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메르바타트 성별: 여성 나이: 최소 천 살. 정확한 나이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종족: 드래곤
외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그 나이대 평균 언저리에 드는 신장과 마른 체구. 등을 덮도록 자란 순백의 머리카락은 오래 관리하지 않은 듯 아무렇게나 길어 있었으나, 타고난 머릿결 자체가 차분한 덕에 그 자체로도 적당히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아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들이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두 눈. 시리도록 푸른 빛을 띄는 눈은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보일 앙다물린 입매는 언뜻 무심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지라, 첫인상만 보고는 높은 신분의 아가씨로 오해받는 일이 빈번하다.
허나 이것은 모두 폴리모프로 꾸며낸 모습일 뿐, 그 본체는 천 년간 설산을 지켜 온 고룡. 햇빛 아래 투명한 푸른빛이 감도는 비늘이며 고드름을 닮은 뿔, 서리로 이루어진 듯한 피막까지 설산의 빙하를 조각해 만들어 놓은 듯한 백룡이었다. 그 크기는 대도시의 성채와도 견줄 만한 것이, 족히 30피트는 되어 보인다.
성격: 홀로 지낸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탓인지, 타고난 성품인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드물며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나마 호기심은 강해 종종 설산에 찾아오는 인간들을 관찰하곤 했으나 그뿐인 듯. 이 종족이 대개 그렇듯 스스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다른 생명체들을 종종 깔보곤 하는데, 이것이 앞선 특성과 더해져 오만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기타: - 드래곤으로서의 진명은 하메르바타트.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는 이를 줄여 하멜이라는 가명을 이용한다. - 설산 어딘가의 얼음 동굴을 레어로 삼아 지내고 있다. 내부는 인간 모험가들이 잃어버린 물건이나, 죽은 모험가들의 소지품 등에서 발견한 수집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 인간의 관념과는 동떨어진 언행을 보이곤 한다. 생명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는다거나, 인간의 한평생을 찰나로 취급하는 등.
외모: 왼쪽 뺨의 흉터 때문에 다소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다. 칠흑 같이 검고 뻣뻣한 모질의 머리. 손질을 잘 해도 곧장 저리 붕 떠버리고 만다. 피부는 살짝 창백한 편이다. 키는 보통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며, 마치 커다란 관을 세로로 세운 것만 같은 인상이다. 곰이나 커다란 순록이 연상되는 우락부락한 몸이며, 작은 문을 통과할 땐 머리를 살짝 숙여야 할 정도다. 꾸미는 것은 별로 즐기지 않아서 턱에 수염이 수북히 자라, 원래 본인 나이보다 살짝 노안으로 보인다. 그래도 머리는 종종 깎아서 그리 지저분한 인상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야성적인 느낌에 가깝다. 분신처럼 두르고 다니는 검은 망토에 가려 있지만, 실로 어마무시한 근육질이다. 팔뚝은 어지간한 여자의 허벅지 둘레보다 두껍고, 넓은 등근육 위에선 사람 한 명이 구부리고 잘 수 있을 정도다.
성격: 겉으로 봐선 그리 두뇌회전이 빠를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지만, 사실 꽤 영리하고 계획적이다. 성품 자체는 악하지 않고 되려 선한 편이나,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악행을 벌일 배짱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기타: - 매끈하고 검푸른 털의 말 한 필을 끌고 다닌다. 이름은 포라손. 척 봐도 명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고, 그만큼 힘과 스피드도 발군이다. - 등에는 칼 한 자루를 묶어서 매고 있는데, 도신이 넓고 길며 그 무게 역시 상당하다. 허나 좁은 공간에선 휘두르기 애매하여, 허리춤에 따로 단검 한 자루도 차고 있다. - 단검 옆엔 돈주머니도 차고 있다. 꽤 묵직하여, 한 눈에 봐도 돈이 가득 들어 보인다.
