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에게 어장의 종합 어장입니다. 메인/서브 미션 발행 및 수행, 이벤트, 포인트 계산, 상점 이용 등. 다양한 곳에 쓰임이 있으며 주로 캡틴이 활동 내역을 확인해야 할 때 쓰입니다. 단, 미션이 아닌 독백, 일상 등은 이곳이 아닌 본 어장에서 활동 후 내역을 남깁니다. 이곳에 레스를 남길 때는 인증 코드를 필히 기입합니다.
한참 깡총거리며 길을 앞서 나가던 토끼가 여전히 한심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아까부터 연신 말을 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신음 비스무리한 것을 내뱉는 꼴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갑자기 말을 걸길래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천국에 왔다느니 뭐라느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질 않나.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며 다시 숲의 출구를 향해 뛰어가는 토끼의 뒤를, 숲 안쪽에서 뭐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붉은 머리 소녀. 어쩐지 말을 걸수록 점점 자신이 한심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어서 입을 꾹 다물지만, 찔끔 새어나오는 눈물은 틀어막을 방법이 없어서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 사이로 작은 훌쩍임이 조금씩 샌다.
기억이 없다.
자기가 천국에 왔나? 하는 착각에서 겨우겨우 벗어나 상황 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려 보았더니, 이젠 머릿속에 부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떨어지기 전엔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애초에 자신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니아'라는 사실, 그리고 어쩐지 여기는 자기가 있던 세계가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뿐. 넌 누구야? 이름이 뭐야? 어떻게 나랑 얘기할 수 있어? 마법사야? 쏟아지는 토끼의 질문으로 깨달은 사실들에 눈 앞이 막막해져선, 아, 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절규하며 대성통곡했던 십여분 전 상황으로 생각이 튀어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을 때.
파사삭! 작은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마침내 밝은 태양빛이 눈꺼풀을 찌른다. 찡그렸다가 뜬 눈에 머지 않은 곳에 한 눈에 보기에도 제법 큰 도시가 우뚝 서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홀린 것처럼 저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온전히 벗어나 숲 밖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숲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묘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려 수풀 근처에 앉아 이 쪽을 보는 토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가, 가가, ..감사해요!"
[ 다음부턴 길 잃지 마. 떨어지지도 말고. ]
퉁명스러움 섞인 다정한 말을 마지막으로, 토끼는 등을 돌려 다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온기가 떠난 자리에 눈길을 주다가, 소녀 또한 자신의 로브를 푹 뒤집어 쓴 채 가야 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시 입구를 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시 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직 도시로 들어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몇 대의 수레가 수십 개나 되는 상자를 싣고 덜컹거리며 옆을 지나쳐갔다. 콜록, 콜록, 와르르 이는 흙먼지를 기침으로 걷어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아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
입구로부터 바로 한 발짝,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았나? 발을 옮기는 찰나의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머릿속을 스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무언가의 착각이겠거니 생각하고선 주위를 둘러 보는데...
"......히, 히이이이..."
더 이상 이상한 느낌이 들고 말고 따위는 전혀 문제될 것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오만 생김새의 사람들이 가게며 가판대에서 시끌거리며 붐비고 있었으니까.
몸이 재생되는 느낌과 그에 더불어 치유됨에 따라 느껴지는 고통 같은 건 없었다. 질끈 감은 눈을 떠보자니 낯선 숲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조종하듯 '도시'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도시는 도대체 어디길래, 또한 이곳은 어디길래. 따듯하고도 서늘한 느낌이 몸을 기분 좋게 감쌌으나 중요한 것은 어색하고도 낯선 느낌이었다. 봄과 가을 그 사이의 것이 물씬 느껴지는 숲에서 나오니 자신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 '도시'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한 곳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나,
나는 도시로 가야 해.
그 누가 묻지도 않았으나 계속 들었던 느낌. 누군가가 조종하고 또 지배하는 듯한 이 느낌. 이질감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의심할 뿐이고 그에 대치되는 도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드는 것에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러나 도시로 들어섰을 때는 무언가 달랐다. 미묘한 느낌. 그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아주 잠깐 동안 저항감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착각일 수도 있을 정도로 짧디짧았던 시간. 과연 이 도시는 안전한 것인가.
자신을 부러 끌어들이려는 것도 도시에 무언가 있기 때문인 걸까.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도시에 들어선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억을 되돌아 보자. 자신은 '고향'의 세계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의 연유를 알아가기 위해 이곳저곳을 탐사하고 서적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세계인 이곳에, 느닷없이 숲속에 떨어진 것이다. 아프지 않았으니 떨어졌다고 볼 수 있을진 몰랐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숲에 누워 있었으니.
과연 이곳은 안전한 곳인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던 그 세계보다는 안전했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을 품고 도시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문명의 발전은 지성체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시작된다. 개체들이 집단을 이루어 떠돌던 삶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본격적인 문명이 탄생할 초석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에도 충분한 발전을 이룬 최소한 국가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이 도시 하나 정도의 규모더라도 중앙의 통치기구가 존재한다면 국가의 형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국가의 정의 자체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문명의 세계에 살다온 내가 문명에게 이끌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리라.
숲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이엘프의 아종이라곤 하나 어쨌든 엘프의 한 분파, 익숙하지 않은 숲이라고 해도 방향을 찾는 것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떨어질때 봤던 숲의 풍경에선 침엽수도 보였던것 같았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있을때 잠깐 보였던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정작 이곳엔 침엽수는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곳은 이곳과는 날씨가 다르다는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온화한 곳에 떨어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에 강하다곤 하지만 이런 복장으론 혹한을 견디기엔 무리가 있다.
