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줄이려는 노력도 없이 그냥 서랍장을 뒤적인다. 아, 여기도 없잖아. 하긴 그렇게나 실랑이를 했으니 약을 다 치워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그래도 어딘가에 하나 정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니 상비약 하나 정도는 두고 살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하염없이 협탁이고 서랍장이고 가리지 않고 온 방안을 뒤졌다. 뭐, 정 없으면 사러 나가면 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사러 나가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히 그때 사러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이건 볼 일이 없었을테니까. 가장 마지막 서랍을 벌컥 열고, 시야에 들어온 그것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뭐냐면, 그거다. 말랑말랑하고, 조금 핑크빛도 들고, 그 뭐냐. 그거.
이미 예전에 본 적 있긴 하지만— 심지어 집에까지 들고 갔었지만? 설마 그걸 여기서 또 마주칠 줄이야. 이거 그런 건가? 저주인형 메리처럼 '안녕 나 ○○○, 지금 당신의 서랍 속에 있어'하고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계속 나타나고 따라오는 독점력 만땅 ○○○라던가. —겠냐! 상식적으로! 그냥 새로 산 거겠지. ....그렇다는 건 내가 가져갔던 것보다 신형이라는 뜻인데. 뭐가 달라진걸까? 겉보기엔 비슷해보인다만. 별 생각없이 일단 집어들어본다. 촉감은... 예전의 그거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딱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어라. 나 그거.... 어떻게 하고 나왔더라...... 타는 쓰레기가 아니라서 뒤뜰에서 불태우진 못하고 그대로 방에 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엣, 중앙 오기 전에 어떻게 했더라 그거? 어, 어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 순식간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에, 설마. 잘 숨겨놓고 왔겠지...?
".......엣..."
그것을 손에 들고 새파래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무지하게 슈르한 광경이 된 채로 집에 두고 온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 열심히 상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 안 나. 설마... 마마나 파파한테 들키진 않겠지...?
드르륵, 뒤적뒤적, 부스럭부스럭, 드르륵 콰당. 이런 소리의 연속이었다. 내 옷장과 서랍장들을 마구잡이로 뒤적거리는 소리인데, 왜 뒤지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또 그 거지같은 습관 못 고치고 '나 약 먹을래 빨리 조' 하는 거지.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도저히 무슨 목적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일단 히또미미는 그렇게 복용하면 호된 꼴을 보고, 그건 말딸도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아 말리고 있다.
그렇게 실랑이하면서 손가락에서 피도 많이 보고 걷어차이기도 하고, 질릴 지경이라 약을 다 치워버렸다. 그래서 저렇게 뒤지고 있는 걸 방치할 수 있는 거지. 이 상태에서 감기 걸리면 그냥 죽어야 한다.
...그래도 약 잔뜩 먹고 죽느니만 못한 꼴로 살아있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애초에 난 튼튼하니까 감기 걸려도 자연치유 쌉가능이라고. 그나저나 저렇게 뒤지다보면 그 정리는 또 내가―
―까지 생각하다가 퍼뜩 몸을 일으킨다. 의자에서 삐그덕 소리가 난다.
......스트레스 해소에 쓰는 그거. 그러니까, 뭐 이번 건 저번처럼 방치는 안 하는데, 한달에 한 번 꼴이랄까, 아무튼. 그. 요즘 메이사 녀석 때문에 꺼내보지도 못했던 거. 그거 어디다 뒀었지. 두뇌 풀가동...!!!!!!!!!!
그렇게 기억해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까? 협탁 두번째 서랍장이었지! 하며 방 안에 돌입했을 때 내가 이 골때리는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가정은 의미 없지. 이미 저질러졌다고.
메이사는 말랑말랑한 그걸 들고 얼굴이 새파래져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런 얼굴을 할 건 아니잖아?! 비록 그때보다 좀 업그레이드 된 건 맞지만, 그건 겉보기로는 전혀 모르니까?! 아니 그보다 나의 개인물건을 그렇게 턱턱 찾아내지 말아줄래!??!??1!!!!111 라고 따지고 싶은 기분.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빨간책을 들킨 남중생들이 으레 그렇지, 사춘기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나는 그렇게 문가에 서서 경직된 채로 동태를 살피다가,
"............그, 이. 일단 내려놓을까? 메이사쨩... 착하지?"
