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긴 여정이었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별을 동경했던 어머니의 흔적은 드넓은 사구로 한뼘 한뼘 흩뿌려졌다. 줄곧 함께 했던 장소였기에 추억이 깃든 이곳을 찾는 것은 그리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가슴 아렸던 시간에 비해 이별은 꽤나 덤덤했다. 언젠가는 겪여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저 빠르게 겪는 것뿐이라고. 무더운 여름날에 찾아온 지독한 성장통은 정말 한숨처럼 지나가버렸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 아야카미로 돌아온 소년은 전보다 조금 성숙해졌다. 개구쟁이 같던 얼굴에는 차분함이 내려앉아서 방정맞던 걸음에 추를 단듯이 닿는 발자국마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고작 한 바구니나 될법한 유품을 손에 들고, 어머니가 계셨던 공간을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기계 소음으로 가득했던 병실은 깔끔하게 비워져 다음 환자를 맞을 준비가 되었다. 소년은 침상 위에 곱게 깔린 매트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윽고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찾은 집안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거의 한달 여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한 거겠지. 유품을 정돈할 새도 없이 창문을 열고 밀린 일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길게 자란 머리를 질끈 묶고, 손가락을 훑기만 해도 한웅큼 잡히는 먼지떼를 하나하나 벗겨내며. 바쁜 일정에 그간 내려놓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어머니와 이곳을 처음 방문해 소지로씨와 인사했던 기억부터 지난 봄과 여름의 이야기들. 잊고 있었네. 모두들 잘 지내고 있을까.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을에 접어든 아야카미는 왠지 모르게 한산해서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듯한 기분이야.
한바탕 미룬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히데미는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어머니가 남긴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원하기 전 입었던 옷가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 '잊히지 않는 사람들' 한 권. 병상에 누운 직후엔 의식이 돌아오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정말 소박한 몇가지 물건밖에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같은 밤에 홀로 심야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 생의 고립을 느껴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치네. 그때 내 자아의 뿔이 딱 부러져 버려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지.
「 “여러 옛일이나 친구를 생각해 보네. 그때 유유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일세.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봤을 때 주위의 광경 속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이지.
나와 남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모두 이생을 하늘 한편 한구석에 부여받아 유유한 행로를 더듬어 서로 힘을 합쳐 무궁한 하늘에 돌아가는 자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마음속에서 일어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에 흐를 때가 있네.
그때는 실로 나도 없고 남도 없는, 단지 누구나가 다 그리워 떠오른다네.” 」
히데미는 책장을 넘기며 씁쓸하게 그 구절을 바라보았다. 아주 어렸을때. 어머니를 따라 문장을 좇았을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구였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작은 한숨과 함께 책이 덮이고, 어머니의 옷가지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이 적막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는 정말로 오롯이 나 혼자만이 남았으니. 단칸방 작은 공간도 왠지 모르게 거대하게 느껴져서 다리를 웅크린채 상자 안에 물건들을 쓸어담았다.
오후에는 포목점에 들러 이제는 작아 맞지 않는 여름 와이셔츠를 뒤로한채 늦은 교복을 맞췄다. 거울 앞에서 가쿠란 단추를 채우며 다른 학생들은 진작 찾았는데 왜 이리 늦었냐는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에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가격을 치르고 나서는 길. 넓게 트인 길을 바라보며 그 사이 지나가는 차 몇대를 향해 무심코 시선이 따른다.
장례를 마친 직후 먼 친척에게 연락이 닿았다. 생판 남이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정이 딱하게 느껴지기라도 한 모양일까. 이런 저런 말이 오갔지만 결국 이곳에 남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연고 없는 시골에 혼자 남아 무엇을 할 것이냐는 가벼운 물음이 심중을 후벼파는듯한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소중한 친구들과 인연이 남아 있기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
히데미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접속한 SNS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건 그게 아니야. 여러 이름을 바쁘게 건너뛰던 손가락은 마침내 한 사람에 이르러 멈춰서지만. 이상하게도 채팅방은 지난 여름방학에 멈춰 있었다.
바빴던걸까? 나도 그랬지만.. 그래도 연락 한통 없다는건 조금 의아한 일이라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DOG DAY의 라이브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