이 시기 남부의 밭에서는 꽃과 작물들이 풍성하게 피고 자라 그곳 인간들의 삶을 한껏 풍요롭게 하고 있을 터이지만, 북부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푸르른 초목은 듬성듬성, 그것도 모두 잎이 좁은 침엽수였으며, 그 외에는 헐벗은 막대기처럼 생긴 앙상한 것들만 종종 보였다. 지금 내가 말을 끌고 거니는 곳은 정말 재미 없는 조용한 설산이었다. 가끔 가다 눈토끼 같은 것도 나왔는데, 평소라면 돌멩이로 맞춰 잡아 불에 구워 먹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쓸 데 없이 이 설산의 ‘주인’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는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주인은 하얀 비늘을 가진 용이라 하며, 멀리서 보면 눈이 쌓인 언덕으로 착각할 만큼 크고 새하얗다고 한다. 솔직히 용이라니...,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신의 대리인이라 여겨지는 그 신비로운 생물이 실재하는 것이라, 어지간히 신실한 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않겠지.
하물며 신앙심이라곤 쥐의 눈물만큼도 없는 내가 그 존재를 믿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헌데 조금 이상한 것은 그 이야기를 해줬던 사람이 평소 이런 헛소리를 즐겨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상당히 진중하고 믿을만한 사람으로, 원래라면 나보다도 더 이런 부류의 하찮은 이야기에 눈길 하나 주지 않을 만 한 인물인데.... 어째서 그렇게 경계했던 걸까? 그것도 빠른 말을 보내 나한테 직접 편지를 부쳐서 경고할 정도로.
"드디어 노망이라도 났나....“
나이가 거의 60은 찬 노인이니 그럴 만도 했다.
별로 그 이야기에 겁을 먹어 토끼조차 무시하고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거니까.
”저기.... 사, 사람인가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고 힘 없는 여성의 목소리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차라리 짐승의 울음소리라면 더 위화감이 없을 상황이었다. 언제라도 등 뒤의 검을 뽑아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 속도를 줄인 뒤에 찬찬히 말 머리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수풀 쪽에 몸을 숨긴 채로 이쪽을 빤히 들여다 보는 갈색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키나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 겨우 성년을 넘긴 것으로 보였다.
깨끗한 옷 만큼이나 인상도 깔끔한 소녀였다.
”무슨 일이오?“
”늑대..., 늑대의 습격을 받았어요!“
소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늑대라.... 오면서 늑대 발자국 하나 보지 못했는데.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보자, 좀 더 많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산길이 험한데 저 소녀 혼자 무리도 없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분명 무리가 있었을 터였다. 헌데 지금 이렇게 혼자 있다는 것은, 늑대에게 습격당했다는 소녀의 말을 믿자면, 동료가 당하는 사이에 홀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된다.
말이 되는가? 저렇게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차라리 신을 속이지 그래.
분명 근처에 동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정하고 보니, 또 왜 구태여 그녀가 이런 수풀이 많은 곳에 숨어서 날 불렀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말 없이 등 뒤의 칼을 꺼내자 소녀는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했는지 벌떡 일어서, 언제 자기가 힘 없는 소릴 내기라도 했냐는 듯이 험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죽여..., X발 저 X끼 칼 꺼냈으니까 나와서 죽이라고!”
“사슴 같은 눈하고 입 한 번 험하시네. 근데..., 누가 누굴 죽인다고?“
수풀 속에서 대여섯의 사내들이 연장을 차고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훈련도 안 된 농부처럼 생긴 도적 놈들 주제에, 숫자가 되니 지들이 뭐 되는 줄 알고 날 에워 싸기 시작한다.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오지 않나? 어지간히도 장사가 안됐나 보다. 이 키와 덩치를 가지고, 거의 지들 키만한 칼을 쑥 뽑는 상대에게 덤벼들다니.
어쩔 수 없나. 사람 죽이면 영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맘에 안 드는데.... 왜 꼭 착한 사람을 건드려 살생을 하게 만드는지.
”으악!“
”시..., X발! 이 X친 괴물 X끼가....“
한 손으로 이 검을 휘둘러 한 명의 허리를 쳐 두 동강을 내자, 경악한 동료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이미 끝났다. 수준 차이를 느껴 압도된 시점부터, 이제 저들은 내게 무기를 휘두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지. 그러게 왜 덤벼선....