냉전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주 다정하게, 위험한 물건을 손에 든 메이사를 상냥하게 달래며 한 발짝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고의 시간을 보내는 도중, 거실 쪽에서 의자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삐걱거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문가에 서서 경직된 유우가의 모습이 있었다. 표정은 말할 것도 없이, 엄청 당황한 느낌. 그리고 달래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한 발짝 다가온다. 나는... 인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꽉 움켜쥐고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 어쩐지 그냥. 이래야 할 것 같아서
"......또 산 거야?"
저번의 그것이 사실 저주○○○라서 우리집을 떠나 그리운 주인(?)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는 마치 사정이 있어서 멀리 맡긴 강아지가 주인을 찾아 국토대장정을 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그런 일화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슬쩍 물어본다. 근데... 상식적으로 그럴리가 없겠지. 그냥 새로 산 거겠지. 응. 알아. 알고 있다고.
"그때 봤던 것보다 최신형인거지? 뭐가 달라졌어? 응? 어떤데?"
아까까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 어때. 아마 잘 숨기고 왔겠지 그거~ 일단 잊어두고 지금은 유우가 놀리는 것부터 하자고~
한편, 츠나지에서는 메이사의 방을 정리하던 프로키온 씨가 그것을 발견하고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또 산 거냐니. 또 살 수밖에 없잖아 예전의 그건 네가 처리해버렸으니까! 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한 발짝 다가가자 한 발짝 멀어지는 녀석. 손에는 말랑말랑한 그것이 마치 푸딩처럼 파르르 떨리며 '쭈인니 살려조 🥺' 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그런 호소에 흔들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 아무튼... 좀... 그... 이것저것 묻었던 거(세척빡세게했습니다진짜로요)를 동거하는 여자애가 들고있다는 상황에 진짜, 진짜, 좀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숨막히는 대치 상황!
그거 넘겨달라고 그냥 힘으로 뺏...을 수는 없었고, 메이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연약한 OOO은 흔적도 없이 으깨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는 거. 메이사 돌보기 만 2년 경력의 나는 바로 알아볼 수 있지. 이 녀석 신났다고. 이렇게 물이 오른 이상 거저 받아내는 건 할 수 없다고...
"...그래, 샀다! 뭐! 왜! 내가 벌어서 내가 샀는데!"
...여친이랑 커플링도 맞춰놓고서 샀단 거에서 내가 정말이지 개쓰레기처럼 느껴진다... 참고로 이 신제품, OO주의! 온천여주인의 OOOO 하드는 솔직히 저번 것보단 나았는데, 그걸 동거하는 여자애 앞에서 말하긴... 아, 씹... 얼굴 개뜨거워. 젠장. 아, 진짜...!
그냥 망신살 흩뿌려버리고 메이사 녀석이 기절하고도 남을 후기를 말해버리면 얼빠진 사이에 회수해올 수 있겠다 싶어, 나는 입을 달싹였다가...
어쩐지 크리스마스 때 메이사랑 키스했었던 게 떠올라 얼굴이 훅 붉어지고, 급하게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취소. 절대 못 말해.
"큭... 차라리 죽여라..."
...서랍장 안에는 곁들여 쓰는 이런저런 거도 있으니까 메이사가 직접 체험해보는 수도 있었지만... 그냥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길 기도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든 그것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어 보면, 탄력있는 그것은 마치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푸딩이라고 할까, 색이 이러니까 젤리라고 해야할까... 어느 쪽이든 그닥 먹고 싶은 외형은 아니지만. 그렇게 흔들흔들~하고 놀고 있다보니 무슨 붙잡힌 여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큿 죽여라 선언이 들렸다. 아쉽게도 나는 죽여달라고 하는 녀석을 곧이곧대로 죽이는 취미는 없단 말이지. 죽을 각오를 한 녀석을 오히려 끝까지 살려놓는다는 쪽이 더 재밌고.
아이쿠,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버리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선 천천히 시선을 그것이 있던 서랍 안으로 옮겼다. 그 안에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부속품이라고 할지, 같이 쓰는 거라고 할지, 아무튼 그런 게 있었다. 그렇네~ 모아두는 편이 한번에 쓰기 편하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지도.
"뭐 죽일 것 까지야." "내가 직접 알아보면 되는데, 그쪽이 죽을 필요까진 없지~?"
히죽. 츠나지에서는 자주 지었던 그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어쩐지 오랜만인 기분이다. 그대로 과시하듯 한손을 서랍 쪽으로 뻗었다. 자아자아, 직접 말 안하면 내가 눈앞에서 해버릴거라고?
