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야? 왜 좋은 얼굴 하다가 마는 건데.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원래 네 거였던 트로피를 내가 뺏었잖아. 좀 더 열을 내야 하는 거 아냐? 아까는 말만으로도 죽일 기세였으면서, 막상 저지르고 나니까 얌전해지는 건 뭐냐고.
대기실 소파에 힘없이 누운 메이사에게 다가갔다. 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메이사에게 이죽거린다.
"메이사. 설마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지~?"
여기 봐.
"네가 방심해서 늦게 출발한 거니까 말이야. 나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갑자기 내 쪽으로 오려고 해서."
여기 보라고.
"하마터면 나까지 늦은 출발할 뻔 했잖아. 게다가 사람이 트로피 줄까 하는데 무시하고. 왜, 좋잖아? 같이 장식해주면 기분만이라도 3관―"
- 다물어, 대쉬.
참견쟁이 트레이너가 또 자기 새끼를 싸고 돌려고 출동했다. 메이사의 어깨를 짚어 안심시키더니 잠자코 날 노려보다가 입을 떼었다.
- 대기실이 여기 하나 뿐이야? 바로 옆에도 하나 있는데 왜 굳이 메이사 옆에 와서 시비냐. 네 트레이너한테 돌아가.
내 트레이너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새끼, 알면서 한 건가?
-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트로피 들고 다른 대기실로 이동해.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나한테 잘난체 훈계를... 딱 봐도 긴장해선 목소리도 떨어대면서 자기 애 감싸겠다고 나섰다. 저 쬐끄만 녀석이 자기보다 강한 게 분명한데도. 진짜, 이놈이나 저놈이나 위선이나 떨어대고... 경멸감에 트로피를 꽉 쥐었다. 어쩐지 눈시울이 찡해와서, 이런 때 아빠를 떠올리는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 계집애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죽어도 싫어. 그래서 나는 트로피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나와버렸다.
*
"어휴."
끝이 깨져서 플라스틱이 드러난 트로피. 그걸 테이블 위에 정돈한 나는 메이사 옆에 앉았다.
"이해하라곤 안 할게. 성격 진짜 지랄맞더라."
하지만 동료 트레이너들끼리 담배피면서 이야기를 좀 주워들은 바로는 이랬다. 주니어 시즌의 유망주였던 토네이도 대쉬는 트레이너인 아버지와 함께 곧잘 대상경주에 출마하던 녀석이었다고. 트리플 반다나를 노렸었는데, 어째서인지 클래식 시즌 들어서는 팀이 해체되고 아버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홀로 출마하기 시작한 게 올해 시니어 시즌. 기초가 워낙 탄탄해서 그런지 트레이너 없이도 잘 해나갔다고.
다들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있지 않겠느냐 했고 나도 거기 동의했다. 사춘기 소녀가 그렇게 뒤틀리는 데에는 가족이 유력한 요인이지.
뜨끈뜨끈한 메이사의 이마에 손등을 얹어 식혀줬다. 아직도 달리던 때의 열이 남아있네. 이마도 젖어있다.
"그래도 휘둘리지 말았어야지."
방금까지 시달린 애한테 하긴 조금 모진 말이긴 하지만, 늦은 출발은 분명한 메이사의 실책이었다.
뜨끈한 이마에 닿는 조금 서늘한 손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지진 않아서. 뭐랄까, 알고 있다고. 내 실책인 거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단 말이야. 그래. 참았어야 했어. 아무리 욱해도 참았어야 했는데.... ......바로 직전에 대기실에서 그런 마찰도 있던데다, 저 자식이 하는 말이 제일 짜증나는 부분만 찔러대니까. 전부 저 녀석 때문이라고...
슬쩍 고개를 돌려서 테이블 위, 끝이 깨진 트로피를 물끄러미 본다. ....진짜로 손에 넣었다면, 둘이서 중앙에 갈 수 있었는데. 애써서 토네이도 대쉬에게 떠넘기고 있다가도 트로피를 보니 불쑥 후회가 치고 올라온다. 그때 도발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그치만 저 녀석이... ....됐어. 어차피 이제 늦었고..."
이제와서 왈가왈부 해봤자 일어난 결과가 바뀌진 않는다. 아무리 토네이도 대쉬를 원망하고 찢어죽여도(?) 1착이 나로 바뀌는 일도 없고, 놓친 사카나 삼관이 돌아오는 일도 없으니까. 그것만큼은 납득하고 있으니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마구로 기념에서 1착하면, 그러면 중앙으로 갈 수 있으니까...." "하아, 위닝라이브 준비... 해야하는데.."