" 꽤나 거대해보이네요. "
숲을 빠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도시로 향하는듯한 길을 발견했다. 잘 닦여있는 도로 같은 느낌이라 이 문명의 발전 수준을 한 단계 올려서 생각하기로 했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고서 좀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도시의 입구가 보이는듯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듯한 이 도시는 입구부터 붐비는 모양새였다. 규모로 보아하니 교역의 중심지거나 국가의 수도 정도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다는 것은 정보를 얻기에도 쉽다는 말이기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즐거움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
이러니 저러니해도 나는 본래가 학자 출신이었다. 그러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나에겐 훌륭한 원동력이나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새로운 곳에 온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주민들에게 정보 수집을 하는 것이니 간만에 할 것이 가득 생겼다는 생각에 힘차게 도시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느껴진 기시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무언가를 날 밀어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세계 사람에 대한 세계의 본능적인 거부? 그렇다기엔 숲에 떨어질땐 일부러 안전하게 착지까지 할 수 있었으니 그쪽은 아닌듯한데. '
도시를 딱 들어설때 느껴진 것이니 도시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보통 도시를 둘러싸는 것은 방어용 장치일 가능성이 높은데 물리적인 방벽 기능을 한다면 이런 기시감을 줄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한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 스캐닝 기능이 동작하고 있는건가? '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선 자동으로 신원을 스캔하는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도시를 몇번 나갔다 들어온게 아니니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지금 가진 정보로 할 수 있는 추측은 이게 전부였다. 허나 이젠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도시에 들어왔고 수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알아갈 수 있다. 그것만이 지금의 나, 라클레시아 테시어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 가볼까? "
무엇이 되었든 내가 살던 세계보단 흥미롭겠지. 그것 하나만으로 이 발걸음의 의미는 충분했다.
1. 일상은 10번의 핑퐁을 기준으로 비타 2개를 지급한다. 그 후 5번을 기점으로 비타의 갯수가 한 개 씩 늘어난다. (예: 27 핑퐁 시 5개의 비타 지급) 2. 독백은 공백포함 1천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1천자 미만은 1개, 1천자 이상 2천자 미만은 2개 식. 3. 미션 작성 시 주어지는 비타는 매 미션마다 다르다. 미션 보상을 확인할 것. 4. 소지 비타 계산은 각자가 하되, 이벤트로 지급되는 포인트는 캡틴이 한다. 5. 비타 지급 방식을 악용할 경우 강경 대처를 할 예정이니 주의 바람.
소지 비타 : 일상, 독백 등 활동을 하여 레스주가 직접 기입하는 부분 추가 비타 : 이벤트 등으로 인해 캡틴이 지급해주는 비타(캡틴만 작성) 총 소지 비타 : 소지 비타와 추가 비타를 합친 것. 건드리지 않아도 자동 설정 됨.
너무 길었다. 너무 길었어. 위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길을 다 알기가 어려워서─ 또 더러운 길은 무작정 피하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예상을 한참 더 초과해버렸다.
”… 그래도 덕분에 많이 더러워지지는 않았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 그 썩은 물에 발이 빠진 시점에서 나의 판정패였다. 우우… 지금도 발가락 사이사이가 찝찝해. 지워지지 않는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발을 오므라 뜨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다. 아니─ 됐다 됐어─ 연연하지 말자. 이미 지난 일이야. 통신선만 확보되면 더는 이런 오지에서 고생할 필요도 없어. 공방으로 돌아가서 선생님께 오버홀을 부탁해야지. 여기서 묻은 더러움을 싹─ 다 지워달라고 하자.
결벽적인 상상으로 정신이 들뜬다. 들뜨려는데─ 현실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어 왔다. 뭐야 저게… 오지 사람들은 전부 다 저런 거적때기를 입고 다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들은 적 있다. 어떤 보호 지구에서는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를 일체 삼가고 자연 속에서 채집과 사냥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지.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의체를 비롯해 Hi의 조력은 물론─ 마더로부터 제공되는 모든 인권 보장 혜택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던데. 혹시─ 저 사람들이?
요즘 시대에 반기술주의라니─ 참 삐딱한 녀석들이다 비웃었는데. 막상 만나려니까 두려움이 앞선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Hi를 혐오한다고 들었다. 실수로라도 Hi가 지구 내부로 들어오면 철저하게 때려 부수고 고철로 만든다던데. 으…… 소름이 끼친다.
정말 저들과 접촉해도 되는 걸까? 조금 더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망설임이 판단에 군살을 붙인다.
여기는 못 본 걸로 하고 다른 곳이나 더 찾아보는 게 어때. 사람들이 여기만 모여 살라는 법도 없잖아. 나는 저런 원시인들 말고 문명화된 세련된 시민들과 만나고 싶어.
내가 만들지 않은 생명의 소리가 인공두뇌를 딱따구리처럼 괴롭혔다.
아니─ 아니 될 말씀이다. 남은 동력이 많지도 않은데 그럴 여유가 어딨어. 무작정 걷다 힘 빠져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가 견인해 주기라도 한대?
거기다. 내가 직접 Hi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저 원시인들이 내가 Hi인지 어떻게 알겠어. 자신의 성능에 자부심을 가지자.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지.
”… 좋아.”
원시인들이 닦아놓은 길 위로 나를 올려놓는다. 괴담 같은 소문 때문에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지만 묘한 이끌림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는 걸까. 흥분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포장도로 위로 작지만 큰 한 걸음을 뗀다.
”… 뭐야 이 애송이는? 어디서 온 거냐? 혼자서 온 거냐?”
”숲에서 왔어. 혼자서 왔지. 당신은?”
”켁── 보면 모르겠냐, 위병이다. 이 더럽게 큰 문을 지키고 있지.”
”… 그렇구나, 당신, 부모님은 있어?”
”뭐? 무슨 뜻이냐?”
”부모님이 계시냐구.”
”…… 진짜 무슨 뜻이냐고.”
호기심에 질문 한 번 해본 건데 왜 저렇게 난처한 표정을 지어?