....아니, 그치만 역시.... ......유우가가 그... 그렇게 했던 걸? 내 손으로? 그렇게 한다고? 갑자기 뭔가 무지 엄청 그런 기분이 들어서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타오른다. 으, 으, 으아악!!! 뻗던 손도 멈추고, 그대로 그냥 오도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게 되어버렸다. 그, 그치만 막상 생각하니까 그게, 그, 그렇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그때 그거 내가 가져갔었다. 그리고 태워버리려다 태우면 안된다는 말을 보고 그냥 그대로 방에 뒀고. ...아니 진짜로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나도 성인이고? 궁금하니까? 몇 번 쪼물거리긴 했지만 그건 겉이고?? 차마 그렇게...진짜..하진 못했다고?? 그냥 얼굴 시뻘개져서는 '이게.. 유우가의...'하고 보기만 했다니까? ....재보려고 대본 적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상황이 내 머리를 하얗게 만들기엔 충분했다는 거다.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그걸 쥐고 있는 손을 움켜쥐는 유우가의 손이라던가, 손에서 더 강하게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이라던가. 다른 손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미끌거리는 느낌에 흠칫 놀랄 새도 없이 바로 잡혀서 그게 그게 그렇게 그
"?!????!?!?!?!?뺘아아아아악?!?!?!?!?!?!?!??!???!!?!"
정신나갈거같아........ 정말 말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으. 으... 으으으.....
......생각해보니 달라진 게 궁금해서 이렇게 해도! 예전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니까 나는 비교 못한다고 젠장!!!!
"힉, 으, 으겍, 으으우우우우...."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그냥 꼴사나운 소리 뿐이라. ...어쩐지 죽고싶어졌다. 아니. 마음을 가다듬자... 가다듬고....
"...변태저질쓰레기당장밖으로뛰어내려서죽어"
어떻게든 매도하기 성공. 하지만 여유없이 다급하게 말해서 역시 꼴사납겠지. 젠장... 죽을래.... 빨리 약이나 달라고.....
싫어 히익 그마아안... 라고 중얼거리고, 엄청 뺫뺫거리고 품안에서 움찔거리는 메이사를 보다보면 조금 엄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그래도 정신 불안정한 녀석은 이제 사양이라고~ 얘는 어차피 나 안 좋아하고. 장난도 슬슬 그만둘까나 생각하면서도, 진공상태는 유지하고 오토 돌리듯 일정하게 시계-반시계 90도 회전을 반복하던 손아귀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야 이 쿠츄쿠츄하는 소리 듣는 거 재밌는걸.
...그래서 메이사가 걷어찼을 때 피할 수가 없었다. 허벅지에 직격타를 맞은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메이사는 해방되자마자 그것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친 OOO은 내 얼굴에 철퍽. 말딸의 따끈한 손으로 데워진... 뜨끈한 액체가 얼굴에 뿌려지는 감각은 진짜 최악이었다. 그보다 허벅지 부러진 거 아냐? 진짜 아프다고 이거...!!!
유행이 지난 츤데레 캐릭터처럼 외치고 나가버린 메이사.
방에 덩그러니 앉아 허벅지를 문지르다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것에 나도 내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
"우... 우왓?!"
따듯해! 말딸의 온열효과 대단하잖아! 인간미 없는 냉온이 아니라고!? 이건... 진짜 괜찮은데? 앞으로 종종 온열서비스 해달라고 하면 안되나??!
...그래서, 손을 벅벅벅벅 씻고 나온 메이사가 마주한 나의 몰골은 그랬다는 거다. 얼굴은 축축하고 자기가 만지던 OOO을 나도 만지고 있는, 오해하기 딱 좋은.
비누를 아낌없이 써가면서 4번 정도 손을 씻고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은.....
......내 손을 잡고 그렇게 그.. 그렇게하던 ○○○를 잡고서 손으로 그...그....
...그나마 본래 사용법대로 쓰고 있지 않은 점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이 상황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 이성적으로는 잘 판단이 안 서는데, 본능적으로는 뭔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밤새 쳐마신 술꾼이 길가에 토해낸 몬자야키(웃음)를 열심히 쪼아먹는 비둘기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하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하.....개변태..."
보나마나 오해라고 말할 게 뻔하지. 그래 봐봐. 방금 말했지? 예지력 200배 상승했다고 나도. 하지만 지금 내가 본 이 모습은 뭘 오해하려고 해도 못할 정도로 명백하고 확실한 그런 모습 아닌가? 오히려 다른 의도로 생각하는게 더 오해잖아?
