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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어제까지는 책도 읽고 내게 거래까지 요청했던 것이, 다시금 망가진 것처럼 늘어졌다. 침대에 눈을 뜬 채 축 늘어진 태오의 모습은 며칠 전 병실에서 넋을 놓고 자아를 몽중에 두고 온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죽어버린 듯 늘어진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2시간째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엔 말을 걸어보고, 시야를 휘휘 저으며 방해도 해봤지만 고장 난 안드로이드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서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넋을 잃은 채 골몰하다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아 결국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모든 걸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 어떻게 잊겠는가? 그렇게 날 보기 좋게 농락하고 떠났는데. 서휘는 태오의 곁을 침묵하며 지키면서도, 이번에는 대체 무얼 결심하려는 건지 추측했다. 이번에도 떠난다면 아예 스트레인지로 목줄을 묶어버릴 생각이었다마는.
"백한결."
하지만 태오가 뱉은 단어에 서휘는 목줄 채울 생각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한참을 넋을 놓던 것이 침묵을 깨고 익숙한 이름을 읊조리자 서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몸을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였길래 그 선생 이름이 나올까." "……왜 내 제안을 망설였는지 답이 나와서요." "내가 어찌 망설였을까?" "가족을 당신 손으로 해하라 하니 그건 싫었을 테지요…… 그 빌어먹을 혈연이 뭐라고." "그럴 리가 있겠더니."
서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태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태오는 여전히 늘어진 모습으로 있다가도, 천천히 눈을 굴렸다. 공막이 새카맣게 물든 것을 본 서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이미 짙은 와위를 느낀 태오는 자신의 앞에선 어떤 거짓도 소용 없다는 듯 눈을 휘었다.
"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닮았는데…… 어찌 모를까요. 백한결, 백서휘……. 나를 지금껏 잘도 농락하였군요. 그래, 어쩌면 당신이 그의 모습을 하고 이따금 커리큘럼을 대신 하러 왔을지도 모르겠어요." "……네가 먼저 도망쳤으니 내 수를 썼을 뿐이지." "커리큘럼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알잖니." "……." "다만,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라 고민했던 것이지 사심은 없었단다. 결국 그 아이도 손패니까." "손패라고 보기엔 모종의 이유로 바깥에서 커리큘럼도 시키지 않고 애지중지 키운 것 같던데요. 언제부터 그리 손패에 신경을 썼다고."
서휘는 속이 꿰뚫린 것 같았다. 어디까지 들여다보는 건진 몰라도 이대로면 낱낱이 밑천을 털릴 것 같았다.
"바라는 게 뭐니." "바라는 것이라." "네 내가 한결이를 습격해야만 하는 이유가 리버티의 견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나인 이유가 뭐니." "직고하길…… 바라시나요." "그래." "당신이 절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순간, 작게 벌어진 입술이 다물리지 못했다. 서휘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 태오가 시체같이 늘어지다 대뜸 떠났던 이유도, 지금 이리 구는 것도 모두 예상은 했지만 으레 충격이란 것은 어렴풋이 예상하던 것이더라도 귀로 듣는 순간 머리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던가. 태오는 그런 서휘의 마음을 알면서도 막힘없이 말을 쏟아냈다.
"당신이 내 모든 걸 꺾어버리고…… 이 지경까지 몰아간 당신이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서…… 무너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짖으면 하여서 그리 거래를 요청했답니다." "꿈도 크군. 나를 역린으로 하여금 무너뜨리겠다?" "정확히는 자멸이겠지. 당신의 손인데."
거부하는 머리와 달리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귀를 울릴 정도로 그 소리가 크다. 서휘는 태오의 말 뒤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다. 단순한 증오가 아니다. 철저한 득과 실을 계산한 발언이다. 네가 바라는 것이 너무나도 크다……. 손을 들어 입가를 덮어 가리고자 더듬거릴 적, 앙상한 손이 제 손을 붙들었다.
"물론 내 이리 방자히 굴어도 용서하실 것을…… 아니 이리 군답니다." "……진심이니?"
이대로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양심을 발휘해 막아야만 함을 안다. 그것이 자신이 행할 마지막 어른된 도리임도 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그리고 저 조그마한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인간의 것이 아닌 색조의 공막과 달리 홍채만은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포사가 비단 찢는 것에 웃는 것을 본 황제가 그 이후로 귀한 비단을 모조리 사들여 찢어내어 재정을 망가뜨리고 무너짐의 발판을 마련했다던 글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붉은 전조등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뛴다. 그래, 양심도, 어른된 도리도, 가족간의 정도 무슨 소용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저 곁에 있으면……. 내가…….
"들키는 순간 네 무덤을 네 손으로 파는 꼴일 텐데? 넌 저지먼트다. 그 점을 상기하고 내게 요청해야지." "내 찢겨도 묻어주는 사람은…… 형님일 텐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단숨에 시원해지는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서휘는 넋을 잃은 채 태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대로면 몽중의 의식에 잡아먹혀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을 안다…….
