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메르바타트 성별: 여성 나이: 최소 천 살. 정확한 나이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종족: 드래곤
외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그 나이대 평균 언저리에 드는 신장과 마른 체구. 등을 덮도록 자란 순백의 머리카락은 오래 관리하지 않은 듯 아무렇게나 길어 있었으나, 타고난 머릿결 자체가 차분한 덕에 그 자체로도 적당히 정돈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아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들이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두 눈. 시리도록 푸른 빛을 띄는 눈은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보일 앙다물린 입매는 언뜻 무심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지라, 첫인상만 보고는 높은 신분의 아가씨로 오해받는 일이 빈번하다.
허나 이것은 모두 폴리모프로 꾸며낸 모습일 뿐, 그 본체는 천 년간 설산을 지켜 온 고룡. 햇빛 아래 투명한 푸른빛이 감도는 비늘이며 고드름을 닮은 뿔, 서리로 이루어진 듯한 피막까지 설산의 빙하를 조각해 만들어 놓은 듯한 백룡이었다. 그 크기는 대도시의 성채와도 견줄 만한 것이, 족히 30피트는 되어 보인다.
성격: 홀로 지낸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탓인지, 타고난 성품인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드물며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나마 호기심은 강해 종종 설산에 찾아오는 인간들을 관찰하곤 했으나 그뿐인 듯. 이 종족이 대개 그렇듯 스스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다른 생명체들을 종종 깔보곤 하는데, 이것이 앞선 특성과 더해져 오만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기타: - 드래곤으로서의 진명은 하메르바타트.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는 이를 줄여 하멜이라는 가명을 이용한다. - 설산 어딘가의 얼음 동굴을 레어로 삼아 지내고 있다. 내부는 인간 모험가들이 잃어버린 물건이나, 죽은 모험가들의 소지품 등에서 발견한 수집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 인간의 관념과는 동떨어진 언행을 보이곤 한다. 생명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는다거나, 인간의 한평생을 찰나로 취급하는 등.
외모: 왼쪽 뺨의 흉터 때문에 다소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다. 칠흑 같이 검고 뻣뻣한 모질의 머리. 손질을 잘 해도 곧장 저리 붕 떠버리고 만다. 피부는 살짝 창백한 편이다. 키는 보통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며, 마치 커다란 관을 세로로 세운 것만 같은 인상이다. 곰이나 커다란 순록이 연상되는 우락부락한 몸이며, 작은 문을 통과할 땐 머리를 살짝 숙여야 할 정도다. 꾸미는 것은 별로 즐기지 않아서 턱에 수염이 수북히 자라, 원래 본인 나이보다 살짝 노안으로 보인다. 그래도 머리는 종종 깎아서 그리 지저분한 인상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야성적인 느낌에 가깝다. 분신처럼 두르고 다니는 검은 망토에 가려 있지만, 실로 어마무시한 근육질이다. 팔뚝은 어지간한 여자의 허벅지 둘레보다 두껍고, 넓은 등근육 위에선 사람 한 명이 구부리고 잘 수 있을 정도다.
성격: 겉으로 봐선 그리 두뇌회전이 빠를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지만, 사실 꽤 영리하고 계획적이다. 성품 자체는 악하지 않고 되려 선한 편이나,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악행을 벌일 배짱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기타: - 매끈하고 검푸른 털의 말 한 필을 끌고 다닌다. 이름은 포라손. 척 봐도 명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고, 그만큼 힘과 스피드도 발군이다. - 등에는 칼 한 자루를 묶어서 매고 있는데, 도신이 넓고 길며 그 무게 역시 상당하다. 허나 좁은 공간에선 휘두르기 애매하여, 허리춤에 따로 단검 한 자루도 차고 있다. - 단검 옆엔 돈주머니도 차고 있다. 꽤 묵직하여, 한 눈에 봐도 돈이 가득 들어 보인다.
이 시기 남부의 밭에서는 꽃과 작물들이 풍성하게 피고 자라 그곳 인간들의 삶을 한껏 풍요롭게 하고 있을 터이지만, 북부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푸르른 초목은 듬성듬성, 그것도 모두 잎이 좁은 침엽수였으며, 그 외에는 헐벗은 막대기처럼 생긴 앙상한 것들만 종종 보였다. 지금 내가 말을 끌고 거니는 곳은 정말 재미 없는 조용한 설산이었다. 가끔 가다 눈토끼 같은 것도 나왔는데, 평소라면 돌멩이로 맞춰 잡아 불에 구워 먹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쓸 데 없이 이 설산의 ‘주인’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는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주인은 하얀 비늘을 가진 용이라 하며, 멀리서 보면 눈이 쌓인 언덕으로 착각할 만큼 크고 새하얗다고 한다. 솔직히 용이라니...,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신의 대리인이라 여겨지는 그 신비로운 생물이 실재하는 것이라, 어지간히 신실한 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않겠지.
하물며 신앙심이라곤 쥐의 눈물만큼도 없는 내가 그 존재를 믿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헌데 조금 이상한 것은 그 이야기를 해줬던 사람이 평소 이런 헛소리를 즐겨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상당히 진중하고 믿을만한 사람으로, 원래라면 나보다도 더 이런 부류의 하찮은 이야기에 눈길 하나 주지 않을 만 한 인물인데.... 어째서 그렇게 경계했던 걸까? 그것도 빠른 말을 보내 나한테 직접 편지를 부쳐서 경고할 정도로.
"드디어 노망이라도 났나....“
나이가 거의 60은 찬 노인이니 그럴 만도 했다.
별로 그 이야기에 겁을 먹어 토끼조차 무시하고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거니까.
”저기.... 사, 사람인가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고 힘 없는 여성의 목소리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차라리 짐승의 울음소리라면 더 위화감이 없을 상황이었다. 언제라도 등 뒤의 검을 뽑아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 속도를 줄인 뒤에 찬찬히 말 머리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수풀 쪽에 몸을 숨긴 채로 이쪽을 빤히 들여다 보는 갈색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키나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 겨우 성년을 넘긴 것으로 보였다.
깨끗한 옷 만큼이나 인상도 깔끔한 소녀였다.
”무슨 일이오?“
”늑대..., 늑대의 습격을 받았어요!“
소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늑대라.... 오면서 늑대 발자국 하나 보지 못했는데.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보자, 좀 더 많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산길이 험한데 저 소녀 혼자 무리도 없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분명 무리가 있었을 터였다. 헌데 지금 이렇게 혼자 있다는 것은, 늑대에게 습격당했다는 소녀의 말을 믿자면, 동료가 당하는 사이에 홀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된다.
말이 되는가? 저렇게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차라리 신을 속이지 그래.
분명 근처에 동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정하고 보니, 또 왜 구태여 그녀가 이런 수풀이 많은 곳에 숨어서 날 불렀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말 없이 등 뒤의 칼을 꺼내자 소녀는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했는지 벌떡 일어서, 언제 자기가 힘 없는 소릴 내기라도 했냐는 듯이 험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죽여..., X발 저 X끼 칼 꺼냈으니까 나와서 죽이라고!”
“사슴 같은 눈하고 입 한 번 험하시네. 근데..., 누가 누굴 죽인다고?“
수풀 속에서 대여섯의 사내들이 연장을 차고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훈련도 안 된 농부처럼 생긴 도적 놈들 주제에, 숫자가 되니 지들이 뭐 되는 줄 알고 날 에워 싸기 시작한다.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오지 않나? 어지간히도 장사가 안됐나 보다. 이 키와 덩치를 가지고, 거의 지들 키만한 칼을 쑥 뽑는 상대에게 덤벼들다니.
어쩔 수 없나. 사람 죽이면 영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맘에 안 드는데.... 왜 꼭 착한 사람을 건드려 살생을 하게 만드는지.
”으악!“
”시..., X발! 이 X친 괴물 X끼가....“
한 손으로 이 검을 휘둘러 한 명의 허리를 쳐 두 동강을 내자, 경악한 동료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이미 끝났다. 수준 차이를 느껴 압도된 시점부터, 이제 저들은 내게 무기를 휘두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지. 그러게 왜 덤벼선....
”다 썰어버리기 전에 저거 들고 꺼지쇼. 가져가서 장례는 치뤄야 할 거 아니요?“
그렇게 폼 잡고 한 마디 하는 순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소리가 설산 전체를 크게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그대로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 깔짝할 수 없었다.
설산의 고룡이 마지막으로 눈을 뜨고 그 몸을 일으킨 것은 수십 년, 못 해도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한 생명이 태어났다 스러졌대도 족할 시간이나, 드래곤에게는 잠깐 눈을 붙이는 데 그칠 시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존재의 시간이, 채 한 세기도 가지 못할 인간의 시간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하여 이번의 잠은, 특히 직전에 수 세기간 잠들어 있던 일과 비교하자면,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단잠을 깨운 것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철의 냄새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얼어붙은 돌과 흙, 얼음과 눈뿐인 이 산맥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쇠의 비릿한 내음.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향이었다.
