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버린 잔을 도미노처럼 늘어뜨리고 새로운 병을 꺼냈다. 아무래도 조금 취할 필요가 있을테니까. 그보다 뭔가 안어울리네. 주스라니.
"내가 저번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야."
당연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것 말이다. 아무래도 그날의 나는 첫 연애라는 것에 취해있었던 탓인지 조금 안해도 될 말을 해버린 것 같아서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뭐 이젠 다 들켜버려서인지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히데미에게 귀찮은 여자라고 인식되는건 조금 그렇잖아.
귀찮은 일을 시키는군. 교사들의 공지를 듣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혹시나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싶어 순순히 따라왔더니만, 이런 이야기나 할 줄 알았더라면 무시하고 어디 먼 곳에서 농땡이나 부릴걸 그랬다. 담력 시험이라는 말이 들려오자마자 눈 굴려 주변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헛숨을 들이키는 녀석, 신이 난 건지 무서운 건지 작게 비명을 지르는 녀석, 서로 얼싸안고 호들갑을 떠는 녀석……, 저와 생각이 같은지 귀찮은 기색을 보이는 인간도 몇 있었지만 대체로는 생생히 전해지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좋아하는 눈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이런 걸 무엇하러 즐기는지 모르겠다. 약해 빠져서 건드리기만 해도 죽어버리고 온갖 기사이적을 두려워하여 신이 아닌 것에도 신의 이름을 붙이던 것들이 어떨 때엔 무서운 게 좋다며 시시덕댄다니. 무어, 궁금하긴 해도 정말 알고 싶지는 않아 더 생각지는 않기로 했다. 졸지에 어린애들 놀이에 끼이게 생겼다고는 해도 불참하면 그만이다. 무신은 선생들 눈치라곤 전혀 살피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떠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얼굴만 아니었더라면.
이름이 무엇이더라. 외울 정도로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종종은 눈길 두었던 인간이다. 그 까닭 첫째로는 이 학교를 기준으로 나름의 무훈을 선보였기에, 그리고 둘째로는…… 나름대로는 연 있는 인간이라. 인간끼리의 치열한 상쟁이나 치정 따위엔 관심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원초의 욕망에서 비롯되고 탐심으로 인해 떨어진 자로서─ 가장 비참하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 목숨마저 불태우겠단 열망만은 꽤 마음에 들었던지라. 끝도 없이 불행할 저 자의 삶이 이번에는 어찌 닥칠까. 아니면 이미 닥친 후인가? 한 번 쯤은 가까이서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마침 제 짝도 저 녀석이라 하니 무신은 이번만은 말썽 한 번 참아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어느새 발걸음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 앞에 닿았다. 한낮에도 빽빽하게 자라난 수풀로 어둑한 삼림은 밤 되니 우중충함이 한층 더하다. 태생이 산에서 난 미물인 그에게는 그리 신경쓰일 점도 아니었다지만. 옛적엔 인간이 홀로 숲을 떠돌다 산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요괴에게 잡아먹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더란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건만 다들 왜 이리도 겁이 많은지. 곁에서 들린 목소리에 눈길만 돌려 녀석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일순간 그 눈동자가 짐승의 눈처럼 번뜩인 듯도 싶다.
"무서우냐?"
지금껏 내내 묵묵하게 잘 가던 녀석이 갑자기 뜸을 들이니 무신 또한 멈추어 주었다. 별다른 사감이나 골탕먹이려는 마음 없이, 그저 묻는 말로.
"...연인이라고 해도 아직 혼약도 올리지 않은 상대에게 그런 무거운 발언을 하는건 현대윤리적으로 아웃이야."
천년전만해도 3일밤만 같이자면 사실혼관계가 되었지만 요즘 시대는 다르다. 사실혼관계를 인정받으려면 이런저런 복잡한 절차가 있는데 거기에 더해 서로 아직 고등학생이니 애초에 그런게 확인되지도 않을거아냐. ...생긴걸로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여전히 요괴의 머리로구나.
"이놈의 요괴들은 왜이렇게 어딘가 한군데 나사가 빠진건지... 내 때 요괴들은 말이야..."