원시인들의 생각은 도통 모르겠다. 침략을 불허하는 높은 성벽 아래─ 생각지도 못한 낯선 아저씨와 시간을 낭비하게 되자 좋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빠르게 가까워오는 땅을 뜬 눈으로 바라보며 전신으로 느끼는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꿈속이라 아프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심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긴장과 공포에 낙하산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추락했던 이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이미 충돌하고도 남았을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일말의 충격도 고통도 없이 세상은 그저 고요했다. 은연중에 잠에서 깨어날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핏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 쨍하게 내리쏘는 불빛과 몸속에 흘러들던 기분 나쁜 액체. 밖에서 내가 깨어나지 못하도록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겠지. 하기야, 깨어나면 혼자서 뭘 어쩔 건데.
이대로 영영 꿈속을 헤매게 되는 것인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눈꺼풀에 감각이 살아있어,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상하반전된 시야에 한가득 들어오는 것은 푸릇푸릇한 풀밭. 지상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격 되어있음을 인지하자 별안간 시야가 가라앉았다. 고작 주먹 하나 정도의 높이였지만 머리부터 그대로 곤두박질을 치니 여간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으윽..."
이상했다. 꿈속이라 아플 리가 없는데 엄청 아프다. 땅에 코를 처박고 있으니 부드러운 흙냄새와 물젖어 약간 비릿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반대로 뒤집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언제 보았는지 모를 새파란 하늘, 느리게 유영하는 하얀 뭉게구름,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쪼개져 비쳐드는 다사로운 햇살. 잠자코 있으면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새겨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 폐기 처분의 대가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일지 모른다고. 높으신 분들이 일말의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닐까 하고. 솔직히, 돌아가기 싫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처절한 싸움, 회색 하늘과 동식물 하나 없이 메마른 땅덩이. 마물 죽이는 것도 사람 죽어가는 것도 더는 싫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선임도 이곳에 와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가만히 드러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영영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양 팔이 억압된 채 뒤뚱거리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넓게 둘러보았다. 저 멀리, 사방을 둘러싼 숲 너머로 높다란 성벽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곳으로 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을 정면에 두고 길 없는 숲을 무작정 걸었다. 해가 등 뒤에서부터 조금씩 넘어오고 있으니 동에서 서로 향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보다 이 답답한 구속을 먼저 풀어내고 싶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몸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꿈속이라 그런지 마력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땅에서 마력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튼튼한 몸뚱어리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이익...!"
꿈속이니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양 팔에 힘을 주고 주고 또 주었다. 꿈인데도 숨이 차오르고 정수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십 분 정도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을까. 오기가 들어 온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는데.
찌지지직—
무언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귀에 들리는 것은 구속복이 찢어지는 소리 하나만이 아니었다. 다른 괴상한 소리가 머릿속에 함께 울려댔단 말이다. 결국 자유로워진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땅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찌이이이— 하는 소리는 한동안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려댔다. 마치 두개골에 트라이앵글을 박아 넣고 연달아 때려대는 듯한 괴로운 감각이었다.
한동안 몸을 웅크리고 어깨를 덜덜 떨었다. 입마개가 침으로 범벅이다. 소음이 겨우 잦아들고, 목덜미를 더듬거려 입마개를 풀었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야 좀 숨 쉬는 것 같았다. 방금 있었던 일을 되짚으면,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얼추 알 것 같았다. 본래 사용하던 마력은 일절 사용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강한 힘을 낼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이런 식이라는 것.
"하... 이게 뭔 꼴이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푸념해 봐야 무슨 소용이람. 방금의 힘을 쓰면 발목에 채인 족쇄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머리가 깨어질 듯한 이명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어서 포기했다. 그렇게, 왼쪽 발목의 족쇄와 쇠사슬로 이어진 커다란 쇠공을 질질 끌며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숲을 빠져나오면 일종의 교역로처럼 보이는 멀끔한 도로가 나타난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시선을 죽 옮겨놓으면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성문 같은 것이 보인다. 그곳으로 낯선 복식의 사람들이 복작하게 왕래하고 있다. 흰 구속복의 양 소매는 너덜너덜하게 찢겨 늘어져 있고, 맨발에다, 한쪽 발목엔 족쇄까지 차고 있는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내 꿈인데 뭐 어떠냐 싶어 별생각 없이 주위를 지나는 짐마차를 뒤따라 도시로 향했다.
위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관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쪽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태연히 관문 너머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덜컥.
심장이 붕 떠오르는 섬뜩한 느낌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은 첫 모형탑 훈련에서, 몸에 묶은 줄 하나에만 의지한 채 안전장치 하나 없는 땅바닥으로 몸을 내던졌을 때의 감각을 닮았다. 주저앉듯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엔 묘한 안도감과 해방감이 어깨를 감싸와, 찔끔 새어난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서 도시 안쪽으로 어색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최소 수십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하늘에서 추락하였고, 마법이나 신성력의 도움도 없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살아 남았다
이것은 아무리 튼튼한 제 육신이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며, 그리고 애당초 어째서 하늘에서 추락하였는가. 그것에 대해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망할 마법사 자식아!!! 나를 놀려 먹는게 그렇게 즐겁더냐!?"
바로 자신의 동료중 한 명인 대마법사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 물론 그녀 본인은 굳이 그런 장난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였기에 분명, 또다른 동료이자 어린 정령과 맞먹는 장난꾸러기인 엘프 궁수의 의견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라고 확신을 내렸던 그였으나
"...어이, 이제 장난은 그만치고 나오라고? 지금 나오면 머리 한 번 쥐어박는 걸로 용서해줄 테니까! ...이래도 안 나와? 그럼 그냥 용서해줄게! 나 이거 진짜 재미 없다? 농담 아니야!!!"