벌써 진이 다 빠져서, 준비를 할 엄두가 안 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삼관도 놓쳤고 기분도 잡쳐서 라이브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떼쓰고 싶다고. 하지만 그래도 2착이고, 응원해준 사람들도 있고.... 하긴 해야겠지. 알긴 아는데도 몸은 소파에 딱 붙어버린 채였다.
"유우가아, 나 좀 일으켜줘...."
안아서 일으켜주면 더 좋고. 누운 채로 두 팔을 벌려서 유우가를 쳐다봤다. 헉, 안아서 일으켜주면 나 엄청 기운나서 위닝라이브도 팍팍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아서 머리도 쓰다듬어주면 더 좋을 것 같고.
메이사는 납득과 체념이 빠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랄까.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게 꽤 무서운 지점이긴 한데. 이해하고 있다면 구태여 강조하고 귀찮게 굴 필요는 없겠지. 나보다는 메이사의 낙담이 심할테니까. 마음의 대미지도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테고.
나는 메이사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지만 메이사는 중앙을 가고 싶어하는 듯 했으니까. 3관을 놓친 지금 마구로의 부담이 더 커졌겠지. 그런 현실 물정은 머리가 식은 메이사부터가 생각했을 거다. 이런 지점은 둘이 비슷하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메이사가 필요로 하는 걸 넘겨줘야 할 때. 메이사 말마따나 위닝라이브 준비도 해야하고.
소파에 누워서 밍기적대는 메이사.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뭔가 바라는 게 있어보였는데, 이거 그냥 줘도 될런지 싶은 걱정이 있었다. 그래서 양 팔을 잡고 그냥 일으켜 세워주기만 했다.
"읏차, 기운 내. 마구로가 있잖아."
바라는 걸 얻지 못해서 그런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다. 그 표정에 마음속에서 장난기가 스리슬쩍 올라오다가도 꾹 참았다. 조금 불쌍하기도 했고, 지금 놀렸다간 꽤 깊은 원한을 얻어서 나중에 된통 코가 깨질 거 같았거든.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메이사를 품에 끌어당겨서 등을 톡톡 두드리고 쓸어내렸다. 메이사는 따뜻하고 말랑하고 부드럽... ...아니아니, 나 요즘 자꾸 자연스럽게 메이사한테 몸을 허락하고 있지 않아!? 선 그어야지. 젠장...
감촉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메이사를 품에서 떨어트려놓고는,
"자, 이제 기운났지? 힘내서 라이브 하고 오자고. 라이브도 준비 열심히 했잖아!"
라며 허둥지둥 수습했다. 그야 여기는 공동 대기실이기도 했으니까 다른 녀석들 보기에 너무 그렇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메이사랑 ...암튼 그랬었으니까 너무 의식하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건 선을 그어서 나쁠 일은...
나쁠 일은...
나쁠... 아니, 그런 시무룩한 눈 하지 말라고! 입꼬리 뭐야! 그렇게 아쉽다고 역력히 티낼 건 없잖아!? 어허, 그런 불쌍한 표정 금지야. 금지. 나 불쌍한 거에 약한 거 알아서 이게 더...
크 으 으 읏...
결국, 귓속말했다.
"라이브 잘 끝내고 오면 나머지도 해줄게."
...나 진짜 메이사한테 너무 몸을 허락하고 있는 거 아니냐. 메이사 너 나 이러려고 만나냐. 젠장...
안아줘~ 라는 의미로 벌린 팔을 잡아서 일으켜주는 유우가. 으으... 그래...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오.... 납득과 체념은 빠른 편이지만 이런 일은 납득하기도 싫고 체념하기도 싫은데에... 물론 일으켜달라고만 말했지만! 말엔 속뜻이라는게 있잖아! 눈치 채라구!! 나 삼관도 놓치고 1착한 애한테 티배깅도 당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지금 안 좋단 말이야... 눈썹을 한껏 끌어내리고 눈을 치켜떠서 유우가를 빤히 바라본다. 입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입꼬리가 처져있고. 영락없는 울상이겠지.
그리고 효과가 있었는지, 품에 안겨서 등 톡톡이랑 쓸어내리기를 받았다. 으힛, 이거 좋아~ 귀와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인다. 솔직히 개별 대기실이었다면 좀 더 이것저것(키스만 빼고) 요구했겠지만, 아쉽게도 여긴 공용이라 다른 아이들과 트레이너들의 시선도 신경쓰이니까... 유우가의 품은 따스하구나아. 떨어지기 아쉬워서 한번 더 얼굴을 부비려는 그 순간 떼어놓아졌다. 우웃, 왜 이 타이밍에... 아까 전의 울상을 다시 소환한다.
