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외진 곳에 있는 고즈넉한 신사. 오늘은, 신당에 계신 신께서 긴히 할 말이 있다 하셨다.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를 꺼내시려는 걸지. 어렴풋이 짐작가는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분이 직접 말씀하시기 전까진 그저 추측일 뿐이라.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몸짓으로 다과를 챙겨 신당에 들어선다. 다과 올린 쟁반을 내려놓고, 그분 앞에 무릎꿇고 앉으며 고개 숙인다.
이 곳에 내려온 이래 벌써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더할 나위 없이 과분한 보필을 받았고 또 더할 나위 없이 많은 신앙을 받았다. 충실한 신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보필을 받을 시간도 이제 슬슬 끝나갈 때가 되었다. 슬슬 올라오라는 대신의 명을 받았다. 더 이상 인계에 내려가 있지 말라는 명을. 인세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 판단이 흐려질 것을 염려하신 듯 하다. 그도 그럴게 나는 공정의 신. 공정의 신이 인세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서야 되겠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선택을 하기로 했고, 그 날이 오늘이다. 내려놓는 쟁반,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끓는 나의 신관.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주었다. 그러니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그동안 과도한 일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답니다. "
부드러이 미소지으며 제 신관의 손을 꼭 잡고 건네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들릴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일부터는 빗자루만 쓸어도 되어요. 주인 없는 사당에는 [ 관리 ] 만 필요할 것이니까요. " "신도도 많이 오지 않는 이런 신관에서 일하느라 많이 힘들었지요? "
공정의 신이란 명명과 달리 공정의 신을 찾는 신도는 많지 않았다. 신을 믿는 사람들도 이제 줄어들어가는 추세이니 어련할까. 자신을 향한 신앙심이 차츰 줄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정의 신. 이런 사사로운 것에 연연해서는 아니된다. 그러니.....
이젠 정말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수고 많았답니다. 나의 신관님. " "이제는 편히 쉬엄쉬엄 하면서 일해도 좋아요. 너무 고생하려 하지 마시구요. "
신이라면 마땅히 하늘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 게다가 당신께서는 엄연한 공정의 신. 때문에 돌아가겠다는 그 결정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 개인적인 감정이 앞선다.
"...가지 마십시오."
놓아지는 손을 다급히 잡아챈다. 신께 감히 무례를 범하는 짓임에도 서스럼이 없다. 떨리는 시선으로 그분의 존안을 눈에 담으니, 더욱 짙고 강렬한 감정의 파도가 밀려온다.
"당신께서 그렇게 가버리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신께서 떠나신다 하여도 여전히 하늘에 계시매 신앙이 단절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럼에도 그분이 계시지 않은 신당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애초에 이 감정은 신을 향한 신관이 가질 법한 게 아니다. 그보단 연모하며 사모하는 대상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남자의 마음에 가까울 터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 곁에 계속 있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 가녀린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호소한다. 이미 흐려진 판단력으론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했다.
길쭉하고 얇은 손을 부여잡은 억세고 굵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음에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왜? 라는 말은 물을 필요가 없다. 당신께서 가버린다면 저는 어찌하냐는 그 말 역시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다시 각자의 가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일 지어니.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자신의 신관을 지긋이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놓아주시지요. "라고 나직이 말해보이려 하였다.
"이렇게 간절하게 말해온다면, 이 공정의 신에게도 미련이 생기려 하지 않겠어요. "
이것은, 더이상 나를 공정하지 않게 만들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부탁 이다. 너라는 존재가 내 마음 속에서 서서히 커져가 집어 삼키려 하고 있으니, 중심을 잡게 해 달라는 요구.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한가지 말을 건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