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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옆자리에, 깊은 바다를 헤치고 나온 보름달이 옆에 앉아주었음을. 보름달과 작은 별이 함께 나란히 있었음을. 그래서,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나날들을 같은 궤도 위에서 보낼 수도 있겠다고.
그러나 비정한 인첨공의 그늘은, 차가운 조류는 그들을 그렇게 쉬이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거친 곳으로 내몰았고, 위험한 곳에 메다꽂았다. 그런 비극을 극복하기 걸맞은 비범한 주인공이었더라면 그런 충돌과 붕괴에도 아랑곳하지 않거나, 아니면 불굴의 의지를 과시하기 마련이건만, 이 평범한 소년은 그러지 못했다. 깨어지고, 부서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채로 결국 자신이 그렇게도 찾아헤매던 사람 앞에 이렇게 굴러떨어졌다.
이런 고생을 감수하면서, 그는 무엇을 원해왔던가?
이상향 같은 과분한 건 필요없다. 환상향 같은 지나친 소리도 바라지 않는다. 현실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이와 손을 맞잡고 함께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하고, 결국 모두가 작은 행복을 움켜쥘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현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평범한 현실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을 힘이 남지 않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때, 소녀가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제는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저 앞길을 향해서가 아니라 길 옆의 공터를 향해서, 밤새 끊임없이 달려온 소년을 위해.
물론 어떤 일이던지 진지하게만 생각해서 매일같이 스트레스만 받으며 사는 것보단 나은 처사일 테지만...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슨배임은 슨배임이네여~"
주변에 따라서 변하는 자신과 다르게, 동월은 확실히 자신만의 주체가 있는듯 보였다. 비록 그것이 다소 위태롭게 보일지라도, 인간이란건 항상 그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런 사소한 변화와 사람들의 생각을 그녀가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변화 없이는 발전도 없을테니까, 그녀는 순응하기로 했다. 어떤 일이 있던, 받아들이는게 최선이었다.
이미 세상은 스트레스 천지니까. 그러는 편이 신경쓸 일이 적기도 했고, 그러는 편이 즐기기엔 더 나은 방법일 테다.
"헤에... 슨배임은 그런 어려운거에 꿰여버리셨던 검까~ 어쩌다 그리 되었대여~"
연애에 관련된 것이라면 어느 누구든 궁금해하는 것은 클리셰인 걸까? 비록 이전의 이야기는 말하기에 조심스러울지라도, 어쩌다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된 것일까 정도는 그녀로서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것도 언젠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잠깐의 티타임과 함께 웃으면서 풀어나갈 이야기려나.
"...응, 그거야 기대하구 있슴다. 설렘이라는 것도 느껴보고 싶슴다."
지금껏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감정도, 계속해서 쌓아나가다보면 언젠간 완성품이 되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목석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깎이고 다듬어져 조각품이 되면 그만이다.
"...푸하~"
자신을 따라하는듯한 동월의 말투에 참으려다가 결국 웃어버렸을까?
"역시 슨배임은 재밌는 사람임다. 이런 사람을 놓친다믄 그건 완전 인생 낭비겠네여~"
상대방이 듣기엔 비약이 심하다 할지라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음... 어떤 부분일라나... 슨배임, 가끔 보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구 그러니까여. VS 게임처럼여~ 가까운 예시를 들자믄...
위험을 무릅쓰고 슨배임 구하러 가기 vs 안전하지만 혼자 탈출하기, 같은 거라던가여?"
물론 그정도면 그녀에겐 아무 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살다보면 더한 선택지를 정해야 할 때가 있을테니까,
"증말이지, 왜째서 즈 주변 사람들은 다들 모 아니믄 도인 검까~ 이쯤 되믄 그냥 온 세상이 코뿔소임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장난스러움이 깊게 스며들어있었다.
"헤헹~ 믿어주시믄 즈야 고맙지여~"
그렇대도 밑 빠진 독은 아닐 것이라 믿는 그 한마디는 분명 그녀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제대로 인식되고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월이란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올바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다른 의미를 담아낸 색들, 빛과 어둠,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힘들테지만... 조금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뭘 그리 놀라심까~ 먼저 고백해왔음서~"
살짝 얼이 빠진듯한 목소리를 흘려내던 동월이 이내 미소와 함께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 역시 한껏 웃어보였다.