그렇게 싸늘한 중얼거림만 남기고 카드랑 핸드폰만 챙겨서 현관으로 향했다. ...집애 약이 없는 건 확실하고, 있더래도 더 뒤져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냥... 지금은 여길 나가서 약을 사고, 넷카페에서 한숨 자고 싶을 뿐...
멧쨔가 유우가의 이지메를 당하던 끝에 결국...🫠 그렇게 시모네타라도 던지면서 편해지려던 관계가 약간 경직되고... 여친도 마주치고... 그러는 거구나...🫠 하긴 이 시점에 너무 훈훈하게 끝나면 뭔가 뭔가니까요 히히... 좀 이따 답레 쪄오겠습니다 잠깐 설거지 하고올게요 👋
메이사는 손을 빡빡 닦고 나오더니 문 너머에서 나를 아주... 한심스럽게 지켜봤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빠칭코에 전재산 탕진한 노숙자를 보는듯한 얼굴, 그보다 심한 건 처음 봤어. ...그래, 솔직히 오해할 만 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진?! 애초에 네가 막 내 물건을 뒤져서 찾아내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뭔가 엄청 억울하다!
"...아니아니아니 잠깐, 나가지 말아봐. 이야기 좀 하자고."
메이사가 가디건을 챙겨입고 카드랑 핸드폰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고 있다. 아니 지금 나가면 또 말딸의 각력으로 달려서 외박하고 올 거지? 그건 막고 싶다고. 집 안에서는 내가 변수를 통제할 수라도 있지 바깥은 그런 거 전혀 안 되고. 뭣보다 친절한 아저씨들이랑 놀고 오는 건... 좀 그렇잖아. 애가.
나는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아까 걷어차인 쪽으로 딛자마자 쭉 올라오는 통증에 " 아, 악, 아 씹...!" 하며 깽깽이 발로 뛰기도 하고, 아무튼 현관까지 다가가 문을 열려는 메이사의 손을 움켜쥐... 지 못했다. 미끄덩, 하고 빠져버려서.
거기 다급해진 나는 일단 가지 못하게 문에 손을 짚 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미끄러져서 철문에 성대하게 팔꿈치를 찧었다. 아야야야, 미친, 오늘 일진 왜 이러냐... 하고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떠보면,
"우왓."
미끄러져서 순식간에 가까워진 우리의 거리. 그리고 문을 등진 메이사를 몸으로 가둬두다시피한 자세. 이. 이건...
일단 축축한 손이라도 메이사의 손을 붙들고 이야기하자.
"...진짜 설득력 없겠지만, 이거 진짜 오해야. 메이사."
이 말을 해선 안 됐는데. 말하면 오히려 믿음이 안 가는 마술의 한 마디를, 나는 다급해서인지 내뱉고 말았다.
현관을 나가기 전에 뭔가 우당탕쿵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쪽을 향해 넘어지는 듯한 유우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곧 찾아올 중량에 대비를 했는..데... ....아무 일도 없네? 슬쩍 눈을 뜨면 아무 일도 없긴. 문을 등지고 선 나를 벽쿵 자세로 밀어붙이고 있는 유우가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와 미끌축축한 손에 꽉 잡힌 내 손이... 묘하게 클래식 시즌 크리스마스를 따올리게 하는 그런 구도라고 할까, 서로 반대지만 말이지.
"윽, 비, 비켜 이 변태! 저질! 쓰레기! ○○○로 부족해서 나한테도 하려는거지!!"
한참 이어진 매도 뒤에 나온 것은 신뢰도 0%의 대사. 이 대사를 믿고 따라가면 인생 망한다는 건 온갖 매체와 주변 소문으로 간접체험한지 오래다. 그러니까 절대 안 속는다고.
"하? 믿으라고? 뭐를? 내가 좀 전에 본 거? 그게 오해라면 나는 눈깔을 갈아끼워야겠는데."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서 슬금슬금, 손을 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문만 열면 바로 튀어나갈 수 있어, 내 승리다(?)
"야...!!! 아! 억울하네 진짜!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 이게!"
아, 이걸 읽고있는 한국의 독자들을 배려한 훌륭한 의역이다 이건. 일본어로 대충 그런 의미의 관용어구를 말했어. 진짜야. 아니 근데 메이사 얘가 어이없게 말하잖아! 물론 메이사가 완전, 막, 전혀 끌림이 없다 이건 아니지. 맨날 편하게 입고 다니기도 하고, 예전부터 발달은 잘 돼 있었으니까. 그래도 말이다...! 허락... 이 없잖아?! 시그널이 있으야 내가 붙잡든 말든 하지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리는데 그런 엄두를 내겠냐고.