아무리 제 동료들을 불러봐도 돌아 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그제야 그는 또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마법에 의한 공간 이동은 아닐거다. 싸가지가 조금 없어도 나름 대마법사 딱지 달고있는 그녀가 결계로 막아둔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 어떤 마법사가 나를 눈치 챌 사이도 없이 공간이동 시키겠어? 이미 진작에 뼛조각 하나 하나 확실하게 정화시킨, 나와 동료가 토벌한 마경의 마왕 중 하나였던 리치왕이 기어코 여신의 심판장에서 빠져나와 우리에게 복수를 위해 찾아왔다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공간 이동 마법은 아닐거라 확정짓자, 그의 생각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럼 혹시 환술? 이렇게 감각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는 환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고있지만, 망할 몽마왕이라면 불가능은 아니겠지. 아니, 하지만 그놈은 마경 사이에 쳐둔 신성 결계 때문에 나오지도 못하고 애당초 이런 환영을 보여주지 않을 텐데? 이상하다는 것을 뻔히 눈치 챌 수 있는 환영 따위를 그 사람의 생명력이나 빨아먹는 모기 같은 몽마 주제에 자존감 하나는 더럽게 높은 녀석이 사용할리가.'
그러니 이것은 환각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이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
"아, 몰라!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이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안 어울려! 이런 건 마법사나 용사 녀석이 하던 일이라고!"
이내 자신은 원래 생각 같은거 안 하는 타입이라며 일단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정한 그였다
'일단 하늘에서 봤듯이 이곳은 숲속이군. 하지만 그렇게 깊지도 않고 사람의 흔적도 있는 것이 방향만 잘 찾으면 마을이나 도시가 나오겠어.'
이윽고 능숙하게 주변을 파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
"가기 전에...그래, 이 바위가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군."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튼튼해 보이는 바위와 같은 제질의 창을 만들어내는 그였으나...
"으왁!? 히, 힘이...?"
평소와는 다르게 엄청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이거. 설마 능력 때문에...? 아니 설마, 지금 까지 그런적 없었는데!"
그리고 다시 한 번 창을 만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체력이 떨어졌다
"젠장, 이 능력을 여태까지 쓰면서 이런 패널티 따위는 경험해 본적도 없는데 갑자기 뭐냐고!"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평생을 같이 지내왔던 능력에 살아 생전 처음 겪어보는 패널티가 생긴 것에 점점 더 당황하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하...이게 도대체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군."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도시와 그 도시를 지키는 성벽을 발견했다
'꽤나 커다란 도시로군. 그리고...젠장할, 한 번도 본적 없는 방식의 성벽이잖아!'
이름 높은 모험가로서 위대한 귀족의 저택이나 제국의 황성, 시골 영지의 성벽과 마경 바로 앞에서 인류를 수호하는 성벽을 봐왔고, 심지어는 마경의 마왕성에도 몇 번이고 들어가고, 직접 부서봤던 그였지만 당장 제 앞에 있던 성벽은 그가 전혀 모르는 방식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게 분명하였다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데...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거야? 주점이나 무대에서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시에서나 나오던 또다른 대륙에라도 와버린거냐 나는?"
그는 다시 한 번 골머리를 앓고 성벽으로 들어간다
'으윽...!? 뭐냐 이 감각은. 마치 마경에 처음 들어갔을 때 느꼈던 본능 단위의 거부감이...! ...? 뭐야. 바로 사라졌잖아? 착각, 이었나? 일단은 주의할 필요는 있겠군.'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메구무는 순간 아차, 하며 자신이 짊어진 짐 중 유난히 눈에 띄는 대태도를 꺼내어 어디 망가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는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검날엔 메구무 또래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성의 얼굴이 비춰졌다. 다만 눈을 감고 있었기에 메구무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검날 속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호타루, 호타루! 니 괘안나?"
그 목소리에 검날 속 남성 '호타루'는 눈을 떴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부른 메구무와 그 주변 풍경을 훑어보던 호타루는 메구무에게 물었다.
「...먼일이고? 근데 여긴 어디고? 숲 아이가? 언제 여까지 왔노?」
메구무는 호타루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호타루 역시 상황파악이 덜 된(사실 덜 된 수준도 아니고 아예 안 된 수준이지만) 것을 알고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그간 있던 일을 호타루에게 모두 말했다.
「그니까, 하늘에서 널쪘는데 어디 다친 곳도 읎고 디지지도 않았다는 거제? 사실 우리 싹 다 디진거 아이가? 여는 머 극락이고.」 "내가 그 생각 안 해본 줄 아나? 내도 했다. 글고 우리가 극락을 어뜨케 가노. 허구헌 날 하는 기 칼질인데." 「문디자슥. 내는 거서 빼라. 내는 극락왕생할기다.」 "확 그냥 뿐질러부까... 암튼... 우리는 어데던 가야한다."
나무에 기대어 호타루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메구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찬찬히 살폈다. 어쨌든 주변엔 사람이 살 것이다. 그것이 수십 명 규모의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할지라도. 숲이 있는 곳 근처엔 벌목꾼과 사냥꾼, 나무꾼이 살테니깐. 그리고 얼만큼 걸었을까. 시냇물을 건너고, 수풀을 헤쳐나가던 메구무와 호타루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큰 성벽을 마주했다.
"니 이런 거 본 적 있나?" 「있겠나? 생각을 해봐라.」 "맞나." 「그치만... 여서 머라도 건질 수 있지 않겠나?」
호타루의 말에 메구무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성벽 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마치고 도시에 들어섰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인 수준의 거부감이 느껴져 메구무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의 감각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의심했다.
─여차저차 해서 추락 간신히 마친 소녀. 불시착한 장소는 울창한 숲 펼쳐진 곳이다. 여기도 나무, 저기도 나무, 온통 나무... 눈 씻고 주변 둘러보아도 소녀가 지내던 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었다. 애초에 어떤 도시의 일부라거나, 하는 곳도 아닌 것 같았다.
"여기, 어디...?"