”다 썰어버리기 전에 저거 들고 꺼지쇼. 가져가서 장례는 치뤄야 할 거 아니요?“
그렇게 폼 잡고 한 마디 하는 순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소리가 설산 전체를 크게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그대로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 깔짝할 수 없었다.
설산의 고룡이 마지막으로 눈을 뜨고 그 몸을 일으킨 것은 수십 년, 못 해도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한 생명이 태어났다 스러졌대도 족할 시간이나, 드래곤에게는 잠깐 눈을 붙이는 데 그칠 시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존재의 시간이, 채 한 세기도 가지 못할 인간의 시간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하여 이번의 잠은, 특히 직전에 수 세기간 잠들어 있던 일과 비교하자면,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단잠을 깨운 것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철의 냄새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얼어붙은 돌과 흙, 얼음과 눈뿐인 이 산맥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쇠의 비릿한 내음.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향이었다.
이 시기에 황량한 북부에, 그것도 험악한 산세로 유명한 이 설산에 구태여 찾아온 인간이라니.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아주 없던 일도 아니었으므로 드래곤은 다시 눈을 감았다. 급한 일로 산맥을 가로질러 지나가야 하는 상인 행렬이거나, 주변 마을에서 온 사냥꾼 따위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길 잃은 모험가 나부랭이쯤 되던가. 어느 쪽도 그리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금 들려온 것은 누군가의 고함소리. 유난히도 거슬리는 것을 보아하니 레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일 성싶다. 드래곤이 지키는 곳에서, 그것도 레어 코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인간들이라니. 간도 큰 것들 같으니. 그것은 살생을 즐기지는 않는 편이었으나, 드래곤답게 생명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도 않기도 했다. 하여 저것들을 전부 정리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까 하는 충동이 순간 떠올랐다 밀려오는 잠기운에 도로 가라앉았으나.
인간의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드래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인간 녀석들 주제에 배짱도 좋구나."
긴 울음소리가 산맥을 한 번 울린다. 다른 드래곤이 들었더라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괴성. 이어지는 것은 땅을 울리는 굉음이다. 몇 차례 반복되는 산울림에 비탈 언저리에 아슬하게 쌓여 있던 눈더미가 견디지 못하고 산 아래로 쓸려 내려간다. 놀란 야생동물들이 부리나케 달아나고, 다시 불길한 정적이 내려앉으면,
쿵. 새로운 봉우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몸체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주의 없이 내딛은 발 아래 인간 몇이 뭉그러진 듯도 하지만, 드래곤, 하메르바타트는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죽이든 내쫓든 할 것들이었으니 몇 미리 정리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기다란 목을 숙여 남은 인간들을 내려다본 하메르바타트는 아까의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인간 녀석들 주제에 배짱도 좋구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다시 한 번 산이 울렸으나, 드래곤은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드래곤의 거처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각오는 되어 있느냐."
그리고 가늘어지는 눈매는, 인간의 기준에서 보아도 상대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으리만큼 명백한 공격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밟힌 녀석의 피와 살점, 그리고 내장이 터져 나가 주변으로 튀었다. 동시에, 그걸 맞은 소녀의 비명도 터졌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두려움. 산에서 늑대 무리를 마주치거나, 패전하고 귀환 중인 용병 무리를 마주쳤을 때도 지금과 같은 감정은 느낀 적이 없었다.
고개를 올려다 보아도 끝이 없다. 만약 정말로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도 지금 내 눈 앞의 존재를 일컬는 말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세상 어떤 나라의 어떤 군대도 이 압도적인 존재를 감히 대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죽음. 지금 저 존재를 거슬리게 하면, 난 확실히 죽는다. 물론 저 잡졸 같은 인간들과 넋이 나간 소녀, 그리고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강함의 차가 존재하겠지만, 저 커다란 녀석에겐 그 정도의 차이는 눈에 뵈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나 역시 지금 깔려서 곤죽이 된 녀석과 별 다를 게 없는 최후를 맞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것 외엔 다른 결과가 떠오르지 않는다. 기댈 수 있는 것은 저 존재가 변덕을 부려 날 살려주는 것 뿐이다.