"에우우...." "! 지, 진짜지?! 나 완전 열심히 하고 올거니까!"
라이브를 잘 끝내고 오면 나머지도 해준다고? 나머지라는건, 내가 얼굴 부비는 것도 포함이고 다른 이것저것도 포함인거지?! 유우가가 약속하지 않은 이런저런 것까지 순식간에 상상해버리고,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힘차게 외쳤다. 나 진짜 열심히 하고 올게!!!
"나, 나 힘내서 라이브 하고 올테니까!! 좀 있다가 봐, 유우가!!!"
조금 전까지 힝잉잉😿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대기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호! 얼른 가서 리허설하고 라이브 뛰고 와야지!!
시니어 산마캔 위닝라이브, 내 레이스 인생 중 가장 활기차고 열정이 넘치던 무대였다. 1착인 토네이도 대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로, 내가 1착이라도 된 것마냥 엄청 열심히 했다니까. 그나저나 토네이도 대쉬는 나한테 티배깅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그렇게 풀이 죽어있었는지. 위닝라이브를 보던 팬들도 의아하단 얼굴이었다고.... 아무튼 그렇게 대망의 위닝라이브가 끝나고, 나는 약속했던 것을 받기 위해 성큼성큼 대기실로 걸어갔다.
"——유우가! 위닝라이브 봤어? 잘하고 왔지?"
문을 열고 바로 유우가를 찾아서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약속했던거! 아까 나머지도 해준다고 한 거! 얼른!
메이사의 위닝라이브는 정말이지 눈부셨다. 아까 잔뜩 울상을 지었던 녀석 맞나 싶을 정도로 미소까지 완벽했다. 1착보다 빛나는 2착이었다고. 그걸 알아서인지 토네이도 대쉬는 라이브도 설렁설렁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부터는 기분이 완전히 꼴아박힌 듯 했다.
...내 애 아니니까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메이사는 딱 봐도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이 반짝거려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호르몬이 숨풍숨풍 분비되는 시기의 여자아이란 무섭다. 진짜로. 그리고 첫빠따로 대기실에 들어와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 나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너 나 이러려고 만나니 메이사...!!!!!! '
그래도 약속한 건 나니까. 일단 따끈따끈한 메이사를 껴안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키스는 아웃이라고 내가 정해두기도 했고, 아까 등 도닥거리기는 했으니까... ...이런 건전한 건 내 전공이 아닌데...
나는 마치 모쏠OOOO라도 된 것처럼, 어색하게 헤매는 손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는 일단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손은 어깨랑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꼬리뼈까지 닿는다. 이랬다가 메이사에게 걷어차일 뻔한 적이 있는(클래식 시즌 때였지만) 나는 퍼뜩 손을 떼고는, "아 실수실수. 미안. 화났어?" 하고서 얼굴을 내려다 보려고 했는데, 정수리만 보이고 잘 보이진 않았다.
...괜찮은 거겠지. 아니, 그보다 더 이상 헤매면 모쏠OOOO이라는 메이사의 의혹에 힘이 보태져버려...!
결국 나는 메이사의 양 뺨에 손을 얹고 문질문질도 하고, 마치 강아지 어르듯이 손가락으로 머리칼 속까지 손을 넣어 와삭와삭 귀뿌리도 긁어줬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손에 잔뜩 엉기지만 딱히 지저분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맨날 보는 게 땀에 젖은 메이사기도 하고.
꼬옥 껴안긴 상태에서 어떤 걸 받으려나~ 하고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으면, 일단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으히히, 이거 좋단 말이지~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으면 슬금슬금 어깨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꼬리 뿌리까지 스으윽 내려가있었다. 으, 으으왓.... 어쩐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잠깐 꼬리가 빳빳하게 세워졌다가 스르르 내려갔다. 이거 비슷한 일이 클래식 시즌에 있었는데, 그땐 놀라서 걷어차버렸었지. 다행히 미수로 그쳤지만, 유우가의 민첩이 5 정도만 낮았어도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었겠지 그날.... 아무튼, 실수라면서 화났냐고 묻는 말엔 그냥 고개를 파묻은채로 저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더 해도... 좋은데.... 더 해주진 않는구나... 약간의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다음은 뺨을 문질문질. 양뺨을 동시에 잡혔을 땐 설마 키스!?하고 좀 두근거렸는데 그냥 설레발에 그쳤다.. 칫. 그리고 귀뿌리를 복복복 긁어주는 그거어어어... 최고야아아.....