어떻게 된 건지 상황 채 파악하기도 전에─ 소녀의 얼굴이 점점 울상 되어간다. 내, 내 스마트폰이랑, 컴퓨터랑, 플스랑, 스위치는...? 다 없어진 거야? 안락한 보금자리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소녀는 절망한다. 간신히 일으켰던 몸 다시 털썩 주저앉힌 채. "...흐아앙."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서, 결국 소리내어 울고 만다. 소매로 눈가 문지르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길 잃은 아이마냥 하염없이 울다가,
"꺅!"
돌연 소리를 꽥 질렀다. 조그만 새가 포르르 날아와 제 무릎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비명소리에 깜짝 놀란 새는 다시금 날아가버린다. 온통 생소한 것 투성이라 덜컥 겁부터 났다. 화면 너머로 경험한 건 많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그럼에도 소녀는 눈가 닦고서 의연하게 일어나려 노력한다.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잖아. 어디든지 가봐야 한다. 설령 이곳이, 자신의 안식처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걸었을까, 시야에 인위적인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마을? 인간들이 사는 곳일까? 그치만 사람, 너무 많으면 무서운데... 그럼에도 소녀는 한 발짝 내딛어보기로 했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도 없다. 다시 얼마간 걷고 조금은 머뭇거리며 마을─도시에 진입하려는 순간.
"...히끅."
처음 맞닥뜨리는 이질감에 당황한 소녀, 딸꾹질 한 번 한다. 자신을 거부하듯 밀어내는 것이 아주 잠깐이나마 느껴졌으니까. 일종의 저항감. 기이하게도 제가 하계에 봉인당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별로 유쾌하진 않은 회상.
라클레시아의 안내로 묵기 시작한 (물론 소녀는 잠을 잘 필요가 없지만) 여관의 주인, 마시는 무척이나 친근한 사람이었다. 특히 자기 집 알바생의 친구 일행이라며 잘 챙겨주기도 했고. 라클레시아는 역시 친구가 많아. 여관 생활은 소녀에게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방에 컴퓨터나 게임기가 없는 건 좀 슬프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이 있었으니까!
"...응?"
여느 때처럼 식당에서 스튜를 흡입하던 소녀, 마시의 말에 숟가락을 멈춘다. 듣자하니 그녀는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헌데 중앙을 지키는 경비원이라면... 소녀는 괜히 그쪽으로 향했다가 고압적인 경비들에게 위협(?)당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일을 계기로 경비병은 사실 무서운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걸 깨닫기도 했고. 게임에선 무릎에 화살이나 맞고 다니는 NPC였는데...
"어... 아, 알았어. 내가 할게!"
그렇지만 마시의 심부름을 차마 거절하진 못한다.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매몰차게 내칠 수도 없었으니까. 스튜를 전부 들이킨 소녀는 마시가 준 바구니 든 채 여관을 나선다. 그리고...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을 뻔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다행히 바구니 속의 내용물은 무사했다), 아무튼 여러 고행을 겪은 끝에 소녀는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래놓고서도 쭈뼛거리며 근처를 서성이던 소녀를 향해, 한 경비병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힉!"
소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또, 또 혼나는 거야? 지금은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경비병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시 씨가 보내서 왔는감?" 소녀를 향해 말을 건네었다. 머리 감싼 채 두 눈 질끈 감은 소녀, 의외의 반응에 조심스레 눈 뜬다.
"...아? 어, 어. 응. 마시가 보내서..."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소녀가 만난 경비병은 상상과 달리 무척이나 친절했다. 부탁받은 음식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소녀는 빈 바구니 든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려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다녀왔어, 마시~!"
소녀는 재빨리 마시에게로 달려가,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보고했다. 왠지 모르게 한 단계 성장한 듯한 느낌 들어 기분이 좋았다. 방구석 히키코모리, 레벨 업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푸른빛을 띄는 어떤 것. 이렇게 작은 것들이 말을 하면 통상 요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들이 이 세계에선 어떤 식으로 불리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요정이라고 칭하겠다. 갑자기 나타난 요정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고선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엔 붉은 빛으로 변했었는데 결국 요정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였던것 같다.
「경배하라, 찬양하라! ■■■의 방문이다!」
하지만 누가 방문하는지는 마치 그 부분만 소리가 막힌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허나 고해, 수사, 죽음이라는 수사가 붙는 존재라는 것은 적어도 이득이 되는 존재는 아닌듯 싶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이런 말을 들었음에도 이곳의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의 눈 앞에도 요정들이 날아다녔기에 분명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귀찮다는 기색조차 없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 실례합니다만, 혹시 눈 앞을 날아다니는 파란 것들을 방금 보셨나요? " " 아무것도 없었는데, 형씨 대낮부터 술이라도 마신게야? "
인상이 호쾌한 아저씨는 이 시간부터 그러면 못써~ 하면서 내 등을 한대 툭 치고 지나갔다. 아마 요정이라고 생각되는 그것들을 아예 보지 못한듯 싶었다. 그렇다면 내 눈에만 보였다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나에게도 목소리와 모습은 들렸을지언정 특정 단어까진 들리지 않았다. 어떤 조건이 있고 그것을 만족해야만 요정들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과 나와 다른 점은 역시,
" 추락의 유무인가. "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말고 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동일한 현상이 보였을지? 그건 윈터나 알레프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을듯 싶다. 하지만 그 전에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딘가 알려진게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추락자라는게 그렇게 흔하진 않은 것 같지만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은 이전에 다른 추락자들도 비슷하게 오지 않았을까하는 합리적인 추론까진 가능하게 해준다.
" 도서관에 가볼까. "
정보는 보통 기록으로 남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구전으로 전한 것이라고해도 언젠간 기록으로 남기게 되니까. 그리고 그런 기록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은 도서관이다. 물론 도서관은 그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원하는 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책들을 대충 훑어보았을때도 그 내용 자체를 기억하는 것은 쉬우니 단편적인 정보를 모아서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일도 쉽다. 그렇기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 책을 좀 열람하고 싶은데요. " " 대여는 따로 서류를 작성하셔야하고 책은 내부에서 자유롭게 꺼내 읽으시면 됩니다. "
사서의 안내를 받은 나는 장대한 서고에 작게 감탄하며 책을 하나씩 꺼내 읽어보기로 했다. 물론 소설 같은 것들은 제외하고 이 일대의 역사를 써놓은 책이나 신문 같은 것들을 스크랩 해놓은 자료들을 중심으로 읽어내려갔다.