생각해라! 노인은 분명 설산의 주인을 직접 보고도 살아온 자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용은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녀석은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말을 하니 어쩌면 대화가 통할 지도 모른다.
대화라.... 내가 가진 것 중에 저 녀석이 혹할 것이 있긴 하던가? 천 년을 넘게 이 설산을 지켜온 전설의 존재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물건엔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게 뻔하다.
잠시 머리를 굴려가며 그것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 패닉에 빠진 몇몇 인간들이 먼저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가만히 있던 것은 나, 그리고 완전히 넋이 나가 주저 앉은 채 기절 직전인 소녀 뿐. ...저런, 그만 오줌까지 지려버린 건가.... 저건 무사히 돌아가더라도 당분간 사람 구실을 하긴 글렀다.
그리고 움직인 녀석들. 저들은 결코 스스로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만 넘쳐 흘러버린 공포심에 이성이 이기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한 것이다.
멍청한 것들.... 소란을 피워 화가 난 저 드래곤을 상대로, 그렇게 야단법썩을 피우다니.... 이후 상황은 안 봐도 뻔할 터.
인간들이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 또 궁금해하던 시절에야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 설산을 찾는 인간들과 어울리기도 했다지만 그것도 전부 한때의 이야기. 산을 찾는 인간들의 발걸음이 점차 잦아들고, 지독한 권태로움이 찾아온 이후로는 흥미도 그쳐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 보내 왔더랬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란 족속 중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을 굽어보던 눈길이 개중 가장 먼저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이들로 향한다. 어차피 내쫓을 생각이긴 했으니 도망가는 것까지야 막을 생각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내지른 소리가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데 있었는지라.
"내 분명 소란을 피우지 말라 하였거늘."
큰 움직임 없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산이 한 번 뒤흔들린다. 가파른 산길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그 진동에 무너지고, 삽시간에 중력을 따라 아래로 쏟아져 내려온 얼음과 눈의 파도가 도망치던 인간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곧 그곳에는 언제 사람이 서 있었냐는 듯 성인 남성의 키만 한 눈더미만이 소복히 쌓여 있을 뿐이다. 그 무게에 깔렸으니 대개는 명을 달리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살아남아 눈을 헤치고 나올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도 전에 체온을 빼앗겨 그대로 얼어죽을 것이다.
순식간에 원래의 정적을 되찾은 설산이 만족스럽기는 하였으나 방금 벌을 내린 녀석들이 불청객의 전부는 아닌지라. 그사이 조용히 도망쳤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아니라면 그 인간들까지 설산 아래 묻어버린 후 다시 긴 잠을 즐기러 갈 심산으로 하메르바타트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서..., 설산을 지키는 위대한 용이여."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인간 하나. 이미 자리를 떴거나, 겁에 질려 정신을 놓은 채 주저앉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는 예상과 달리 당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누가 너에게 입을 열 것을 허락하였지?"
아니, 당황보다는 흥미에 가깝겠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재미에 조금은 짜증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용기 한 번 가상하구나. 그래, 계속해 보아라."
하여 답지 않게 변덕을 한 번 부려 보았다. 같잖은 말을 주절거린다면 마저 없애 버리고 돌아가면 될 일이고, 조금이나마 재미가 있었다면 그 용기와 노력을 크게 사 살려 보내줄 수도 있겠지. 모두 저 인간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리라.
입술을 꽉 깨물고 싶었던 것을 애써 참았다. 방금 저것이 눈사태를 일으켜 수 명의 도적들을 눈 무덤 아래 묻어 버린 것을 막 본 참이다. 크기만 큰 게 아니다.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벗어나 자연현상까지 다루는 존재인 것이다.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 노인이 그렇게나 내가 이 설산을 넘어가는 걸 만류했는지.