이 시기에 황량한 북부에, 그것도 험악한 산세로 유명한 이 설산에 구태여 찾아온 인간이라니.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아주 없던 일도 아니었으므로 드래곤은 다시 눈을 감았다. 급한 일로 산맥을 가로질러 지나가야 하는 상인 행렬이거나, 주변 마을에서 온 사냥꾼 따위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길 잃은 모험가 나부랭이쯤 되던가. 어느 쪽도 그리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금 들려온 것은 누군가의 고함소리. 유난히도 거슬리는 것을 보아하니 레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일 성싶다. 드래곤이 지키는 곳에서, 그것도 레어 코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인간들이라니. 간도 큰 것들 같으니. 그것은 살생을 즐기지는 않는 편이었으나, 드래곤답게 생명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도 않기도 했다. 하여 저것들을 전부 정리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까 하는 충동이 순간 떠올랐다 밀려오는 잠기운에 도로 가라앉았으나.
인간의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드래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인간 녀석들 주제에 배짱도 좋구나."
긴 울음소리가 산맥을 한 번 울린다. 다른 드래곤이 들었더라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괴성. 이어지는 것은 땅을 울리는 굉음이다. 몇 차례 반복되는 산울림에 비탈 언저리에 아슬하게 쌓여 있던 눈더미가 견디지 못하고 산 아래로 쓸려 내려간다. 놀란 야생동물들이 부리나케 달아나고, 다시 불길한 정적이 내려앉으면,
쿵. 새로운 봉우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몸체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주의 없이 내딛은 발 아래 인간 몇이 뭉그러진 듯도 하지만, 드래곤, 하메르바타트는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죽이든 내쫓든 할 것들이었으니 몇 미리 정리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기다란 목을 숙여 남은 인간들을 내려다본 하메르바타트는 아까의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인간 녀석들 주제에 배짱도 좋구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다시 한 번 산이 울렸으나, 드래곤은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드래곤의 거처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각오는 되어 있느냐."
그리고 가늘어지는 눈매는, 인간의 기준에서 보아도 상대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으리만큼 명백한 공격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밟힌 녀석의 피와 살점, 그리고 내장이 터져 나가 주변으로 튀었다. 동시에, 그걸 맞은 소녀의 비명도 터졌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두려움. 산에서 늑대 무리를 마주치거나, 패전하고 귀환 중인 용병 무리를 마주쳤을 때도 지금과 같은 감정은 느낀 적이 없었다.
고개를 올려다 보아도 끝이 없다. 만약 정말로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도 지금 내 눈 앞의 존재를 일컬는 말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세상 어떤 나라의 어떤 군대도 이 압도적인 존재를 감히 대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죽음. 지금 저 존재를 거슬리게 하면, 난 확실히 죽는다. 물론 저 잡졸 같은 인간들과 넋이 나간 소녀, 그리고 나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강함의 차가 존재하겠지만, 저 커다란 녀석에겐 그 정도의 차이는 눈에 뵈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나 역시 지금 깔려서 곤죽이 된 녀석과 별 다를 게 없는 최후를 맞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것 외엔 다른 결과가 떠오르지 않는다. 기댈 수 있는 것은 저 존재가 변덕을 부려 날 살려주는 것 뿐이다.
생각해라! 노인은 분명 설산의 주인을 직접 보고도 살아온 자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용은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녀석은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말을 하니 어쩌면 대화가 통할 지도 모른다.
대화라.... 내가 가진 것 중에 저 녀석이 혹할 것이 있긴 하던가? 천 년을 넘게 이 설산을 지켜온 전설의 존재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물건엔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게 뻔하다.
잠시 머리를 굴려가며 그것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 패닉에 빠진 몇몇 인간들이 먼저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가만히 있던 것은 나, 그리고 완전히 넋이 나가 주저 앉은 채 기절 직전인 소녀 뿐. ...저런, 그만 오줌까지 지려버린 건가.... 저건 무사히 돌아가더라도 당분간 사람 구실을 하긴 글렀다.
그리고 움직인 녀석들. 저들은 결코 스스로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만 넘쳐 흘러버린 공포심에 이성이 이기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한 것이다.
멍청한 것들.... 소란을 피워 화가 난 저 드래곤을 상대로, 그렇게 야단법썩을 피우다니.... 이후 상황은 안 봐도 뻔할 터.
인간들이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 또 궁금해하던 시절에야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 설산을 찾는 인간들과 어울리기도 했다지만 그것도 전부 한때의 이야기. 산을 찾는 인간들의 발걸음이 점차 잦아들고, 지독한 권태로움이 찾아온 이후로는 흥미도 그쳐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 보내 왔더랬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란 족속 중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을 굽어보던 눈길이 개중 가장 먼저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이들로 향한다. 어차피 내쫓을 생각이긴 했으니 도망가는 것까지야 막을 생각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내지른 소리가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데 있었는지라.
"내 분명 소란을 피우지 말라 하였거늘."
큰 움직임 없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산이 한 번 뒤흔들린다. 가파른 산길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그 진동에 무너지고, 삽시간에 중력을 따라 아래로 쏟아져 내려온 얼음과 눈의 파도가 도망치던 인간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곧 그곳에는 언제 사람이 서 있었냐는 듯 성인 남성의 키만 한 눈더미만이 소복히 쌓여 있을 뿐이다. 그 무게에 깔렸으니 대개는 명을 달리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살아남아 눈을 헤치고 나올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도 전에 체온을 빼앗겨 그대로 얼어죽을 것이다.
순식간에 원래의 정적을 되찾은 설산이 만족스럽기는 하였으나 방금 벌을 내린 녀석들이 불청객의 전부는 아닌지라. 그사이 조용히 도망쳤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아니라면 그 인간들까지 설산 아래 묻어버린 후 다시 긴 잠을 즐기러 갈 심산으로 하메르바타트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서..., 설산을 지키는 위대한 용이여."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인간 하나. 이미 자리를 떴거나, 겁에 질려 정신을 놓은 채 주저앉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는 예상과 달리 당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누가 너에게 입을 열 것을 허락하였지?"
아니, 당황보다는 흥미에 가깝겠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재미에 조금은 짜증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용기 한 번 가상하구나. 그래, 계속해 보아라."
하여 답지 않게 변덕을 한 번 부려 보았다. 같잖은 말을 주절거린다면 마저 없애 버리고 돌아가면 될 일이고, 조금이나마 재미가 있었다면 그 용기와 노력을 크게 사 살려 보내줄 수도 있겠지. 모두 저 인간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리라.
입술을 꽉 깨물고 싶었던 것을 애써 참았다. 방금 저것이 눈사태를 일으켜 수 명의 도적들을 눈 무덤 아래 묻어 버린 것을 막 본 참이다. 크기만 큰 게 아니다.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벗어나 자연현상까지 다루는 존재인 것이다.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 노인이 그렇게나 내가 이 설산을 넘어가는 걸 만류했는지.
하지만 입을 열든 열지 않든, 죽는다면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확률이 조금은 있는 쪽에 거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미 눈 속에 갇힌 저 치들이 용의 심기를 잔뜩 건드려 놨으니, 나 역시 같은 패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 아까 빈틈이 잠시 생긴 사이에 그대로 도망쳤다면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솔직히 그런 도박에 몸을 걸고 싶진 않았다. 만약 저 용이 날 정말로 죽이고자 한다면, 말을 타고 전 속력으로 달려 봤자 불과 5초 안에 잡히고 말 테니. 포르손은 내 말이긴 해도 훌륭한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참 운도 없지. 전설로만 전해질 정도면 최소한 근 수 십 년 동안은 나타난 적도 없었을 텐데, 하필 내가 산을 넘을 때에 깨어나서는....
“용기 한 번 가상하구나. 그래, 계속해 보아라.“
됐다. 일단은 최소한 들을 마음은 생긴 것 같았다. 이걸로 가장 힘든 부분은 지나간 셈이다.
이젠 그 의중을 알아차릴 차례다. 무엇 때문에 나를 살려 두었는가?
실은 선량한 용이어서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내려오자마자 그저 단잠을 깨웠다는 이유로 이런 X친 대학살극을 벌이진 않았을 터였다.
그러면 여기서 소란을 피우게 된 이유를 듣고 싶어서?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먼저 자초지종을 듣고 판단을 내렸겠지, 지금 저것이 보이는 반응은 그저 방의 쓰레기를 치우는 듯한 그런 느낌이잖은가? 느껴지는 건 딱히 짜증나거나 힘들지도 않은 잔잔한 귀찮음 뿐이다.
남은 건... 흥미인가?
맞다. 녀석은 날 관찰하고 있는 거다. 마치 무료한 와중에 갑자기 굴러 들어온 보물상자와도 같은 것이지. 그야 천 년이나 이런 설산에 머무르고 있다면 심심하기도 할 터이니....
그 때, 잠깐 스치듯 어떤 생각이 머리 속을 지나쳤다. 그래. 그거라면....
“발언을 허락해 주어 감사하오, 설산의 주인.”
잠시 그 거대한 것에게 고개와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 예법이야 어릴 때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배웠으니, 아마 실수는 없을 터였다. 뭐..., 저 용이 인간의 예법을 얼마나 이해해 줄 진 모르지만.