>>39 라클레시아 테시어 (1회) 라클레시아 테시어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지만, 원하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글자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전 따위를 이용해 해석해 보려고 해도 글쎄요. 글씨가 ■ 따위로 점철되어 있는데 사전이 있다고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요.
몇 권의 책이나 스크랩북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본 책도 ■ 투성이라 알 수 있는 것이 없군요. 라클레시아 테시어가 도로 책장에 책을 꽂아 넣습니다. 툭.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종이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큰 기대 없이 쪽지를 펼쳤던가요. 다행히 이 쪽지는 ■가 아닌, 라클레시아 테시어가 이해할 수 있는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N열 3층 열두 번째]
책의 위치를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다른 곳에서 정보를 찾을지, 책의 위치로 살피러 갈지는 당신의 몫입니다.
때는 아직 이른 점심 때, 스튜 재료가 될 감자며 당근 껍질 벗기길 마치고 아픈 허리춤을 통통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즈음에.
벗긴 껍질을 모아담아 버리러 가는 길에, 마시가 작은 바구니 하나를 건넨다. 이 도시락을 중앙 북쪽 경비원에게 대신 가져다 달라고. 그, ..그럴게요! 물기 젖은 손을 대충 앞치마에 문질러 닦고 도시락을 건네받는데, 문득 저번에 시장 입구 부근에서 마주쳤던 경비원의 시선이 뇌리에 스친다. ..이번에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기껏 바구니를 잘 건네받고선 묘하게 주눅들어하는 기미를 저 쪽도 알아챘는지, 왜 그러니, 니아? 목소리엔 대번에 걱정이 어린다. 무슨 일 있니? 힘들면 굳이 안 나가도 돼. 상냥한 말에 으응, 괘, 괜찮아요! 씩씩한 체 대꾸하고 가게를 나섰다. 딸랑.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쾌하게만 울리는 종 소리.
언제든 못 하겠다고 이야기하면 괜찮다고 해 줄 상냥한 마시인 걸 알아. 그치만, 이런 것도 못 해선 마시를 볼 낯이 없으니까.
"...바, 밥값은, 해야지!"
좋았어! 꾹 쥔 주먹으로 혼자 기합을 넣고선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착, 착, 착, 내딛는 발걸음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씩씩함을 담아낸 결과다. 그러고 보니 북쪽엔 아직까지 발걸음을 한 적이 없다. 마시에게 들은 몇몇 단편적인 정보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추운 곳이고, 작은 촌락같은 곳이고, 음, 또....
..그리고, 북쪽에 가면 혹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 큰 길로만 다녀야 한다? 수상한 사람은 피하고.
몇 주 전엔가 들었던 마시의 경고 섞인 조언이 퍼뜩 떠오른다. ........아. 발걸음에 담긴 씩씩함은 대번에 싹 씻겨 내려가고. 툭, 하고 바구니가 떨어진다. 마시가 음식물이 쏟아지지 않게 손을 써 놓은 건, 어쩌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과연, 마시의 말대로 북쪽은 추웠다. 몸이 떨리는 건 분명 추워서 그런 것이다. 결코 중앙 북쪽에 가까워저서 두려운 마음에 다리가 벌벌 떨리는 건 절대 아니고, 제대로 갖춰입고 오지 못 해서, 추워서 그런 거야. 으, 으으, 으으으, 이제는 끈적이는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잘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는 다리를 연약한 의지로나마 질질 끌고, 코 앞에 도착했다. 몇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낸 길에 따르면, 이제 이 모퉁이만 돌면 중앙의 북쪽 관문 앞이다. 벽 너머로 염탐하듯이 고개만 디밀어 목적지를 살핀다. ...앗! 생각한 것보다 더 가까이에 경비원이 있어서, 눈이라도 마주칠까 디밀었던 고개를 얼른 빼 버리고 말았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아서 지, 지지, 진정해, 진정해, 수십 번 정도는 되뇌이고 난 뒤에야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 경비원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어쩌면 이제 스튜는 따듯한 스튜가 아닐 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이, 이거.. 포, 포르시티아에서, 요."
점점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잔뜩 경계를 더해가는 경비원에게 주뼛주뼛 다가가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또 눈물이 찔끔 날까 봐 일부러 고개는 들지 않았다. 바구니를 건네받은 경비원이 갑자기 사근사근해지거나,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일은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게 대금은 후에 가게에 가서 치르겠습니다, 따위의 얘기를 할 뿐이었다. 어쩐지 초조한 마음에 로브 앞자락을 계속해서 쥐었다 피는 걸 경비원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네, 네, ...그럼 이, 이, 이만.."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모퉁이를 돌 때까지 경비원의 시선이 따갑게 뒷통수에 박혀오는 것만 같았다. 도시 동쪽으로 향하는 관문을 통과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쉴 새 없이 구겨지기를 반복한 로브자락이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무서웠지만 그래도 끝냈으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어쩐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한적하고도 아무런 할 일이 없어 지루하던 때. 그는 여지껏 남을 돕고 방을 빌려 하룻밤을 지내는 나날을 보냈다. 너무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손을 빌려 주지 않으면 심심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보통 심히 일하면 지쳐서 쉬고 싶어 하지 않냐 하느냐마는, 그가 누구인가. 정통 흡혈귀는 지치지 않는다. 워낙 체력이 왕성하다 보니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왔고, 그것들이 나타났다.