하지만 입을 열든 열지 않든, 죽는다면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확률이 조금은 있는 쪽에 거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미 눈 속에 갇힌 저 치들이 용의 심기를 잔뜩 건드려 놨으니, 나 역시 같은 패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 아까 빈틈이 잠시 생긴 사이에 그대로 도망쳤다면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솔직히 그런 도박에 몸을 걸고 싶진 않았다. 만약 저 용이 날 정말로 죽이고자 한다면, 말을 타고 전 속력으로 달려 봤자 불과 5초 안에 잡히고 말 테니. 포르손은 내 말이긴 해도 훌륭한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참 운도 없지. 전설로만 전해질 정도면 최소한 근 수 십 년 동안은 나타난 적도 없었을 텐데, 하필 내가 산을 넘을 때에 깨어나서는....
“용기 한 번 가상하구나. 그래, 계속해 보아라.“
됐다. 일단은 최소한 들을 마음은 생긴 것 같았다. 이걸로 가장 힘든 부분은 지나간 셈이다.
이젠 그 의중을 알아차릴 차례다. 무엇 때문에 나를 살려 두었는가?
실은 선량한 용이어서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내려오자마자 그저 단잠을 깨웠다는 이유로 이런 X친 대학살극을 벌이진 않았을 터였다.
그러면 여기서 소란을 피우게 된 이유를 듣고 싶어서?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먼저 자초지종을 듣고 판단을 내렸겠지, 지금 저것이 보이는 반응은 그저 방의 쓰레기를 치우는 듯한 그런 느낌이잖은가? 느껴지는 건 딱히 짜증나거나 힘들지도 않은 잔잔한 귀찮음 뿐이다.
남은 건... 흥미인가?
맞다. 녀석은 날 관찰하고 있는 거다. 마치 무료한 와중에 갑자기 굴러 들어온 보물상자와도 같은 것이지. 그야 천 년이나 이런 설산에 머무르고 있다면 심심하기도 할 터이니....
그 때, 잠깐 스치듯 어떤 생각이 머리 속을 지나쳤다. 그래. 그거라면....
“발언을 허락해 주어 감사하오, 설산의 주인.”
잠시 그 거대한 것에게 고개와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 예법이야 어릴 때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배웠으니, 아마 실수는 없을 터였다. 뭐..., 저 용이 인간의 예법을 얼마나 이해해 줄 진 모르지만.
“내 이름은 데일이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편력기사지. 어느 한 곳에 발을 붙이고 한 달을 넘겨 살아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지식의 폭 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소.“
나는 잠시 거기서 입을 달싹였다. 다음 꺼낼 말은 용의 심기를 다소 건드릴 지도 모를 말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 이미 건드린 벌집이다. 이제와 물리는 것은 곧 실패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테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웃음을 지었다.
“귀공께선 이 영역을 오랜 세월 다스려 온 것으로 아오. 실로 당신의 위엄에 걸맞도록, 넓고도 광활한 대지였소이다. 허나, 내 이 설산을 오르다 보니 또 그런 생각도 들더군. 넓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인 황량하기 그지 없는 땅이라고.... 이 설산은 그대와 같이 고귀하고도 강대한 용이 다스리기엔, 다소 추레한 곳일지도 모르오.“
잠시간의 유흥거리로 살려 두긴 했다만, 사실상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저렇게 당당한 기세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처음이라 잠시 흥미를 가졌을 뿐, 한낱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라고는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구걸 혹은 거래 제안이 아니겠는가. 드래곤의 시각에서도 아득할 만큼 먼 과거의 일이기는 했지만, 인간에게 제 본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열이면 열 두려움에 떨며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 테니 살려서만 보내 달라 빌던 이들. 수레 가득한 귀물부터 음식물과 노예까지, 그 제물의 종류도 다양했으나 드래곤을 만족시킬 만한 것은 없었기에 그 최후는 뻔했더라지. 하기사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비싼 금은보화라 한들 설산을 벗어나지도 않는 드래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이름은 데일이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편력기사지. 어느 한 곳에 발을 붙이고 한 달을 넘겨 살아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지식의 폭 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소."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자랑거리야 제 알 바 아니라 해도, 자꾸만 제 예상을 빗겨가는 인간이란 꽤 흥미롭지 않은가. 길어지는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귀공께선 이 영역을 오랜 세월 다스려 온 것으로 아오. 실로 당신의 위엄에 걸맞도록, 넓고도 광활한 대지였소이다. 허나, 내 이 설산을 오르다 보니 또 그런 생각도 들더군. 넓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인 황량하기 그지 없는 땅이라고.... 이 설산은 그대와 같이 고귀하고도 강대한 용이 다스리기엔, 다소 추레한 곳일지도 모르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하메르바타트가 이 설산에 대해 애착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이다. 인간들이야 제멋대로 다스리니 지키느니 하지만, 사실 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이 설산을 지배한다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지킨다 한들 그의 레어 정도일 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니만큼 가장 익숙한 곳이라는 정도의 가치는 두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이것은 드래곤의 관점일 뿐, 인간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은가? 저 데인이라는 인간이 말을 뱉어 놓고도 눈치를 살피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제 '영역'을 모욕했으니 자신이 진노할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한다.