“내 이름은 데일이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편력기사지. 어느 한 곳에 발을 붙이고 한 달을 넘겨 살아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지식의 폭 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소.“
나는 잠시 거기서 입을 달싹였다. 다음 꺼낼 말은 용의 심기를 다소 건드릴 지도 모를 말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 이미 건드린 벌집이다. 이제와 물리는 것은 곧 실패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테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웃음을 지었다.
“귀공께선 이 영역을 오랜 세월 다스려 온 것으로 아오. 실로 당신의 위엄에 걸맞도록, 넓고도 광활한 대지였소이다. 허나, 내 이 설산을 오르다 보니 또 그런 생각도 들더군. 넓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인 황량하기 그지 없는 땅이라고.... 이 설산은 그대와 같이 고귀하고도 강대한 용이 다스리기엔, 다소 추레한 곳일지도 모르오.“
잠시간의 유흥거리로 살려 두긴 했다만, 사실상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저렇게 당당한 기세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처음이라 잠시 흥미를 가졌을 뿐, 한낱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라고는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구걸 혹은 거래 제안이 아니겠는가. 드래곤의 시각에서도 아득할 만큼 먼 과거의 일이기는 했지만, 인간에게 제 본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열이면 열 두려움에 떨며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 테니 살려서만 보내 달라 빌던 이들. 수레 가득한 귀물부터 음식물과 노예까지, 그 제물의 종류도 다양했으나 드래곤을 만족시킬 만한 것은 없었기에 그 최후는 뻔했더라지. 하기사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비싼 금은보화라 한들 설산을 벗어나지도 않는 드래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이름은 데일이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니는 편력기사지. 어느 한 곳에 발을 붙이고 한 달을 넘겨 살아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지식의 폭 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소."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자랑거리야 제 알 바 아니라 해도, 자꾸만 제 예상을 빗겨가는 인간이란 꽤 흥미롭지 않은가. 길어지는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귀공께선 이 영역을 오랜 세월 다스려 온 것으로 아오. 실로 당신의 위엄에 걸맞도록, 넓고도 광활한 대지였소이다. 허나, 내 이 설산을 오르다 보니 또 그런 생각도 들더군. 넓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인 황량하기 그지 없는 땅이라고.... 이 설산은 그대와 같이 고귀하고도 강대한 용이 다스리기엔, 다소 추레한 곳일지도 모르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하메르바타트가 이 설산에 대해 애착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이다. 인간들이야 제멋대로 다스리니 지키느니 하지만, 사실 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이 설산을 지배한다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지킨다 한들 그의 레어 정도일 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니만큼 가장 익숙한 곳이라는 정도의 가치는 두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이것은 드래곤의 관점일 뿐, 인간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은가? 저 데인이라는 인간이 말을 뱉어 놓고도 눈치를 살피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제 '영역'을 모욕했으니 자신이 진노할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한다.
"말재간은 좋은 인간이로구나."
저 뒤에 또 어떤 말을 하려고 서론을 이리 길게 끄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는 않겠지. 드래곤에게 남는 것이라곤 시간뿐이니 말이다. 제 마음에 들 만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면 자비를 베풀어 살려보내줄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모욕당했다는 핑계로 치워 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칭찬 아닌 칭찬이다. 시퍼런 눈으로 내려다 보고 저런 말을 들어 봤자 기쁠 리 전무하나, 그래도 내심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한숨이 놓였다. 다소 막 산 인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진 않았다. 인적도 드문 이런 설산에서, 시체도 못 찾게 저런 무지막지한 것에게 당하는 결말이라니....
그래도 일단 첫 단추는 꿰었다. 이런 때만 되면, 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머리 회전이 평소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팽팽 돌아간다. 그리고 종종 그것으로 구원받곤 하지. 이번에도 부디 그 지혜가 날 살리길....
“그래서, 네놈이 할 말이라곤 그것이 전부인가?“
여기가 승부처로군.
나는 되려 그것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어차피 저 반응이 호기심이건, 아니면 죽이기 전에 마지막 말을 들어 두는 것이건, 결국 나는 앞으로 들이 받아야 할 운명이니까.
“그럴 리 있겠소? 그랬다면 내 이유 없이 귀공의 영역을 헐뜯지도 않았을 터이지.”
배짱 좋게 서 있지만 실로 오금이 저릿저릿하다. 허나 그런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곧장 사지가 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더욱 강하게 밀어 붙여야 할 때. 또 한 걸음 하곤,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당당하게 위를 올려다 보고 쩌렁쩌렁, 산이 떠나가라 외쳤다.
“찾아주겠소!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근사한 영토를.... 이 차가운 설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요. 남쪽 땅 멀리, 불타는 사막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과실들이 열린 수 만 그루의 과수가 있소. 금은 보화...?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북쪽의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생애 한 번은 만져볼까 한 그런 커다란 보석을 그저 한낱 장난감처럼 다룬다오.”
나는 그 용의 앞에 등 뒤의 칼을 풀어 땅에 꽂아 넣었다. 분명, 기사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주군에게 맹약을 한다 하였다. 술집에서 만났던 어린 종자가 그랬었지. 지금 쯤 아마 건실한 청년이 되어 있겠군. 편의 상의 편력기사를 자처하고 있을 내가, 설마 하니 이런 짓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말을 들을 땐 정말 미처 몰랐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법, 만약 이것으로 내 목숨을 구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댓가는 내 목숨이오. 만약 내 제안이 성에 차지 않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기꺼이 귀공께 이 목숨을 바치지.”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기사가 새로 모시는 주인에게 예를 갖추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시,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높이 든 채 두 눈을 마주하곤 물었다.
"찾아주겠소!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근사한 영토를.... 이 차가운 설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요. 남쪽 땅 멀리, 불타는 사막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과실들이 열린 수 만 그루의 과수가 있소. 금은 보화...?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북쪽의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생애 한 번은 만져볼까 한 그런 커다란 보석을 그저 한낱 장난감처럼 다룬다오."
그 화려한 묘사보다도 하메르타트의 마음을 이끈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존재이리라. 드래곤의 시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지금껏 그가 보아 온 가장 먼 곳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본 것이 전부였다. 끝없는 설원과 암벽, 흰 눈과 푸른 얼음만이 가득한 시야. 운이 좋아야 맑은 날에 산맥 언저리에 위치한 마을 한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 설산은 황량한 북부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이 설국 밖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대륙을 종단하다 보면 녹음이 우거진 밀림도, 불꽃이 일렁이는 사막도, 인간이 쌓아올린 대도시도 있다는 사실을. 허나 그것은 전부 글과 말을 통해 학습한 것일 뿐. 그런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라.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 이후 말라붙었다 여겼던 호기심이 다시금 들끓고 있었다.
"댓가는 내 목숨이오. 만약 내 제안이 성에 차지 않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기꺼이 귀공께 이 목숨을 바치지."
그대로 검을 지면에 박아넣고 무릎을 꿇는 인간을 바라보며 백룡은 고민에 빠졌다. 인간 따위가 목숨을 내놓는다 한들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저렇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던진 인간이라니. 그 자체로 흥미롭지 않은가? 세상 구경이라면 저자 없이 혼자 떠나도 될 일이라지만 천 년의 삶을 통틀어 가장 흥미롭다 할 수 있는 인간을 이대로 죽여 없애기는, 어쩐지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어찌하겠소? 내 제안을 받아 들이시겠소?” "그대의 이름이, ...데인이라 하였던가."
속내 모를 시선으로 한참 상대를 응시하던 하메르타트는 곧 마음을 정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한 차례 돌풍이 휘몰아친다. 사람이 겨우 휩쓸려가지 않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잦아들면 그곳에는 언제 거대한 드래곤이 서 있었냐는 듯 고요하고,
"이 몸은 백룡, 하메르바타트."
별안간 낯선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겉보기에는 인간과 다른 바가 없으나, 정체 모를 위압감에 더해 날씨에 맞지 않는 얇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이 아님이 분명한 존재. 새하얀 머리칼과 시리도록 푸른 눈, 무엇보다도 그 음성을 통햐 방금 전까지 하늘을 가리며 서 있던 고룡이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존재였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여리한 체구의 여인은, 스스로가 드래곤임을 증명하듯 한 손만으로 묵직한 대검을 뽑아들어 무릎 꿇은 인간에게 겨누었다 내려놓았다. 언제든 그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으니 주의하라 경고하듯.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즉, 일단 먹혀들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니..., 아직은 방심해선 안된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 밀다가 피를 본 사람은 지금껏 여럿 보았다.
지난 달 부고를 받은 상인도 자식처럼 아끼던 곰에게 그만 머리를 먹혀 살해당했다 하지 않았던가? 비록 눈 앞의 존재가 말은 통한다고 하나, 결국은 인간의 말을 할 뿐인 용이다. 저것에겐 그저 내가 개미나 바퀴벌레와도 같아 보일 뿐이니, 언제 갑자기 변덕이 생겨 날 죽이려 들지 모를 일이지....