하지만...
"엩."
느릿하게 허리를 감싸오는 팔, 그리고 자신의 뺨에 살며시 대어지는 다른 손, 그리고 이쪽으로 똑바로 향해있는 시선은 아주 조금,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을까. 생각하고 움직이는 반응이 아닌 무의식에서부터 전해지는 감각에 그녀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동월을 바라보았다.
"...그 러 니 까~ 그런 사람인걸 알고도 이렇게 지내고 있는거 아님까? 슨배임도 스스로가 그런 사람인걸 알고 있음서 이렇게 같이 있고 싶어하는 거구 말이져."
정말로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곤 못해도... 애초에 어중간한 각오였다면 둘 중 어느쪽이든 먼저 심드렁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그녀는 그러할 테니까... 처음 만난 봄으로부터, 지금 성하제의 가을까지... 그리고 그 뒤로도...
"......"
천천히 기울어져가는 고개, 가까워져가는 입술, 그 상냥한 기운은 자신의 뺨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아주 잠깐, 시야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평소보다도 더 밝은 빛들이 비춰지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경이 곤두서는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게 설렌다는 것일까?
머릿속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래선 서로 배우는 입장인거 아님까~ 증말이지... 사제관계 망임다~ 뿌우임다~"
살짝 뚱한 표정을 짓던 그녀였지만 이내 배시시 웃어보였을까, 동월이 그러했듯, 살며시 허리가 감겨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깝게 붙어있던 그녀 역시 두 손을 뻗어 뺨에서부터 귀 뒤까지 얼굴을 약하게 감싸쥐고선 천천히 시선을 가까이 했다.
"머, 그치만 그게 공평한거 아니겠슴까? 서로의 방식대로... 그 사랑이란걸 알려주고, 알게 된다면 분명 뭔가가 있겠지여.
다행스럽게두, 즈는 숨기는게 없으니까여."
조심스러워 망설이는 경우는 있어도 한번 꺼내기로 다짐했다면, 그녀는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아, 사실 조금은 있으려나? 그래도 사람이니까..."
서로의 코가 맞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잠깐 멈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좀 더 위로 올려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하고선 다시금 고개를 뒤로 물려 동월을 바라보았다.
비사문천의 복장은 어깨부분에 세개의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는 하얀 재킷, 새하얀 바지와 각자 원하는 색의 동양식 장식이 달려있는 하얀 야차 가면으로 통일되어있다. 그릭느 비사문천 캡틴의 복장은 다른 이들과 차별점이 있을 뿐이다.
재킷 안에 받쳐 입은 단추 하나를 풀어놓은 와인색 셔츠와 짧은 치마로 보이나, 실제로는 양쪽 중 한부분은 핫팬츠, 다른 부분은 긴 새하얀 바지와 잘 맞는 낮은 굽의 구두도 귓가에 들려오는 인지저해 프로그램으로 인해 들려오는 작은 노이즈 소리도 이제는 혜성에게 익숙했다. 납치 실종 사건을 해결한 뒤 불법으로 살 속에 박아넣은 칩을 통해 온 비사문천 단원 U의 연락에 늦은 새벽 아지트에 도착한 혜성은 제 앞에 놓여져 있는 커다랗고 묵직한 가방과 이야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키는 기이한 변조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하며 혜성은 얼굴을 전부 가린 노이즈 너머로 피워문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꾹 눌러껐다. 이어지는 U의 깐족거리는 유쾌한 질문에 짤막한 웃음이 노이즈 너머로 흘러나온다.
"수고하셨어요. 하지만 다음에 이런 일이 있을 땐 미리 이야기를 해줘요. 그래야 미리 세탁할 곳을 찾아놓을 수 있으니까요."
현금다발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장갑 낀 손으로 노크하는 것처럼 두드려보이며 혜성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간다. 예상을 벗어난 법외적인 루트로 들어온 생각보다 많은 현금다발을 최소한의 수수료를 지급하고, 최소한의 루트로 세탁해서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이제부터 캡틴인 혜성은 생각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