"말재간은 좋은 인간이로구나."
저 뒤에 또 어떤 말을 하려고 서론을 이리 길게 끄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는 않겠지. 드래곤에게 남는 것이라곤 시간뿐이니 말이다. 제 마음에 들 만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면 자비를 베풀어 살려보내줄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모욕당했다는 핑계로 치워 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칭찬 아닌 칭찬이다. 시퍼런 눈으로 내려다 보고 저런 말을 들어 봤자 기쁠 리 전무하나, 그래도 내심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한숨이 놓였다. 다소 막 산 인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진 않았다. 인적도 드문 이런 설산에서, 시체도 못 찾게 저런 무지막지한 것에게 당하는 결말이라니....
그래도 일단 첫 단추는 꿰었다. 이런 때만 되면, 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머리 회전이 평소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팽팽 돌아간다. 그리고 종종 그것으로 구원받곤 하지. 이번에도 부디 그 지혜가 날 살리길....
“그래서, 네놈이 할 말이라곤 그것이 전부인가?“
여기가 승부처로군.
나는 되려 그것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어차피 저 반응이 호기심이건, 아니면 죽이기 전에 마지막 말을 들어 두는 것이건, 결국 나는 앞으로 들이 받아야 할 운명이니까.
“그럴 리 있겠소? 그랬다면 내 이유 없이 귀공의 영역을 헐뜯지도 않았을 터이지.”
배짱 좋게 서 있지만 실로 오금이 저릿저릿하다. 허나 그런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곧장 사지가 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더욱 강하게 밀어 붙여야 할 때. 또 한 걸음 하곤,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당당하게 위를 올려다 보고 쩌렁쩌렁, 산이 떠나가라 외쳤다.
“찾아주겠소!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근사한 영토를.... 이 차가운 설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요. 남쪽 땅 멀리, 불타는 사막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과실들이 열린 수 만 그루의 과수가 있소. 금은 보화...?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북쪽의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생애 한 번은 만져볼까 한 그런 커다란 보석을 그저 한낱 장난감처럼 다룬다오.”
나는 그 용의 앞에 등 뒤의 칼을 풀어 땅에 꽂아 넣었다. 분명, 기사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주군에게 맹약을 한다 하였다. 술집에서 만났던 어린 종자가 그랬었지. 지금 쯤 아마 건실한 청년이 되어 있겠군. 편의 상의 편력기사를 자처하고 있을 내가, 설마 하니 이런 짓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말을 들을 땐 정말 미처 몰랐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법, 만약 이것으로 내 목숨을 구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댓가는 내 목숨이오. 만약 내 제안이 성에 차지 않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기꺼이 귀공께 이 목숨을 바치지.”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기사가 새로 모시는 주인에게 예를 갖추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시,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높이 든 채 두 눈을 마주하곤 물었다.
"찾아주겠소!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근사한 영토를.... 이 차가운 설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요. 남쪽 땅 멀리, 불타는 사막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과실들이 열린 수 만 그루의 과수가 있소. 금은 보화...?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북쪽의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생애 한 번은 만져볼까 한 그런 커다란 보석을 그저 한낱 장난감처럼 다룬다오."