정확히는 죽인다는 것보다 치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적어도 저것의 관점에선.
“윽.”
“이몸은 백룡, 하메르바타트.“
돌연 바람이 불어 눈을 약간 감았다. 감았다기보다 찌뿌렸다. 설산의 바람이니, 어지간히 춥기도 추웠으니.
설마, 이것도 저것이 불러 일으킨 건가? 하긴 놀라울 것도 없다. 산사태도 태연하게 일으키는 마당에 이 정도 바람이야....
허나 정말 놀라운 건 그 이후였다.
‘여자...?’
너무 놀라, 그 말은 입 밖으로도 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목소리로 듣자면 방금까지 저기 버티고 서 있던 용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머리 속에서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이 아까 그 용이 변한 모습이라는 거지?
종종 기르던 개나 말이 인간이 되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었다지만, 용을 만나고, 또 그 용이 여인이 되어 눈 앞에 나타났다고? 세상에 이런 황당무게한 이야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예쁘기는 또 엄청나게 예뻤다. 그냥 예쁘다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신비스러운 여신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게, 마치 달로 빚은 조각처럼 보였다. 아무튼, 보통 내가 쉬이 볼 수 있는 마을의 여인네들과는 사뭇 공기부터 달랐던 것만은 확실했다.
계속 홀리듯, 그 외모에 눈길이 가고 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창관에 방문한 게 육 개월은 더 되었나.... 여자가 고프니 드디어, 눈 앞에 있는 게 인간이든, 아니면 용이 변한 여인이든 상관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걸지도 모르겠군....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에 대검이 겨누어 졌다가, 다시 바닥으로 툭 내려졌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얼이 빠졌던 모양이다.
“...현명한 선택이오.“
일단 시치미를 떼고 내려놓아진 검을 주워 등에 매었다. 목에 검을 겨눈 건 경고의 의미인가? 참..., 만약 조금만이라도 방금 품었던 마음을 이 여인..., 아니 용에게 들켰다간 그야말로 대참사가 벌어지겠군.
...다음 마을에 들르면, 일단 제일 먼저 창관부터 가야겠어.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자리에 일어나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봐도, 또 본체가 거대한 용인 걸 알고 봐도, 그만 마음이 동해 버리는 외모다. 당장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당겨 강제로 입을 맞추지 않은 건..., 그저 그 결과가 확정적으로 내 죽음으로 이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미 벌써 실행에 옮겼겠지.
일단 난 범죄자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조각 같은 외모를 가만 보고 있자면, 인간의 법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을 정도로 혹 해버리고 만다. 설마 이건 용이 아니라, 무슨 인간을 홀리는 악마 같은 것인가...? 근데 난 독실한 신자도 아니건만, 신께선 왜 내게 이런 시험을 들게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럼 내 당신을 무사히 그 비옥한 낙원까지 데려다 드리리다. 경비야 한두 푼 드는 건 아니겠지만, 그 정도는 내 목숨값으로 퉁 친 셈으로 하고....“
일단 그래도 이야기는 진행시켜야지. 가만히 있다가 내가 재미없다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커다란 앞발로 날 깔아 뭉게면, 그 순간 바로 내 몸은 훌륭한 퇴비로 탈바꿈될 것이다.
”그나저나 내 귀공을 뭐라 부르면 되겠소?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긴데.... 아가씨..., 는 별로일 듯하고.“
난 살짝 입에 미소까지 띄고 물었다. 아까 그 흉흉한 본체를 앞에 두고도 당당히 거래를 제안한 나였다. 이 정도는 여유롭지.
"그나저나 내 귀공을 뭐라 부르면 되겠소?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긴데.... 아가씨..., 는 별로일 듯하고."
호칭이라. 하기사 인간들 사이에서 드래곤의 진명이란 눈에 띄기도 할 것이다. 수백 년 전,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과 어울리던 시절에는 어떤 핑계를 댔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드래곤은 딱 두 음절을 내뱉는다. 하멜.
"하멜이라 부르거라."
진명을 줄였을 뿐이지만, 인간 사이에 섞여들기에도 그리 어색지 않은 이름이었다. 폴리모프할 때 일어난 바람에 휘말려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빗으로 대충 쓸어내리던 하메르바타트, 아니 하멜은 다시금 데인이라는 인간을 마주보았다. 아까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그사이 미소까지 띠고 있는 얼굴. 제가 드래곤임을 알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정말이지, 배짱 하나는 좋은 인간이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저 인간은, 그대의 동료인가?"
추운 북부, 그 중에서도 이 설산의 해는 짧은 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거든 한시바삐 길을 떠나야 할 터. 그럼에도 시간을 끈 것은 한구석에서 정신을 놓은 듯 벌벌 떨고만 있는 인간 하나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나머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목숨을 구한 여자아이.
인간이란 제 무리에 애착이 강하다던데. 혹여나 저 인간까지 살려달라 청한다면, 그 정도야 들어줄 의향은 있었다. 재미있는 인간에게 내리는 자비이자 상이라고나 할까. 하여 자그마한 소녀를 가리키며 묻는다. 살릴 것인가, 이대로 두고 떠날 것인가.
그렇군. 하메르바타트를 줄여 하멜인가?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작명이다. 중성적인 느낌의 이름이라서 사용함에 크게 어색함이 없고, 또 상당히 흔한 이름이다. 예전에 아인슈타르크의 하역장에서 일하던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인부가 분명 그 이름이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남쪽으로 가려면 꼭 지나쳐야 할 곳이니 아마 조만간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군.
“그럼 출발하기 전에... 저 인간은, 그대의 동료인가?“
”동료?“
누굴 말하는 거지 싶어 고갤 돌려 보니, 저런, 거기엔 갈색 머리의 소녀가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엎드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
불쌍해 보이긴 하나 딱 그 뿐이었다.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마당에 무슨 특별한 연이 있다고, 그녀 보고 저 소녀를 살려달라 말라 하겠는가?
아..., 그래. 특별한 연이 있긴 했지. 날 죽이려 한 거.
생각해 보니 좀 열받는군.
”아니, 모르는 사람이오.”
뒤돌아 서 딱 잡아 뗐다.
아마 저대로 그냥 두면 늑대 밥이 될 거다. 혹은 지나가는 용병이나 도적패 따위에게 잡혀 노예로 팔리거나..., 겁탈당할 가능성도 없진 있겠지. 이 세상은 약한 이에게 그리 호의적이진 않으니까.
가뜩이나 인적도 드문 설산에 저렇게 넋놓고 있으니, 운 좋게 마음씨 좋은 나그네라도 만나지 않는 이상 저 소녀에게 불행이 닥치는 건 이제 시간 문제다.
그래 봤자 선량한 사람을 속여 도적질하려다 저 꼴이 난 거니, 동정의 여지는 전혀 없다. 만약... 상대가 내가 아닌 평범한 마을사람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모든 걸 빼앗긴 채 저 설산 아래 싸늘한 시체로 버러져 있겠지.... X발.
그대로 그 소녀를 못 본 체 하곤 나의 애마, 포르손 위로 훌쩍 올라 타고 올려 주려는 양으로 하멜에게 손을 뻗었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용은 용인지 신체 능력은 좋은 듯 해 필요할까 싶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 쓰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조금이라도 말을 틀까 싶어 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남쪽으로 가려면 적어도 최소한 반 년은 더 걸릴 터..., 지금 이대로의 관계 그대로라면, 아마 같이 여행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을 거다.
...어찌 친해질지는 조만간 차차 생각해 보자고.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하멜? 나는 원래 지나쳐 가는 길이았소만, 귀공이야 말로 아직 볼일이 남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당신과 천 년이나 함께해 온 땅 아니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신의 영역에 대해 생각보다 애착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미 천 년 동안 지겹게도 봐 온 풍경이라 이미 진절머리가 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천 년이나 지키고 있었던 것이 또 새삼 역설적이었지만. 뭐..., 그 부분은 내 알 리가 없다. 고작 해야 30도 먹지 않은 인간인 내가 감히 천 년을 산 용의 생각을 무슨 수로 쫓겠나....
매정하게 돌아서는 인간—데인—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모르는 관계라면, 이쪽에서도 더욱 관심 가질 이유는 없다. 이 설산에 올랐다가 홀로 버려진 인간이 한둘은 아니었으니 그 최후가 어떨지도 뻔한 일이라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지. 제 흥미를 끈 것은 이 데인이라는 인간 한 명뿐 아닌가.
그대로 돌아본 곳에는 검푸른 털을 가진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이 설산에도 야생마 정도는 살아가고 있으나,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한낱 짐승 주제에 그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도망은커녕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니. 제 주인과 생긴 것만 닮은 것이 아니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점까지 빼다 박았구나, 하는 감상이 절로 들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드래곤에게는 이동할 때 무언가에 올라탄다는 행위 자체가 낯설었다. 원체 몸집이 크니 몇 발짝만 걸어나와도 한참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고, 그보다 먼 거리를 가야 할 때는 날개를 펼치면 되었으므로. 그것도 아니면 마법을 이용해도 될 일이고. 따라서 처음에는 내밀어진 손을 거부하려 하였으나, 문득 인간들의 눈에 띄면 귀찮아지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이 인간과 함께 움직여야 하지 않는가.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구나, 생각하며 묵묵히 데인의 손을 붙잡고 안장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조금은 어색한 동작으로 처음 앉아 본 말의 등 위는 생각보다도 단단했다.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하멜? 나는 원래 지나쳐 가는 길이었소만, 귀공이야말로 아직 볼일이 남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당신과 천 년이나 함께해 온 땅 아니오?"
