳐다볼 뿐이었고, 상대는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 뿐이었다.
“흐음······.”
미하엘의 눈이 너를 가볍게 훑는다. 생긴 것은 저와 비슷해 보이는데, 워낙 추락자들이 갖은 세계에서 오는지라. 미하엘은 제 손에 묻은 과즙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도 남은 건 대충 혀로 훑었다. 그러다 네 흔들리는 눈과 마주칠 때면, 미하엘은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혹시 말이 안 통할까 싶어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걱정마, 지금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 언어만큼은 모두 통하거든?”
추락자 특권이라구, 하고 덧붙이는 모양새가 퍽 낙천적이다. 미하엘은 이 능력만 있으면 외국에 나가도 문제 없을 텐데, 같은 말을 재잘거리다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러니 이제 말해도 된다는 것처럼.
뭐, 미하엘이 알았겠는가. 네가 저와 말이 통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침묵으로 소리 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창 현재 진행 중인 문제로 인해 어색한 분위기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대화가 이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당혹감만 커진다. 그가 여타 사람처럼 땀을 흘릴 수 있는 몸이었다면 이미 관자놀이까지 땀방울이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상대편 쪽이었다. 그는 도리어 멍하니 듣고 나서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아, 그랬지. 워낙 급하게 다가온 터라 말이 안 통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깜빡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뒤로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이 뒤에 따라붙었지만 시급한 문제가 있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손짓으로 구사하는 언어도 대충 통하려나? 그보단 몸짓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가중된 혼란을 이기지 못하고 턱 막힌 목에 강제로 힘을 주어 소리를 내었더니.
“…………────아,”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끔찍한 쇳소리가 났다. 갈사暍死 직전에 처한 사람이 낼 법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록 혼란에 빠진 상태일지언정 객관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깔끔하게 발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게목으로 인해 잃어버린 침착마저 되찾을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 한결 안정을 되찾은 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되찾았다.
소리만 없을 뿐 홀로의 갖은 내적 부산을 떨었던 그가 마침내 방도를 하나 찾았다. 언어는 통한다 했지. 그는 천천히 아래로 몸을 낮추고 앉아, 손톱이 다 떨어져 나간 손가락으로 땅 위에 글씨를 써 보았다.
딸깍, 딸깍. 의자 위에서 무릎 끌어안은 채 앉아있는 소녀, 연신 마우스를 클릭한다. 이것도 꽝이고, 저것도 별로. 이건 좀 많이 노잼이야. 그 게임 후속작은 언제 나오나? 중얼이던 소녀가 키보드 덜걱이며 웹사이트를 부산스레 돌아다닌다.
할 만한 게임도 없고, 진짜 열라 심심해.
자신에게 아직 창조의 권능이 남아있었더라면... 엄청나게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를 창조하고, 엄청나게 똑똑한 스토리 작가를 창조하고, 엄청나게 재능 있는 음악가도 창조하고, 또 창조해서... 트리플 A급의 명작 게임을 만들라고 지시했을 텐데. 올해의 게임을 n관왕으로 수상하고, 유저들 사이에서 극찬이 끊이질 않는 갓겜을! 상상만 해도 행복하지만, 결국 공상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공상인 것이다. 소녀는 한숨 내쉬며 키보드에서 손을 물린다.
지루하다. 소녀가 조그만 몸 가누어 의자에서 폴싹 뛰어내린다. 그 뒤로 풍성한 오렌지색 머리칼 질질 끌려나온다. 소녀는 너저분하게 쌓인 짐더미 사이에서 컵라면 한 개를 능숙히 찾아낸다. 그 다음 비닐을 벗기고, 뚜껑을 뜯고, 면 위로 스프 마구 흩뿌린 뒤 책상 옆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린다. 이 방에는 창문이 없다. 당연히 외부도 보이지 않고 애초에 그럴 필요조차 없다. 바깥 세상을 접하는 수단은 인터넷 하나만 있으면 된다. 새삼, 인간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들이구나 느끼게 된다. 인류가 일구어낸 문명 수준은 창세신인 소녀마저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달랑 전기 통하는 선 하나로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신들의 시대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맛. 있. 겠. 당~"
어쨌건 소녀는 다 익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그리고 면발을 크게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단칸방이 드넓고 푸르른 창공으로 바뀌었단 말이다. 잘 익었던 컵라면은 물론 면발 집었던 젓가락도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짧은 시간동안 공중에 체류하던 소녀의 몸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으, 으에엑! 뭐야 이거! 잠, 잠깐마아아안!!!"
있는 힘껏 악 써보고 몸뚱이 바르작거리지만 그런다고 추락이 멈출리 있나. 결국 소녀는 자유낙하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아직 창조의 권능이 남아있었더라면... 엄청나게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를 창조하고, 엄청나게 똑똑한 스토리 작가를 창조하고, 엄청나게 재능 있는 음악가도 창조하고, 또 창조해서... 트리플 A급의 명작 게임을 만들라고 지시했을 텐데. 올해의 게임을 n관왕으로 수상하고, 유저들 사이에서 극찬이 끊이질 않는 갓겜을!<<
으아아악 이 권능 저도 갖고싶어요!!! 어떡하지 하찮은 창조신님 너무너무너무 귀여워...😇
>>980 본인 고유의 체취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무취예요! 하지만 외부로부터 밴 냄새는 나는데, 대충... 바싹 마른 건조한 흙, 흙먼지, 외출하고 나면 외투에 배곤 하는 특유의 먼지 섞인 바람 냄새라고 해야할지... 중금속 섞인 공기 특유의 답답한 향 같은 게 나요!
네가 제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입을 열고 소리를 낸다. 내었다. 내었지만, 그건 말이 아니었다.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듣기 힘든 쇳소리는 짧게 지나간다. 덕분에 미하엘은 귀를 막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제가 들은 게 무엇인지 판단조차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 그러니까······.”
다시 침묵이 찾아올세라, 미하엘이 입을 여는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네가 몸을 움직였다. 미하엘은 반사적으로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천천히 낮춰지는 네 몸에 뭘 하려는 건가 싶어 미하엘의 자세도 같이 낮아졌다. 그 덕에 가까워진 거리에 낯익은 것 같으면서도 낯선 냄새를 맡았다.
흙먼지 같은 냄새. 오래되어 묵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머문 것 같은 냄새다. 거기에 숲의 포근한 냄새가 섞였다. 꽤나 특이하다고, 미하엘은 잠깐 생각했다.
그 사이 너는 느릿느릿 땅 위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미하엘의 시선이 써진 글자로 향했다. 악필이니 명필이니 생각할 것은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글자들이 읽혔기에. 이어서 적힌 다른 글자에 앗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그랬구나! 같은 말은 없었다. 대신 흙바닥을 그었던 네 손을 덥썩 붙잡았다.
“읽히는 게 문제가 아니지! 손가락! 손이 왜 이래? 완전 엉망이잖아—! 이런 손으로 글씨를 쓰다니 미친 거 아니야?”
이어진 으악하는 짧은 비명. 낯선 글자가 읽히고 안 읽히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글자는 읽히는 추락자가 아니던가. 미하엘은 제가 다 아프다는 듯이 방방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