"아우우우..... 죠아아...."
너무 좋아서 뇌가 녹는다아아.... 흐물흐물해진 대답을 그대로 꺼내면서 유우가한테 폭 기댔다. 응, 역시 좋아.... ....그나저나 그렇게 귀까지 쓰다듬 당하고 보니, 이제와서야 땀투성이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뺘...뺘아앗....
"...엣, 아, 그... 여, 역시 땀투성이니까.... 이쯤할까...?" "유우가까지 축축해져버리니까...."
하지만 역시 아쉬우니까, 조금 미적거리다가 슬그머니 유우가에게서 몸을 떼었다. 우우, 머리카락 엄청 젖어있었네.... ...이런 상태인데 유우가한테 쓰담쓰담받고 귀까지.... 으으으으.....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여, 역, 역시 씻고나서 하는게 좋았을텐데. 오늘은 왜 이렇게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많지.....
"...그래, 나머지는 샤워하고 나서 하자. 오늘도 뒤풀이 할 거지? 유우가네 집에서?"
뒤풀이라고 쓰고 야키니쿠 파티라고 읽는 그거. 항상 유우가네 집에서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하겠지! ...아니.. 이번엔 1착 아니니까 패스려나....
마침 딱 좋게 다른 녀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대기실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슬슬 관두길 잘했네. 이제 메이사에게 내놨던 공약도 이행했겠다 마음 놓을까나.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을 때, 메이사가 하는 말에 나는 굳어버렸다.
- 나머지는 샤워하고 나서 하자. 유우가네 집에서.
좀 악의적인 편집이 들어가지 않았냐고? 아니 아니, 남들이 듣기엔 딱 이랬다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들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가, 메이사의 이야기에 귀를 움찔거리는 걸 봐버리고 말았단 거지.
그러니까 방 안에 머뭇거리며 들어온 녀석들에게 우리들이 어떻게 보일지란 그런 거다. 나는 온통 메이사의 땀냄새를 몸에서 풍기고 있고, 둘이서 대기실에서 껴안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샤워하고 내 집에서 하자는... 으, 아 아아아악 아니 물론 하긴 했지만?! 키스는 했지만요 그건 제 의지가 없었고 억울하달까 저희 아 무 일 도 없 었 다 고 요 ! ???11!!?
하지만 이쪽에서 애써 눈을 피하는 우마무스메 녀석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당시 나와 메이사는 거의 츠나센에서 암암리에 '했네 했어...' 정도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나는 반쯤 공식적인 메이사의 깔이었다고.
하지만 그걸 몰랐던 나는 몸을 뻣뻣이 굳히고는 "아, 으 응 그치! 야키니 쿠구워 먹어 야지~ 나엄 청 비싼고기사 뒀다고? 기대하라고하 하핫." 하며 제발 얘들아 오해하지 말아다오하는 해명을 했지만 우마무스메들은 도란도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뿐 이쪽에는 어떤 관심도... 크으으으읏....
*
그래서, 메이사를 스쿠터 뒷자리에 태우기 전에 나는 헬맷을 줄락말락하며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다.
아, 다른 애들도 왔네. 슬슬 이동해야겠구나~ 묘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이녀석들 또 했네 했어'같은 표정으로 힐끔거리는 아이들에게 묘하게 도야가오를 해보이며 대기실을 나섰다. 아니이~ 딱히 뭘 한 건 아니고 그냥 나데나데 받았을 뿐인데 저쪽이 멋대로 오해한거잖아~? 난 아~무 잘못 없다구? 굳이 해명하려고 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뭐 이걸로 소문이 쫙 퍼지면 유우가를 노리는 녀석들이 더 줄어들테니까 나야 얼마든지 오케이기도 하고~
그래서, 스쿠터에 타기 전 헬멧을 줄락말락 하는 유우가의 말에 나는 또 대 실 망 해버렸다는 것이다.
"어, 어, 어째서어...." "그보다! 이번 건 유우가가 먼저 해준다고 했던 거잖아!! 난 그냥 받았을 뿐인데."
너무해, 어째서 그런 말을.... 이제 나는 뭘 위해서 뛰면 되는 건데(농담이지만)
"므으으.... ....알겠어. 대기실에선 안 할게..." "대신 다른 곳에서는 해도 된다는 거지? 분명히 대기실에서는 하지 말자고만 말했다? 무르기 없어!"