한평생 지내 온 땅은 맞으나, 떠난다 한들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애시당초 드래곤이란 장수종이 아니던가. 정말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발붙이고 살게 된다면, 또 수천 년이 지난 이후에는 이 설산에서 지냈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
"내가 살아온 땅은 맞으나, '내' 땅은 아닌 것을. 볼일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그러므로 드래곤은, 미련 하나 남지 않았다는 듯 무심한 낯빛으로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음, 뭐가 다른 건지 전혀 납득이 안 된다.... 보통은 천 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거점으로 지키고 있으면, 자기 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설마 “자연의 모든 것은 신에게 귀속된 것이며, 우리는 그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는 교회식 마인드라도 가진 건가?
...하, 그럴 리가.
아무튼 뭐..., 천 년이나 산 백룡님이 아닌가? 나로선 이해 못할 생각이 다 있으시겠지 싶어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런 갑다 해야지, 힘 없는 인간이 어디 토를 달겠는가.
“그러면 문젠 없겠지. 당장 이대로 출발하겠소.“
그 말과 함께 나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였다. 어찌 남쪽 방향이 아닌가 하면, 거기에 개인적인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빌어먹을 설산에서 변을 당한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나의 애마, 포르손은 그냥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영리한 말이었다. 평소보다 달리는 모양새가 온순하고 또 정돈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녀석과 함께해 온 난, 그 작은 차이를 바로 알아차렸다.
모르긴 몰라도, 자기가 지금 등 뒤에 태운 존재를 신경 쓰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그게 작고 여린 여성이기에 배려하여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작은 몸체 뒤로 무시무시한 본모습이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건진..., 내가 말의 말을 할 수 없으니 알 도리는 없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나, 슬슬 사람의 향기가 근처에서 나기 시작했다.
물론 진짜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이 아닌, 근처 곳곳에서 사람의 손이 거쳐간 ‘흔적’이 눈에 띈다는 의미다.
”크, 흠흠.... 아, 하멜?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오만..., 천 년이나 설산에 홀로 지내면 무슨 생각이 드오? 해봤자 60이나 살면 오래 살았다 하는 인간인 나로선 도무지 상상이 안가서 말요.”
이대로 쭉 말 없이 달리기엔 너무 적적할까 싶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내가 적적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뒤에 앉은 요 조그만 여인 말이다. 하.... 내가 어쩌다 타인의 눈치나 보는, 이런 궁상 맞는 처지가 됐는지.
허나 그땐 쓸만한 선택지가 그것 밖에 없었으니, 아마 다시 돌아가더라도 결과는 지금과 같을 거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정체야 어떻든, 일단 겉보기엔 대단한 미인이 아닌가? 내가 아는 ‘그 녀석’이 이런 미인을 등에 태우고 온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잠깐 상상만 해도 입가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흰 설원을 가로지르는 새카만 말 한 필. 멀리서 바라본다면 제법 그림 같은 대조를 이루리라. 그 위에 올라앉은 하멜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이 설산의 지리 정도야 당연히도 훤히 꿰고 있었으나, 계속해서 눈과 바위와 앙상한 나무뿐인 풍경이 반복되다 보니 위치 파악이 쉽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에 익숙해져 있던 것도 어려움을 더하는 데 한 몫을 했고. 평생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살아온 드래곤은 아직 올려다보는 시야에 적응을 하지 못했더랬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 생명체가 남긴 듯한 흔적이 걸려든다. 야생동물의 것은 아니고... 인간인가. 이 방향에 인가가 있었던가? 제가 기억하는 것이라야 십수 년 전의 풍경이니, 그사이 새로 생겼을 수도 있기는 하겠다. 인간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났다 스러지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조용히 제 앞에서 말을 모는 듯하던 데인이 말을 걸어온다.
"크, 흠흠.... 아, 하멜?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오만..., 천 년이나 설산에 홀로 지내면 무슨 생각이 드오? 해봤자 60이나 살면 오래 살았다 하는 인간인 나로선 도무지 상상이 안가서 말요." "생각?"
반문이 먼저 튀어나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대부분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고, 깨어 있는 동안이래봤자 높은 봉우리 위에서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귀찮게 구는 인간들을 정리하는 정도였으니. 글쎄, 무언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권태로움이 찾아온 이후부터는, 그래. 관성적으로 살아왔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생각이랄 게 있나. 홀로 지낸 것은 알을 깨고 나올 적부터였으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잠시 고민. "내 보기에는 너희 인간들이 더 신기하더구나.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들 하는지."
인간들을 볼 때면 늘상 드는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작디작은 것들이 쉴새없이 움직여 대니 수명이 그토록 짧은 것이 아닐까, 하는 고찰을 옛날 언젠가는 했었지.
"그러고 보니... 인간치고 나에 대해 아는 게 많구나. 여기서 홀로, 얼마나 지냈는지까지 말이야. 어디서 나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냐?"
그리고 이왕 대화를 튼 김에 자신도 질문 하나를 던져 보았다. 자신과 마주한 놈들 중 살아남은 것들은 많지 않을 터인데, 인간들 사이에서 설산의 용에 대한 소문이라도 돌고 있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못 해도 백 년은 지났을 텐데, 그 정도라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는 전설 취급이나 받으련가.
“생각? 생각이랄 게 있나. 홀로 지낸 것은 알을 깨고 나올 적부터였으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내 보기에는 너희 인간들이 더 신기하더구나.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들 하는지.”
“흠.”
생각보단 심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천 년이라는 거의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홀로 보내 왔으면서도, 그걸 겨우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라 말하다니.... 용이란 어쩌면 신께 너무 오랜 수명을 허락 받은 나머지, 그쪽 감각이 완전히 무뎌져 버린 게 아닐까? 시간 감각 말이다. 하기사, 그녀가 만약 인간과 같은 시간감각을 타고 났었다면 진즉 어딘가 목이라도 매었을 테니, 이게 맞는 듯도 싶다.
어딘가 찝찝하지만, 그래도 답을 해준 게 어딘가?
그리고 ‘그건 인간이 작은 게 아니라, 그쪽이 X친듯이 큰 거요.’ 라는 말은 조용히 혼자의 생각으로만 해 두었다. 기껏 말도 텄는데 여기서 선택지를 잘못 골랐다간, 이후 분위기가 파탄날 것이 불 보듯 훤하다. 최악의 경우, 겨우 챙긴 내 목숨마저 땅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충분한 친분이 쌓이기 전까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단어는 스스로 골라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리라.
“그러고 보니... 인간치고 나에 대해 아는 게 많구나. 여기서 홀로, 얼마나 지냈는지까지 말이야. 어디서 나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냐?”
”그렇소. 한 때 이 근방에서 꽤 오래 살았던 노인이 내게 편지로 알려준 거요. 그땐 설마 진짜라고는 생각 못했으니, 보내준 내용을 일일히 다 기억하지도 않았지.“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잘 봐두었을 것이다.
”원체 허무맹랑한 소리가 적혀 있어 말이오. 크기는 마치 눈으로 만든 동산과 같고, 눈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또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든가.... 그런데..., 실제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알겠더군. 그조차 그저 축소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연한 이치다.
인간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그 괴정에서 이야기는 눈처럼 불어나기도, 또 눈처럼 녹아 줄어들기도 하니까.... 되려 원본 그대로 전해지는 게 신기할 일이지.
그나저나 의외로군. 당연히 시큰둥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녀 쪽에서 먼저 질문을 걸어올 줄이야.
”그나저나 그렇게 안 보였는데, 백룡님께선 생각보다 인간들의 평판을 신경 쓰는 타입인가 보오?“
살짝 히죽거리며 고개만 뒤로 돌려 물었다.
인간들이 개미나 바퀴벌레의 평판 따위 신경도 쓰지 않듯, 그녀 역시도 그럴 줄로만 알았다. 반대로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관심이나 있었을까? ...아니, 전혀 아니지.
"그렇소. 한 때 이 근방에서 꽤 오래 살았던 노인이 내게 편지로 알려준 거요. 그땐 설마 진짜라고는 생각 못했으니, 보내준 내용을 일일히 다 기억하지도 않았지."
"원체 허무맹랑한 소리가 적혀 있어 말이오. 크기는 마치 눈으로 만든 동산과 같고, 눈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또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든가.... 그런데..., 실제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알겠더군. 그조차 그저 축소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가. 어쩌면 그 편지를 보냈다는 노인이 과거에 자신과 마주쳤던 인간의 후손일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고, 아니 즐기지 않았다기보다도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었으므로 그간은 굳이 알아보지 않았는데. 생전 처음, 타인의 입으로 듣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남의 이야기인 듯 낯설게 들리면서도 흥미롭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궁금증은 해소되었으니 대화는 여기에서 끝인가 하였는데.
