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을 떠나는 걸음을 향해 '예, 살펴가이소.' 소년의 짧은 한마디가 이어진다. 카랑카랑 아이 같던 목소리는 설익기 시작해 제법 고교생 다운 분위기가 흘렀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야요이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전보다 좀더 초췌해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르는걸, 어딘가 턱 막힌 목소리에 속 안이 욱씬거려 와락 올라올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야지마씨가 머물렀던 소파 옆에 말없이 앉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따뜻한 시트 위에 허리를 길게 뉘였다. 이어지는 몇마디에 심술이 났는지 도통 눈도 안마주치고 수액걸이에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투명한 팩에 시선을 내다 꽂는다.
"야요이씨, 여전하네. 이래 누워 하는 소리가 마 딸랑 그거가?"
날카롭게 솟아오른 시선만큼 날이 선 말투였다. 불과 여름방학 전의 꼬맹이라면 우와아앙 울며 바보처럼 눈물 콧물이나 펑펑 터트렸을텐데. 이런 꼴이 되어선 고작 한다는 말이 키 컸냐는 말이라니. 울화통이 들끓어 올라오려는걸 수액 한방울마다 곱씹으며 깊은 한숨과 함께 비워낸다. 하필이면 왜 바로 옆 호실이냐고. 익숙한 병실의 풍경 속에 이제는 엄마가 아닌 야요이 누나가 누워있네. 왜 자신 주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아파야 하는걸까. 괜히 서러워서 화가 난 표정으로 열심히 외면했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오늘 들어왔다. 방학때 잠시 일이 생겨가 쫌 멀리 다녀왔네. 머 할말은 아인데.. 일이 너무 많아가, 그간 연락 몬해서 미안하다."
소지로씨에게 이야기 들었다고, 크게 다친건 아니냐고, 노래를 잠시 쉬게 되었다고 또 엉뚱한 짓을 하는건 아니냐고. 묻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 많은 것들을 다 눌러담아 그간 있었던 일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에 조금 딱딱한 얼굴로 사과한다. 집에 닿자마자 걱정이 되어 그렇게 사방팔방 동네 똥개처럼 쏘다니고선. 꽁한 얼굴로 딴청을 부리는 태도가 자기도 답답했는지 다리를 꼰다.
"완전 감옥이겠네. 누나한테 말이다. 키타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병원식도 싱거워가 입에 드가겠나? 평소 밥도 잘 안먹는 사람한테."
뭐가 그리 급한지 무언가를 감추며 바뀌어가는 얼굴 색에 히데미는 자기도 모르게 엄한 표정을 풀어버리고 예전 같이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로 조근조근 말을 이어간다. 이런 반골 밴드녀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었을지 묻지 않아도 대충 알것 같아서 턱을 괴며 바라보는 시선에 걱정이 한가득 담겼다.
"누나야, 야요이 누나야. 내 딴건 안물어볼란다. 그냥, 아프지마라.."
항상 그랬지. 누나랑 나,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단 노래라는 도구를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간질이기만 해서. 비밀 투성이를 나뭇가지로 찔러봐야 괴롭기만 할뿐이라고. 더이상 캐묻지 않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함축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일댈을 이야기하는 것은 히나주였구나. 하지만 나는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라는 이유보다는 히나주도 즐겁게 놀 수 있을 자신이 있다면 그때 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다들 놀자고 모인거지...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상황극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기에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보다는 히나주가 그렇게 놀아서 즐길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줬으면 해.
나는 정말 느긋하게 이어도 상관없어. 솔직히 일댈이면 아무래도 조금 텀을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히나주가 괜찮다고 한다면 나야 아무래도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를 이어가보고 싶어. 꼭 지금의 설정이 아니라 IF 설정식으로 해서 둘이 주종이라던가, 혹은 둘 중에 하나가 신 혹은 요괴라던가 그런 느낌의 다른 관계성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말이야. 혹은 사귀기 전의 좀 더 이런저런 이야기라던가... 사귄 이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있겠지. 좀 더 합의하에 이런저런 사건을 만들어볼수도 있을테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자고 일어났을때의 상황이 참 궁금해지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자고 일어난 후에 역시 조금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줘. 혹시라도 여기서 자고 일어나니까 조금 힘들 것 같다. 라는 말이 나와도 진짜 진짜 원망 안할 거니까.
난 상황극은 기본적으로 즐겁게 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편하게 해주기야!
어쩐지 추궁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 어쩐지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어쩔까. 이번 일은 순수하게 나의 잘못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분명 나는 쓸데 없는 말을 할게 뻔하니까. 얌전히 날카롭게 찔러오는 어두운 감정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망에 넣어둔 물고기처럼 어떻게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제멋대로인 판단이 앞선 탓에 자신만의 ‘특별함’이라는 가치에 빠져버려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이해를 바라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좋게는 봐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관에 가깝다고 본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한참 어린애에게 이름을 부려진 것 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미치광이 노친네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은 그냥 넘겨버릴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괜찮아?”
바쁘다는 말 만으로 무언가를 전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나누기는 했지만, 그 안에 언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서로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비슷한 것 같다던가 아니면 기껏해야 그날 함께 보냈던 여름날의 열기가 식지 않은 탓에 해서는 안될 짓을 해버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런 탓에 그냥 조금 멋쩍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았으니까. 입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색하게 지었던 웃음조차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부분까지 인간과 닮아가고 있구나. 조금은 안심 되었지만, 섬세함의 파편조차 없는 말에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 깰 수 밖에 없다.
우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영원토록 알 수 없겠지만,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잃고 난 이후의 인간의 표정. 나와 마주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던 그런 어둠이 히데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서 말을 돌리는 것은 퍽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흘러서는 안될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쿠당탕――――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바늘이 뽑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피로가 심했던 탓에 걸으려 하니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야했다. 고작해야 이런 일로 이 아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싶지는 않다고, 생각했기에. 겨우겨우 벽을 짚고 일어서서 천천히 히데미를 향해 걸어간다. 이윽고 그 아이의 품으로 넘어지듯이 쓰러지며 가볍게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난 절대 안 죽어.”
있잖아 히데미. 나 말이야. 메이저에 갈거야.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면서까지 올랐던 무대 위로 가기로 했어. 가족을 버리면서 기타를 치러간 남자에게 실망도 했지만, 그만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내가 혐오스럽더라. 아마, 좋은 연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독선적이고 기타가 없으면 아직도 손이 떨리니까.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고통조차 기타를 들지 않으면 제대로 아프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남의 등뒤에 서지 않으면 하고싶은 말조차도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