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하우스로 향하는 길, 쫓기는 발소리도 귓가를 가로지르는 바람소리도 모두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런거였나보다.
근 한달여만에 마주한 건물은 여느 때와 같았다. 수년같은 시간을 돌아보며 닿은 감상은 잠시 뒤로 물러둔 채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공연 전 무대는 한산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음향팀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었고 분위기는 뭔가 조금 어수선해서. 얼굴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눌 밴드 멤버들도 전원 바빠 보이는 탓에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마침 건너편으로 걸어오는 소지로씨를 급히 잡아 세웠다.
아저씨는 잠깐 나를 못알아본듯 어딘가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개구쟁이 꼬맹이는 참을성 없이 부쩍 자라버려 추억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때 그 시절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구나.
잠시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피해 소지로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지로씨에게 어머니의 부고를 알리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앞으로 정리해야 할 일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고교 1학년생이 나눌법한 무게는 아니었지만. 좋든 싫든 이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견뎌야했기에. 소년의 표정은 어울리지 않게 차분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휩쓸려온 대화 뭉치에 덮여 있던 일을 꺼내본다. 소년은 알지 못했다. 아저씨의 얼굴에서 잠깐동안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가는 그 의미를. 사고가 나버렸다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버렸다고. 마지못해 이어지는 목소리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표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견뎌내고 있던 무게에 또 다른 깊은 무게감이 내려앉자 머리가 팽 돌아버릴것만 같아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가라앉은 얼굴 틈새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감당할 수 없는 어린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송곳니를 드러내 버렸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소년에겐 낯선 것이라 그 모습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다. 대화 간에 잠깐 침묵이 흐르고. 히데미는 소지로씨에게 감정을 눌러담지 못한 실수를 사과한다.
"아저씨, 우리 사귀고 있어예. 야요이 누나야랑 저."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히데미는 생각했다.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반나절 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네. 병원 로비, 안내데스크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지나치며 승강기에 올라 복도를 지난다. 내딛는 발자국 하나하나에 되살아나는 기억.
병실 한켠에 이르러 공백으로 남은 이름표 자리엔 아직도 엄마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은 것만 같다. 내부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창틈새, 병상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아간다.
바로 옆 호실. 소년은 입구에 걸린 익숙한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당장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이래서야 남자친구 실격이라고. 자조 섞인 웃음이었을테다.
두 손으로 얼굴을 포갠채 괜히 '그아아-' 앓는 소리나 내면서 바보처럼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화를 낼까, 아니면 울어버릴까, 여름 방학까지의 꼬맹이라면 깊게 생각했을 유치한 고민거리가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아, 억수로 파이다, 오늘."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굳게 닫힌 문을 확 열어제낀다. 또박 또박, 힘이 실린 걸음과 그 어느때보다 심술 가득 뾰족한 눈매로. 하지만 창가로 등을 돌리고 있는 야요이 누나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금방 표정이 누그러져선 입술을 오므린다.
"야지마씨..? 오랜만에 뵙네예. 야요이 누나 지금.."
야지마 마키씨, 완벽하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누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밴드 멤버들과 몇번 말을 섞어볼 기회정돈 있었다. 혹시 잠든거냐며, 조심스럽게 작아진 목소리로 제 한쪽 뺨에 두 손을 포개 자는 시늉을 하며 묻는다.
야요이는 의사가 들어와 링거액을 다 맞은것을 확인하고 바늘을 빼는 중에도 아무말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은 이미 한참전에 지나갔는데 어느새 장마가 다시 시작되기라도 한건지 우중충한 가을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것 처럼 흐릿한 물냄새가 났다. 숨을 쉬고있을 뿐이지 시체같은 모습에 야지마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구나. 야요이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그렇게나 아끼는 것도 이해는 갔다.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반응. 한때 이미 겪어보았던 일이니까.