"그나저나 그렇게 안 보였는데, 백룡님께선 생각보다 인간들의 평판을 신경 쓰는 타입인가 보오?"
고개를 뒤로 돌린 채 히죽거리며 물어오는 질문은, 매사 시큰둥한 얼굴에도 균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래 봤자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진 정도였으나 평상시와 비교하자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표정.
아까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굴더니만, 이제는 시덥지도 않은 말까지 내뱉어대는 걸 보니 모습 하나 바꿨다고 제가 좀 편해진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저 목숨 하나 거두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도 저리 불손하게 굴다니. 고작 겉모습에 따라 저리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대니 저것을 단순하다 해야 할지, 멍청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 하나로 죽이기엔 아까운 인간은 확실했으니 한 번은 봐 줄까.
"인간 놈들이 무어라 한들 내 상관할 바이겠느냐. 나를 마주치고 말까지 퍼뜨릴 만큼 멀쩡히 살아돌아간 운 좋은 인간 녀석이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녀의 눈썹이 아주 미묘한 차로 움직였다. 여기까지 거의 조각처럼 아무 표정도 없어, 인간 모습일 땐 표정을 바꿀 수 없는 줄로만 알았다만..., 또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거기 담긴 의미는 아마 "헛소리 말거라, 인간." 같은 것이었겠지.
"인간 놈들이 무어라 한들 내 상관할 바이겠느냐. 나를 마주치고 말까지 퍼뜨릴 만큼 멀쩡히 살아돌아간 운 좋은 인간 녀석이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눈 마주치지 말고 앞이나 보라는 듯하니, 곧장 고개를 돌렸다.
하기사 평소에는 항상 만물을 내려다 보는 위치일 텐데, 막상 이렇게 가까이서 올려다 보고 이야기 하려니 짜증날 수도 있겠지. 암. 아님, 그냥 내 태도가 맘에 안 들었거나.... 음. 이거, 가까워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근데 그 운 좋은 인간을 구태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있소? 방금도 하나 만든 것 같은데. 응?"
앞을 보니 저 멀리 검은 연기 한 줄기가 희미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불을 떼고 있다는 것..., 즉 이제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추운 날씨 때문에 다소 정돈된 느낌의 퇴비 냄새가 뭉근히 코를 찌르며, 넓게 펼쳐진 보리 밭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에 왔을 땐 이 정도로 넓진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 개간했나? 그 새 사람이라도 는 모양이군.
"곧 도착하겠군. 보시오, 우리의 역사적인 첫 목적지가 목전에 있소."
야심찬 멘트치곤 그리 멀리 온 것도 아니니, 주변 풍경은 그닥 달라진 게 없다. 그래도 구태여 다른 점을 꼽자 하면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이 전부인데, 그녀가 있던 설산이 워낙 인적이 드문 야생이라선지 그마저도 큰 차이로 느껴졌다. 마치 표정 하나 없는 그녀 얼굴에 인 작은 움직임 하나도 내가 놓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튼, 이대로 그녀를 마을로 데려가기 전에 먼저 해야만 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천천히 걷게 하곤, 다시 뒤를 슬쩍 보았다.
설마 하니 뒤 한 번 더 돌아 봤다고 죽기나 하겠나 싶지만..., 혹시 모르니, 그녀와 살짝 눈만 마주칠 정도로 조심스레 보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전에 일단 우리 사이의 관계부터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생각하오만...."
"근데 그 운 좋은 인간을 구태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있소? 방금도 하나 만든 것 같은데. 응?"
"그래, 그 운 억세게 좋은 인간이 네놈이지. 그리 만들어 준 것이 누구인지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좀 가지면 좋으련만."
틀린 말은 아니나, 제가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면 이리 입방정을 떨 기회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경고의 의미가 다분한 말을 쏘아붙이고 다시 주변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 제법 달라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더욱 짙어진 인간의 흔적 같은 것.
어딘가에서 검은 연기 한 줄 피어올라 하늘을 가르고, 이 설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흙이 펼쳐져 있다. 그 땅에 심어진 푸르스름한 작물들. 분명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는 이 방향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 같은데, 그사이 이 정도 규모의 밭이라니. 안 그래도 척박한 땅에 말이다. 역시나 인간들이란, 그 작은 몸으로 너무 바삐 움직이다 보니 수명이 그토록 짧아진 게 아닐까?
"곧 도착하겠군. 보시오, 우리의 역사적인 첫 목적지가 목전에 있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한 마을이 아닌가 싶지만, 적어도 하멜, 그 드래곤에게만큼은 역사적인 순간이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 년만에 처음 방문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가. 분명 익숙한 설산의 땅 위에 밭을 만들고 건물 몇 채를 지어올렸을 뿐이다만, 어찌 이리 가슴이 설레는지.
마을에 가까워지자 말의 속도가 점차 줄어든다. 슬쩍 다시 뒤를 돌아보는 인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눈을 마주치자,
"그래서 말인데, 그 전에 일단 우리 사이의 관계부터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생각하오만...."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하? 하는 소리와 함께 눈썹을 한 번 까딱했다가, 제가 지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어디 가서 스스로를 드래곤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 신원을 꾸며내기는 해야 할 터인데, 문제는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도 쉽지 않은 까닭이라.
"네 편할 대로 둘러대거라. 그 편이 남들 듣기에도 자연스러울 테지."
대충 눈 앞의 인간에게 떠맡기기로 했다. 드래곤 앞에서 목숨을 구할 정도의 입담이니 이 정도야 어련히 알아서 꾸며내겠지.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면 그 때 가서 혼쭐을 내면 될 일이고.
>>38 하멜이 찬바람 쌩쌩 부는 얼음이라면 데인은 뭔가 은은한 불꽃 같은 느낌이랄까. 크고 뜨겁진 않아도, 언젠간 하멜도 녹아내리는 날이 오겠지?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얼불춤 같은 비유였다() 그치그치 아무래도 천 살 연하면 세대차이가 나도 한참 나는 거 아니겠어 ^▽^ 연하남의 특권은 까불어도 귀엽게 봐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신나게 까불어라 데인아!
"그래, 그 운 억세게 좋은 인간이 네놈이지. 그리 만들어 준 것이 누구인지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좀 가지면 좋으련만."
"흠, 잘 알고 있소만? 이거, 아무래도 내 감사함이 당신에겐 느껴지지 않나 보오.“
능청스레 대꾸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거짓도 아니다. 여기서 남쪽까지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이동하는 건 거의 말 한 필 이상의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거기에 식비와 기타 통행세 같은 지출까지 더한다면, 그야 말로 어마어마한 거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지간히 감사하지 않고서야 그런 돈을 낼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암....
물론 거기에 순수한 감사의 의미만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이 정도의 미인을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기회는, 아마 내 팔자에 다신 없을 호사인 것은 분명했으니. 그 정체가 사람이 아닌 거대한 천 살짜리 백룡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인간이었다면 어찌 용기라도 내 볼 터인데 말야.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네 편할 대로 둘러대거라. 그 편이 남들 듣기에도 자연스러울 테지."
게다가 말투는 이 어찌 딱딱할 수 있는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이따금씩 방금처럼 미간을 일그러트리거나 하긴 하나, 결국 금세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고 만다.
물론 맘만 먹는다면 그녀에게 그 이상의 변화를 주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만..., 후환이 두렵단 말이지.
"알겠소.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둘러댄다..., 잠시 생각하며 말머리를 앞에 두고 있으니 길 앞에서 살짝 인형이 아른거렸다.
툭 튀어나온 배와 땅딸막한 키. 어깨는 딱 벌어져 옆으로 길었다.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오는 대장장이 난쟁이가 연상되는 체형. 그는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두꺼운 팔뚝으로, 자루에 곡식을 한가득 이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내가 아는 이였다.
"데인? 이게 웬일이야! 자네가 여길 오다니...."
"오랫만입니다, 촌장님.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원래라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해야 예의겠지만, 등 뒤 그녀를 두고 훌쩍 혼자서 내려버릴 수는 없으니 목례로 인사를 대체했다.
그리고 내 눈 앞의 사람은 그런 것 하나에 그리 개의치 않아 하는 성격이기도 하니, 그런 사정쯤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오랜 지인이라도 보는 반가운 말투로 나를 맞았다. 실제로 오래 되긴 했지.... 8에서 9년은 흘렀나, 아마 그랬을 거다.
"음. 하하, 자네도 말투에 제법 어른의 태가 나게 변했구먼.... 그나저나 뒤의 미인 분께선 어느 귀족 집의 영애이신가?"
간단한 인사 후, 촌장의 시선은 내 등 뒤를 향했다. 역시나 그것부터 물어 보시는군.
나와 그는 비스듬히 있어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다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 하얀 머리칼은 어지간히 사람의 눈길을 끄는 모양이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집사람입니다."