로 시작한 옛날 요괴자랑. 동세대라고 하더라도 못해도 수억년, 수천년전의 이야기지만 어쩐지 입에서 나오는 것은 헤이안이 대부분이었다. 누에가 어떻니 백면금모가 어쩌니. 마사카도는 어떻고 원령이 어쩌니 하는 틀에박힌 이야기였지만 공통점은 하나. 최소한 타인에 대한 인지만큼은 멀쩡하게 가져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요기도 좀 흘리고 다니지 말고, 전에 준 피크는 제대로 가지고 다니고 있어? 혹시라도 애들한테 무슨일 생기면 그냥은 못넘어가는거 알지?"
현대 윤리로는 아웃이라는 말에 그 존재는 물음표가 검은 기운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사기다 저거.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그 존재는 시트 스레에 써잇는 '천연적인 성격'이란 부븐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헤이안이라.. 그 때 덤벼든 애들은 전부 죽였는데"
뜬금포로 나오는 소리, 맥락을 이해 하지 않는 것일까. 누에가 어쩌구 타마모노마에가 어쩌구는 솔직히 그 존재는 관심없었다. 그 당시 그 존재의 종족이라 부를 부분에 이름은 없으니 흘리지 말고 피크 어쩌구하는 말에는 그 존재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뭔가 조몬은 어머니같네. 여러 이들을 챙기고 하는 점에서"
그렇게 말하며 야요이가 준 피크를 슥 보여준다. 누가 반지 형태로 가공해준 것인지 검지에 끼여잇었다. 3인방이 웬 피크가 물어봤을 때 '뭔가 귀해보이는 사람이 준거야'라고 대충 둘러댔더니 그럼 잃어버리지 않게해야한다며 직접 채린양이 반지로 가공해준 것이다. 왜 반지지?에 대해서는 하하핫하며 웃어넘겼지만
하지말라고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사기를 내뿜어대는 센의 모습에 조금 속이 답답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제대로 알아듣고는 있는걸까. 이런 건 공포를 주입해버리는게 최선의 교육방법이겠지만... 보는 사람도 많고 어디까지 헤집어놓아야 멀쩡한 가치관을 가지게 될지 모르니 그것 역시 난감한 노릇이다. 덤벼드는 모든 이를 죽였다니 무슨 무차별 살인귀나 아귀도 아니고... 요괴라면 조금 더 존재방식에 구애될 필요가 있거늘... 하여간 요즘의 요괴들이란.... 공의 형태로 돌아다니면서 인간에게 신뢰를 보내지를 않나 하물며 이쪽은 사고방식이 쇼와...헤이안이지를 않나... 그래도 둘다 아직은 괜찮은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 시절은 이해한다만... 지금은 한명이라도 죽였다간 앞으로도 영원히 해를 못보게 될거야."
약간의 경고를 담아 위압만 주려한다. 어느정도가 적절할지는 몰라서 어디까지나 이 아이가 지금까지 뿜어댄것보다 아주 약간 더... 정도면 괜찮으려나. 금방 기운을 거두어들이고 아이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잘도 가공했네. 낡은거라 금방 깨질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손재주가 좋은걸까.
"그게 나의 올바른 존재방식이니까 그런거야. 인간도 요괴도 하물며 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위험과 마주하면 신을 찾는 법이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는 것 처럼."
하늘을 잃은듯 울면서 신을 찾는법이다. 신이기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기에 신인 존재. ...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스스로도 어쩐지 이 일년사이 많이 변했구나싶은 생각은 들었다. 감상적이 되었다고 할까 사색이 많이 늘었지. 새파랗게 어린애에게 누이니 뭐니 하는 옛벗을 본 탓일까. 아마 그럴지도.
"아직 어린아이가 방황하고 있다면 길정도는 알려줘야지. 너처럼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같은 아이는 처음이지만."
헤이안 말부터 그 존재는 단 하나의 원칙만으로 살아왔다. 적은 죽인다 적이 아니라면 신경쓰지 않는다. 그 것이 전장의 잔상인 그 존재의 존재 법칙이나 다름없다. 약간의 위압을 주려는 당신에게 그 존재는 무표정하게 바라볼뿐이다. 그정도로는 위협도 안 된다는 것일까. ..실제로 그 존재가 평소에 흘러나오는 것은 '잔재'에 불과한 것도 있지만.
"신을 찾는다라- 내 탄생은 엄밀히 말하면 그 신들이 버린 것들의 모임?이라고 전에 본 퇴마사가 그러긴 했어"
아베노 세이클럽이었던가?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은듯 가볍게 생각하다 이내 떨쳐버립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길이 어딘지도 모르는 것 같은 아이라는 말에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어딘가 다른 분위기로 한자루의 검과 같이 냉정히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