그 화려한 묘사보다도 하메르타트의 마음을 이끈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존재이리라. 드래곤의 시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지금껏 그가 보아 온 가장 먼 곳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본 것이 전부였다. 끝없는 설원과 암벽, 흰 눈과 푸른 얼음만이 가득한 시야. 운이 좋아야 맑은 날에 산맥 언저리에 위치한 마을 한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 설산은 황량한 북부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이 설국 밖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대륙을 종단하다 보면 녹음이 우거진 밀림도, 불꽃이 일렁이는 사막도, 인간이 쌓아올린 대도시도 있다는 사실을. 허나 그것은 전부 글과 말을 통해 학습한 것일 뿐. 그런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라.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 이후 말라붙었다 여겼던 호기심이 다시금 들끓고 있었다.
"댓가는 내 목숨이오. 만약 내 제안이 성에 차지 않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기꺼이 귀공께 이 목숨을 바치지."
그대로 검을 지면에 박아넣고 무릎을 꿇는 인간을 바라보며 백룡은 고민에 빠졌다. 인간 따위가 목숨을 내놓는다 한들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저렇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던진 인간이라니. 그 자체로 흥미롭지 않은가? 세상 구경이라면 저자 없이 혼자 떠나도 될 일이라지만 천 년의 삶을 통틀어 가장 흥미롭다 할 수 있는 인간을 이대로 죽여 없애기는, 어쩐지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어찌하겠소? 내 제안을 받아 들이시겠소?” "그대의 이름이, ...데인이라 하였던가."
속내 모를 시선으로 한참 상대를 응시하던 하메르타트는 곧 마음을 정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한 차례 돌풍이 휘몰아친다. 사람이 겨우 휩쓸려가지 않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잦아들면 그곳에는 언제 거대한 드래곤이 서 있었냐는 듯 고요하고,
"이 몸은 백룡, 하메르바타트."
별안간 낯선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겉보기에는 인간과 다른 바가 없으나, 정체 모를 위압감에 더해 날씨에 맞지 않는 얇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이 아님이 분명한 존재. 새하얀 머리칼과 시리도록 푸른 눈, 무엇보다도 그 음성을 통햐 방금 전까지 하늘을 가리며 서 있던 고룡이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존재였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여리한 체구의 여인은, 스스로가 드래곤임을 증명하듯 한 손만으로 묵직한 대검을 뽑아들어 무릎 꿇은 인간에게 겨누었다 내려놓았다. 언제든 그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으니 주의하라 경고하듯.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즉, 일단 먹혀들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니..., 아직은 방심해선 안된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 밀다가 피를 본 사람은 지금껏 여럿 보았다.
지난 달 부고를 받은 상인도 자식처럼 아끼던 곰에게 그만 머리를 먹혀 살해당했다 하지 않았던가? 비록 눈 앞의 존재가 말은 통한다고 하나, 결국은 인간의 말을 할 뿐인 용이다. 저것에겐 그저 내가 개미나 바퀴벌레와도 같아 보일 뿐이니, 언제 갑자기 변덕이 생겨 날 죽이려 들지 모를 일이지....
정확히는 죽인다는 것보다 치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적어도 저것의 관점에선.
“윽.”
“이몸은 백룡, 하메르바타트.“
돌연 바람이 불어 눈을 약간 감았다. 감았다기보다 찌뿌렸다. 설산의 바람이니, 어지간히 춥기도 추웠으니.
설마, 이것도 저것이 불러 일으킨 건가? 하긴 놀라울 것도 없다. 산사태도 태연하게 일으키는 마당에 이 정도 바람이야....
허나 정말 놀라운 건 그 이후였다.
‘여자...?’
너무 놀라, 그 말은 입 밖으로도 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목소리로 듣자면 방금까지 저기 버티고 서 있던 용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머리 속에서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이 아까 그 용이 변한 모습이라는 거지?
종종 기르던 개나 말이 인간이 되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었다지만, 용을 만나고, 또 그 용이 여인이 되어 눈 앞에 나타났다고? 세상에 이런 황당무게한 이야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예쁘기는 또 엄청나게 예뻤다. 그냥 예쁘다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신비스러운 여신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게, 마치 달로 빚은 조각처럼 보였다. 아무튼, 보통 내가 쉬이 볼 수 있는 마을의 여인네들과는 사뭇 공기부터 달랐던 것만은 확실했다.