뭐, 따지고 보면 부실도 있고, 유우가네 집도 있고, 우리집도 있고(?) 대기실이 아니어도 나데나데라던가 꼬옥 안아주기라던가 할 수 있는 장소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대기실에서는 금지라는 말을 훌훌 털어버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헬멧 줘, 빨리 가자."
낚아채듯 헬멧을 받아서는 푹 눌러썼다. 그리고 유우가의 등을 꾹 안으면서 뒷자리 탑승 완료! 출발하자구~
칫, 복도를 눈치채다니... 오늘 유우가 좀 똑똑하지 않아? 약간의 아쉬움은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날려버렸다. 뭐어, 직접 달리는 것도 꽤 빠르지만 이것도 좋다니까. 그렇게 도착한 유우가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서서, 일단 샤워를 하려면 갈아입을 옷이 있어야 하니까... 어디보자. 속옷은 가방에 여분이 있고, 반바지는 두고 갔던 게 세벌 정도 있는데..아, 찾았다. 그리고 티셔츠는 항상 그랬듯이 유우가 것을 하나 빌리고. 응. 이걸로 완벽해! 그렇게 주섬주섬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려다가, 잠깐 중지라는 말에 멈췄다. 에? 갑자기? 혹시 수도 망가졌나?
티셔츠 입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고? 그래 알겠어. 그대로 티셔츠만 빼서 바닥에 툭 던져놓고, 그대로 내가 입고 있는 체육복 상의를 스르륵 들어올려 벗으려고 했는데—— 역시 감이 좋은 유우가. 다급하게 취소니 그냥 자유이용권이니 하면서 수습하려는 유우가를 보고 히-죽 웃었다.
"아냐~ 나도 너무 자주 빌려 입는 것 같아서 좀 미안했고~" "근데 땀투성이인 옷을 다시 입는 건 좀 그러니까~ 속옷이랑 반바지만 입어야겠다~ 지금까지 미안했어 유우가~"
물론 티셔츠는 주워서 입을 거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근데에~ 유우가네 집에서 속옷차림으로 있었다고 하면 파파가 유우가 죽이러 오겠지~?"
스르륵 올리던 옷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멈춰있었다. 자아, 어쩔까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땀이 식어서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했다. 으, 으으... 역시 가을은 좀 쌀쌀하네....
"—라니 농담이야. 혼인신고서도 안 냈는데 유우가가 전기톱에 반으로 갈라지면 큰일나니까 절대 말 안한다구?" "그럼 자유이용권 잘 쓸게~ 티셔츠 빌린다?"
바닥에 던져둔 티셔츠를 집어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후에 유우가가 뭐라고 할 지 궁금해서 귀를 좀 쫑긋 세우고 있다가, 역시 추우니까 빨리 뜨신 물을 틀어서 몸을 데웠고.
왜 불안한 느낌은 틀리질 않는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악당같은 눈빛으로 변하더라. 그걸 보자마자 아차 싶었지. 도게자까지 박아가며 애원했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는지 웃옷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이 이걸 여기서 잡아서 못 벗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럼 또 좀 그렇고 그런 구도가 되어버릴지도 몰ㄹ 아니 근데!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벌써 아랫쪽이 보일락말락
저거 점이야?
그걸 보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곤란한 상황이 되지 않았는지 체크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런 나를 매도하는 메이사의 이야기에 양심이 콕콕 쑤신다... ...내 집에서 네 점까지 봤다고 하면 나 진짜 12등분으로 오대양에 뿌려질걸...
자꾸 생각나네 ㅆㅂ...
나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꾹 참고 있다보니,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메이사가 웃옷을 입어주겠다는 감사한 말씀을. 메이사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휴, 하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벗고 들어간 옷들을 하나하나 주워 빨래통에 던져 넣었고. 속옷은 그냥... 못 본 척 냅뒀다.
...메이사 가면 좀 쉬어야지. 늙는다 늙어.
*
씻고 나온 메이사한텐 좋은 냄새가 풍겼다. ...라고 해도 난 아까 땀냄새도 괜찮았는데 말이지. 아니아니 생각 그만.
"응, 너 가면 하려고."
...일종의 보험이지. 그래서 나오자마자 먹자고 세팅도 다 해뒀다. 버너와 팬, 같이 먹을 곁들임 채소에 밥도 뜸들이기까지 완료. 식탁엔 기름 튀는 걸 방지하는 커버도 깔아놓았다고. 메이사 마실 오렌지 주스랑 콜라도 어제 사뒀다. ...성인이어도 같은 집에서 술 마시는 건 좀 그러니까. 나 13등분 되는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