뭐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아무튼 그런 내가 듣기엔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이거지. 거기에 어그로가 끌려서 반박부터 하려던 찰나, 손을 꼼지락대며 내 손아귀에서 나오려는 메이사. 손에 힘을 꽉 줬지만 그래서인지 더 수월히 미끄러져 빠져나왔고, 메이사의 그 손이 문고리로 가는 걸 보자마자...
...아니, 그래요. 위에 저렇게 말해놓고 나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급하면 몸에 익은 나쁜 버릇부터 나오는 법이라고요. 메이사가 요즘 워낙 또라이같은 짓을 많이 했으니까 내가 좀, 그래, 조급했다니까.
미끌거리는 손으로는 도저히 안되겠어서 팔로 허리를 끌어당겼다. 원래도 좁았던 우리 사이의 공간이 더욱 밭아져, 메이사와 내 가슴이 맞닿고 눌렸다. 안 돼. 어, 안 돼. 이걸 풀어도 안되지만, 안 풀어도 안 돼. 아, 젠장 일단눈깔면난진짜큰일나는거야.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둘다 엄청 머쓱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감각이 들어 애써 눈을 피하며 일단 아무 이야기나 하기 시작했다. 의식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워, 원래 그건 세척도 해야 하고 그런 게 남아있으면 곤란하다고, 아무리 수성이어도 빼놔야지 편하단말이야 나는그러니까청소를하려고한...!!!! 아니 애초에 왜 남의 서랍을 막 열어서 찾아내는 거야 그걸!"
근본적인 지적! 그렇게 왁 외쳐버리고 나자 내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 꼬라지가 되어버렸다.
"너 그거 나쁜 버릇이라고! 아니, 지, 진짜 내가 그렇게 절제 없이 살았으면 말도 안 해 그동안 너 있어서 내가...!!!!!!!!"
대충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꼼지락대다보니 손을 잡는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덕분에 더 수월하게 빼낼 수 있었다. 퐁 소리라도 날 것 처럼 튀어나온 손으로 재빨리 문을 열려고 했는데, 전혀 예상 못한 사태가!!
"햣?!"
그대로 허리가 끌려가더니 쿵, 이마랑 뭔가가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감은 눈을 뜨면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건... 유우가가 입고 있는 옷 의 가슴팍 정도 .....조금 전에 했던 말이랑 너무 다르지 않아? 여, 역시 그럴 생각인거 아냐? 한번 더 경멸하는 눈으로 유우가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영 시선이 맞지 않는다. 뭐냐고 진짜...!
"하? 그딴 거 별로 알고 싶지 않거든?" "그게 싫으면 찾기 쉬운데다 상비약 두면 되는 거잖아. 나라고 뭐 좋아서 찾은 줄 알아?!"
물론 감추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고, 애초에 내가 원인이겠지만. 그래도 아무튼, 나도 찾아내고 싶지 않았다고 그딴 거! 나도 억울하다고! 억울함을 담아 빽 외치고 나서 잠시 숨을 고른다. 젠장.. 손에 또 묻었잖아... 4번이나 씻었는데 또 씻어야한다고...
상비약이라는 말에 한숨이 푸욱 나온다. 그렇겠지. 내가 당초 예상했던 목적대로다. 또 뭔가의 이유로 심기가 상해 나한테 시위를 하려는지 뭔지 마구 입에 집어넣어놓고 손가락을 물어뜯겠지. 저번에는 정강이였지만 이번에는 무릎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죄어오는 기분이다. 원래도 수술한 무릎, 무리하지 않으려 애는 쓰고 있지만 그래봤자 현상 유지. 우마무스메의 각력으로 걷어차이면 최소한 수술, 최대로는... 서있는 게 기적이 되겠지.
내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무릎이고, 그건 어지간하면 남에게 밝히지 않으나 메이사에겐 내가 직접 말했다. 하지만 저번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걷어차기가 있었다. 믿고서 말했었는데. 가슴에 묻어뒀다지만 또 생각난다.