"집...! ...이 분이...?"
화들짝 놀라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 봤다.
...아무리 내 등 뒤의 여인이 미인이긴 해도, 저런 식의 반응은 좀 상처 받는데.... 이래 봬도, 나름 어디가서 얼굴만큼은 꿇리지 편이라 생각했건만.
아무튼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둘째치고, 촌장은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듯 내게서 시선을 패스하여 그녀에게로 향했다.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주변 풍경으로 눈을 돌린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돌을 쌓아 벽을 메꾼 인간들의 집은, 종종 산 아래나 중턱에서 보이던 마을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대부분 들짐승을 잡아 연명하는 듯하던 그 마을들과 달리 이곳에는 제법 넓은 밭이 자리해 있다는 것일까. 그사이 인간들의 농업 기술이 발전이라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빼곡히 심어진 보리가 바람에 따라 일제히 흔들리는 것은 눈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드래곤이 보기에도 꽤나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언젠가부터 저만치에서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내 마주한 것은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든 인간 남성 하나. 제 앞을 가로막은 데인의 덩치가 결코 작지 않은 탓에 절반쯤은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으나, 땅딸막한 키와 어깨가 떡 벌어진 체격 정도는 인식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인 듯 말이 멈춰선 사이, 하멜은 긴 머리칼을 늘어뜨려 얼굴을 감추었다.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질색이라는 심정에서 나온 행동인 듯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글쎄. 애시당초 그 새하얀 머리며 가벼운 옷차림부터가 인간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그자는 이 마을의 촌장이라는 듯했다. 데인과도 제법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고.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의 정서나 기분을 알아차리는 데 서툰 하멜까지도 단숨에 반가움이라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고조된 어투를 보아하니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닌 듯 싶었다.
"음. 하하, 자네도 말투에 제법 어른의 태가 나게 변했구먼.... 그나저나 뒤의 미인 분께선 어느 귀족 집의 영애이신가?"
저들끼리 인사를 주거니받거니 하던 인간들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쏠린 것은 그 다음 순번. 구경하듯 훑는 시선이 불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래도 아까 알아서 둘러대라 언질해 두었으니 어련히 잘 대처하겠지—. 하며 제 앞에 앉은 인간을 바라보는 순간.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집사람입니다." "집...! ...이 분이...?"
대답이랍시고 이어지는 말에 안 그래도 냉담하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기존의 얼굴도 그리 친절한 인상은 아니었으나, 지금과 비교하자면 차라리 그편이 사람 좋아 보일 수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의 촌장이 자신에게 다가와 뭔가를 묻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 돌려 데인이 앉은 방향을 바라본다. 마침 눈치라도 보는 듯 뒤를 살짝 돌아본 탓에 살기 등등한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하여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인— ...녀석이로구나."
어조는 평이하나 그 안에 담긴 말뜻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다만 도중에 말을 한 번 흐린 것은, 다른 인간 앞에서 같은 연기할 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탓이다. 당장 이 무례한 인간을 죽여버리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
"파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네! 용서하시오, 영애. 데인 이놈이 어려서부터 천성 개구장이라 장난이 많소이다. 특히 자기 맘에 든 미인한테는 더 하지."
한껏 굳어졌던 얼굴은 촌장이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겨우 풀어질 수 있었다. 그래 봤자 평상시의 무표정에 불과했으나, 직전의 살벌한 얼굴에 비교하자면 온화해 보이기까지 하는 낯.
'자기 마음에 든' 이라니. 제 본모습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고서도, 심지어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여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겉껍데기 하나만으로 호감을 품을 수 있는 것인지. 보이는 모습에만 의존하는 이 단순한 인간을 믿고 앞으로의 여정을 맡겨도 되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하였으나, 어쩌겠는가. 결국 그 단순해빠진 인간을 따라오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녀인 것을.
"솔직히 말 못할 정체라면, 굳이 밝힐 이유는 없다오. 데인이 직접 말 뒤에 태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손님이 아니오? 적어도 우리 마을이 해를 입힐 그럴 분은 아닐 테지.... 별 볼 일 없는 마을이지만, 부디 편히 있다 가시오."
외진 곳에 위치한, 그리 크지도 않은 마을이니 낯선 외부인을 경계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순순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그리 폐쇄적인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어린 여성으로 보이는 인물이 마을에 무슨 피해를 끼칠 수 있겠냐며 간과했을 수도 있겠고. 누군가 성질을 긁어 기어코 본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그녀로서도 큰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으니 어찌 보면 정확히 파악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이 데인이란 작자가 생각보다 이 마을에서 신임받는 인물일 가능성인데. 이 입만 산 인간의 무얼 보고 그토록 신뢰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경우가 맞다면, 마을 전체가 안목이라고는 없는 모양이지. 생각하며 짧게 혀 한 번 차고 입을 열었다.
"하멜이라 한다. 이자와는 목적이 겹쳐 남부까지 동행하기로 하였을 뿐이니 쓸데없는 오해일랑 말고."
제가 취한 겉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간을 하대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걱정이 잠시 스쳐지나가긴 하였으나 빠르게 관두었다. 어설프게 인간인 척을 하다 의심을 사는 것보다야 낫다는 판단이 절반, 어차피 상대도 멋대로 자신을 높은 신분의 인간으로 착각한 듯하니 이쯤이야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절반.
많은 것을 생략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먼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주겠다 제안하였고, 본인은 그 거래를 받아들여 함께하기로 한 것이니 크게 보면 목적이 겹친 것 아니겠는가.
ㅋㅋㅋㅋㅋㅋ 사실 이 여행의 목적은 하멜 사회성 기르기였던 것이야... 데인아 앞으로 수고가 많겠구나..... 그치 역시 겨울 배경이라면 보리밭이 낭만 아니겠어. 남부로 내려가다 보면 점점 밀밭도 보일 텐데, 그럼 또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 같아서 벌써부터 기대 중이야 ^_^
촌장의 말솜씨 때문인지, 살벌한 독기를 가득 품었던 그녀의 표정은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까지 변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이젠 슬슬 저 무미건조한 조각상 표정에도 익숙해져 가는 참이다. 반대로 평소에 변 변화가 없으니, 이런 작은 변화에도 주의 깊게 살피게 되는 점이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인가.
진짜 돈 많은 부자들은 털 달린 짐승보다, 별 움직임도 반응도 없는 물고기를 선호한다고 들었는데, 왠지 지금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이 드는군.
대개 그런 사람들일 수록, 남들은 모르는 특별한 것에 집착하는 자가 많지.... 물론, 난 평범하게 예쁜 게 좋은 보통 사람이다.
"하멜이라 한다. 이자와는 목적이 겹쳐 남부까지 동행하기로 하였을 뿐이니 쓸데없는 오해일랑 말고."
"오해라니..., 허허! 난 처음부터 영애가 이놈의 짝으론 아깝다 생각했던 사람이라오!"
"킁...."
오랫만에 만났는데 좋은 소리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지만, 이해는 한다. 내가 봐도 그녀는 확실히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이었으니까.
하..., 재미 없구만....
나는 슬슬 이 자리가 재미 없어지려 하는데, 왜인지 귀찮게 촌장이 또 계속 말을 이어가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나저나 남부라. 참 먼길을 함께하시게 됐구려.... 내가 아는 데인이라면 누군가를 옆에 붙이고 다니는 건 딱 질색할 놈인데, 뭐..., 그거야 각자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네. 있다마다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바쁘니까, 얼른 길이나 터 주시죠."
말 고삐를 잡고 내가 곧장이라도 지나가겠다는 듯이 말하자, 촌장은 살짝 한숨을 내쉬곤 약간 갓길로 비켜서곤 아쉽다는 듯이 덧붙였다.
"원 싱거운 녀석하곤.... 알았네. 이번에도 '크루스' 네에 들르러 온 겐가?"
다 알면서 묻는군. 그 부분에선 나도 짜증을 감추지 않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 깡촌까지 찾아올 이유가."
"그래, 그렇겠지.... 얼른 가 보게나."
그때 표정이 살짝 어두워 거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어차피 곧 방문하게 될 터이니, 구태여 길을 열어준 촌장을 붙잡지는 않았다.
말을 끌고 점점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참 아담하다면 아담하고, 또 개방적이라면 개방적인 마을이다. 지어진 건물들만 보면 정말 별 거 없는 마을이지만, 따로 도시처럼 바깥과 안을 가르는 성벽 같은 것이 없다. 그것 때문에 마치 이 모든 주변 풍경까지 모두 마을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단 말이지.
그 때, 작은 눈송이 하나가 콧잔등을 차게 스쳤다. 눈이라도 내리나 싶어 슬쩍 하늘을 보았으나, 또 그런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무에 걸린 눈 조금이 바람을 타고 떨어진 모양이로군.
그리 별 생각 없이 말을 몰던 중 방금 본 촌장의 생각이 나, 괜히 혼잣말 하듯 등 뒤의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늙으니 괜히 말이 많아지는군.... 원랜 참 과묵하던 분이셨는데 말요.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저리 되려나 모르겠소."