■■■니 뭐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이상하고도 신비롭고도 부정적인 존재임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 추측하건대, 그것의 존재는 강력하고도 지배력이 방대한 누군가였을 것이며 봉인 같은 거라도 당했던 것 같기도 했다. 단순한 추측에 비롯된 것이지마는. 어쩌면 잠시 지나가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죽음으로 고해하며 사죄하라는 것인가? 공포로 억압하는 존재인 것인가. 뭐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강 윤곽이 잡혔다.
그렇다면 이상한 요정 같은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알아 볼까?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마을에 오래 지냈다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혹은 상인, 도서관에서 고서를 찾아 보아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유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무척이나 좋네요."
"그렇지. 이런 날씨면 밖에 나오기 딱 좋다네. 그건 그렇고 무슨 용건인가?"
"다름이 아니고 요정에 관련해서 말이지요. 이곳에 존재라도 합니까?"
"글쎄다. 내가 나이 90을 먹고도 이곳에서 요정이라고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확실히, 이곳에 요정은 없어. 소설 속에 존재한다면 몰라도."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것의 존재는 무엇이지. 확실히, 요정이라기에는 흔히들 말하는 개념의 그것보다 사악해 보이기는 했다.
>>43 니아 니아가 다시 여관으로 돌아옵니다. 마시는 고생했다며 무언가를 건넵니다. 비타 +1.
>>44 유이 노인이 떠나갑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저 노인보다 더 나이를 먹은 사람을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요?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아는 것이 없는 지금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대여섯살 쯤 된 아이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칼을 들고 우르르 뛰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들은 용사니 마왕이니 같은 장난을 치며 와하하 웃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미소는 보물이라고 했던가요. 저런 해맑은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이 괜히 나온 것만은 아닐 겁니다. 웃는 아이들 사이로 빛무리 같은 것들이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합니다. 어쩐지 요정과 비슷하게 여겨지네요. 아이들이 멀어집니다. 어떻게 할까요? 저게 정말 요정이라면 말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이런, 그새 또 잠들어버렸나. 넓은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풀밭에서 무어라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던 윈터는 이상한 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어. 하늘을 올려보면 아직 해님이 저물진 않았고, 라크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으며 해 질 녘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던 소년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자연이 내쉬는 숨이 아니라서, 졸린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면 푸르게 빛나는 님프들이 포르르 날아다니고 있어. 그것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의미를 정의할 수 없는 단어가 귀에 들려와. "■■■" 하면서. 윈터가 아는 정령은 경이롭고 순수한 자연물에 가까웠는데, 이것들은 고해니 사죄니 죽음의 공포니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것이 무슨 광신도 같았단 말이야. 대놓고 들어라고 하는 말인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아리송한 윈터가 날벌레처럼 주변을 맴도는 존재들 중 하나에게로 손을 뻗어 잡아보려 했지만, 그것은 손에 잡히는 감각 없이 버섯이 포자를 내뿜을 때처럼 뿌옇게 먼지가 되어 흩어지더니 이내 다시 모여들어 똑같은 형체로 되돌아와.
"야. 잠깐만. ■■■이 도대체 뭔데?"
윈터는 그 단어의 의미를 정의할 수 없었지만, 귀에 들려온 그대로의 발음을 따라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어. 아무래도 자신과 다른 이들이 이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 푸른 존재는 다급하게 뛰어가는 윈터를 슬쩍 돌아보며 얄궂은 미소를 흘리고서 정면을 높게 가로막은 성벽을 그대로 투과해 사라져 버리고 말아.
"대체 뭐냐고..."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 버린 푸른 존재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윈터의 눈에 성벽 근처에 작은 토끼 굴 같은 것이 들어와. 기다란 토끼 귀를 가진 어려 보이는 수인이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어. 아무래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지. 어쩌면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부터. 윈터가 성큼성큼 다가가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끼 소녀. 윈터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소녀를 내려다보았어. 영원이를 만났을 때의 미묘한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소녀는 이 세계의 원래 주민이겠지.
"꼬마야. 너도 방금 봤지? 저 하루살이 같은 것들. 혹시 ■■■이 뭔지 알고 있니?"
윈터는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려 하면서 최대한 귀에 들었던 단어를 흉내 내어 발음해 보았어.
도시에서 하나뿐이라던 여관이 이곳인가- 윈터는 여관 근처를 서성이며 건물을 구경하고 있었어. 이 도시는 딱히 관광지 같지도 않았고 추락자 같은 외부인도 드물어 보였으니까 여관 같은 숙소가 하나뿐인 것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지. 지금 당장은 이곳의 화폐가 없지만,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이 여기겠구나 생각하며 멍하니 뺨을 긁적이는 윈터를 누군가가 불러 세워. 여관 안에서 나온 여성은 윈터에게 웬 바구니를 내밀어 보이며 작은 부탁을 했어.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아무것도 입에 삼키지 못한 윈터여서 바구니 안에서부터 흘러나는 맛있는 냄새에 더 침이 고였는지도 몰라.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라크와 잠시 동행하며, 주민들의 부탁을 들어주면 그들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담담하게 여성의 의뢰를 수락하는 윈터였어. 도시의 중앙으로 향하는 길목은 치안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익숙한 도시 외곽의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어.
언제 또 뒤를 따라왔는지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릴 것 같은 양아치 놈들과 자그마한 소란이 있었지만, 바구니에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걸까, 안에 든 음식은 쏟아지는 일은 없었어.
그렇게 성벽을 따라 걸어서 도착한 북쪽 관문엔 처음 도시에 들어올 때에 보았던 것처럼 두 사람의 위병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가 의뢰자가 말한 병사인지 알아야 말이지.
"야. 마을 여관에서 누가 이거 갖다 주라던데."