정강이, 허벅지, 그 다음은... 메이사의 허리를 껴안았던 손에서 슬쩍 힘이 빠졌다. 아니 손 만은 아니고, 온몸에서 쭉 기운이 빠졌다는 말이 맞겠다. 아까는 티격태격이었어도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는데, 약 이야기 하나에 심란해졌다. 눈을 내리깔고, 날 원망하는 얼굴인 메이사를 내려다봤다. 얼굴에서 고단함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약 좀 그만 먹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줬다. 대신 메이사의 어깨에 양 팔을 얹고 느슨하게 감았다. 껴안다시피, 어쩌면 하소연하다시피 매달려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숨이 스르르 나온다.
"미안해. 내가."
뭐에 대해 미안해야 하는진 잘 모르겠다. 난 최선을 다해주고 있는데, 머리가 이상했던 다른 여자애들은 그러면 만족해줬는데. 네가 있어서 피곤했다. 언제 집에 있는 약을 먹을지도 몰라 다 갖다 버리고, 식사는 깨작거리고, 틱틱거리는 데다 개인공간은 없다시피하고, 그리고 수틀리면 다시 몸만 휙 나가선 안 들어오고. 밖에 나가선 신나게 약 먹어제끼고. 왜 그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애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까지 무력한 기분은 츠나지 때 이후로 오랜만이네.
지치고, 성가시고, 뭐에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사과했다. 난 널 여전히 좋아하니까. 너랑 츠나지에서 지냈던 2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너로 인해 이만큼이나 바뀌었으니까. 나도 애를 쓰다보면 너를 티끌만큼이나마 바꿀 수 있겠지 싶어서.
"잘못했으니까 여기 있어."
그러면서도 느슨하게 감았던 팔을 풀었다. 이렇게 애원해도 있는 게 싫다면 가야지 어쩌겠나. 친절한 아저씨들은 나처럼 잔소리하고 질책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야 너, 뭐가 미안한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테니까. 대답하더라도, 나를 이렇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닐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냥 형식적이고 상투적이고, 당장을 모면하려는 것뿐이잖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자신이 비참해지는 사과다. 날 이렇게 바꿔버린 일이 너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거구나 싶어서. 그걸 직접 입에 올리는 것도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겠지.
".....바보같아."
약은 없어도 술은 있겠지. 그걸로라도 잊어버리고 싶다. 약하고 먹었을 때보단 덜해도 결국 많이 마시다보면 어쨌든 잊을 수 있으니까. 느슨하게 감겼던 팔이 풀리고, 너를 슬쩍 밀치고서 다시 안으로 글어갔다. 화장실로 직행해서 손에 묻은 것들을 닦아내고선 이번엔 냉장고 앞으로.
"....."
그리고 손에 잡히는대로 술을 꺼내서 들이켰다. 차가운 술이 가차없이 목으로 넘어간다. 쓰고 맛은 없지만, 비참한 기분보단 맛있다고 할 수 있지.
저............. 멧쨔의 복용량이 처음 왔을 때보단 약간씩 줄어들고 있다는 제멋대로 뇌피셜이 있어요 예전엔 막 스까서 손 위에 수북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단일한 종류로 손에 소복이 쌓일 정도... 그래도 약먹을 때마다 소동이 일어나니까 둘다 그런 미묘한 변화는 캐치하지 못할 거 같다는...🫠
여친쨩과 데이트(집에서 이케아 가구 조립 대신 해주고 일단 2만엔 받아오기, 이 돈으로 멧쨔 고기사줘야겟다) 하지만 이 실상을 짐작하지 못하는 멧쨔는 땀흘리고 샤워까지 하고 온 고급향기 유우가를 보고 🙄💊🍺 상태가 되는 거겠죠...
그랬다가 여친쨩네 집에서 외박하면서 "아 이거 유우가가 조립해준 거" "아 이것도" "아 이건 들고와줬어" 😿 "둘이 진짜 친했는데 내가 방해했구나..." 🍇 "일당 2만엔 줬어." 😺 "아...!!!!!!!!!" 하는 네컷만화 봐버린wwwwwwwwww 어쩐지 유우가 데이트하고 나면 맛난 걸 해줬어... 데이트해서 기분 좋은 줄 알았는데 돈 받은 거엿구나 하고 납득하는 시간을 가져버린다던가wwwww
>>997 유우가가 술 말아 마시는 취미를 들이게 된 건 화해 이후겠네요 🤔 불안정한 멧쨔한테 독한 양주가 들어가면 진짜 큰일날테니까... 화해하곤나서는 같이 안주 만들고 유우가가 우롱하이볼 같은 거 만들어주고 하면서 건전음주 라이프 즐길거라 생각하니까 엄청 마음이 따듯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