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과거의 시라카와 선조님들 말이야? 그거라면 죽을 뻔 한 것을 구해줬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난! 다이묘가 자기 성이나 땅 뺏기고 패주하고 도망치고 그러면 사실상 살아남긴 힘들다고 들었거든.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보호를 해주고 구해줬다는 느낌이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욕欲이라면 몇 번이고 진탕 쏟아부었기에 받아줄 용의 또한 생겼다. 벅차도록 무겁게 짓누르던 입맞춤 멎은 자리에 신애 가득한 요괴의 입술이 닿아 온다. 이미 난폭하게 몰아치는 행위에 익숙해진 터라, 제게 바치는 숨결 모조리 뺏어 버릴까 하는 충동 짧게 스친다. 허나 제 것에 비하자면 간지러운 입맞춤일지라도 그 흥취 나쁘지 않아 가만 받아주기로 했다. 그것으로 마침내 줄곧 길었던 행작 끝이 난다. 제법 평정해진 낯을 하면서도 은근한 뒷맛에 제 아래의 요괴를 물끄럼 내려다보다, 문득 들린 말에 반사적으로 눈매 좁혔다. 대단히 심기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늘 그래 왔듯 공연스레 못된 심보 튀어나온 것에 불과한지라. 당장 싫다 하며 이 녀석 괴롭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참 호식한 덕에 제법 배가 부른 참이니 해 달라는 대로 해 줄까도 싶어졌다. 상대는 수줍은 기색 잔뜩 묻어난 투로 말하고 있건만 낭만 따위 없는 신은 눈에 힘 빼고 대충 털썩 몸 뉘이기나 한다.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생전 보건실에 들락거린 적이 없었으니 누워서 보는 광경 새삼스럽게 낯설다. 새삼스러운 장소 눈에 익히고 있을 무렵, 곁에서 들린 말에 무신의 고개 곧장 옆으로 기울었다.
"하, 그 음험한 놈."
담담하고 평온하던 표정 별안간 와락 일그러진다. 흐물거리는 체 속 시커먼 놈 얼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탐탁하지 않아서 그렇고, 하필 그놈이 꺼냈단 말이 '카와즈가리'라 하니 더욱 불쾌했다. …생각난 참에 마주치거든 더 두들겨 주어야지. 무신 제 형제란 놈처럼 뭇 신사神事에 통달한 것은 아니라지만, 오래된 역사와 제사에 관해서는 당대의 상식으로써 아는 바가 제법 있었다. 특히나 시나노의 이치노미야一宮로 꼽혔던 대사大社의 제의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새해 아침의 개구리 사냥. 신년 밝은 아침에 개구리를 죽여 무사와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다. ……듣기만 해도 그 늙어빠진 자식 꿍꿍이속 품었음이 뻔하군. 그 이야기 나온 계제 소상히 고해 보아라."
무신 누운 채로 장탄하다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곁으로 몸 돌린 채 한쪽 팔로 제 몸 지탱하며 답 기다렸다. 그 녹슨 철쪼가리 같은 그 자식도 그 자식이지만, 이 맹랑한 녀석도 눈만 떼면 사고를 쳐 대니 만만찮게 괘씸하다. 생각하자니 또 짜증 치밀어서 한 대 먹여줄까 싶으나 우선은 참기로 했다. 무엇이 되었든간에 골치아프게 될 일임은 분명하니 골아플 준비는 미리 마쳐 둔 참이다.
비는 끊이지 않고 오늘도 어김없이 내리고 있었다. 학교가는 날은 아니었기에 굳이 우산을 쓰고 비를 뚫고 외출할 이유는 없었으나, 유우키에게는 비가 오늘 날이라고 할지라도 일정을 빼놓을 순 없었다. 이런 휴일에는 카와자토 저택으로 가서 이것저것 일을 돕고는 했으니까. 물론 꼭 그래야만 하는 의무는 없었으나, 이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행동에는 귀찮음이나 마지못해서 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룩주룩. 빗방울을 온 몸으로 받은 푸른색 우산을 접은 후, 물기를 탈탈 털어낸 그 우산을 유우키는 현관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오늘은 뭐부터 할까. 일단 엉망이 된 곳은 없는지 확인부터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유우키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러는 와중에 복도에서 한 여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가라 테루. 카와자토 아야나의 식객. 정확히 어떤 이인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데리고 온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간? 아니면 요괴? 그것도 아니면 신? 어느 쪽이건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야나의 손님이라면 자신이 카와자토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접할 손님이라는 사실만이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사가라씨."
언제나처럼 팔을 한쪽 접어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선 기품이 흘렀다. 흘러가는 물처럼 어색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인사를 마치며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