"그나저나 남부라. 참 먼길을 함께하시게 됐구려.... 내가 아는 데인이라면 누군가를 옆에 붙이고 다니는 건 딱 질색할 놈인데, 뭐..., 그거야 각자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네. 있다마다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바쁘니까, 얼른 길이나 터 주시죠."
동행은 질색이라. 하기사 한 지역에 오래 발붙이지도 않는 편력기사라 하였으니,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더 불편하기도 하겠다만... 어쨌거나 본인이 먼저 제안한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소란을 피우지 않아 잠든 드래곤을 깨우지만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일이고. 전부 스스로의 업보라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원 싱거운 녀석하곤.... 알았네. 이번에도 '크루스' 네에 들르러 온 겐가?" "...그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 깡촌까지 찾아올 이유가." "그래, 그렇겠지.... 얼른 가 보게나."
'크루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긴 여정의 첫 목적지를 이 후미진 마을로 삼을 정도면 꽤 중요한 인물이겠거니 싶었다. '이번에도' 라 말하는 것을 보니 한두 번 오간 수준이 아닌가 본데. 그렇다면 촌장이 데인을 그리 반가워하던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것을 마지막 대화로, 말은 착실히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아까 보이던 것이 너른 밭뿐이었다면 마을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아졌다. 이를테면 더욱 가까이에서 보이는 건물들, 포장은커녕 쌓인 눈만 겨우 치워낸 것이 전부인 흙길, 쟁기며 수레 따위 농사에 쓰이는 듯한 기구 같은 것들. 짚을 엮어 올린 지붕 위로 나무 타는 향과 음식 내음 섞인 연기가 피어오르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생활 소음에 더해 말발굽 소리가 전부인 고즈넉한 풍경. 낯선 인간의 문명을 관찰하는 것도 잠시,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말을 걸어오는 탓에 정적은 금세 깨어졌다.
"늙으니 괜히 말이 많아지는군.... 원랜 참 과묵하던 분이셨는데 말요.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저리 되려나 모르겠소." "뉘 앞에서 나이를 운운하느냐? 우습지도 않군. "
아까 그 촌장에 대한 이야기인 듯한데. 늙었다 한들 한 세기의 절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인간들이 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 앞에서 늙었느니 어쩌느니 하다니.
"네놈은 이미 충분히 수다스러우니, 나이가 든다면 과묵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겠구나. ...그보다도, 지금 찾아가는 것이 누구인지나 말해 보거라."
이왕 대화가 시작된 김에 궁금했던 점이나 해결하자 싶어 답지 않게 말이 길어진다. 그 '크루스' 라는 인간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굳이 찾아오는 것인지.
그녀가 드래곤답게 인간을,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다른 종족 전체를 깔보는 것은 맞았으나 그것은 호기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날 개미나 쥐 같은 것들이 문명을 이룬 것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감상이랄까. 분명 자신이 알을 깨고 나왔을 적에는 얼마 눈에 띄지도 않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끼리 전쟁을 벌이니 나라를 세우니 하며 자신이 사는 북부 끝까지 밀려오지 않던가. 한없이 긴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이 보기에는 눈 깜짝할 새 변하는 것이 인간들이니, 신기하다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잠시 입을 다물었던 데인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저 먼 보리밭 건너가 훤히 내다보인다. 허나 그곳에는 인간이 살 만한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즈음 말이 이어진다.
"저기 저 보리밭 끝에, 하얀 끈이 박힌 말뚝 보이시오?"
있었다. 얼어붙은 땅에 느닷없이 박힌 말뚝 하나와,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흰 끈이.
"그 아래 묻혀 있는 놈 이름이오. 내가 직접 묻었지."
그러니까, 일종의 무덤인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묻고 난 뒤에도 몇 번이고 찾아올 정도라면 꽤나 가까웠던 사람의 것이겠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킴으로써 숙연한 분위기를 이어가거나, 애도의 말 한 마디라도 건네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 말을 들은 것은 보통도 아니고 인간은 더더욱 아니었던지라.
자신도, 데인도 입을 다문 탓에 한동안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간간히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와 말이 걸어가며 내는 작은 소음뿐인 와중에, 갑작스레 정적을 깨는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데인? 데인! 데인 맞죠?"
잠시 내리감았던 눈을 뜨고 시선을 아래로 옮기면 밝은 금발의 자그마한 것이 또랑또랑하기 그지없는 벽안으로 이리를 바라보고 있다. 제 키보다도 작은 체구와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볼 따위를 보아하니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물론 인간 기준으로는 십 년 안팎은 살았을 것이나 어디까지나 드래곤의 관점에서—인간이 분명해 보인다.
데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어린아이는 이내 재빨리 길을 따라 달음박쳐 사라진다. 길은 한 갈래뿐이었으므로 굳이 붙잡지 않고 가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 곧 길 끝에 나타난 집 한 채와 그 어린아이,
"엄마 저기! 저기 와요!"
그리고 그 곁에 선 여인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 태양을 닮은 빛의 머리칼하며 맑은 호수 같은 눈이 빼다 박은 듯 닮은 두 사람. 누가 봐도 부모자식 관계임이 분명해 보였다. 자식 쪽이 더 자랐을 때의 얼굴이 예상될 수준인 것이 반박도 못 할 외탁인데. 아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미 혼자 낳았대도 믿겠구나, 생각하며 잠자코 데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긴 크루스 보러 온 거야?" "아니." "아니면, 나 보러?" "...아니." "그럼 왜 왔어?" "...."
제 앞에서도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양 뻔뻔하게 굴던 놈이 이리 딱딱하게 구는 꼴이란. 저쪽은 꽤나 반가워하는 듯한데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인간들 사정에 그리 관심 둘 생각은 없었기에 구태여 끼어들 생각은 없었으나, 이어지는 대화에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일단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 이유는 천천히 들으면 되니까.... 뒤에 모시고 계신 예쁜 아가씨도 같이요." "아가씨가 아니라 내 집사람인데." "네놈이..., 기어코 명을 재촉하는구나."
아까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또다시 헛소리라니. 다시 서늘하게 얼어붙는 표정. 일전처럼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그나마 나은 듯싶으나,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조금 풀어진 건 여인이 웃음을 터뜨린 순간. 한참 웃어대던 여인이 조금 진정한 후, 관심은 다시 자신에게로 옮겨온다. 어쩐지 아까 마을 초입에서 만난 촌장과의 대화가 그대로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오래간 함께 살아가다 보면 같은 핏줄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닮게 되는 것인지.
"음, 크흠.... 아니시죠?" "쯧. 그럴 리가. 잠시간 동행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꼽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며 혀를 찬다. 이런 대화를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 인간들이란 서로에게 관심들이 너무 많아 귀찮다고 생각하며, 아까 촌장 앞에서 대었던 변명을 그대로 반복했다.
말에서 내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집은 꽤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해 고풍스럽니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니 하지만, 결국은 낡아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진대도 이상치 않을 꼴이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 들어올 때부터 요란하게 끼익거리던 문짝과,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상태일 것이 분명한 창문들. 벽과 바닥에는 깨진 흔적이 가득해 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새어들어오는 집은 인간의 문명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에 가까운 하멜에게도 그닥 좋은 환경처럼 보이지 않았다.
야생의 짐승들조차도 제 새끼는 최선의 환경에서 기르는 법인데. 이 집은 어린 것이 자라기에는, 애시당초 마을의 다른 집과 비교했을 때 외관부터도 눈에 띄게 허름한 것이, 지나치게 열악하지 않은가? 하여 조금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니 집주인이 곧장 변명하듯 입을 열어온다.
"괘, 괜찮아.... 크루스는 없어도 그 동안 조금 저축해 둔 게 있으니까." "그놈 뒤진 지가 거의 십년인데, 저축은 개뿔.... 그래서 그 아끼던 머리도 잘라서 팔아먹었어?" "그건...."
그러니까, 이 집의 가장이 그 크루스란 인간이었던 모양이지. 이미 죽었고, 저 말뚝 밑에 묻혔으니, 남은 어미가 홀로 자식을 키우려다 이리 된 모양이다. 제 머리카락까지 잘라다 팔아야 할 만큼 궁했나 보지. 다른 인간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구한 결과가 이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기구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정심은 들지 않는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인간의 관점에서였는지. 데인의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가 딸려나온다. 아니면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는 쩔렁, 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얹어졌다. 적은 돈은 아닌 듯한데. 문득 고개를 들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화가 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그려져 있다.
"볼일은 끝났수. 가지."
답도 듣지 않은 채 데인은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저것이 얼마나 되는 돈인지, 진짜 과거에 빌린 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딱히 그녀의 알 바도 아니었으나 이 집안에 꽤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이 설산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찾아볼 것이 생겼으니 이만하면 지루한 인생에 나쁘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하며, 그녀 역시 뒤돌아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래서. 이젠 어디로 향할 셈이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던 흑마의 등에 올라타며 묻는다. 사실 다음 행선지인 마을의 이름을 댄대도 그녀가 알리라는 가능성은 낮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만 다니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에서.