계속 홀리듯, 그 외모에 눈길이 가고 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창관에 방문한 게 육 개월은 더 되었나.... 여자가 고프니 드디어, 눈 앞에 있는 게 인간이든, 아니면 용이 변한 여인이든 상관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걸지도 모르겠군....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에 대검이 겨누어 졌다가, 다시 바닥으로 툭 내려졌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얼이 빠졌던 모양이다.
“...현명한 선택이오.“
일단 시치미를 떼고 내려놓아진 검을 주워 등에 매었다. 목에 검을 겨눈 건 경고의 의미인가? 참..., 만약 조금만이라도 방금 품었던 마음을 이 여인..., 아니 용에게 들켰다간 그야말로 대참사가 벌어지겠군.
...다음 마을에 들르면, 일단 제일 먼저 창관부터 가야겠어.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자리에 일어나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봐도, 또 본체가 거대한 용인 걸 알고 봐도, 그만 마음이 동해 버리는 외모다. 당장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당겨 강제로 입을 맞추지 않은 건..., 그저 그 결과가 확정적으로 내 죽음으로 이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미 벌써 실행에 옮겼겠지.
일단 난 범죄자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조각 같은 외모를 가만 보고 있자면, 인간의 법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을 정도로 혹 해버리고 만다. 설마 이건 용이 아니라, 무슨 인간을 홀리는 악마 같은 것인가...? 근데 난 독실한 신자도 아니건만, 신께선 왜 내게 이런 시험을 들게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럼 내 당신을 무사히 그 비옥한 낙원까지 데려다 드리리다. 경비야 한두 푼 드는 건 아니겠지만, 그 정도는 내 목숨값으로 퉁 친 셈으로 하고....“
일단 그래도 이야기는 진행시켜야지. 가만히 있다가 내가 재미없다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커다란 앞발로 날 깔아 뭉게면, 그 순간 바로 내 몸은 훌륭한 퇴비로 탈바꿈될 것이다.
”그나저나 내 귀공을 뭐라 부르면 되겠소?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긴데.... 아가씨..., 는 별로일 듯하고.“
난 살짝 입에 미소까지 띄고 물었다. 아까 그 흉흉한 본체를 앞에 두고도 당당히 거래를 제안한 나였다. 이 정도는 여유롭지.
"그나저나 내 귀공을 뭐라 부르면 되겠소?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긴데.... 아가씨..., 는 별로일 듯하고."
호칭이라. 하기사 인간들 사이에서 드래곤의 진명이란 눈에 띄기도 할 것이다. 수백 년 전,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과 어울리던 시절에는 어떤 핑계를 댔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드래곤은 딱 두 음절을 내뱉는다. 하멜.
"하멜이라 부르거라."
진명을 줄였을 뿐이지만, 인간 사이에 섞여들기에도 그리 어색지 않은 이름이었다. 폴리모프할 때 일어난 바람에 휘말려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빗으로 대충 쓸어내리던 하메르바타트, 아니 하멜은 다시금 데인이라는 인간을 마주보았다. 아까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그사이 미소까지 띠고 있는 얼굴. 제가 드래곤임을 알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정말이지, 배짱 하나는 좋은 인간이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저 인간은, 그대의 동료인가?"
추운 북부, 그 중에서도 이 설산의 해는 짧은 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거든 한시바삐 길을 떠나야 할 터. 그럼에도 시간을 끈 것은 한구석에서 정신을 놓은 듯 벌벌 떨고만 있는 인간 하나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나머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목숨을 구한 여자아이.
인간이란 제 무리에 애착이 강하다던데. 혹여나 저 인간까지 살려달라 청한다면, 그 정도야 들어줄 의향은 있었다. 재미있는 인간에게 내리는 자비이자 상이라고나 할까. 하여 자그마한 소녀를 가리키며 묻는다. 살릴 것인가, 이대로 두고 떠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