윈터는 두 병사 사이에 대뜸 바구니를 내밀 뿐이었어. 여성이 평소에도 도시락을 챙겨준다 했으니까, 알아서 받아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처음 들어온 동쪽과 달리 북쪽 관문은 분위기가 좀 더 무겁고 경계가 삼엄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딱딱하게 자세를 잡고 있던 위병 중 하나가 머뭇거리더니 주위를 지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자세를 풀고 윈터에게 다가와 바구니를 받아 들며 순박하게 미소 지었어. 고맙다고.
"뭐... 고생하라고."
한 집단의 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누구보다 잘 아는 윈터였기에, 그냥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주고서 발길을 돌렸어. 위병은 의뢰를 부탁한 여성의 아들일까 같은 당연한 생각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여관으로 돌아온 윈터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지.
"다녀왔어."
여전히 분주해 보이는 여관.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겨와서 배가 꼬르륵... 마침 주방에서 나온 여성이 윈터를 반겨주었어.
"바빠 보이네... 보상은 됐고. 여기서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보다시피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거든."
무언가 이상하다. 내가 고른 책들은 전부 읽을 수 없었다. 문자가 있고 그것이 해석이 안되어서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자가 어떤 모양도 보일 수 없게 ■■■처럼 표시 되어 있었다. 무언가 글자가 보이고 해석이 되지 않는거라면 사전 같은걸 이용해서 조금씩 해석이라도 되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 혹여 인쇄가 잘못된 것인가 싶어 다른 것들도 읽어보았지만 마찬가지.
" 이건 읽는 행위 자체를 막아버리는 느낌인데 ... "
분명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는 이곳의 언어를 하나도 모름에도 듣는데에 이상이 없었고 말하는데에도 지장이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추락자들끼리도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었으니까. 길거리에 써있는 간판들도 의미 정도는 바로바로 알아챌 수 있었는데 이런 기록물들만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열람을 막고 있다는 것으로 밖엔 해석이 되질 않았다.
" 도서관은 소득이 없는... "
망연자실하여 꺼내들었던 책을 꽂아넣었다. 그 순간 바닥으로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정갈하게 잘 접혀있는 그 쪽지는 겉으로는 특별한게 없어보였지만 왜인지 내용을 읽고싶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쪽지여도 어쩔 수 없다. 이런 곳에 꽂아둔 본인을 원망하는 수 밖에. 무슨 내용이 있을지 약간의 기대를 담아 쪽지를 펴본다.
'N열 3층 열두 번째'
읽을 수 없는 책에서 나온 쪽지는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작성 되어 있었다. 책을 펼쳐볼때도 보이지 않았던 쪽지인데 갑자기 떨어져서는 어느 책의 위치만 알려주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별거 아니겠지 하고 넘겼을 정도의 내용이지만 이번에는 그곳에 있는 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디보자 N열 3층 열두번째 ... "
나는 근처에서 발받침대를 가져와 올라가서 해당되는 구역으로 가서 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표지에도 별 내용이 없는 것 같고 겉보기엔 평범한 책인데 굳이 쪽지가 이걸 가리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말없이 책을 펼쳐들었다.
>>46 윈터 토끼 소녀는 윈터를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경계인 듯 싶지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는 윈터의 행동에 토끼 소녀가 굴 입구 쪽의 애매한 위치로 자신의 몸을 숨깁니다.
어둠 속에서 토끼 소녀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 같습니다. 토끼 소녀가 입을 엽니다.
“삐—————————.”
순간, 긴 이명이 윈터의 머리를 헤집습니다. 토끼 소녀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명이 너무나 길고 시끄러운데다가 고통스러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윽고 토끼 소녀는 굴 깊은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윈터 뿐이네요.
>>47 윈터 마시는 윈터의 말에 도움을 주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곳은 그런 곳이라면서요. 마시가 윈터에게 배고파 보이니 이걸 먹으라며 샌드위치를 건넵니다. 마시의 애정이 담긴 샌드위치 +1.
마시의 애정이 담긴 샌드위치. 마시가 여관에 머무르는 니아를 위해 마음을 담아 만든 샌드위치. 섭취하면 맛있다. 어떤 일이라도 성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48 라클레시아 테시어 (2회) N열 3층 열두 번째에 놓인 책은 너덜너덜한 동화책입니다. 겉표지가 어찌나 닳았는지, 종이 조각이 일어나 지저분합니다. 문득 라클레시아 테시어는 생각합니다. 동화책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은 ‘문자’의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해석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이 책은 두어살 먹은 어린 아이가 읽을 법한 동화책으로 글보다는 그림의 비중이 8할은 되는 책입니다. 물론 이런 동화책에서 어떤 정보를 얻겠냐마는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라클레시아 테시어가 동화책을 펼칩니다. 너덜너덜한 동화책은 낱장이 흐트러져 손을 댈 때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면 확실히, 문자들은 ■ 따위로 보이지만, 그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건 용사와 마왕, 혹은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세계를 침범한 마왕이 세계를 부수려 하자 용사가 나타나 마왕을 물리치고 세계의 안녕을 되찾아왔다는 내용 같습니다. 그리고 이 동화에서 요정—그러니까 그에 준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덩어리들은 용사의 동료로 보입니다. ······잠깐만요. 마왕이 아니라 용사라구요?
요정이 선한 측이라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라클레시아 테시어가 동화책을 닫으면 발 아래에서 비타 한 개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진 몰라도 챙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비타 +1.
나름대로 친절한 손길이었음에도 손이 가까워오자 고개를 홱 하고 피해버리는 것은 역시 짐승다운 행동이었어. 이제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입을 열었는데 머릿속에서 삐- 하고 찢어지는 듯한 이명이 울려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이 꼬맹이가, 약이라도 올리는 건가?
"아- 짜증 나네." ... "너, 거기 딱 기다려."
괜한 오기가 생긴 윈터는 소녀가 사라진 굴 안쪽으로 깊숙이 따라 들어가려 했어. 글쎄, 이어진 곳이 어딘진 몰라도. 무릎을 꿇고 몸을 잔뜩 웅크려서 흙 구멍에 몸을 밀어 넣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