정확히 말해 그때의 아주머니와 지금의 야요이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차-라는 편안한 단어보다는 단순하게 마키는 야요이가 천재이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평범한 인간이랑은 다른 음악의 별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사람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건 아닐까. 아마도 어릴때부터 봐온 탓에 생긴 오지랖이나... 여동생에 대한 일종의 콩깍지같은 것일테지만.
정신력이라기보다는 광신. 일종의 신앙이 아닐까.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신 그날을 기점으로 오늘 하루 기타를 손에 쥐지 못하면 지금 당장 죽어버릴 사람처럼 미친듯이 연습에 매달리는 탓에 학교까지 보내가면서 좀 멀쩡한 생활을 하길 바랬는데. 어쩐지 이제는 좀더 멀어진것 같았다. 아이는 크고 나면 집을 떠난다는걸까. 나이차이는 별로 안나지만. 팬들은 그런 야요이를 흠집조차 나지 않을정도로 강인한 천재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부숴져버린 탓에 사고의 구조가 망가져버렸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이 강한 정신이라고 한다면 더이상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한마디만 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강철같은 정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뿐인 이야기다.
실제로도 야요이는 오늘 하루를 못견디겠다는 것 처럼 방금 전에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거칠게 바늘을 쥐어 뽑은 탓에 이미 한 번 피범벅이 되었고 그 탓에 나는 모처럼 입고온 예쁜 옷에 피를 묻히는 꼴이 되었다. 자가용을 끌고오지 않았으면 불심검문이라도 당했을거야. 그래도 역시 바늘이 피부째로 뜯겨서 피가 흐르는 광경은 보기싫었지만. 나름 최연장자를 담당하다보니 그것도 익숙해지는 참이었다. 이대로 아무일없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다르게 거칠게 열리는 병실의 문을 바라본 나는 당활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자와군이었나? 분명 몇 번 라이브하우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깊은 교류는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야요이를 따라 스튜디오며 라이브하우스를 돌아다니는 모습에 대충 직감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전에는 그냥 팬보이일줄 알았는데 어느순간부터는 사귀고있더라-하는 단순한 일이다. 그보다는 야요이쪽이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이렇게까지 찾아오는구나.
"방금 막 잠든것 같은ㄷ... 귀신같네."
익숙한 목소리에 야요이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한창 피곤할텐데도 남자친구가 와서 그런지 어쩐지 아까 나와 이야기할때보다는 조금 더 밝아보이는 표정에 어쩐지 조금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배시시 웃는 모습에 어쩐지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망가진 고물 인형같은 표정이었는데 이젠 저런 얼굴도 하는구나.
"...뭐 보호자도 왔으니까 난 갈게. 젊은 두사람끼리 잘해봐~"
이럴때는 오래 있는게 더 안좋겠지. 병실에서 나가면서 아이자와군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고보니 별 문제는 없겠지?
"...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키와 이야기할때는 그래도 제대로 나온것 같은데. 그래도 닷새만에 말하는 것 치고는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안만나고 먹지도 않았으니 조금 갈라진 것 같기도 해서 조금 부끄럽네. 어쩌지.
"...한달만인가? 그렇지?"
여름방학이 끝난 이후로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다. 그보다는 내가 연락이 줄어든거겠지만. 페스티벌의 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빴고 여름방학의 마지막은 애초에 아야카미에는 없었다. 서머소닉에 나갔으니까. 끝난후에는 도쿄에서 머물며 인터뷰며 기획사와의 계약이며 하는 통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돌아와서는 경음부 애들의 레슨에... 그리고 지금 스트레스해소를 하다 지금 이상황. ...생각해보니 글러먹은 것 처럼느껴지는데. 고백 직후부터 애인을 방치한게 되나. ...쓰레기 밴드맨맞구나. 조금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게 열때문인지 아닌지도 ㅗㅁ르겠다. 멋쩍게 손을 흔들고 나서야 방금 그사단을 냈던 손이라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감출정도로. 솔직히 말해, 이런저런 감정때문에 조금 화끈해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