"형님은 행하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주 잠깐, 가책을 내려놓고…… 선을 그어두고, 무너지더라도 나의 품에서 무너지면 된답니다. 죽더라도 내 손에 죽고, 비명을 지르더라도 내게 질러야지요." "하, 하하." "리버티가 무너뜨릴 거예요, 형님. 형님이 일구어낸 모든 것을, 어떻게든 인첨공에 물들지 않게끔 발악한 당신의 동생을…… 그 작자들은 잘린 목을 쥐며 외치겠지요, 우리는 정당했고 악마를 처단했노라고. 그러니 우리가 정의라고…… 오, 미천한 짐승들이 갇힌 곳에서 정의라니, 어련하시려고." "……." "그러니 선수를 치는 것은 오로지 형님의 손이어야만 해요……. 괴롭겠지만 어쩌겠어요. 모든 것은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랍니다." "네 나를 진창길로 떨어뜨리고자 하는구나. 밑바닥 그 아래로." "아무리 위를 노니는 것들이 나를 가여이 여긴들 결국 경애할 걸 아니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이 곁에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서휘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하! 하하……. 점차 웃음은 갈라지고 사그라들더니, 이내 태오의 눈을 정확히 마주하며 사납게 읊조렸다.
"영악한 것." "당신이 알려줬잖아. 사람 속내 읽고 쥐어 흔드는 법." "영악한 것…… 거둬 키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진실로?" "……." "그럴 줄 알았아요. 어찌 되었든 내가 바라는 대답은 그게 아니랍니다……." "……할게."
하게 해줘. 씹어뱉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절절 끓는 듯했다. 태오는 앙상한 손을 뻗어 서휘의 뺨을 더듬었다. "현명한 판단이니 상을 드려야겠죠." 속삭이는 소리외 함께 서서히 굽히는 팔과 함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수벽으로 이루어진 간격이 허물어졌다. 가볍게 내려앉은 것은 묵직하게 떨어지고, 이내 그림자 틈을 모조리 메꿨다. 공막 새카맣게 물든 눈이 서서히 감긴다. 나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 척수에 새겨진 자. 당신의 눈을 가리고, 온갖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옳은 것을 쳐낼 간신.
최후의 순간, 내가 속삭인 모든 것이 실은 당신이 원하던 것이었음을 깨달으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거라고, 혼자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입을 다물고 고요히, 자신이 생각해서 오로지 자신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성운도 예외가 아니고, 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너는, 소년이 네게 말하지 않고 혼자 짊어지고자 하던 그것을 원했다.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을 때, 질끈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그것은 네 손에 쥐인 자기 팔목을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눈물은 땅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네 옷에 스며버리고 말았다. 아아, 네게 이런 얼굴 보여주기 싫었는데. 이런 걸 네게 묻히기 싫었는데. 이런 순간이 또 찾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성운의 한탄이 들릴락말락 나직한 울음소리가 되어 네 귓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데 마레를 떠난 태오 선배가 저렇게 된 거, 우리 아버지 때문이야······.”
얼마간의 서글픈 소리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꺼내어놓은 것은 그 한 마디였다.
“태오 선배가 그러더라. 아버지가 자기 인생 망치는 첫발걸음을 떼줬다고···(situplay>1597039446>456) 내가 인첨공에 와서 처음으로 커리큘럼을 받았을 때, 뭔가 사고가 생겨서 죽을 뻔했는데··· 태오 선배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기술이 있었던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뿐이었다고 하면, 그 죄스러움이 괴롭다고 해도 성운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첫 번째 커리큘럼을 받다가 사고가 생긴 것보다 태오가 알터에서 고난을 당한 게 먼저이니까. 그러나, 그 결과 일반적인 범주에서 비틀려나가버린 태오의 정신이 무엇을 바라게 되었고, 그리고 그게 네게 무엇을 꿈꾸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혜우야, 나 봤어, 봐버렸어··· 네가 무엇을 바랐는지···”
성운이 네게 내어놓는 말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파나케이아.
한때 성운에게 있어 그 단어는 잊지 못할 그날의 밤하늘 아래서 같이 나눠들었던 노래의 제목에 불과했으나, 그의 행복한 기억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에 불과했으나, 그래서 네 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듣고 내심 쿵쾅대는 심장을 거머쥐게 만드는 단어였으나, 성운은 이제 알아버렸다. 그것은 네가 꿈꾸던 무참하고도 완전무결한 결말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네게서 빼앗아버린 거지, 혜우야. 그렇지······?”
네가 그런 무참한 결말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그리고 자신이 네 결말을 빼앗아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그 사실을 더욱 괴롭게 했다. 그리고 그것 덕분에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성운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647 (내글구려병은 흔한 지병이니 그러려니 해주세요) 혹시나 팁이 필요하시면 언제건 말씀해주세요. 지금 딱 근무시간에 잠이 드는 이상한 패턴이 잡혀서 고생중이에요... 3.3 그러다가 일요일에 집안일에 지쳐서 저녁잠을 좀 잤다가 10시에 깼었네요. 흐음, 그런데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이대로 퇴근하자마자 잠들고 새벽에 깨는 패턴 정착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